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확실성(롬 8:14-17)
                                     변  종  길(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 시대를 가리켜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미국의 경제학자 갈브레이쓰(John K. Galbraith)가 1976년에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제목의 책을 낸 후로 이런 말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경제를 보더라도 불황이 오래도록 계속되니까 이것이 언제 끝나게 될는지, 언제 경제가 좋아지게 될는지 예측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정치적으로 보더라도 새로 들어온 김영삼 대통령께서 추진하고 있는 개혁 작업, 사정 작업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 앞으로 어떻게 되어갈 것인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들 합니다. 특별히 북한의 핵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 나라의 외교 정책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참으로 불확실합니다. 지금은 북한의 핵 문제로 야기된 위험이 크고 긴장이 고조되었다고 해외에서는 많이 떠들고 있습니다만, 우리 나라 사람들은 하도 오랫동안 긴장 가운데서 살고 있어서 그런지 별로 걱정하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지금 미국이나 영국 등 해외에서는 한반도의 위기가 고조되고 있다고 야단입니다만, 우리 나라에서는 '증권 시장의 주가가 최고치를 갱신했다"는 뉴스가 들리고 있습니다. 하여튼 우리 나라에서는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외교적으로 매우 불확실한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우리가 가장 확실하다고 믿고 있는 물리학, 자연 과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926년에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가 '불확정성 원리'라는 이론을 발표했는데, 이 논문이 발표된 이후로 물리학계에는 큰 파문이 일어났습니다. 이 '불확정성 원리'라는 것은 어떤 한 입자(粒子)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원자를 아시지 않습니까? 보통 물질의 가장 작은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 원자인데, 그 원자를 쪼개면 다시 양성자, 중성자, 그리고 그 주위를 도는 전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전자의 위치를 알기 위해서는 빛을 쪼여야 합니다. 이 전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파장이 짧은 빛을 쪼여야 하는데, 짧은 파장의 빛을 쪼이게 되면 광양자(光量子, quantum)의 에너지가 더욱 더 커진다고 합니다. 그러면 광양자가 전자와 충돌하여서 전자의 속도를 변화시켜 버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 입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측정하려고 하면 할수록 속도가 부정확하게 되고, 또 입자의 속도를 정확하게 측정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 위치는 부정확하게 됩니다. 이것이 소위 '불확정성 원리'인데, 오늘날 물리학과 천문학의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스티븐 호킹(Stephen W. Hawking)이라고 하는 영국의 물리학자요 천문학자가 있는데, 몇 년 전에 우리 나라에도 다녀갔다고 합니다. 그는 휠체어를 타고 다니며, 말도 제대로 못하고 컴퓨터를 이용해서 대화를 하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이 '불확정성 원리'를 천체의 '블랙 홀(black hole)' 연구에 도입했습니다. 그래서 이 블랙 홀, 곧 어떠한 물체도, 빛조차도 그 안에 들어가면 나오지 못한다는 이 블랙 홀이 증발할 수 있다는 '블랙 홀 증발 이론'을 내놓았습니다. 이 이론은 입자의 위치가 정확해지면 속도가 부정확해지고 속도가 정확해지면 위치가 부정확해지기 때문에 블랙 홀을 빠져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없이 많은 시간이 지나면 이 블랙 홀도 증발할 수 있다는 이론을 내 놓았습니다. 우리가 이해하기엔 너무나 어려운 이론입니다만, 하여튼 오늘날 시대는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것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교회에도 이러한 현상이 팽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에도 보면 내가 구원받았는가 구원받지 못했는가 하는 의문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가 아닌가? 내가 과연 천국에 갈 수 있는가 갈 수 없는가? 여기에 대해 불확실성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구원의 불확실성이 증대되고 있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 고등부 수련회에 가 보면 거의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것이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당신은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라는 것입니다. 또한 유 초등부에 다니는 어린 아이들을 향해서도 "당신은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라고 묻고서는, "어려서부터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신학교에 지원하는 학생들을 면접할 때에도 목사님들께서 "당신은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고 합니다. 신학교에 들어와서 목사가 될 사람에게조차 이런 질문을 던지는 그러한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오늘 이 시간에는 '구원의 확실성'에 대해서 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몇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겠는데, 첫째는 '구원의 확실성의 개념'에 대해, 둘째는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역사적 고찰'에 대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성경적 답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I. 구원의 확실성의 개념

  첫째로, 구원의 확실성의 개념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확신'이라는 말과 '확실성'이라는 말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확신(assurance)'이란 "내가 확신한다"는 말에서처럼 나의 주관적인 상태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확실성(certainty)'이란 "어떠한 사실이 확실하다."고 말하는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객관적인 사실에 강조를 두는 말입니다. 이 '확신'이나 '확실성'은 정상적일 때에는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떠한 사실이 확실하다면 그것을 내가 그대로 믿을 때에 그것은 또한 나의 확신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잘못되어서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내가 그것을 믿을 때에는 '확실성'과 '확신'이 나누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이 확실성과 확신이란 말이 같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는 편의상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경우에 따라 확신과 확실성이란 용어를 번갈아 가며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사물이나 주장에 대한 우리 영혼의 상태는 여러 가지로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북한이 지금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태도는 대개 다음 세 가지가 됩니다. 첫째는 "그럴 리가 있나?" 하며 의심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럴 수도 있겠다.", "가질 수도 있겠다."라고 짐작하거나 추측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북한은 분명히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확신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옛날에 희랍의 철학자들은 크게 두 종류의 확실성을 이야기했습니다. 첫째는, '감각적인 인지(認知)에 의한 확실성'입니다. 그것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것은 확실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 눈앞에 지금 나무가 서 있다."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져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나의 감각으로 인지할 수 있는 것, 그것은 확실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유에 의한 확실성'입니다. 생각에 의한 확실성인데, 예를 들어 산수나 기하학 같은 것이 이런 종류에 속합니다. 우리가 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1 더하기 1은 2이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또는 기하학에 있어서 "삼각형의 세 변의 합은 180도이다."라는 것은 기하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고, 삼각형이 어떻게 생겼든 간에 삼각형의 세 각의 합은 180도가 된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이러한 사유에 의한 확실성을 다시 '직접적인 확실성'과 '간접적인 확실성'으로 나누었습니다. 직접적 확실성이라는 것은 학문의 기본 전제가 되는 것, 예를 들면 수학의 공리(公理) 같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평행선은 서로 만나지 않는다는 것은 기본 공리입니다. 이것은 더 이상 증명할 수 없고 그 자체로서 확실하다고 직관되어지는 것입니다. 또는 "두 점 사이의 최단 거리는 직선이다." 하는 것은 증명할 수가 없지요. 이것을 우리가 증명할 수는 없어도 거의 모든 사람이 사실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직접적 확실성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간접적 확실성'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추리나 증명을 통해 얻어지는 확실성입니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예로 들면, 직각 삼각형에 있어서 빗변의 제곱은 다른 두 변의 각각의 제곱의 합과 같다는 것은 조금 복잡하지만 그림을 그려서 증명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증명을 통해서 얻어진 진리는 확실하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나 조금만 기하학을 배우면 증명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은 확실하다고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간접적 확실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외에 또 하나의 확실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에 의한 확실성'입니다. 믿음에 의한 확실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같은 철학자도 경험적이고 논리적인 확실성 외에 '도덕적 확실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물론 칸트의 철학은 우리의 것이 아니고 칸트의 사상이나 방법론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에 의한 확실성, 또는 논리적인 확실성 외에 또 다른 확실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것은 우리가 크게 감사해야 할 점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존재라든지 우리 영혼의 불멸이라든지 그리스도께서 구주가 되시는 것, 또는 성경의 권위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 등, 이런 것들은 우리의 경험적인 인식이나 학문적 증명에 기초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증명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각자 자기 안에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학문은 이런 일에 관여할 자격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경험이나 사유에 의한 확실성과 믿음에 의한 확실성, 이 둘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경험이나 우리의 생각에 의한 확실성, 이런 것들은 객관적으로 확실한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근거들에 기초해 있기 때문입니다. 증명할 수 있고, 또 어떤 것들은 실험해 볼 수가 있기 때문에 확실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진리들도 사실은 변합니다. 그런 진리들은 계속해서 발전합니다. 예를 들자면, 뉴튼(I. Newton)의 물리학이 나왔을 때에 그것은 진리이며 변하지 않는 것처럼 한 동안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금세기 초에 아인슈타인(A. Einstein)이 '상대성 이론'을 내놓음으로써 뉴튼의 물리학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도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서 심각하게 도전받고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하나님은 주사위 노름을 하지 아니한다"면서 끝끝내 이 '불확정성 원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만, 오늘날 물리학계에서 이 '불확정성 원리'는 엄연한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지금 다시금 스티븐 호킹에 의해, 우주의 최초의 몇 초간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으로는 부족하다면서, 또다시 극복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경험이나 사유에 의한 확실성, 이런 것들은 변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런 것들의 문제는 '학문적 귀족주의'를 낳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확실성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자연 과학, 곧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라든지 스티븐 호킹의 양자 물리학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고도의 수학을 배우지 않은 사람은 오늘날 자연과학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과학자들 사이에도 어떤 이론을 내어놓으면 그 이론에 대해서 찬성하는 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전세계적으로 수준급의 학자들 사이에서도 어떤 이론에 대해서는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지는 그런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비해 믿음에 의한 확실성은 모든 인간의 의심을 초월하는 확고부동한 신적인 확실성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어리석게 보이지만, 그러나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모든 의심을 초월하는 확고부동한 확실성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지식만이 아니라 우리의 겸손, 신뢰, 의지, 순종, 순결함 등을 동반하는 그런 확실성입니다. 우리의 인격과 우리의 삶 전체가 관계되어 있는 확실성이고, 따라서 이것은 우리의 영혼의 깊숙한 곳, 내적이고 섬세한 부분을 터치하는 그런 것입니다. 또한 이 믿음에 의한 확실성은 너무나 귀하고 중요하기 때문에 수백 만, 아니 수천만 명의 순교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적인 확실성 때문에 순교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요한 케플러(Johann Kepler)라는 천문학자는 태양 주위를 돌고 있는 행성의 궤도를 계산해 낸 사람인데 - 소위 '케플러의 법칙'이라고 알려져 있지요. - 이러한 위대한 천문학자도 결국은 점성술을 행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점성술을 행했는데, 그가 왜 점성술을 했는지에 대해 그는 이렇게 변명을 했습니다. "궁핍한 어머니는 미련한 딸의 도움으로 살아야만 했다." 이 말에서 '궁핍한 어머니'란 천문학을 말하고 '미련한 딸'이란 점성술을 말합니다. 곧, 천문학을 해서는 먹고 살 수가 없기 때문에 결국 점성술을 해야만 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도 세 번이나 자기 주장을 철회하고 말았습니다. 1616년에 한 번, 그리고 1633년에 두 번 철회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받을 고문에 대한 두려움이 학문에 대한 사랑보다도 더 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확실성'은 매우 강합니다. 이것은 매우 강하기 때문에 금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믿음의 확실성은 우리 마음 속 깊이 자리잡고 있으며 우리의 전(全) 인격이 관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의 믿음을 매우 귀하고 소중하게 여깁니다. 자기의 모든 지위나 재물보다도 더 소중하게 여깁니다. 자기의 처자식보다 더 소중한 것이고 심지어는 자기의 목숨보다도 더 소중하고 온 세상보다도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하며 세상의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데까르트(Descartes)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고 말했는데, 이 말을 빌려서 표현하자면 우리 믿는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redo, ergo sum)."

II.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역사적 고찰

  그 다음에 우리는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역사적인 고찰'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참된 구원의 확실성은 어디서 얻을 수 있는가? 이 중요한 구원의 확실성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간단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로마 카톨릭에서는 몇몇 사람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합니다. 그래서 카톨릭 신자들은 여러 면에서 우리와 교리가 다른데, 그 중에서 아주 분명한 것 중의 하나는 카톨릭 신자들에게는 구원의 확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화란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에 독일의 어느 도시에 가서 특강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카톨릭 교회에 다니던 어떤 사람이 참석하였습니다. 강의 후 쉬는 시간에 그 사람이 여러 가지 질문을 해와서 재미있는 대화를 주고받았습니다. 그 때 옆에 계시던 어떤 목사님이 그 사람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지금 죽으면 천국에 갈 자신이 있습니까?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글쎄요, 오늘 목사님(사실 그때 필자는 강도사였다)의 강의를 듣고 보니까 지금은 천국에 갈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글쎄요 지나고 나면 또 모르지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카톨릭 신자들에게는 구원의 확신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구원을 그들이 행하는 선행(善行)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선행을 얼마나 많이 하느냐에 따라 그들의 구원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카톨릭 신자들은 또 신부에게 의존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는 것이 아니고 신부에게 찾아가서 고해성사를 합니다. 또 신부가 베푸는 미사에 참여해서 신부가 주는 떡을 받아먹음으로써 죄 사함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카톨릭 신자들은 신부에게 얽매이고 로마 카톨릭 교회에 예속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카톨릭 교회는 이렇게 사람들을 교회 체제 안에 붙들어 매어 놓습니다. 심지어 사람이 죽고 나서도 수백 년간 연옥에 붙들어 놓습니다. 이처럼 무서운 것이 카톨릭 교회입니다. 그래서 카톨릭 신자들에게는 "내가 어떻게 교회의 계명을 지킬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카톨릭 신자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얼마만큼만 지키면 구원받을 수 있는가? 내가 얼마만큼만 선을 행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가?" 물론 그 신자들 중에는 "내가 얼마나 완전하게 지켜야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얼마나 적게 지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라고 질문하게 됩니다. 고등학생이 대학 시험을 앞두고 일류 대학에 들어가려고 할 때, "합격 컷트 라인이 몇 점쯤 될 것인가?"에 관심을 많이 쓰게 됩니다. 이 때 "만점을 받으면 좋다. 점수를 아주 많이 받으면 무난하게 들어갈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서 가능한 한 최대의 점수를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들은 "내가 얼마만 받으면 될 것인가? 컷트 라인을 조금 넘을 수 있는 점수만 받고서 나머지 시간들은 가능하면 놀고 쉬는데 사용하자." 이렇게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카톨릭에는 항상 두 종류의 신자들이 있습니다. 첫째 부류의 사람들은 피상적인 종교 생활에 만족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때때로 신부에게 찾아가서 고해성사를 하고, 가끔 주일이 되면 한 번씩 미사에 참여해서 신부가 넣어 주는 빵을 먹고, 그리고 금식 절기가 되면 일년에 한 번쯤 금식하고, 그 다음에는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교회가 구원받게 해 줄 것이라고 믿으면서 자유롭게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시고, 교회도 잘 나가지 않고 죄를 지으면서 평안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피상적인 종교 생활에 만족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피상적인 생활에는 도무지 영혼의 평안함을 느낄 수 없어서 신비적인 방법과 금욕적인 방법을 통해서 세상과 구별되고 자신의 육을 죽이고 순수한 종교적인 생활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람들은 대개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도원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들은 엄격한 수도원의 규율을 따라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행위 성화'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자기의 행함으로써 거룩하여지고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고 하는 그런 행위 성화의 길을 걷고 있는데, 물론 이러한 노력들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실 카톨릭 신자들은 자선(慈善) 행위를 많이 합니다. 남을 도우며, 여러 자선 단체를 통해 선한 일을 많이 하려고 하고 있는데, 이런 것을 우리는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도하는 분들의 온전한 헌신, 곧 온 마음을 다 바쳐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헌신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런 것들은 우리가 크게 배워야 할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들의 생활은 독립적이지 못합니다. 그들은 형식적이고 율법적인 것에 얽매여 있습니다. 카톨릭 신자들은 항상 "나는 충분히 행하였는가?" 또는 "내가 또 무엇을 더 행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이러한 질문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불안과 긴장 가운데서 갇혀서 살아갑니다. "내가 어느 정도 행하면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인가?", "내가 무엇을 더 해야만 할 것인가?" 항상 이러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수도원에서 살아가는 수도승이라 할지라도 항상 마음 속 깊은 곳에는 불안과 긴장이 감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종교 개혁자들의 믿음의 확실성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종교 개혁은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갈구에서 탄생했습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처음에는 선행에서 구원의 확실성을 찾았으나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루터는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도원의 규칙을 따라서 아주 열심히 기도하고 엄격한 규칙을 따라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엄격한 삶을 통해서도 마음의 평안을 얻는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나중에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에서 이 평안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곧 로마서 1장 17절에 있는 대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에서 참된 하나님의 의를 발견하고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루터는 이 사실, 곧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에 용감하게 일어섰습니다. 1517년에 그는 95개 조항을 내걸고 과감하게 그 당시의 모든 교회의 세력에 대항하여 일어섰던 것입니다. 1521년에 보름스(Worms)로 소환되어 갈 때에 주위의 친구들이 말렸습니다. "지금 당신이 그곳에 가면 당신은 잡혀서 죽을 것이다. 화형에 처해질지도 모르니 제발 그곳에 가지 마시오." 이렇게 친구들이 만류를 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보름스를 향해서 갔습니다. 그 때 가면서 말하기를, "저 지붕 위의 기와장들만큼 마귀들이 많이 있다 할지라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의 믿음은 확고했습니다. 그의 소망은 확실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니 누가 나를 대적하리요?" 이렇게 믿고서 나아갔던 것입니다. 이 확실성이 루터의 신앙의 특징이었습니다. 루터는 종종 영적인 갈등을 했습니다. 마귀들과의 싸움 때문에 갈등하고 고민하는 것이 자주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루터는 마음 속에서 나오는 이 확실성을 가지고 종교 개혁을 진행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개혁자들의 신앙의 특징도 확실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종교 개혁자들에게 있어서 '믿음'이라 하는 것은 그저 '희망한다,' '생각한다' 또는 그저 '짐작한다'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서 믿음이란 확실한 지식을 말했고 견고한 신뢰를 말했습니다. 그들에게서 믿음이란 모든 의심과 두려움을 내어 쫓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들 각자에게 개인적으로 죄 사함과 영원한 의와 구원이 오직 은혜로 주어진 것을 확신했습니다. 이 은혜는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주어진 것을 확실하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유한 가운데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그들의 영과 함께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했습니다. 그들은 믿는 고로 말하였습니다. 그들의 삶에는 진정한 자유와 독립성과 성숙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피조물에도 속박되지 않고 살았으며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에만 복종하였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이 세상의 다른 어떤 사람도, 어떠한 것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꿋꿋하게 나아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살아 있는 믿음은 17세기에 들어와서 차차 퇴보하였습니다. 종교 개혁이 일어난 지 1세기만에 이러한 살아있는 신앙은 차차 퇴보하고, 교리와 신학은 발전하였지만 신앙과 확실성은 차차 시들어갔던 것입니다. 이것을 표현하자면 그들은 이제 더 이상 그들의 신앙을 고백하지 않고 신앙 고백만 믿고 있었습니다. 이 말은 곧,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살아있는 신앙 고백을 하지 않고 문서화된 그런 신앙 고백만 믿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17세기의 정통주의(正統主義)는 차차 합리주의(合理主義)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종교를 한낱 이성(理性)의 일로 생각했습니다. 역사적인 증거들과 이성적인 추론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신앙인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읽을 때에도 그저 어떤 교리를 증명하는 증명 구절들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조금 뽑고 저기서 조금 뽑아서 '하나님의 전능성'을 증명하고, 또 여러 군데서 뽑아서 '하나님의 전지성'을 증명하고, 이처럼 성경을 교리를 증명하는 증명 구절들로 생각하였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딱딱하고 시들어지자 여기에 대한 반동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소위 18 세기에 일어난 경건주의인데 이들은 '체험'을 중요시 여겼습니다. 이들은 "아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참된 신앙은 체험이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남이 체험한 것을 듣는 것으로는 족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체험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성도들이 천국 가는 길에 경험하게 되는 긴 일련의 체험들을 제시했습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의 비참함을 느껴야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죄를 깊이 깨닫고 슬퍼해야 되고, 그 다음에는 율법의 정죄에 빠져서 죽는 것과 같은 그런 체험을 통과해야 되고, 그 다음에는 갑자기 어느 날 복음의 해방의 선언을 체험할 수 있다." 이렇게 주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믿음'과 '확신'을 구분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이란 수년간의 탄식과 한숨으로 얼룩진 그러한 기간이요, 기도와 바람으로 보내는 세월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믿음에 비해서 "확신이라 하는 것은 수년간의 체험 후에 갑자기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갑자기 주어지는 이러한 체험은 "특별한 계시를 통해서 나타날 수도 있고, 성경을 읽다가 어떤 성경 구절을 통해서 갑자기 우리에게 깨달음이 올 수도 있고, 또는 우리 영혼에 밝은 빛이 갑자기 환하게 나타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또는 "확신을 찾고 있는 영혼에게 그리스도께서 직접 나타나서 그에게 기쁨으로 충만케 하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체험은 소수의 그리스도인만 할 수 있고 소수의 성도들만 이러한 체험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경건주의자들에 의하면 세상은 어둡고 비관적이었습니다. 이 세상은 고난과 슬픔에 찬 인생이요, 그래서 종종 세상을 비유하기를 광야(廣野)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광야 같은 인생을 살아갈 때에 경건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으로 만족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보통의 교회 생활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따로 모여서 기도회를 가지고, 자기들끼리 모여서 성경공부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소위 '교회 안의 교회(ecclesiola in ecclesia)'라 하는 것을 조직해서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 경건주의는 나중에 헤른후트(Herrnhut)의 친첸도르프(Zinzendorf)가 일으킨 '복음주의 운동'과 요한 웨슬레(John Wesley)의 '부흥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친첸도르프는 율법이 아니라 복음에 의해, 시내산의 천둥이 아니라 골고다의 사랑스런 음성에 의해, 모세의 엄격한 모습이 아니라 예수님의 친근한 모습에 의해 사람들의 영혼을 얻고자 했습니다. 친첸도르프는 경건주의자들의 소위 '영적 투쟁(Busskampf)'이나 '영적 돌파(Durchbruch)'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그런 경건주의자들을 불쌍한 그리스도인들이라 불렀습니다. 그는 탄식하며 불평하는 기독교가 아니라 찬송하며 기뻐하는 기독교를 원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사랑의 구주'를 설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죄인들을 향하신 주님의 무한한 사랑,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그의 받으신 상처와 흘리신 피는 죄인들의 마음속에 강한 인상을 줄 것이며, 바로 이 인상 속에 그리스도의 구속이 역사하며 성령을 통한 생명 주심과 새롭게 함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예수님의 상처에서 안식을 얻으며 죄의식과 죄의 지배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그들은 이제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풍성한 예배 의식을 행하며, 수많은 감정적인 찬송들을 부름으로써 계속적으로 영양분을 공급받고 자라가게 된다고 합니다. 
  이에 비해 요한 웨슬레의 부흥 운동은 좀 다른 길을 걸어갔습니다. 웨슬레는 친첸도르프보다 죄의식을 더욱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갑작스런 충격을 통해 영혼들을 거짓 평안에서 벗어나게 하며, 믿음의 확신에 도달하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믿음에 앞서 깊은 죄의식이 선행(先行)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열정적인 설교와 죽음과 지옥에 대한 무서운 묘사와 영혼을 감동시키는 찬송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갑자기 그리스도의 은혜와 구원이 제시되었습니다. 그래서 지옥을 향해 나아가던 영혼이 갑자기 천국을 향해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갑작스런 회심은 그 영혼이 분명히 의식할 수 있는 체험이라고 합니다. 그 영혼이 거듭난 날짜와 시(時)와 분(分)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웨슬레가 회심한 것은 1738년 5월 24일 저녁 9시 15분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구원의 확신을 경험한 사람은 더 이상 의심하지 않으며 사망에서 생명을 옮겨진 것을 압니다. 칭의는 이제 영원히 지나간 문제이며, 이제 그 앞에는 성화가 놓여 있습니다. 이제 그의 주위에는 그와 마찬가지로 구원받아야 할 수많은 영혼들이 있으며, 그들을 회심시키는 것이 그의 가장 큰 소명이 됩니다.
  이들 두 운동은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들은 잠자는 영혼들을 일깨웠으며, 세상을 향하여 복음을 들고 나가도록 촉구하였습니다. 국내 전도와 국외 선교에 막강한 힘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리고 주일 학교와 여러 종류의 단체들을 설립하였으며, 성경과 소책자 배포, 복음 전파와 이웃 사랑 등, 많은 좋은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봉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두 운동은 커다란 일면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즉 한 쪽으로 치우쳤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 이들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서 등한시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의 첫 부분에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고백하는데, 이 경건주의자들과 웨슬레 계통의 부흥 운동가들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서 등한시하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전도와 회개를 강조했지만, 그것보다 더 넓은 예술이라든지 학문이라든지 문학이라든지 정치라든지 또는 가정이라든지 사회 등의 넓은 영역을 무시하거나 또는 가치를 절하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오직 예수의 보혈에서 안식을 얻고 회심한 것으로 만족했으며, 또한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것을 거의 모든 사명으로 생각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또한 이들 경건주의자들과 부흥 운동가들은 감정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잘못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감정과 체험을 아주 강조했는데 그러다 보니 소위 '감상성(感傷性, sentimentality)'에 빠지게 되고, 또는 병적인 감성(感性)들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모이면 울고 눈물 흘리고 짜고 하는, 이런 병적인 감성들에 빠지기도 하였으며, 그들의 신앙생활은 지나친 긴장과 비이성적인 열정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종종 지성이 억압받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인격은 지.정.의(知.情.意)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지.정.의의 균형이 깨어지고, 너무 지나치게 감정 쪽으로 신앙생활이 기울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 세상에 대한 성도들의 주권, 이런 것들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빛의 아버지로부터 오는 모든 좋은 것들을 감사함으로 누리는 것이 결핍되었고, 또 세상 직업에 성실히 종사한다든지, 넓은 마음을 가진다는 것 등이 결핍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신앙의 삶은 종종 인간의 삶과 분리되곤 했습니다. 이들에 있어서 신앙의 삶은 인간의 삶과 분리되고, 인간의 삶 위에 거하고, 또는 인간의 삶에 대해서 종종 적대적인 관계를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비유로 말하자면, 이들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자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서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에 있어서 기독교는 그저 자루 서말 속에 들어 있어서 가만히 한 구석에만 머물고 마는 그런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III.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성경적 견해

  그렇다면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는 무엇인가? 이 구원의 확실성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원의 확실성을 우리는 합리적인 방법을 통해서 얻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이성적인 방법으로 과학을 연구하듯이 증명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라든지, 영혼의 불멸이라든지 또는 예수님의 대속이나 부활 같은 것들을 증명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런 것들을 증명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기독교를 비판하는 자들에 대항하는 무기를 제공하기는 합니다. 그리고 이미 믿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견고케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합리적, 학문적인 증명들은 기독교의 진리를 확증하는 데는 불충분합니다. 그런 것들은 사실의 바깥 부분만 건드리고 본질과 핵심은 손대지 못합니다. 기껏해야 '그럴 듯함', '그럴 수도 있음'으로 인도하나 참된, 확고부동한 확신을 가져다주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정 또는 체험에 의한 방법도 충분치 못한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감정에 의한 방법은 뚜렷한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의 대부분의 내용들은 체험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창조를 체험하지 못했으며,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삼위일체도 체험할 수 없으며, 또한 예수님의 성육신도 체험할 수 없으며, 십자가의 고난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것은 '현재 여기(nunc et hic)' 있는 것들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체험(ervaring)'이란 것을 이런 감각기관을 통한 '경험(waarneming)'이 아니라, 신앙생활 가운데 가지게 되는 '반응(bevinding)'이란 뜻으로 이해한다 할지라도(예를 들어서 죄의식이나 죄로 인한 갈등이라든가 양심의 고소,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구원에의 갈구, 그리스도의 보혈 안에서의 평안,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고 영혼의 기쁨 등), 이런 것들은 먼저 믿음을 전제하고 있으며, 믿음 후에 따르는 것이지 결코 믿음보다 앞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그리스도가 구주임을 믿지 않는 사람이 결코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없으며,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이 주 안에서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그가 계신 것과 그를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자임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히 11:6).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얻는 올바른 방법은 '믿음'에 의한 방법입니다. 믿음이란 나의 바깥에서 오는 진리들을 어린아이처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곧 그대로 수용(受容)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 믿음은 항상 '앎'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앎'은 직접적으로 아는 것도 아니요, 자신의 연구에 의해 아는 것도 아니요, 추리나 증명을 통해 아는 것도 아니요, 감각이나 경험을 통해 아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앎이란 신뢰할 수 있는 증거들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선지자들이 예언해 준 것, 그리고 예수님께서 증거해 주신 것, 그리고 사도들이 증거해 준, 이런 신뢰할 수 있는 증거들을 통해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증거들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증거들이 있어도,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도무지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펴서 읽으면 잠부터 온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왜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성경의 증거를 읽고도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성경을 읽기는 읽어도 성령의 감동감화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우리가 성경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성령의 증거가 필요합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12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 곧 성령을 받은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도록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세상 지혜로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십자가의 도를 깨달을 수도 없고 그것이 도리어 미련하게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지 않습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이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것을 미련한 것으로 배척하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십자가의 도를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을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서 우리가 진리를 알게 될 때에, 그것은 곧 신뢰를 불러일으키고 또 여러 가지 체험들과 반응들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러한 체험들과 반응들은 믿음 후에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 그 후에 거기에 대한 감정이 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경건주의자들은 이 순서를 도치(倒置)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이 순서를 바꾸어서 감정을 먼저 내세웠습니다. 그들은 감정을 통해서 믿음에 이르려 하였는데, 이것은 순서가 뒤바뀐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객관적이고 확고한 기초인데, 비유하자면 바위와 같습니다. 이런 바위와 같은 확고한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지 않으면 모든 것은 유동적이고 변하고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올바른 믿음은 그 성격상 항상 확실성을 수반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믿음은 그 자체로서 이 '확실성,' '확신'을 수반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왜냐하면 확신이라는 것은 믿음에서 직접 흘러나오는 것이고 믿음의 본질적인 속성이 곧 확실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의심에 빠집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인 가운데서 믿음이 좋은 사람인데도 종종 의심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의심은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 의심은 따지자면 옛 사람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옛 사람에게서 이 의심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에는 온갖 의심들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눈을 들어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에 모든 의심이 사라지고 우리 마음에 확신이 찾아 들게 됩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구리 놋뱀을 쳐다보았을 때에 그들이 나음을 얻은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 곧 복음을 그대로 믿을 때에 우리의 마음에 평안과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다. 모든 의심을 초월하는 그런 확신이 우리 마음 가운데 찾아 들게 됩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에서는 이 하나님의 약속에다 선행이라는 조건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경건주의에서는 이 하나님의 약속에다가 감정이나 체험이라는 조건을 붙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 하나님의 약속에 아무런 다른 조건도 붙이지 않습니다. 오직 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을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감사의 열매를 맺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된 믿음, 살아있는 믿음은 항상 선행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선행의 열매가 맺혀져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6절에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참된 믿음은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살아서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곧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열매들을 보고서 믿음의 진실성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열매들에서 참된 믿음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우리는 "만약 믿음이 선행(先行)되지 않는다면 참된 선행(善行)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이 선행을 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참된 선행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의심에서 행하고, 불안해하면서 행하고, 두려움에서 행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내가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 이러한 두려움에서 그들은 선을 행합니다. 이런 두려움에서 나오는 선행은 참된 선행, 곧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행이라 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더라도 종으로서 섬기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기쁨으로 섬기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유한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우리는 구원받을지 몰라 두려워서 선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확신을 가지고 기쁨을 가지고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8장 16절에 있는 대로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자유한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종은 두려움으로 주인을 섬기고 또 보수를 바라고 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감사함으로 아버지를 섬기게 되는데, 바로 이러할 때에 진정한 자유가 있게 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우리는 믿기 위해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행하기 위하여 믿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얻기 위해 무엇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에서부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확실성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의 확실성에 감사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확실성은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어린아이처럼 믿음으로 받아들일 대에 얻게 되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러한 확신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이제 담대히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은 곧 우리 것이다"라고 말한 사도 바울의 고백을 좇아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들에 대해서 우리는 의미를 느끼고 일할 보람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무장되어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일하러 나가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단지 전도하고 기도하는 것만으로 그치는 것은 아닙니다. 비유로 말하자면, 골방은 집의 한 부분이지 집 전체는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집은 기도하는 골방보다는 훨씬 더 넓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수시로 힘을 얻게 해 주는 골방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구원의 길만이 아니라 또한 세상을 이긴 이김입니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우리는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은 주의 성전에서 제사장이며 또한 온 땅의 왕으로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길에서 자라는 꽃들을 사랑하며 하늘의 별들을 보며 감탄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술을 멸시하지 아니하고 학문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공을 바라고 일하지 아니하며, 보수를 바라고 노동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손이 행할 것을 발견하는 것을 행하며, 우리의 미래는 알지 못하나 하나님의 계명을 좇아서 살아갑니다. 우리가 선행을 행하되 그것에 대하여 생각하기도 전에 행하고, 열매를 맺되 우리가 그 사실을 알기 전에 맺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의식 중에 아름다운 향기를 양 사방으로 퍼뜨리는 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한마디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모든 선을 위해서 무장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처럼 큰 구원을 은혜로 받았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행하며, 우리가 받은 구원을 확신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이런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날마다 구원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기쁨은 세상 사람들에겐 비밀이며, 우리가 구원을 확신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이 세상의 어떠한 것으로도 얻을 수 없는 구원,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일들을 기쁨으로 이루어 갑니다. 우리의 일 가운데 노래가 있고, 우리의 생활 속에 찬송이 끊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모두, 이런 구원의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서 담대히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