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살자”(엡 2:11-22)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우신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데 전에 우리는 허물과 죄를 죽었던 자였고(1절), 전에 우리는 공중 권세 잡은 자 곧 마귀를 따랐던 자였고(2절), 전에 우리는 육체의 욕심대로 살았던 자였습니다.(3절)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우리들에게 풍성한 긍휼을 베풀어 주셨고(4절 상) 큰 사랑을 베풀어 주셨고(4절 하)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8절)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큰 은혜이요 사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우리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종종 잊어버릴 때에 많습니다. 다른 것은 잊어버려도 하나님의 은혜만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대개 나이가 들면 건망증(健忘症)이 심해집니다. 이 건망증(健忘症)도 때로는 유익할 때도 있습니다. 미움, 상처, 원한 등은 빨리 잊을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은혜」입니다. 

부모님의 은혜, 친구의 은혜, 선생님의 은혜, 이웃의 은혜를 잊어서는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사람이 됩니다. 신세진 분들에게 늘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감사할 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결코 배은망덕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행복한 사람이 되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은혜를 기억하며 사는 것이 행복의 비결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 11절에서 “그러므로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의 [그러므로]라는 것은 엡 2:8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선물로 받고 구원을 얻은 자라면 마땅히 자신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우리에게 베푸신 놀라운 은혜,  믿음의 선물로 구원을 받은 성도라면 “하나님의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잊지 말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푸신 구원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살려면 무엇을 생각하며,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까?

1.하나님 멀리있었던 불신자이던 과거를 생각해야 합니다.(11-12절)
본문 11절에서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은 자들이라. 그 때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서 외인이요, 세상에서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었더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과거에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로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과거에 육체적(肉體的)으로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인]이요, [무할례당]이었습니다. 이 말은 선택받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비교하여  매우 멸시 천대적인 표현입니다.(12절) 

또한 12절에서는 과거의 우리의 모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① 그리스도 밖에, 이스라엘 나라 밖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② 약속의 언약에 대하여는 외인이었습니다. ③ 세상에 소망이 없는 하나님도 없는 자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아무리 착하게 열심히 살아도, 하나님도 없는 자, 천국에서 제외된 지옥에 갈 자, 하나님의 축복과 관계없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영생(永生)복락(福樂)을 누리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따라서 우리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다음과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은 우리의 과거에 대한 기억은 우리로 하여금 두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베푸신 은혜에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위치에서 자만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받은 직분은 우리가 날 때부터 받은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과거에는 “형편없이 하나님을 모르고 우상숭배(偶像崇拜)에 빠져 살았던 자이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불행한 과거를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이해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이해하고 도와주고 협력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베소교회는 유대인들과 이방인 신자들로 구성된 교회였습니다. 유대인 출신 성도들은 자기들보다 엄격하지 못하고 믿음이 없어 세상에 치우치는 이방인 성도들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싫어했습니다. 믿음이 있는 성도들은, 믿음 없어 무절제하고 무지한 성도를 보면 화가 나고 상대하기가 싫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한 때 그런 자였다“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 14:1-2에서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는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채소를 먹을 만한 믿음이 있다”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는 어떠한 경우일지라도 결코 다른 사람의 믿음에 대하여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잊었다]라는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안이숙 사모님의 책 중에 [그럴 수도 있지]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이해할 수 있지」→「나도 과거에는 그럴 적이 있었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와 다르다고 비판하지 맙시다. 정죄하지 맙시다. 
[전과자]였다가 새사람이 된 사람은 다른 전과자를 비판하지 않습니다. 이해하고 도와줍니다. 죄인이었다가 예수님 은혜로 구워 받은 사람은 죄인을 향해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며 도와줍니다. 우리는 바리새인 병을 조심합시다. 문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는 가? 아닌 가? 입니다. 은혜를 맛보면 달라지고 변화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면 「그럴 수 있지요」. 아직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불쌍한 사람이지요. 가엾은 사람이지요. 본성을 잘못타고 났기 때문이지요. 마귀의 종이지 때문이지요. 불쌍히 여기며 인내하며 기도하며 도와주어야지요. 사람은 판단하고 비판하고 책망해서 변화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이해하고 동정하고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고 모범을 보여주어 은혜를 받아야 변화됩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와 같은 사람도 변화시키신 하나님, 아직도 하나님과 멀리 있는 저들에게도 갑절로 은혜를 주셔서 변화되게 하소서!”라는 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찬송가 410장의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라고 가사를 신앙고백적인 측면에서 찬송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내하며 기다려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恩惠)는 돈 주고 살수 없고, 나를 송두리째 드린다한들 얻어낼 수 없는 귀하고 귀한 선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구원주로  주신 은혜에 늘 잊지 않고 감사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2.하나님 가까이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현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13절-18절)
본문 13절에서 “이제는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현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하나님 나라 안에, 축복의 약속 안에 ,천국 안에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워 졌습니다. 친밀한 사귐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언제라도 부르면 대답하시는 하나님, 항상 지켜주시는 예수님, 언제나 도와주시는 성령님이 곁에 계십니다. 말씀이 귀에 가까워졌고, 찬양이 입술에 가까워졌습니다. 주를 위한 뜨거운 마음에 손과 발엔 땀이 나도록 헌신 봉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교역자가, 집사님이, 성도님이 가까워 진 것입니다. 친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이웃과 평화를 누립니다. 행복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내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공로로 된 일이라는 것입니다(14절).

그래서 14절에서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가네 막힌 담을 허시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둘이 하게 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가까워졌습니다. 
교도소의 죄수들에게는 정든 가정과 사회와 분리되는 높은 교도소의 담이 있듯이, 모든 사람들에게는 율법의 담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법인 율법의 담은 죄인으로 지키기에는 너무 높아 모든 사람들은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율법(律法)의 담은 하나님과 사이를 막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둘이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막힌 담을 허물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첫째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율법의 담을 허물어 버렸습니다(14절)
본문 14절에서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율법의 담을 허물어 버렸습니다.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 517에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블랙 리스트]에 오른 범인(犯人)은 반드시 법에 따라 처벌되어야 하듯이,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는 인간은 공의의 하나님의 법에 따라 처벌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진노인 지옥 불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아담의 후손인 우리 모두의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사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사 대신 죄를 뒤집어쓰고 십자가에서 육체로 죽음을 당하였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인 죽음의 값을 치루었기에 율법은 무너졌고, 우리는 지옥 리스트에서 해방되었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놀라운 예수 십자가의 은혜를 잊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신앙생활의 원동력은 예수 십자가의 은혜를 잊지 않고 생각하는데서 오는 감사와 충성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습니까? 이제라도 우리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을 담을 허물어 버리심으로 하나님과 가까워진 하나님의 백성을 잊지 말고 삽시다. 그리함으로 우리 속에 감격과 감사함이 다시금 뜨겁게 회복될 줄 믿습니다. 삶이 무미건조하다는 생각이 듭니까? 그렇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구속의 은혜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만을 생각합시다. 그리하면 놀라운 은혜가 넘치게 될 줄 믿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담을 허물어 버렸습니다(15절)
본문 15절에서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유대인과 이방의 담을 허물어 주셨습니다.

율법 안에 유대인만이 하나님의 선민이었으나 이제 예수님이 율법의 담을 깨트렸기 때문에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피 공로만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교회는 인간의 모든 높은 담이 예수 피 공로로 무너지는 곳입니다. 
유대인/이방인, 흑인/백인, 북한사람/남한사람, 전라도/경상도, 그 어떤 인간의 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공로로 다 무너져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인간관계의 담은 우리 스스로가 만든 죄의 작품입니다. 예수 십자가의 은혜를 망각한 소치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모든 담을 다 허물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믿고 가서 용기 있게 담을 허물어 버리는 일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외면하는 이웃은 없습니까? 스스로 쌓은 높은 담, 내가 먼저 허물어 버립시다. 예수님은 인간관계의 담을 허물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화해는 예수님의 은혜를 잊지 않은 사람들의 축복입니다. 

셋째로,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원수된 담을 허물어 버렸습니다(16절)
본문 16절에서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십자가에서 모든 원수된 담을 허물어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공로는 「원수끼리의 화목」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은 화목입니다. 십자가의 능력(能力)과 위로는 하나님과 화목, 옆으로는 이웃과 화목을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한마디로 정의하라면 [화평케 하는 자]라고 말해도 무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신 목적이요. 십자가를 지신 목적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마 5:9에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화평케 하는 자들입니까? 아니면 다투게 하는 자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된 현재 우리의 삶은 예수님을 본받아 평화를 만드는 자 곧 [피스 메이커]가 되어야 합니다. 결단코 불화를 만드는 자 곧 [트러블 메이커]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미국의 제39대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는?
1976년 11월 민주당 후보로서 대통령선거에 출마, 현직 대통령 G.R.포드를 누르고 제39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는 취임 후 이집트-이스라엘 양국을 조정하여 중동평화를 정착시키고자 하였습니다. 
퇴임 후에는 애틀랜타에 카터센터를 설립, 냉전 후 지구상에서 야기되는 중대사건의 분쟁해결사로서의 조정 역할에 진력하고 있으며, 1994년 6월에는 개인자격으로 북한을 방문, 김일성과 회담을 갖고 교착상태이던 핵문제를 논의하여 해결의 실마리를 푸는 데 공헌하였다. 퇴임 후 21년간 세계 평화와 인권을 위해 노력한 공로가 인정되어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또한 김영삼 전 대통령과 원수 김일성 사이에 화평을 도모하는 역할을 잘 감당하여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게끔 한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는 지금 세계 평화 사절단으로 평화케 하는 일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미 카터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는 원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일입니다. 원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양보하면 화목을 이룰 수 있습니다. 주님과 가까이, 이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은혜를 잊지 않고 보답하는 일입니다. 

넷째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려 오신 것입니다.
본문 17절에서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결코 정죄함이 없을 뿐만 아니라 모든 범사에 기쁨과 즐거움이 넘칩니다. 무엇보다도 평화가 넘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이 주는 평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다섯째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평안을 얻게 하신 이유는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하시기 위함이십니다.
본문 18절에서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에게 우리에게 평안을 얻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께 담대히 나가갈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결코 주저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3.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권속된 우리에게 장래에 이루어야 사명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19-22절)
사도 바울은 본문 19-22에서 “이제 우리는 외인도 아니요, 손님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말하면서 “모퉁이 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서 함께 지어져 가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율법 안에서는 유대인들만이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출신, 학벌, 혈통, 성격을 초월하여 아름다운교회의 성도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모두 한 시민이요,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19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전에 멀리 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이제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그 공동 운명체가 바로 우리교회입니다. 우리 아름다운교회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로 말미암아 한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앞으로도 우리교회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성전, 곧 교회를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21-22절) 아직 완성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본문 22절 하반 절에서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敎會)는 완성된 성전이 아니라 완성을 위해서 자라나는 성전입니다. 우리 모두는 교회성장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교회의 성장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① 교회 성장은 개인 신앙의 성장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성전의 모퉁이 돌이라면 우리 개인은 성전의 벽돌 한 장 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지만 교회를 이루어 가는 것은 성도 개개인이라는 것입니다. 
② 교회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 힘을 모아야 합니다. 교회 건물을 짓는 것을 연상해 봅시다. 붉은 벽돌 한 장, 한 장이 쌓여 건물이 완성되는 것을 봅니다.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 성장의 세 가지 원리입니다.
첫째로, “한 장씩 쌓아 나간다.”라는 것입니다. 벽돌 한 장의 품질이 좋아야 건물 전체의 품질이 좋습니다. 교회의 성장은 <개인 성장>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서로 연결 된다”는 것입니다. 벽돌 한 장이 아무리 좋아도 서로 연결되어 쌓이지 않으면 건물을 이룰 수 없습니다. 개인 신앙이 아무리 좋아도 서로 협력 하지 않으면 교회는 성장할 수 없습니다. <관계 성장>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로, 쌓여지는 벽돌이 먼저 쌓이지는 벽돌에 맞게 깎여져야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내가 남의 유익을 생각할 때, 성장을 이룬다는 것입니다.<양보 성장>이 중요합니다. 때를 따라 위에 있는 벽돌이 깎일 때도 있고, 때로는 아래 있는 벽돌이 깎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서로의 깍임의 작업을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장 한다→ 내가 성장 한다→ 남의 유익을 생각함이 성장한다(고전 10:32). 개인이 연결되어 구역을 이룹니다. 구역이 연결되어 교회를 이룹니다. 개인이 연결되어 남, 여전도회를 이루고, 학생회를 이루고, 주일학교를 이룹니다. 구역, 남. 여전도회, 학생회, 주일학교가 서로 잘 연결되어 자라는 것이 교회가 자라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교회→신앙의 평준화, 골고루 발달/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국민경제분포의 평준화의 차이입니다. 교회의 자람→나의 자람→함께 자람/ 교회의 축복→나의 축복→함께 축복입니다. 바로 이것이 앞으로 우리 태평중앙교회가 이루어야 할 사명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은혜를 잊지 않는 성도는 교회의 성장에 공헌하므로 자기가 성장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은 성장했습니까? 교회는 성장했는데 여러분은 그대로 있습니까? 그런 일은 없습니다. 교회가 성장하면 내가 성장할 수 있습니다. 내가 성장하면 교회도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늘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은혜를 잊지 않고 사는 것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멀리 있었던 ① 과거 죄인의 신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을 낮추며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② 이제 현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 가까이 있게 된 하나님의 권속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과 화목하며 이웃과 화목을 이루며 살아야 합니다. ③ 앞으로 우리가 이루어야할 교회 성장의 사명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하기 위해서는 맡은바 직분에 충실하여 신앙의 성장에 힘을 써야 합니다. 아름다운 교회의 성도는 은혜를 잊지 않고 보답하므로 날마다 성장하는 교회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우리 교회 위에 가득하기를 기도합시다. 이를 위해서 우리에게 깎여야할 부분이 있다면 철저하게 깎아내야 합니다. 그리함으로 우리 자신을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을 이루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