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믿음”                                

마22:31-33, 갈 2:19-20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살아 계시는 동안 그 분은 민족으로서는 유대인이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은 그 당시의 큰 세력 바리세파. 사두개파 사람들하고 항상 부딪혔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3가지다,
 (1)구약성서에 씌어진 율법을 그대로 지키는 것 (2)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만이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이라는 것 (3)하나님이 계신 곳은 성전이라는 것. 그러므로 그 거룩하신 성전은 영원히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 이 율법과 선민과 성전 이 세 가지가 그들의 신앙의 내용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의 뿌리를 예수님이 다 건드리셨다. 가령 율법에 대하여 여러 군데 나오는데 그 중의 하나가 안식일에 대한 율법이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환자를 고친 것을 가지고 안식일을 범했다고 했을 때 무어라고 했는가? 

하나님께서 안식일의 율법을 준 것은 사람을 위해 준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선민사상에 대해서 율법학자가 와서 내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 물어보았다.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하라고 했는데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이웃을 누구라고 대답했는냐 하면 사마리아사람이다. 사마리아 사람은 이방인이다. 그러니까 선민사상을 거부한 것이다.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집이기 때문에 영원한 집이다. 제자들이 물어볼 때 이 성전이 내가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그러나 성전이 무너진 이후에 사흘 안에 새 성전을 세울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이 직접 가야바의 궁전에 끌려가서 성전모독죄로 고발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이 세 가지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점은 유대인이나 예수님이나 다름이 없다. 

다른 점은 유대인들은 성경에 씌어진 글을 그대로 믿고 그대로 사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는 것은 죽은 하나님이 되어 버린다. 하나님은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고 살아서 움직이는 산 하나님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생각이다.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케 하려고 왔다”그 예수님이 완성케 하려고 한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5:43에 나온다. 바로 옛 성경 속에는 네 이웃은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고 했는데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네 원수를 사랑하라 왜? 내가 믿는 하나님은 선한사람, 악한사람 가리지 않고 햇빛을 비춰주고 비를 내려 주지 않느냐 이것이 예수님의 대답이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 바로 내 안에 와 있다. 

우리가 열심히 믿는다는 것이 굳어진 믿음을 가진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을 때 성전 안에 이방인과 유대인과 남자와 여자의 사이의 막이 짝 벋겨져 버렸다. 예수님은 지금 막힌 담을 허시는 분이다. 

 그러면 살아있는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 여기에서 이루어지게 하고 바로 그렇게 받아드리는 것이 살아있는 믿음이다. 그러면 살아있는 믿음이 어떻게 생기는가?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분명하게 말한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성령을 통해 강림하시고 내 안에 계신다.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것이 살아있는 믿음이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들어올 때 죄로 가득한 내 죄가 사해진다는 것이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와 계시다는것은 영원한 생명이 내 안에 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죄와 죽음에서 구원을 얻었다는 말뜻이 된다. 그러면 그 분을 모시고 사는 내 삶 그것은 어디에 속해 있는가? 바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다. 

내가 정말 예수의 몸이 되어지고 있느냐? 예수의 몸이라면 예수님이 땅위에서 하신 그 일을 하는 것이 교회가 아닌가? 마 25:31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 찾아와 주었고” 오늘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어디에서 보아야 하나? 우리는 우리의 선교의 대상이 고난 당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이 지구의 상처받은 자연까지 살펴야 한다.  우리가 몸이 되고 부단히 전진해 나가는 행렬 속에 어떤 환난이 와도 용기를 잃지 않기를 바란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