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가정이 정말 행복한 가정입니까?”(시 1:1-6)

영국의 속담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행복(幸福)은 타인의 뜰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정에 있다." 이 말은 행복(幸福)의 출발점은 가정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가정이 건강하고 행복하면 건강한 인생,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회사를 설립하신 적이 없습니다. 학교를 세운 적도 없습니다. 국가를 만든 적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만든 공동체는 교회와 가정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가정이라는 공간 안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들을 경험하고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이 가정 안에서 평화와 안식과 사랑과 믿음과 희망을 경험함으로 행복을 맛보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오늘날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신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위험에 처해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가정은 죄와 허물이 가득한 세상 한 가운데 완전히 노출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잘못된 가치관에 의해서 우리 가정은 위협을 당하고 있고 좀먹어 들어가고 있습니다. 가정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서 가정은 점점 파괴되고 있습니다. 

노벨상 수상자인 「솔제니친」은 "공산주의 국가들이 붕괴된 원인은 분명하고 단순하다. 그들이 가정과 교회의 중요성을 과소 평가했기 때문이었다." 라고 단언(斷言)했습니다. 세계의 대 재벌(財閥)이었던 「폴 재티」는 "내가 만약 두 달 동안만이라도 가정의 행복을 가질 수만 있다면 내 재산을 다 쏟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많은 돈으로 다섯 번이나 아내를 바꾸어 보았지만 마음에 참된 사랑을 가지지 못했으며 비참한 인생으로 끝맺고 말았습니다. 물질이 너무 없어서 행복하지 못한 가정도 있지만, 물질이 너무 많아서 행복하지 못한 가정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물질은 진정한 의미에서 행복의 기본요소가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잠 15:16에서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시 16:2과 시 73:25에서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주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샤마니즘의 영향을 깊은 영향을 받은 한국 사람들은 기본적인 복을 추구하려고 합니다. 
어느 신학자는 샤마니즘의 특징은 현실성, 의존성, 기복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샤마니즘적 신앙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헬라어에서 복(福)이란 말은 “마카리오스”입니다. 이 말은 즐거움이라는 뜻을 내포합니다. 거룩하고 신성한 즐거움을 의미합니다. 죽음을 초월한 즐거움입니다. 이것이 복(福)입니다. 기복적으로 믿지는 마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을 믿은 결과로 복(福)은 받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영육이 복(福)을 누리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문의 말씀은 참으로 중요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두 길을 가르칩니다. 의인(義人)의 길과 악인(惡人)의 길입니다. 복 있는 삶과 복 없는 삶입니다. 우리는 복 있는 삶을 통하여 의인의 길을 복을 누려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가정이 행복한 가정인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세상의 죄악(罪惡)을 좇지 않는 가정입니다.(1절)
본문 1절에서“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악을 따르지 않는 가정이 행복입니다. 행복한 가정이 되려면 죄악(罪惡)을 멀리해야 합니다. 욥서 22:23에 보면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욥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고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리면 다시 흥하리라." 

▶ 지금 죄와 사망의 역병(疫病)이 오늘날 전국을 강타하고, 전 세계를 돌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이 “마귀청정지역(마귀魔鬼淸淨地域)”이 되게 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 가정은 이미 불행한 가정입니다. 정말 행복한 가정이 되기를 원하신다면 우리의 장막에서 죄악과 불의를 멀리해야 합니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란 말이 있듯이 죄를 짓는 사람과 같이 하다 어울리다 보면 죄를 짓는 길에 서게 되고, 결국 자기도 모르게 죄를 짓는 그런 자리에 그저 앉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잠 13:20에서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바울은 엡 5:3에서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을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라이프 스타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만약 죄악을 멀리하지 않으면 결국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죄악에 물들게 되고 결국 불행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죄악을 멀리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첫 번째로는 악인(惡人)의 꾀를 좇지 말아야 합니다.(1절 상) 
본문 1절 상반 절에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을 꾀를 좇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세상의 죄악을 좇지 않으려면 우선적으로 악한 자의 충고를 따르는 말아야 합니다. 여기의 “악인의 꾀 ”란 “사악한 자의 충고”를 말합니다. 영어성경에 보면 "counsel"이란 단어를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악한 의도, 악한 저의, 악한 계획”을 말합니다. 그래서 악인(惡人)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 악한 음모, 악한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과 친한 가정은 결코 정상적인 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악인은 삶의 방향을 어지럽게 하고, 소란케 하며, 정로에서 탈선하여 위반케 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악인을 황소(시22:12), 사자(시7:1, 22:13, 57:4), 젊은 사자(시17:12), 개들(시22:16,20, 59:6,14), 들짐승(시74:19) 등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악인은 짐승과 같이 이성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악인은 자기 본능대로 행하고, 먹고, 마시고 육체적인 욕구만을 채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악인(惡人)의 중심 사상은 무엇입니까? 
악인은 철저한 무신론자(無神論者)들입니다. “하나님은 없다”(시14:1),“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시 42:3,10)라고 고 떠들어대기도 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지도 아니하며,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역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행복한 가정이 되려면 악(惡)을 도모하고 계획하는 자리에 참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과 의논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학식이 많이 있고, 넓은 식견이 있다고 할지라도 결코 그들을 우리의 상담자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각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대적하는 생각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생각의 밑바탕에는 악독이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 바벨탑을 쌓을 때 보세요. 사람들은 서로 악을 조장하고 도모합니다. “우리가 벽돌을 굽자! ... 우리가 하늘 꼭대기까지 탑을 쌓자!”(창 11:3)라고 서로 조장합니다. 악은 혼자 행하기보다 함께 행하여 함께 타락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인의 꾀를 좇지 말아야 합니다. 악인과 같은 행동을 같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살전 5:22에서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흉내도 내지 말라는 말입니다. 따라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요즘 세상에 모방 범죄가 많습니까?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고 흉내를 냅니다. 인터넷을 통하여 범죄를 배웁니다. 텔레비전 만화에 76초마다 폭력이 나온답니다. 어느 기관에서 KBS MBC SBS 등 지상파TV 3사의 어린이 시청 프로그램을 조사했더니 폭력성이 위험 수준인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어린이 대상 만화영화에는 10분당 폭력 장면 빈도 수는 7.9회라고 합니다. 때리고 부시는 장면이 그렇게 많이 나옵니다. 이런 장면이 없으면 재미없어 합니다. 케이블 TV의 폭력성과 음란성은 이보다 더합니다. 
또한 인터넷은 아이들에게 완전히 노출되어 있습니다. 초등학생, 중학생이 관리하는 성인 사이트가 많이 있다고 합니다. 전 세계의 인터넷 성인 사이트는 약 600만개가 있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하루에 약 6,000개가 새로 생긴다고 합니다. 세계에서 인터넷 성인 사이트가 제일 많은 나라가 우리나라와 러시아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성매매 종사자가 대략적 33만 명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20-30대 여성 4.1%가 성매매에 종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일 년의 시장 규모 24조원이라고 합니다. 현대자동차의 매출액보다 더 많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악은 선을 지배합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합니다. 우리가 악에서 떠나 산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정을 지킨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점점 복 없는 사람이 되어 갑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가 돌아서야 합니다. 그래야 복 있는 삶이 되고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마틴 루터」는 “선을 행한다고 선인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선인은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한다고 악인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악인은 악을 행한다.”고 하였습니다. 애써 선을 행하고 애써 악을 피해야 합니다. 이것이 복 있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두 번째로는 죄인(罪人)의 길에 서지 말아야 합니다.(2절 중)
본문 1절 중반 절에서 “복 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죄악을 멀리하려면 죄인의 길에 서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죄인과 함께 길을 걷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를 지을 수 있는 그 길을 가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죄(罪)를 지을 수 있는 그 길을 가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인생의 길을 걸어갈 때, 뻔히 잘못된 길인 줄 알면서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죄인(罪人)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길을 걷다 보니, 죄를 짓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은 돌이켜 나와야 할 길입니다. 죄를 짓는 길에 서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를 짓는 자리에 함께 어울리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죄를 짓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죄인(罪人)」입니까? 
죄인(罪人)이란 목표에서 빚나간 자입니다. 히브리어로 “죄인”이란 「하말티아」라는 말인데, “과녁에서 벗어난다, 빗나간다.”라는 뜻을 가진 말에서 비롯된 말로서 하나님께 반역한 자요, 불법한 자요, 과녁을 맞추지 못하는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맞추어 살지 못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양궁선수가 과녁을 향하여 활시위를 당기듯이 하나님의 질서에도 정해진 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질서에 어긋난 삶을 사는 자는 죄인입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질서에 순응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죄인은 죄의 일을 업으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합니다. 사단이 기뻐하는 일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 있는 사람이 되려면 이러한 죄인과 같은 삶의 태도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악인의 길에 서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줄서기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줄서기는 더 중요합니다. 
어느 길에 서 있느냐는 중요한 것입니다. 길의 선택이 중요합니다. 우리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그런데 사람들은 아무데나 길을 만들려고 합니다. 모든 게 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길이 아니면 가지 말아야 합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악인(惡人)의 길에 서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 길이 넓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길은 협착하고 매우 좁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넓은 길로 가기를 좋아하고 부화뇌동(附和雷同)하여 그 길로 갑니다.(마 7:13-14) 그래서 예수님 마 7:13-14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명(生命)의 길로 가는 길은 때때로 외롭고 고독할 수 있습니다. 이 길은 좁은 길이요,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생명의 길이며, 영생의 길입니다. 하지만 죄인의 길은 넓은 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로 갑니다. 그러나 죄를 지어서 어색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런 삶을 삽니다. 그러기에 이 길을 걸어도 죄책감(罪責感)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할 것은 죄인(罪人)의 길은 분명히 악인의 길이요, 범죄자의 길이요, 멸망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길을 걸어가기에 고독하지 않고 대중적이라고 할지라도 분명히 그 길은 멸망의 길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는 푯대에서 어긋난 길을 걸어서는 안 됩니다. 목표점을 잃어버리고 자기의 생각과 방법대로 살아가는 그런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 길은 가인의 길입니다. 그 길은 발람의 길입니다. 그 길은 가룟 유다의 길입니다. 행복한 가정이 되려면 죄악을 멀리해야 하는데, 죄악을 멀리하려면 죄의 길에 서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로 오만(傲慢)의 자리에 앉지 말아야 합니다.(1절 하)
본문 1절 하반 절에서 “복 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행복한 가정이 되려면 죄악을 멀리해야 하는데, 죄악을 멀리하기 위해서는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않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오만한 자'란 '조롱하고 비웃다'라는 뜻에서 온 것으로서 “하나님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조롱하고 비웃는 사람 ”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오만 자의 자리”란 남을 조롱하는 자리를 말합니다. 이는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있느냐 아니냐를 말하지 않습니다. 어디에 있든지 간에 다른 사람을 조롱하고, 비웃는 자가 되어 있다면, 오만한 자의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만(傲慢)한 사람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악한 말로 하나님을 조롱합니다. 시편 3편 2절에서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라고 조롱합니다. 시편 10편 4-6절에는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저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주의 심판은 높아서 저의 안력이 미치지 못하오며 저는 그 모든 대적을 멸시하며 그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오만한 자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모독하며 경건한 성도의 아름다운 신앙과 의를 비웃습니다. 저들은 마음에는 독선과 오만함에 가득차 있습니다. 이들은 진리와 양심과 도덕을 다 포기하고 자기를 세우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말라기 3장 14절에서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일이 무가치하고 헛된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이런 오만한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과 함께 앉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앉는다.”(시팅)라는 말은 아주 오만한 자들과 같은 죄악의 생활습관에 젖어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이런 사람들과 함께 계속해서 어울리다 보면 여러분도 결국에는 무너지고 멸망하게 됩니다.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처음에는 악인의 꾀에 좇다가, 그 다음에는 죄인의 자리에 서게 되고, 결국에는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아 버리게 됩니다. 이처럼 죄는 처음부터 멀리하지 아니하면 점진적(漸進的)으로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만듭니다. 우리의 영혼을 파괴합니다. 우리의 가정을 파괴(破壞)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정말 복 있는 가정이 되기를 원한다면 아예 처음부터 죄악을 멀리해야 합니다.
창세기 39장에 보면 요셉은 보디발의 가정 총무로 있으면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받았지만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요셉은 날마다 다가오는 정욕의 시험을 '내가 어찌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9절)라고 하면서 단호하고 분명한 태도를 보일 뿐만 아니라 죄악의 자리에서 도망가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바리새인들과 같은 사람들과 같이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1:43에서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리를 잘 못 잡았습니다. 그 자리가 항상 높습니다. 그 자리가 교만의 자리이며 오만한 자의 자리입니다. 누가복음 14:9에는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자리를 잘 못 잡으면 창피를 당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모른다고 하게 된 원인을 잘 보십시오. 자리 때문이었습니다. 그 자리가 배반하게 하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가지 않아야 할 자리입니다. 사도행전 20장에는 바울이 드로아에서 밤늦게까지 말씀을 전할 때에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문에 걸터앉았다가 3층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바울은 이 청년을 다시 살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유두고가 왜 떨어졌는지 아십니까? 자리가 나빴습니다. 창문에 걸쳐 앉아 있다가 조니 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인의 꾀를 좇지 말아야 합니다. 죄인의 길에 서지 말아야 합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악을 벗어 버리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첫째로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4절)
본문 4절에서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여기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라는 말은 악인의 삶과 그 결국은 1절에서 3절까지 말한 의인의 복된 삶과 그들의 축복에 결코 참여하지 못한다는 것을 강하게 대조시키는 말씀입니다.

악인은 겨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겨는 그 안에 생명이 없습니다. 뿌리도 내릴 수가 없습니다. 열매도 없습니다. 껍질이요, 쭉정이입니다. 그러므로 바람과 함께 이리 저리 날아다닙니다. 결국 불에 태움을 받게 됩니다. 그러기에 죄악을 멀리하지 않으면 허무한 인생으로 끝나고 맙니다. 죄악을 멀리하는 가정은 바람 앞에 겨와 같게 됩니다.(시 35:5) 광풍 앞에 날리는 쭉정이와 같습니다.(호 13:3) 바람 앞에 검불과 같이 되고 폭풍에 불려가는 겨와 같습니다.(욥 21:18) 그리고 무엇 보다도 마태복음 3장 1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불에 던짐을 받는 쭉정이와 같은 사람이 되고 맙니다. 

둘째로 악인은 심판을 견디지 못합니다.(5절 상) 
본문 5절 상반 절에서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심판'(샤파트)은 마지막 때에 있을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공의로우신 판결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부분적인 심판이 아니라 전체적인 심판 곧 세상 종말과 함께 이어질 마지막 심판을 받게 됩니다.(계 20:11).

공의의 하나님은 악인과 의인의 행위를 보시고 그 행위대로 보응하십니다.(마13:40, 25:32-33). 그런데 그때에 악인은 심판을 견디지 못합니다. 여기 '견디지 못한다'는 말은 자신의 죄악이 너무 커서 그 결과가 너무 무서워 일어서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거나 거절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심판을 항거할 수 없습니다. 결국 악인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 앞에 설 수밖에 없고, 피할 수도 없습니다. 바로 그때에 악인은 유구무언(有口無言)일 수밖에 없습니다(마22:12-13, 25:41,45-46). 그래서 시편 5편 5절에서 "오만한 자가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라기 3장 2절에서도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인생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 악인은 하나도 그 앞에 서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은 상급을 얻기 위하여 그 분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 받은 의인은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삶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서야 할 모든 준비를 다해야 합니다.

셋째로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합니다.(5절 하)
본문 5절 하반 절에서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합니다. 여기 '회중'(에다)은 거룩한 장소인 성소나 성전을 말합니다. 신약식으로 말하면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을 말합니다. 그런데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합니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의인의 회중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무리들이 모임을 말합니다. 오직 중생한 성도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입은 성도만이 거룩한 회중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히13:12, 요일1:7). 

그런데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회중에 들지 못하는 악인들은 시대 시대마다 있다는 사실입니다. 구약시대에 가인이 의인 아벨과 함께 하지 못하였습니다(창4:1-16). 구약시대의 광야 교회에서 고라당과 같은 무리들이 하나님의 회중에 들지 못하도록 땅이 입을 벌려 그들을 삼켜버렸습니다(민 16:1-35). 신약시대에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의 회중에 들지 못하였습니다(행1:16-19). 뿐만 아니라 의인의 회중에 들려고 성령을 속였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행5:1-11). 세상을 사랑한 데마도 그러합니다.(딤후4:10)

그래서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22장 15절에서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그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됩니다.(마25:12,30,41,46).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악인의 길을 걷지 말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가정입니다.(2절)
본문 2절에서“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양식으로 살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요 6:27에서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심과 같이 썩는 양식을 붙들고 살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본문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발의 등이 되고, 길의 빛이 되기 때문입니다.(시 109:105)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의 대로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의 평안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우리에게 복(福)을 실어다 줍니다. 복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러납니다. 그래서 신명기 28:2에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의 “여호와의 율법”이란 좁은 의미로는 모세 오경을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다 말씀입니다. 또한 여기의 “즐거워한다.”(히 : 「헤페츠」)라는 말은 “기뻐한다.”라는 뜻입니다. 

▶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한다는 무엇을 뜻합니까?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것이란 말씀의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의 주제는 말씀입니다. 119:14에는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 때때로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나의 영혼을 수술하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예화) 정교한 귀 수술을 하려는 숙련된 외과의사가 환자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당신에게 상처는 주더라도 손해는 입히지 않을 것입니다.”왜냐하면 그 상처는 망가진 귀를 회복케 위해서 남겨진 상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때로는 우리에게 상처도 도움이 됩니다. 우리의 위대하신 의사이신 주님께서도 똑같은 말씀을 우리에게 해 주십니다. 내게 우선 달고 귀에 순한 말씀만 아니라 쓰고 마음에 찔리는 말씀도 즐거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상처를 주더라도 손해는 입히지 않습니다. 그 말씀이 우리에게 복이 됩니다. 말씀을 즐거워하는 것이 복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복 받는 비결입니다. 

그리고 본문 2절의 “묵상(黙想)”(히: 「하가」)이란 말씀은 “깊이 생각한다. 신음한다. 명상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두 가지 의미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조용히 깊게 생각하는 것이고, 둘째는 짐승이 배고파서 부르짖듯이 애타게 부르짖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이 말씀은 짐승이 배가 고파서 부르짖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중얼대는 것을 말합니다. 부르짖는다는 말씀 속에는 애타게 바라는 사모가 있고, 말씀을 깨닫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고, 말씀을 깨달으면서 죄를 회개하는 애통이 담겨져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한번만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주야로 묵상해야 합니다. 
습관적으로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명상해야 합니다. 매일 시간을 정해 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데 인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배고픈 아이가 울면서 먹을 것을 요구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기에 갈급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소화를 시켜야 합니다. 시편 19편 9-10절에는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맛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지 아니하면 맛을 느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은 신비한 체험을 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율법은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며, 지혜롭게 하고, 영혼의 눈을 밝게 하기 때문입니다.(시19:7-8). 그러기에 우리는 시편 119편 97절에서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지키기 위해서는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구원은 은혜로 값없이 받지만 받은 은혜를 지키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삶의 표준으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행복한 가정이 되기 원한다면 하나님을 사랑하시고 존중하시되, 말씀을 즐거워하고,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읽는 소리가 넘쳐나는 가정은 행복한 가정입니다. 성경말씀을 읽는 사람은 그 모습부터가 다릅니다. 성경을 한 시간 읽고 난 후에 찍은 사진과 고민을 한 시간 동안 한 후에 찍은 사진의 모습을 비교해보면 전혀 다를 것입니다. 같은 사람인데도 얼굴이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읽으면 생각이 달라지고, 성품이 달라지며, 행동이 달라지고, 취미가 달라지며, 말이 달라지고, 성격이 달라지며 품행이 달라지고 그의 모든 삶의 패턴이 달라집니다. 날마다 말씀을 즐거워하여 묵상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복한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까? 
여러분의 가정에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넘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송이 꿀보다 더 달아 늘 즐거움으로 그 말씀을 읽으며 주야로 묵상하면 놀라운 체험을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에 내 인생을 맡기며, 거기에 나의 모든 것을 걸고 굶주린 짐승이 부르짖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면 행복이 가득한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육신의 떡도 필요하지만 결코 육신의 떡으로만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님을 시험하는 사단을 말씀으로 물리치시면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살도록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나를 나 되게 만들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합시다. 내 인생의 길에 빛이 되어 인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전 인격을 맡기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출애굽기 13:9에서 “여호와의 율법으로 네 입에 있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입에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계시록 1:3에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고 지키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며 사는 가정에게 주시는 복은 무엇입니까?(3절)
본문 3절에서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세 가지 복을 받습니다. 

첫째로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복을 받습니다.(3절)
본문 3절 중반 절에서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 심기운 사람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가정이 됩니다. 생명수의 시냇가에 뿌리를 내린 나무는 그 결과로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17장 8절에서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편 92편 12-15절에서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발육하리로다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하리로다 늙어도 결실하여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여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내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시절을 좇아 맺는 열매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입니다(마3:8). 이 열매는 구원을 얻는 믿음의 열매요(벧전1:9), 성령의 열매요(갈5:22-23), 빛의 열매요(엡5:9), 찬송의 열매요(히13:15), 물질의 열매요(빌4:17-18), 부활의 열매요(고전1523), 영생에 이르는 열매입니다(요4:36). 이와 같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심기운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잎사귀가 마르지 않습니다.(3절 중)
본문 3절 중반 절에서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 심기운 사람은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가정이 됩니다. 사계절 내내 청청한 빛을 내는 상록수,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는 그 잎이 마르지 않는 상록수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심겨진 의인의 신앙도 그 잎이 시들거나 마르지 아니합니다. 여기 '마르지 않는다'는 말은 손상되거나 망하지 않음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잎사귀'는 신앙생활을 표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의 외적인 생활, 자손의 번성, 사업의 형통 등을 뜻합니다. 가뭄이 와도 청청한 빛을 내는 잎사귀, 환난과 핍박과 그 어떤 어려움에 부딪혀도 신앙의 색깔이 변함없는 성도. 이것은 복 있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나타내주는 화려한 축복입니다.

셋째로 형통한 삶을 삽니다.(3절 하)
본문 3절 하반 절에서 "...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형통한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시는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여기 "그 행사"란 말은 "그가 행하는 모든 일들"을 말합니다. 복 있는 사람의 축복은 결코 인간의 잔재주로 얻는 그런 종류의 복이 아니라 끊임없는 경건의 노력을 통해서 얻는 완전무결한 축복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한 인물들을 수없이 많이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녹을 삼백년 동안 형통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형통케 하여 복의 근원이 되게 하였고 그로 인해 만민이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형통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여호수아를 형통케 하셨고,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였던 다니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형통케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3장 10절에서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철학자 존 로크(John Locke)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려주신 가장 위대한 축복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프랑스의 시인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  1802∼1885)는 “영국이 세계적인 나라가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스위스 대법원에는 “국민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라고 쓰여 진 벽화가 있다고 합니다. 오늘날 스위스가 세계적으로 부강한 나라가 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화) "미국의 청교도 역사 속에서 가장 위대한 영향을 끼쳤던 사람 중 「조나단 에드워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나단 에드워드」는 주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신앙적인 여인과 결혼해서 신혼초기부터 철저하게 기교적 원리에 입각해서 그리스도인의 가정을 형성해 나갔습니다. 

이것과는 대조적으로 같은 ‘뉴잉그랜드’에서 에드워드와 같이 자란 동네 친구였던 「맥스 쥬크」는 신앙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방탕했던 여인과 결합하여 나중에 자신도 신앙을 저버려 그의 사람됨이 점차 잘못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두 사람의 가계를 추격했는데 참으로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① 「조나단 에드워드」는 오늘날까지 617명의 후손을 두었는데, 성직자 100명, 대학의 총장을 지냈던 사람이 12명, 교수 75명, 의사 60명, 군대 장교 75명, 저술가 80명, 변호사 100명, 판사 30명, 공무원 80명, 하원의원 3명, 상원의원 1명, 미국의 부통령을 1명 배출했다고 합니다. 
② 반면에 「맥스 쥬크」는 1,292명의 후손을 두었는데, 유아로 사망한 사람이 309명, 직업적인 거지가 310명, 불구자 440명, 매춘부 50명, 도둑 60명, 살인자 70명, 그저 그렇고 그런 사람이 53명 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극단적인 예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사는 가정과 악인의 꾀를 좇고 죄인에 길에 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 자의 결과가 악인의 꾀를 좇은 자의 결과가 어떠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좋은 실례입니다. 

바라기는 에드워드의 가정처럼 되어서 하나님께 자손만대 영광 돌리는 행복한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맥스 쥬크의 가정처럼 참으로 불행한 가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본문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악한 일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복을 받으셔서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와 같이 시절을 따라 열매를 맺고, 잎사귀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는 근심이나 걱정을 하지 않고, 형통할 수 있는 그런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