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욕심에 끌려/약1:13-16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사도 야고보는 지금까지 시험의 긍정적인 측면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었습니다. "시험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좋은 것이다. 복된 것이다. 우리가 시험을 참고 승리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 이러한 것들이 사도 야고보가 지금까지 우리에게 말씀해 준 것입니다. 
반면에 사도 야고보는 오늘 본문 속에서는 시험의 부정적인 측면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시험이 아무리 좋은 것이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 시험을 우리가 참고 이겨내지 못하면 소용없습니다. 시험에 빠져버리고 시험에 넘어가면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시험에서 넘어지겠습니까? 그것은 순전히 자기의 개인적인 욕심 때문입니다. 

하루는 어떤 아주머니가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앞에 보니까 두 어린 형제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아이들도 아주머니의 얼굴을 알아보고서는 아주머니께 공손히 다가와서 인사했습니다.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아이들이 인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주머니는 그들을 기특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무엇인가 그들에게 주고 싶었습니다. 때마침 그의 손에는 잘 익은 자두 세 개가 쥐어져 있었습니다. 그는 자두 세 개를 동생되는 아이에게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이것들을 형과 사이좋게 나누어가져라." 
아이들은 아주머니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습니다. 아주머니가 가고 난 뒤에 동생은 형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 이것들은 아주머니가 내게 주신 것이니까 형은 한 개만 가져. 내가 두 개를 가질게." 

형이 그 소리를 듣고서 가만히 내버려 두었겠습니까? 
"아니야! 내가 형이니까 내가 두 개를 가지고, 너는 한 개를 가져야 돼." 
아이들은 티격태격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자두 한 개를 더 차지하겠다는 욕심 때문에 형제 사이에 서로 싸우게 된 것입니다. 
이와는 정반대 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옛날에 형과 아우가 있었습니다. 형의 밭과 아우의 밭이 서로 인접해 있었습니다. 형은 결혼을 해서 가족이 딸려 있었고, 동생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농사를 잘 지었습니다. 추수 때가 되었습니다. 

형이 생각을 해 봅니다. '이제 곧 내 아우도 결혼을 해야 할텐데. 장가가면 필요한 것이 많겠지. 그러니 내가 양식이라도 조금 도와주어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서 밤중에 몰래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자기 밭에 가서 낟가리에 싸여져 있는 곡식단을 한아름 안았습니다. 그리고 동생이 눈치채지 못하게 동생 밭에 있는 낟가리 위에 안고 간 곡식단을 쌓아 놓았습니다. 그 다음 날도 그렇게 하고 또 그 다음 날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전연 낟가리의 곡식단이 줄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러했겠습니까? 동생도 형과 똑같이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형은 가족이 딸려 있으니까 양식이 많이 필요하시겠지. 내가 도와드려야겠다.' 동생은 동생대로 밤중에 형 몰래 자기 낟가리의 곡식단을 한아름 안고서 형의 낟가리 위에 쌓아 두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줄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 날도 두 형제는 밤중에 몰래 일어나서 자기의 낟가리에 있는 곡식단을 한아름 안고서 형은 동생의 밭으로, 또 동생은 형의 밭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중간 지점에서 딱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두 형제는 왜 자신들의 낟가리에서 곡식단이 줄지 않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사랑에 너무 감격해서 부둥켜안고 한참 흐느껴 울었습니다. 

뒤에 솔로몬이 그 감동적인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솔로몬은 예루살렘 성전을 어디에 지을 것인지 장소를 물색하고 있었습니다. 솔로몬은 두 형제의 사랑을 기리기 위해서 그들이 얼싸안았던 바로 그 자리에 성전을 지으면 좋겠다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바로 그 자리에 예루살렘 성전이 지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욕심이 있으면 다툼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욕심이 없으면 평안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간에 만족하면서 감사하게 살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욕심에 끌려서 미혹되지 않도록 잘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야고보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편의상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간단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시험에 넘어간 뒤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려서는 안됩니다. 

내가 잘못을 저질러놓고 그 탓을 하나님께 돌려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13절 상반부에 있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예컨대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시험을 치렀습니다. 학생들의 실력을 평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학생 가운데 한 명이 부정행위를 하다가 적발되었습니다. 처벌을 당했습니다. 그 때 학생이 이렇게 원망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시험에 부정행위를 한 것은 학교에서 시험을 치렀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든 책임은 원인을 제공한 학교에 있다. 선생님이 잘못이다."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부족하고 내가 못나서 시험에 빠지고 나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험을 허락하신 것은 다 우리를 복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시험을 통해서 우리를 옳다고 인정하시고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내가 부족해서 시험에 빠지고 나서는 내게 시험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원망하려고 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아라." 
그런데 그들이 자기 욕심에 끌려서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아담에게 물으셨습니다. 
"아담아, 너 왜 선악과를 따먹었느냐?" 
그 때 아담이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다시는 따먹지 않겠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이렇게 대답했더라면 사랑의 하나님은 기꺼이 그를 용서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함께 하라고 짝지어주신 그 여자가 내게 그것을 줌으로 내가 먹었나이다." 
그는 하와를 탓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 이 에덴동산에 나 혼자 살도록 내버려 두시지, 왜 그 여자를 만들어서 짝지어주셨습니까? 그래서 제가 선악과를 먹을 수밖에 없었지 않습니까?" 
아담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내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라"고 말할 때는 언제이고, "왜 하나님께서 그 여자를 만들어 주셔서 나로 하여금 유혹에 넘어가도록 만드셨습니까?"라고 하나님을 원망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또 하와에게 물으셨습니다. 
"하와야, 너는 왜 선악과를 따먹었느냐?" 
그 때 하와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뱀의 꾀임으로 내가 먹었나이다." 
무슨 뜻이 그 말 속에 깔려 있습니까? 
"왜 에덴동산에 하필이면 뱀처럼 간교한 짐승을 만들어 놓으셨습니까? 그래서 제가 뱀의 꾀임으로 시험에 넘어간 것이 아닙니까?" 
하와는 이런 뜻으로 뱀을 탓했을 것입니다. 하와는 뱀을 탓함으로서 뱀을 만드신 하나님을 원망한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자기들의 잘못을 뉘우쳤더라면 사랑의 하나님은 기꺼이 용서하셨을 것입니다. 
반면에 다윗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윗도 엄청나게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남편이 있는 아내를 범했습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던 것입니다. 밧세바는 임신을 해 버렸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죄를 숨기기 위해서 작전을 짰습니다. 전쟁터에 나가 있는 우리아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전황에 대해서 자세하게 보고를 받고 난 뒤에 우리아로 하여금 자기 아내 밧세바와 잠자리를 같이 하도록 유도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아는 충직했습니다. 지금 자신의 동료들이 전쟁터에서 싸움을 하고 있는데 자기 혼자 편안히 자기 아내와 가까이 할 수 없다고 아내를 멀리 했습니다. 다윗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제 2단계 작전을 짰습니다. 우리아를 최전선에 보내어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다윗 임금을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다윗의 잘못을 질책했습니다. 그제야 다윗은 깜짝 놀라서 정신을 차렸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통곡하면서 철저하게 회개했습니다. 그 때 다윗은 단 한 마디도 밧세바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밧세바, 당신이 그 시간에 목욕을 했기 때문에 내가 시험에 빠진 것이 아니오?" 
한 마디도 밧세바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 하나님! 왜 하필이면 저로 하여금 그 시간에 왕궁 위를 걷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 제가 몹쓸 놈입니다. 제가 죄인입니다.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윗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오히려 다윗에게 축복을 주셨습니다.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솔로몬 왕이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살아가다 보면 우리가 부족하고 우리가 못나서 시험에 빠질 때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다른 사람을 탓하지 말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마십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이여! 내가 잘못했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모든 것을 나의 탓으로 돌리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 사랑의 하나님은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우리의 모든 죄과를 옮겨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더 큰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시험에 빠질 때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아야 할 이유에 대해 살펴봅니다. 

13절 하반부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본질적으로 하나님은 선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악이 티끌만큼도 개입되실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으실 수가 없습니다. 악에게 물들 수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친히 아무도 악에 빠지도록 시험하실 수가 없습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은 선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선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하루는 어떤 과학자가 나비가 고치 구멍 속에서 빠져 나오는 것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고치의 구멍은 아주 작았습니다. 고치 속에 들어있는 나비의 덩치는 매우 컸습니다. 그러니 큰 덩치의 나비가 고치의 작은 구멍을 통과해서 빠져 나오기가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조금 힘주어서는 빠져 나오다가 쉬고, 또 조금 힘을 주어서는 빠져 나오다가는 쉬기를 계속 반복했습니다. 
과학자가 보기에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위를 가지고 고치 가운데 몇 개의 구멍을 조금 넓혀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나비는 넓혀진 구멍을 통해서 쉽게 빠져 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나온 것을 보니까 나비의 덩치가 훨씬 커 보였습니다. 몸에 윤기도 흘렀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그는 이러한 생각을 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고치의 구멍을 저렇게 작게 만드셨을까? 하나님의 지혜가 부족해서 일까?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일까? 차라리 내가 만들었더라면 고치의 구멍을 조금 더 넓게 만들었을 텐데……' 
그런데 뜻밖에 그의 눈앞에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좁은 구멍을 통과해서 나온 나비는 곧바로 쉽게 훨훨 날아갔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넓혀준 구멍을 통과해서 나온 나비는 날지를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몇 번 파르르 날갯짓을 떨더니 그저 앞으로 고꾸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전연 날지를 못했습니다. 과학자는 이상하게 생각하고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서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연구 결과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나비는 고치 안에 있을 때 영양분이 어깨 쪽으로 몰려있습니다. 그러니까 좁은 구멍을 통과하면서 그 영양분이 온 몸에 골고루 퍼지는 것입니다. 또 날개에도 영양분이 퍼져서 날개에 힘이 있으니까 몸의 균형이 잡히게 되어 나오기만 하면 쉽게 훨훨 날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넓혀준 구멍을 통해서 나온 나비는 영양분이 그대로 어깨 쪽에 몰려있습니다. 몸에 균형이 없습니다. 마치 어깨만 으쓱거리는 깡패처럼 전연 몸에 균형이 잡히지를 않습니다. 날개에 힘이 없습니다. 앞이 무거우니까 앞으로 고꾸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회개했습니다. 
"오, 하나님! 참으로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 오직 하나님만 지혜로우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든 것이 선하십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도 선하십니다. 언제나 우리를 복되게만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나비가 좁은 구멍을 통과해야 빠져 나오듯이 우리도 살아가다 보면 삶의 좁은 골짜기를 통과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괴로워서 우리가 하나님께 물어보고 싶습니다. 
"하나님! 왜 나에게 이와 같은 시험을 허락하셨습니까?"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들려고 할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지혜가 부족해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언제나 복된 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골짜기를 통과하고 난 뒤 바로 그 앞에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우리가 시험을 만나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지혜가 부족해서 우리가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험을 당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선 자체이십니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십니다. 언제나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 사실을 우리가 잊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간에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심을 믿고 감사하고 맡기면, 우리는 시험을 쉽게 이겨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셋째로, 그러면 왜 우리가 시험에 빠지는지 그 이유를 살펴봅니다. 

그것은 자기 욕심 때문입니다. 14∼16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먼저 1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아담과 하와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에덴 동산에 얼마나 실과가 많았습니까?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그것으로 만족을 삼지 못했습니다. 감사히 여기지 못했습니다. 오직 한 가지 선악과에 욕심이 생겼습니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기 할만큼 탐스러웠습니다. 결국은 욕심에 끌려서 선악과를 따먹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욥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시험을 겪었습니까? 사실 욥처럼 하나님을 원망할 이유가 많았던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많던 재산이 다 날아가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십 남매가 사고로 죽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시험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욥1:21의 말씀입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욥은 자기가 주인이 아니고, 자기는 종이고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인되신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을 삼고, 또 주인되신 하나님이 가지고 가시니까 그것으로 감사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의 마음 속에 욕심이 없으니까 시험에 빠질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랍비에게 사랑하는 아들 두 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랍비가 잠시 외출한 사이에 두 아이가 사고로 죽고 말았습니다. 랍비의 아내는 일단 두 아들의 시체를 방안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나서 남편이 돌아오면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뒤에 랍비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내는 남편 랍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제가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제게 아주 귀중한 보석 두 개를 맡기고 갔습니다. 그런데 오늘 느닷없이 저를 찾아와서는 맡겨놓은 보석을 돌려달라고 하는데 이럴 때는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랍비는 아무런 생각없이 대답했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주인이 달라고 하면 당연히 돌려주어야지. 어서 돌려주도록 하시오." 
그제야 랍비의 아내는 랍비를 데리고 두 아들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흐느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방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놓으셨던 귀중한 보석 두 개를 찾아가셨답니다." 
우리는 주인이 아닙니다. 주인되신 하나님이 주신대로 만족하고, 주인되신 하나님이 도로 가지고 가시면 그것으로 만족을 삼고 감사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욕심이 없으면 우리가 시험에 빠질 리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다 욕심 때문에 시험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15절 말씀을 보십시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중간에 죄가 있습니다. 시작은 욕심입니다. 결과는 사망입니다. 우리가 시험을 잘 참고 이겨내면 하나님은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우리에게 상급으로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욕심에 이끌려 시험에 넘어가 버리면 그 결과는 사망에 이르고 마는 것입니다. 
욥은 시험을 이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자기의 욕심에 이끌려 시험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들에게 사망이 임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16절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욕심으로 무엇을 얻고, 욕심으로 무엇을 이루겠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욕심의 결과는 생명이 아닙니다. 사망입니다. 망하는 것입니다. 
나이 50대에 접어든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해 결혼기념일을 맞이했습니다. 천사가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 분이 너무나 행복하게 사시는 모습을 보니까 보기에 좋습니다. 그래서 결혼기념으로 제가 소원을 한 가지씩만 들어드리고 싶습니다." 
천사는 먼저 아내에게 소원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자기의 소원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제 남편하고 세계일주를 한 번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지요. 소원을 들어드리지요." 
그러면서 천사는 아내의 손에 두 부부가 세계를 일주할 수 있는 비행기표 두 장을 쥐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천사는 남편에게 소원을 물었습니다. 
"당신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남편은 머뭇머뭇하더니 천사를 끌고서 구석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천사의 귀에 대고서 소곤소곤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저보다도 나이가 한 30살쯤 연하의 마누라를 한 번 데리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빙긋이 웃으면서 남편의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남편의 나이가 50대인데 갑자기 늙어서 80대의 할아버지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욕심의 결과입니다. 욕심으로 무엇으로 얻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욕심은 사람을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욕심 때문에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험을 만나셨습니까?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언제나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선하십니다. 언제나 복되게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간에 그저 감사함으로 받으시면 됩니다. '나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시겠지!' 그 믿음을 가지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면, 곧 하나님은 우리를 옳다고 인정해 주시고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험을 만나셨습니까? 반드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습니다. 다 우리를 위하신 길입니다. 복되게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으로 만족 삼고, 하나님이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간에 나를 위해서 가장 복된 길로 인도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다 맡기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허락하신 시험을 참고 승리함으로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또 하나님이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다 받아 누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박상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