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라”(엡 5:1-7) 

본문의 말씀은 구속 받은 성도답게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구체적인 말씀입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본문 1절에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면서 우리가 구속받은 성도답게 살려면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본받는 것은 성도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고전 4:16과 11:1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왜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까?
그것은 본문 1절 하반 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된 우리를 무조건 택하시고 영원토록 그의 자녀로 삼으신 무궁한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입은 성도답게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는 생활을 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본 받는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인 동시에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본받는 삶을 살 때에 비로소 우리는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 5:48에서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온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온전한 삶을 사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삶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2절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 같이 …행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하나님으로 성육신(成肉身) 하신 분입니다. 인간으로서 가장 하나님을 잘 보여주시는 그분의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처럼 되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란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 다음으로 경건서적으로 애독되는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 저자 [토마스 아캠피스]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진실로 빛 속에서 살기를 원하고 마음의 모든 흑암으로부터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가 걸으신 길을 본받아야 한다”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참된 축복을 누리려면, 인생의 근심과 걱정, 슬픔과 고통을 벗고 참된 기쁨과 평화와 안식을 얻으려면 하나님처럼 되기 위하여 예수님을 본받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강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 때에 하나님이 뒤에서 역사하십니다.

에베소 교회의 시대나 지금 시대나 사납고 두려운 세상, 음란하고 타락한 세상, 위험하기 짝이 없는 세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 위험한 세상에서 우리는 신자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얼마나 두렵습니까?  주일 성수만 제대로 지키려 해도 얼마나 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집니까?  사람들이 나에게 피해를 줄 때, 두렵게 할 때, 죄악이 유혹할 때, 갖가지 어려운 일로 마음이 무너질 때, 이때야 말로 그리스도 예수를 모방하며 살아가야 할 때입니다. 그리할 때에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본 받는 자”란 말은 구체적으로 어떤 말입니까? 이 말은 헬라어로 “미메테스”라는 말로 “흉내를 잘 하는 사람”에서 유래된 말로 “모방자”,“흉내를 내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인간을 본 받는다”는 뜻으로 주로 사용되었는데(고전 4:16, 111) 본 구절에서는 하나님을 본 받는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그의 자녀가 되고 용서함을 받은 자로서 마치 어린 아이가 그 부모를 모방하듯이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하심과 사랑을 모방하여 닮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처럼 살기 위해서 예수님의 어떤 점을 본받아야 하는지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야 합니다.(2절 상)
본문 2절 상반 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본 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의 구속의 사랑으로서 나를 위해서 죽으신 구체적인 사랑이십니다.(요 3:16) 사랑은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속성 중에 하나입니다. 요한 1서 4장 7-8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먼저 입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랑을 입은 자녀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 2절에서“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 행하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요 13:34의 인용의 말씀으로서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권면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 받는 자가 되려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의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모범이 될 만한 인생의 모델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본받을 스승을 상실한 시대가 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청소년들이 본받을 삶의 모범이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 기성세대가 자신있게 우리를 본받으라고 말할 그 무언가가 우리에게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세상을 향해서 우리를 본받으라고 말할 그 무엇이 우리에게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그의 사랑입니다. 

2. 예수님의 희생과 용서를 본받아야 합니다.(2절 하)
본문 2절 하반 절에서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사랑을 구체적인 내용은 희생과 용서입니다. 나를 위해서 화목 제물이 되어 주신 사랑입니다. 
본문 2절 하반 절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 구약의 제사에 비유되고 있는 말씀으로서 “제물”(프로스포라)은 일반적인 제사의 통칭으로서 감사제를 가리키며, “생축”(뒤시아)은 짐승의 피를 뿌려 바치는 속죄제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바치신 그의 전생애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고, 생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희생 자체를 가리킨다고 봏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화목 제물의 중심은 희생과 용서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써 우리를 용서하셨던 것처럼 우리 역시 그분을 본받아 서로 용서하는 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을 받은 자가 되었으니 우리 역시 그 사랑을 본받아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용서를 본 받아야 합니다. 용서를 하되 세 번이 아니라, 일곱 번이 아니라 끝까지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마 1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나를 위해 희생 제물을 드림으로써 용서를 완성하신 주님을 그 마음속에 모신 성도라면 마땅히 이웃을 위한 희생적 사랑을 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요일 4:9-11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시대는 아귀다툼을 해도 먹고살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인구는 많고 땅은 좁고, 너도나도 이기주의로 살아갑니다. 에베소 교회를 비롯한 당신 도시에 세워진 교회의 환경도 비슷했을 것입니다. 사람이 많은 곳엔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어야 살게 되어있으니까요. 

그런데 그리스도의 사랑은 희생하는 것입니다. 남을 위하여 자신을 버리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을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희생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하나님에게 용서를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처럼 희생하고 용서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척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성도라면 마땅히 희생과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내 사랑을 가지고는 할 수 없지만 예수님의 사랑을 가지고는 할 수 있습니다. 나를 위해서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가지고는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자기위해 남에게 손해를 끼치는 사람입니다. 교도소에 가보십시오. 온통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가장 행복한 사람은 남을 위해 자기가 손해 보는 사람입니다. 남을 위해 희생하며 봉사하는 사람이 승자요, 강자입니다. 우리 가정에서 누가 가장 희생이 큽니까? 어머니 아닙니까? 우리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희생하고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생쥐신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생쥐처럼 잇속이 있으면 쏙 나왔다가 손해 볼 것 같으면 쏙 들어가 버리는 눈만 말똥말똥 주위를 살펴보는 신자를 말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지 말고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입은 자녀답게 예수 그리스도처럼 희생하며 용서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3. 예수님의 성결을 본받아야 합니다.(3-6절) 
본문 3-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성결을 본 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자신을 성결하게 해야 합니다. 신랑을 사랑하는 신부는 자신을 깨끗이 합니다. 더러운 마음과 행위를 피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자신을 「향기로운 제물」로 드렸습니다. 「향기로운 제물」→「성결한 그의 생애」를 말합니다. 그래서 살전 4:7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살전 4:3에서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의 성결을 본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로, 성결하지 못한 행위들은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아야 합니다.(3절) 
본문 3절에서“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고 말씀하고 것처럼 성결하지 못한 더러운 것들을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의 ① 음행(淫行)(프로네이아)은 간음, 매음의 뜻을 지니는 말로 결혼 관계 이외의 모든 불법적인 성관계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음행은 이교도들의 종교의 의식의 한 특징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의 죄를 음행에 비유하고 있습니다.(렘 3:6-10)
“(렘 3:6-10) “[6] 요시야 왕 때에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네가 배역한 이스라엘의 행한 바를 보았느냐 그가 모든 높은 산에 오르며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거기서 행음하였도다 [7] 그가 이 모든 일을 행한 후에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게로 돌아오리라 하였으나 오히려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그 패역한 자매 유다는 그것을 보았느니라 [8]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어 쫓고 이혼서까지 주었으되 그 패역한 자매 유다가 두려워 아니하고 자기도 가서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 [9] 그가 돌과 나무로 더불어 행음함을 가볍게 여기고 행음하여 이 땅을 더럽혔거늘 [10] 이 모든 일이 있어도 그 패역한 자매 유다가 진심으로 내게 돌아오지 아니하고 거짓으로 할 뿐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② 더러운 것(아카다르시아)은 음행의 불결한 성격을 묘사한 말로서 음행과 기타 부당한 영리 행위까지 다 포함하는 범위가 넓은 말입니다.  
③ 탐욕(폴레오넥시아)은 이익만을 추구하는 욕망을 뜻하는 것으로서 세상을 취할수록 더욱 취하려는 마음입이다. 이런 마음의 소유자는 하나님보다 물욕을 앞세우고 거기에 열중하는 하기 때문에 탐심은 곧 우상숭배와 같습니다.(골 3:5) 
(골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그런데 이 같은 것들의 “이름이라고 부르지 말라”는 구절은 이방신들의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 것과 그들의 제사 방식에 대해서도 일체 말하지 말 것을 강조한 구약의 말씀과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출 23:13, 신 12:30, 시편 16:4) 

그런데 존 스토트 목사님은 “사도 바울의 이 같은 명령은 풍요의 여신으로 간주되어 그를 숭배하는 데 보통 성적 향연이 자행되었던 여신 아데미를 수호신으로 모시고 있던 에베소 지역의 성도들에게 매우 수준 높고 고상한 요구였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요구하는 바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요구임을 깨닫고 주님의 성결을 본받는 자답게 성결하지 못한 더루운 것들은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로, 성결하지 못한 말을 버리고 돌이켜 감사한 말을 해야 합니다.(4절) 
본문 4절에서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성결하지 못한 말을 버리고 돌이켜 감사한 말을 해야 합니다. 
여기의 “누추한 말”(아이스크로테스)은 “천한, 속된”이란 뜻에서 유래된 말로서 저급하고 속된 말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부끄럽고 추잡한 난잡한 말을 말합니다.
② 어리석은 말(모률로기아)은 아무 유익이나 가치가 없는 말로서 마치 술 취한 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③ 희롱의 말(유투러펠리아)은 상스러운 말, 독설 등을 말하는 것으로서 저속한 농담, 외설스러운 농담, 남에게 상처를 주는 농담, 저속한 개그 등을 말합니다. 즉 음담패설(淫談悖說)입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누추한 말, 어리석은 말, 희롱의 말은 남에게 손해를 주는 언사입니다. 누추함은 남에게 수욕을 주는 언행이고, 어리석은 말은 남의 정지(情地)를 이해하지 못하는 말이니 남에게 무례한 언사이고, 희롱의 말은 건덕에 필요한 좋은 말이 아니고 상대방을 무시하는 농락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세 가지는 다 남에게 손해를 주는 말입니다. 음란한 입→ 음란한 마음→음란한 행위에 빠집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라면 모여서 어리석고 무익한 음란한 농담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에서 돌이켜 감사한 말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사람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곧 하나님께 계속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또 그들과 대화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사도 골 2:7과 3:15에서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우상숭배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5절) 
본문 5절에서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상숭배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라는 말씀인데, 이는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도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 하는 자가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은 이러한 것들로부터 노출되어서 넘어질 때가 많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에베소교회의 성도들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가운데 죄를 짓기도 하지만, 어느 때에는 알면서도 죄를 짓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본문 5절과 같은 행동은 불신자의 회개하기 전 상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이후에도 이와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면 성결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결한 삶을 사는 사람은 결코 이와 같은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이와 같은 행동을 한 사람은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에서 배척받게 됩니다. 우리는 결코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에서 배척받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음란한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음행하는 자, 더러운 자, 탐하는 자 → 우상숭배자(현대인의 우상 섹스, 돈, 권력) →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합니다. 우리는 영혼을 깨끗이, 마음을 깨끗이, 몸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 3:16-17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예수님처럼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깨끗함을 모방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되지 말라” 여기서  더 한발자국 나가 “그리스도를 모방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넷째로 이단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6-7절) 
본문 6절에서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 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이단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이단과 함께 참예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만약 이단에 넘어가고, 그들과 함께 참예하는 자가 되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헛된 말”은 공허한 거짓말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 대조되는 거짓 교훈을 가리킵니다. 특히 본문에서는 육체의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심을 가지고 행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기업을 받는 없다는 진리를 부정하여 사람들을 육체적 방종에 빠지게 하는 거짓된 이단 사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자들을 가리켜 불순종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공허한 거짓말을 하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당시 선량한 성도들을 현혹하여 죄를 짓게 하였던 이단들 가운데 대표적인 이단이 영지주의인 것을 감안하여 볼 때에 영지주의자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육체와 영혼을 구별하는데, 육체는 악하지만, 영혼은 선하다고 말하면서 육체의 일이 영혼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육체가 어떤 행동을 하여도 영혼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사람들은 이들의 주장을 믿고서 구원은 영혼이 받는 것이니, 육체는 세상의 쾌락을 즐기면 살아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까지 구원하신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때에는 영혼만 들어가고 육체는 땅에 묻혀서 썩지만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영광스런 몸으로 다시금 부활합니다. 뿐만 아니라 영혼과 육체는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될 때는 오직 죽을 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육체의 행동은 곧 영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며, 영혼의 성결함은 곧 육체에 미쳐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영지주의자와 같은 말을 하는 자들은 육에 속한 자들로서 성령이 없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이단에 넘어지지 아니하면 유다의 권면을 들어야 합니다. 유다 1:17-21에서 “[17]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18]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치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19] 이 사람들은 당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니라 [20]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21]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드로의 처음과 나중을 보십시오. 바울의 처음과 나중을 보십시오. 우리들의 처음은 미약하였으나 이제 점점  「그리스도를 모방하여 살므로 하나님 같이 되었다」라는 평가가 여기저기에서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사랑의 자녀처럼」 예수님을 본받으면서 살려고 몸부림치다가 온전하여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고, 예수님의 희생과 용서를 본받고, 예수님의 성결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함으로 하나님께도 인정받고 사람들에게도 인정받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