“헛된 삶을 살지 아니하려면”(전 7:13-14) 

전도서의 기자 솔로몬은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도다.”(전 1:2,12:8)라고 고백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헛된 삶을 살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헛되지 아니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헛되지 아니한 것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전 12:1-2)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헛된 삶을 사는 것입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헛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입니까? 이에 대해서 우리는 ‘이렇다 혹은 저렇다.’라고 함부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우리가 보기에는 헛된 삶이 아닌 것 같은데, 우리가 보기에는 헛된 삶인 것처럼 보이는데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보면 어떤 삶이 헛된 삶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단 5:5,25)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사는 열납하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를 열납하십니다. (창 4:4-5)  

▶▶ 지금은 누가 헛된 삶을 살고 있는지, 누가 최선의 삶을 살고 있는지 분명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 인생의 마침표를 찍을 때에 선악(善惡)간에 그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때에는 누가 충성된 사람이었고, 그때에는 누가 게으른 사람이었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때에는 누가 지혜로운 사람이었고, 누가 미련한 사람이었는지를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때에는 누가 성령의 사람이었고, 사단에게 속한 사람이었는지가 분명하게 판명됩니다. 왜냐하면 그때에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후 5:10에서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 12:14에서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는 참으로 의미 있고 지혜로운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아주 당당하게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 것 아시지요.”라고 말합니다.(마 7:22) 그러나 주님은 이에 대해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4)는 책망을 들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주의 말씀을 듣고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바로 이와 같은 자라”고 주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마 7:24)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는 정말 헛되지 않는 삶을 살지 아니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아주 떳떳하게 “나는 주님께서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나는 주님께서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는 주님께서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나는 주님께서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혀 주었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본 것 아시지요.”(마 25:42)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마태복음 25장에서 양과 염소의 비유의 말씀을 하시면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하지 아니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다.”(마 25:45)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함께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 여러분! 
▶▶ 극단적인 성향을 띤 사회학자들은 이 시대를 가리켜 “미친 사회”라고 말합니다. 극단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정말 이 사회가 미친 것 같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자기의 옳은 소견대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백성들조차도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결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성경적인 통찰력과 분별력을 가지고 이 세대를 바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세상적인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살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종말을 맞이한 성도답게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흥청거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은 결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헛된 삶을 살지 않는 것입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입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입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까? 우리는 이에 대해서 신령한 고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와 허물로 죽어버린 인생들은 영적으로 무지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곧 인간의 무능력이요, 피조물의 한계(限界)입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을 걸어갈 때 수없이 많은 문제들을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겪을 5분 후의 일도 알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장래의 일을 알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장래의 일을 사람들에게 비밀로 지키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행(幸)과 불행(不幸), 죽음의 때, 그리스도의 재림은 비밀로 묶여진 사건들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사는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 13절에서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곱게 하겠느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장래 일을 알게 된다면 피조 세계는 혼돈과 무질서로 위기를 맞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앞날에 행복이 찾아옴을 알게 된다면 하나님을 멀리하고 나태와 방종으로 인생의 삶을 허비하고 말 것입니다.
또한 미래에 닥칠 불행을 알게 된다면 근심과 걱정으로 절망 속에 잠길 것입니다. 그는 불안과 공포 속에서 비참한 인생을 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생들의 장래 일을 비밀로 정하시고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요구하고 계십니다. 사실 인생은 장래 일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은 곧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이루어지는 영원한 신적 계획에 들어있기에 하나님 안에서 모든 문제를 풀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지혜를 가진 성도는 우리의 처지와 형편을 주장하시는 하나님께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성도는 좋고 나쁜 환경을 떠나서 무조건 하나님의 섭리를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의인이 쉽게 멸망을 당하고, 악인이 형통하는 모순된 현실 속에서도 오직 모든 사건을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는 신앙자세가 필요합니다. 지구촌에 기동하는 모든 인생은 행복과 불행의 골짜기를 통과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인생의 삶은 기쁨과 고통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마치 밤과 낮이 있고, 여름과 겨울이 있듯이 인생의 삶에도 행복이 있나 싶으면 곧 불행이 찾아오고, 절망 속에서 고통의 삶을 사나 싶으면 다시 찬란한 여명이 깃드는 희비가 엇갈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성도라고 해서 항상 형통한 일만 계속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불신자라고해서 곤고한 날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기쁜 일, 슬픈 일, 희망에 가득차 있을 때, 절망이 가득할 때 등 별별 날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사람들은 그때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처해진 상황과 환경 속에서 언제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분별하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처신하는 삶의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달란트대로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 합니다. 달란트를 많이 받고 적게 받은 것은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 평가되는 사람들이 아니라 수직적인 관계 속에서 평가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본문의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환경을 어떻게 대처해야 될 것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어떻게 사는 것이 헛된 삶을 살지 아니하는 삶"인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 헛된 삶을 살지 아니하려면 형통한 날에는 기뻐해야 합니다.(14절 상) 
본문 14절 상반 절에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형통한 날에는 기뻐해야 합니다. 여기 '형통한'(토브)라는 말은 '좋은', '선한', '아름다운'의 뜻입니다. 따라서 형통한 날이란 '성공한 날', '번영의 날', '평안의 날', '영광의 날'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곧 성도가 하는 일마다 잘되는 때를 의미합니다. 즉 육신적으로 강건하고, 사업이 잘되고, 영적으로 평안한 때를 말합니다.

그러면 성도는 어떻게 해야 형통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서 몇 가지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① 말씀을 순종할 때입니다. 신명기 29장 9절에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고 말씀하고 있고, 여호수아 1장 8절에도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고 하였습니다(수1:7,왕상2:3).
② 하나님을 구할 때입니다.
역대하 26장에 보면 웃시야 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5절에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의 사는 날에 하나님을 구하였고 저가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③ 교회를 사랑할 때입니다.
시편 122편 6절에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라"고 하였습니다.
④ 회개할 때입니다.
잠언 28장 13절에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라고 하였습니다.
⑤ 부지런할 때입니다.
시편 128편 2절에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라"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에게도 형통함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곧 저들의 진노에 불과합니다.
잠언 23장 17절에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잠24:19).
왜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됩니까? 그것은 악인의 형통은 다 죄이기 때문입니다. 잠언 21장 4절에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의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생이 형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구하고 그 계명을 지킬 때 가능합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자신의 죄악을 회개하며 부지런함으로 살아갈 때 형통케 됩니다. 결코 인간의 잔재주를 가지고 형통케 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잔재주는 결코 오래가지 못합니다. 진실하지 못하고 교활한 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시 37:1-2)

그런데 솔로몬은 이처럼 하나님의 축복으로 형통할 때 “기뻐하라”고 교훈합니다. 여기 '기뻐하라'는 말은 영어성경에는 “be happy"는 뜻으로 되어 있지만 구약 히브리 원문에는 ‘투바’라는 말로 되어 있는데,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여 최선을 삶을 영위하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뻐하라”는 말씀은 사도 바울에게뿐 아니라 솔로몬에게도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솔로몬은 기쁨을 누리며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전도서 3:12과 2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노라." "내 소견에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이는 그의 분복이라." 

기뻐할 줄 아는 것이 행복입니다. 기뻐할 줄 모르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건강해도 기뻐할 줄 모르고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어도 기뻐할 줄 모르고 밤에 단잠을 잘 수 있어도 기뻐할 줄 모르고 집이 있고 부모형제 처자가 있어도 기뻐할 줄 모르고 공부할 수 있는 학교가 있고 일할 수 있는 일터가 있어도 기뻐할 줄 모르고 운동도 하고 등산도 할 수 있는 몸이 있어도 기뻐할 줄 모르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나라가 있어도 기뻐할 줄 모르고 마음껏 기도하고 예배드릴 수 있는 교회가 있어도 기뻐할 줄 모르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헛된 삶을 아니하려면 형통한 날에는 기뻐해야 합니다. 기쁨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요 행복한 사람입니다. 건강하기 때문에 기뻐하고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기 때문에 기뻐하고 밤에 단잠을 잘 수 있기 때문에 기뻐하고 집이 있고 부모형제 처자가 있기 때문에 기뻐하고 공부할 수 있는 학교가 있고 일할 수 있는 일터가 있기 때문에 기뻐하고 운동도 하고 등산도 할 수 있는 몸이 있기 때문에 기뻐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나라가 있기 때문에 기뻐하고 마음껏 기도하고 예배드릴 수 있는 교회가 수 있기 때문에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분부입니다. 

어떤 사람이 기뻐할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는 은혜의 사람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처한 처지에 자족할 줄 아는 겸손한 사람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생각과 성품이 단순한 사람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 형통할 때 모두 기뻐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통한 날을 만났을 지라도 인생의 온갖 쾌락을 마음껏 즐기면서 방종하지 말고 좋은 날에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좋은 때를 이용하여 선한 일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물질적인 형통이 있을 때 선교하며 구제하며 선한 일에 사용하라는 말씀입니다. 건강할 때 주를 위해 봉사하며 헌신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평안한 기회를 만났을 때 그리스도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힘써 일하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라”는 말씀은 “나에게 형통한 날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라”는 말씀입니다. 소요리 문답 제1문답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을 말할 때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형통한 날을 만난 그리스도인은 즐거워하되 결코 방종하지 말고 그것으로 인하여 도리어 하나님의 은혜를  찾고 기억하며 감사하는 중에 기뻐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통한 날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요,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감사하라고 하였는데 감사하지 못한다면 엄청난 죄악을 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형통할 때 가장 지혜롭지 못한 행동이 나오기 쉽습니다. 흔히 성도가 범죄(犯罪)할 때는 곤고할 때가 아니라 형통할 때입니다. 형통할 때에 신앙의 열정도 식어집니다. 문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좋은 시절에 방종하여 게으르며 교만함 특별한 불신앙으로 떨어집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그 이유는 평안한 시대에는 사람들이 육체를 많이 위하기 때문입니다. 
영국 역사를 보면 개신교를 가장 심하게 핍박한 시대가 메리 여왕 시대인데, 이때에 신앙을 위하여 옥에 갇혔던 성도들이 후에 감옥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간 다음에는 대부분이 타락하였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일한 가운데 정신 차려서 기도하지 않으면 미혹을 받아서 타락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므로 형통하다고 느껴질 때에 더욱 더 조심하고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 10:12의 말씀을 통하여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일이 잘될 때, 형통하게 될 때 방탕하기 쉽습니다. 가난하고 궁핍에 처했을 때에는 하나님만이 그의 삶의 전부였는데, 부하게 되니 교만하여지고 방탕하여 하나님을 배반하는 성도의 모습들이 비쳐지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평안할 때, 형통할 때 육체의 정욕을 좇아 살 수 있는 연약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아도 환난과 핍박이 있을 때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옥에 갇히기도 하고 순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나, 박해가 없을 때는 오히려 세속화되어 타락하는 경우들이 많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좋은 시대를 만났으면 또한 언제든지 좋지 못한 곤고한 날이 다가올 줄 알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고 변함없이 믿음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앞날을 준비하는 지혜입니다. 우리는 혹 있을 곤고한 날을 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준비 시대에 우리의 할 일은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성도는 환경을 초월하여 변함없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사무엘상 12장 24절에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형통한 날을 만났을 때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그 기회를 잃지 않고 선한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솔로몬은 전도서 3장 12절에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할 수 있도록 하심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전 313)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왕상 19:12-13) 은밀한 데서 보시는 하나님 앞에 항상 단정하게 생활해야 합니다.(마 6:1-4)  무엇보다도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 때에는 그것을 즐거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감사를 해야 합니다(눅 16:15) 형통할 때에는 더더욱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2. 헛된 삶을 살지 아니하면 곤고한 날에는 생각해야 합니다.(14절 중)
본문 14절 중반 절에서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곤고한 날에는 생각해야 합니다. '곤고(困苦)'라는 말은 국어사전에 보면 '곤란하고 괴로움'을 뜻합니다. 히브리 원어에서는 “라”라는 말인데, 이 말은 “악한, 해로운, 비참한, 슬픈” 등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는 "bad”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곤고한 날'이란 환난의 날이요, 실패의 날이요, 불행의 날이요, 재난의 날을 말합니다. 고통과 슬픔이 지배하는 때를 말합니다. 곤고한 날이란 모든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 역경과 고난과 환난의 날을 말합니다. 불치의 병에 걸리는 일 이 있습니다. 전쟁의 재난에 휩싸일 수도 있습니다.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는 일도 일어납니다. 대학 진학에 실패하기도 합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바울처럼 매를 맞는 일도 감옥에 갇히는 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곤고한 날들이 많이 다가옵니다. 곤고한 날을 당할 때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인생에게 언제 이런 곤고한 날이 다가옵니까? 그 이유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이 성도를 훈련하시기 위해 그 방법을 사용하시는 것이고(욥, 다니엘과 세 친구...), 그래서 욥은 욥기 23:10에서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죄를 범하기 때문에 오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2장 9절에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곤고한 날에 쉽게 비관하며 타락하기가 쉽습니다. 역대하 28장 22절에 보면 "이 아하스 왕이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여"하고 고발하고 있기때문입니다.

그러면 곤고한 날에 성도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본문에 보면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생각하라'(라아)라는 말로 영어 성경에는 컨시더(consider)라는 말인데, 이 말의 뜻은 “보다, 숙고하다, 관찬하다, 고찰하다”라는 뜻입니다. 괴로움의 시절은 자신을 살필 수 있는 적당한 때입니다. 왜냐하면 이때까지 보지 못하던 것을 곤고한 때에는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곤고는 우리의 자신을 돌아보게 선생입니다.” 
조급한 마음으로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교만한 마음으로 급하게 노를 발하지도 말고 인내하며 겸손하게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전7:8,9에 보면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것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생각이 부족합니다. 우리에게 생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생각이 우리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생각이 곧 우리 자신입니다. 그렇다고 “근심 걱정을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생각하라는 말은 깊은 사색(思索)을 하라는 것입니다. 복잡하게 생각하라는 말이 아니고 단순하게 깊이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 그런데 만약 곤고한 날에도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못한다면 그 고난을 통해서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곤고한 날에 그 곤고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수만 있다면 그 고난은 우리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 71절에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도 롬 5:3-4에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이는 환난을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시편 23:4에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동행하심과 위로를 감사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첫째, 나의 부족함을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곤고한 날은 나 자신을 솔직하게 돌이켜 보는 날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부족했던 것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맡기며 열심히 기도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선하고 부지런하게 살지 못했던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곤고한 날들이 나로 하여금 나의 부족함을 깨닫게 만들고 나를 반성하게 만들고 나를 뉘우치게 만든다면 곤고한 날은 나에게 화가 아니라 복이 될 것이고 불행이 아니라 행복이 될 것입니다. 

둘째, 곤고함을 당하는 이웃들을 생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보다도 더 극심한 곤고함을 당하는 이웃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나보다 더 극심한 슬픔과 아픔과 고통을 당하는 이웃들이 많이 있습니다. 내가 곤고함을 당할 때 곤고함을 당하는 이웃을 생각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1:4). 사실 우리가 곤고함을 당해 보아야 곤고함을 당하는 이웃을 생각하게도 되고 이해하게도 되고 동정하고 사랑을 베풀게도 됩니다. 

(예화) 몇 회 전에 정신대에 끌려가서 한 평생을 극심한 치욕과 고통 가운데서 살아 온 어느 할머니가 길거리에서 배고파하는 어린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사 주며 사랑을 베풀다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소유 전부를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서 써달라고 기증을 하고 세상을 떠난 일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곤고한 삶을 만날 때에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축복이 얼마나 복된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곤고한 날들이 나로 하여금 곤고함을 당하는 이웃들을 생각하고 이해하고 동정하고 사랑하게 만든다면 곤고한 날은 나에게 화가 아니라 복이 될 것이고 불행이 아니라 행복이 될 것입니다.
 
셋째 곤고한 날을 당할 때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난을 당할 때 그것은 단순한 인간적인 고난이 아니라 자기 몸에 부어진 그리스도의 고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고후1:5). 히브리서 편지에서는 고난(苦難)당하는 초대 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예수를 깊이 생각하고 예수를 주목해서 바라보라고 권면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으면 이는 아름다운 것"이라고 권면했습니다(벧전2:19). 곤고한 날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날입니다.

넷째, 곤고한 날을 당할 때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을 생각해야 합니다. 곤고한 날은,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 가운데, 형통한 날에 이르는 하나의 과정임을 깊이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기차가 터널을 통과할 때 사방은 온통 캄캄해집니다. 터널은 종착점에 이르는 한 과정입니다. 한 번 두 번 또는 몇 번씩 당하는 곤고한 날들은 70년 또는 80년 지나가는 인생 여정에서 통과해야 하는 몇 개의 터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종착역이 중요합니다. 끝이 더 중요합니다. "끝이 시작보다 낫다"(전 7장 8절)라고 했습니다. 곤고한 날을 당할 때 선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요셉이 구덩이에 던져졌지만 그것이 마지막이 아니었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불치의 병에 걸렸지만 그것이 마지막이 아니었습니다. 모세와 야곱이 피난을 갔지만 그것이 마지막이 아니었습니다. 40년 광야의 길이 마지막이 아니었습니다. 신8:7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결국 우리 모두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십니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30:5). 곤고한 날에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곤고한 날들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섭리를 깊이 생각하며 하나님을 더욱 더 의지할 수 있게 만든다면 곤고한 날은 나에게 화가 아니라 복이 될 것이고 불행이 아니라 행복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곤고할 때에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비관하기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가 많이 내리는 때에야 집에 비가 새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곤고함을 통해 유한한 인생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곤고함을 통해 우리 자신의 무능과 연약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곤고함을 통해 하나님이 없이는 살 수 없는 피조물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곤고함을 통해 하나님을 철저하게 바라보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성도라면 곤고한 날이 닥치면 하나님을 향해 얼굴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성도는 결코 땅을 상대하는 사람이 아니요, 하늘을 상대하는 신령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시편 34편 6절에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라고 하였고, 시편 22편 24절에서도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 얼굴을 저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부르짖을 때에 들으셨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곤고한 날에 모세의 기도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곤고케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의 화를 당한 연수대로 기쁘게 하소서"(시90:1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은 곤고할 때 하나님을 바라보기보다는 그 괴로움에 빠져 방황하지는 않습니까? 성도에게 다가오는 고난은 결코 저주가 아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괴로움들은 성도를 성도 되게 하는 축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불청객(不請客)으로 다가오는 곤고함이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의 소위를 살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될 것입니다.

3. 헛된 삶을 살지 아니하면 장래의 일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14절 하)
본문 14절 하반 절에서 “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장래의 일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내일에 대해서 함부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내일 일은 하나님께 맡겨야 하고, 염려는 오늘에 족합니다.(마 6:32)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하루에 밤과 낮이 있고 일년에 춘하추동 사 계절이 있듯이 인생 여정에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이 병행해서 있다는 말씀입니다. 전도서3:4에 보면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형통과 곤고를 병행하게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변화는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지는 조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보라"고 말씀했습니다. 전3:11에 보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조화의 지혜입니다. 이 조화의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세상에 낮만 있다면 사람이 살기가 힘들 것이고 세상에 여름만 있다면 살기가 지겨울 것입니다. 만일 세상에 형통한 날만 있다면 사람들은 모두 게을러지고 안일해지고 타락(墮落)하고 말 것입니다. 만일 세상에 곤고한 날만 있다면 사람들은 모두 슬퍼하고 우울하고 약해지고 낙심하게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도 바울에게도 형통한 날들과 함께 곤고한 날들을 주셨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우연도 아니고 불행도 아닙디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조화이며 우리의 유익이며 행복입니다. 산이 아름다운 것은 고저장단(高低長短)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장래의 일을 걱정하고 염려만 하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헛된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혜로운 삶을 살려면 삶의 중심이신 하나님께 내일의 일을 맡겨야 합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삶의 중심되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자세는 하나님의 주권(主權)을 온전히 인정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미래의 알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래를 감추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생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는 가운데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가는 삶이 귀하다는 것을 깨우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장래의 일을 모르게 하심은 우리에게 은혜입니다. 그 이유는 장래의 일을 모르는 일이 우리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미래 일이 좋아질 것을 알게 되면 거기에만 관심을 두고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미래 일이 불행하게 될 것을 알면 그것에 대한 근심과 걱정 때문에 인간적 지혜를 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사람은 미래에 대하여 전연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만 믿으면 미래 일이야 어떻게 되든지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우리는 매일 당하는 그 날을 우리 일생의 최후의 날과 여겨야 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최선을 다하여 살아야 합니다. 형통한 날에는 온전히 기뻐하되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리고,  곤고한 날에는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살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날들을 결코 우리에게 불행이 아니라 유익이 될 것입니다. 결코 헛되지 않은 삶을 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곤고한 날들을 맞고 있습니다. 앞이 캄캄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모든 일들이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형편에 처한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헛된 삶을 아니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형통한 날이 있고, 곤고한 날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형통한 날을 만났다고 하여서 결코 경거망동(輕擧妄動)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마음을 행복을 느끼고 기뻐하되 모든 영광을 이러한 형통함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반대로 곤고한 날을 만났다고 결코 좌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곤고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숙고해 보고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기도함으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장래의 일은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오늘도 최선을 다하여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 인생은 유한한 인생입니다. 유한한 인생은 무지하고 연약하여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영적 소경입니다. 언제 형통한 날이 있을지, 어느 때 곤고한 날이 있을지 도무지 장래 일에 대해서는 무식한 자들입니다. 이러한 답답함 때문에 그릇된 성도들은 소위 예수 무당들(?)에게 예언을 받으려고 이곳저곳으로 방황하기도 합니다. 죄로 오염된 인생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정하신 장래 일까지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짓 선지자들의 속임수에 빠지지 말아야 됩니다. 예언을 한답시고 자랑하며 순진한 성도를 유혹하는 악한 자들에게 우리의 신앙을 맡길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인생은 장래 일을 알 수 없지만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지한 인생들에게 삶의 지혜를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오늘도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이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자신을 살핌으로 보다 나은 삶을 살고,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칭찬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