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없이 살자/요 19:28-30
 
사람이 이세상에 태어나면 반드시 죽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이 한번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엔 반드시 심판이 있으리라.(히 9:17) 
사람이 산다는데에 있어서는 모두다 희망을 가지고 있지만 죽는다고 할때는 슬프고 두렵고 모두다 마음속에 두려워 합니다. 죽는다는 것에 대하여 여러 사람들의 반응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죽음을 반항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자신에게 부정하고 왜 죽음이 내게있나 하고 죽음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사람은 나에게만 죽음이 있는것처럼 분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사람은 타협적으로 나를 살려주시면 내가 보다 선하게 살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사람은 죽음을 부정할수 없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고, 그리고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죽음에 대하여 다섯가지 반응에 연구한 크볼리서라는 심리학자가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을 분별해서 그가 인터뷰한 결과의 반응 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을 때 남긴 유명한 명언들을 기록한 책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최후로부터 제자들 그리고 위대한 성자들, 시인과 정치인,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서 남긴 그 명언들. 
이것들을 읽을 때마다 죽음에 대하여 고상한 표현들을 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 내게 잠이 오는구나 자러 가자" 이렇게 고상한 말을 한사람이 있고 또 성프렌시스코와 같이 "오 죽음의 자매여 어서오라" 이렇게 높은 경지에 도달해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 하고 떨리고 그리고 심히 마음으로 슬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이 왔을 때 그는 전혀 우리가 상상할수 없는 한마디를 그는 남기고 있습니다. 
"다 이루었다" 이말을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음은 분명히 유대인들의 교권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한다는 죄목을 걸었습니다.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고 하나님을 참담하게 한다는 죄목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 죄목으로는 사형선고에 마땅한 것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로마의 법에 걸었습니다. 민중을 선동하고 세금을 거역하고 자칭 왕으로써 로마의 권력에 그는 반역하는자라고 하는 그런 고발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토록 했던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아무죄가 없는 것을 알고 있는 빌라도였지만 그러나 민중들의 함성은 당신들이 예수를 처형하지 아니하면 로마의 황제의 신하가 아니다. 이렇게 떠들 때 빌라도는 두려운 마음으로 어쩔수 없이 사형선고를 내립니다. 
오전9시에 자기 죽음의 형틀을 짊어지고 예루살렘 거리를 지나 골고다 언덕위에 주님은 못박히게 됨니다. 
오전9시부터 오후3시까지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달려 그의 창에 찔린 옷자국에서 피가 흐르고 머리에 가시관에서 피가 쏟아지고 땀도 눈물도 기름도 쏟아 그몸에서 다 흘러내렸습니다. 
그는 오후3시에 운명할 시간이 가까이 왔을 때 그는 하늘을 향하여 한마디를 크게 외칩니다. "다 이루었다"하시고 고개를 숙이고 운명 하시더라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오늘말씀에 보면 십자가에 달렸을 때 많은 무리들이 그의 갈증을 해소하려고 스폰지에 신 포도주를 묻혀서 입에 댔지만 주님은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주께서 주시는 이 고난의 잔을 그는 친히 죽음으로 맞이 하면서 슬퍼하거나 그는 괴로워 하거나 절망하지 않으시고 "다 이루었다"는 말로써 끝냈던 것입니다. 
자기 죽음 앞에서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역사적으로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다 이루었다" 생각해보면 예수님은 그죽음이 많은 사람들의 눈에서 볼때에는 실패자로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로마의 사형수로 그십자가의 형틀에서 처참하게 죽어가는 모습 나약한 죄인으로 강도들과 함께 죽는 그러한 모습을 볼 때 그는 분명히 실패로 보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말할 때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고 또 권력을 누려본 일도 없으며 좋은 장막에 살만한 거처도 없었고 세상적인 명예도 없었습니다. 
그가 있었다고 한다면 죄인들의 친구였고 가난한 사람들의 벗이었습니다. 그는 학력도 없었고 특별한 학위도 없었으며 그는 이세상에서 누가 우러러 볼만한 평판을 가진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이레 최고의 성공한 사람으로 우리는 인정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를 연구하는 학문이 도서관에 참으로 수없이 메우고 있습니다. 지금도 목숨을 걸고 그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 수천만에 이르고 있는것입니다. 
재산도 물질도 받치면서 주님을 향해서 따르면서 '오 나의 주 나의 성자 예수여 나의 생명 나의 전부 나의 행복이옵니다.' 
이렇게 고백하면서 눈물을 쏟고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위대한 성공자 였습니다. 
그의 생애는 역사에 기리기리 아름답게 우리에게 기억되면서 우리의 가슴을 울려주고 우리의 심금을 흔들면서 역사를 진동 시키고 있습니다. 분명히 당시에 예수 십자가에 달릴 때 실망한 지사들도 엠마오로 돌아가면서 그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줄로 알았노라. 그러나 그는 십자가에 죽은지 사흘째요. 이렇게 슬픈기색을 띨정도로 그에대한 실망을 했던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가 머라 말하던가네 그는 친히 자기 죽음에 대하여 다 이루었다 나는 성공했다 누가 머라든 누가 멀하든 머라고 말하든 나는 잘살았다. 이렇게 자기자신에 대하여 말을 했던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마지막 자기죽음 순간에 "다 이루었다" 이렇게 말할수 있다 한다면 내가 마지막 죽는 순간에 '나는 참 잘살았다'. 이렇게 말할수 있다면 이게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 되겠습니까. 
그렇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죽음으로 비젼을 성취 하셨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인생을 살면서 나름대로 이런 목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사는데 그 목표가 어떤사람들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어느 대학을 진학한다는 목표가 있고, 어떤 사람들은 좋은 배우자를 만나 결혼을 해야한다는 목표가 있고, 어떤 사람들은 사업을 시작해서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목표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떤 그런 목표도 있어야 되겠지만 분명한 비젼에 대한 성취가 있어야 됩니다. 이것을 가르켜서 참성공이라고 말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목표가 달성될 때 성공했다고 말합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갔을 때 성공했다. 좋은 취직을 했을 때 성공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세속적인 가치관의 얘기고, 오늘 예배를 하는 예배를 드리는 그리스도인 여러분, 여러분들은 비젼의 성취를 하고 있을 때 성공했다고 하나님도 인정을 하고, 나도 인정을 하는 것입니다. 
비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주신 소원입니다. 내 욕망에서 산출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께서 내게 내 재능과 내 기질과 그리고 내 상황과 환경과 그리고 내게 있어서 주어진 여건 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기대하시는 바 이루실 뜻이 바로 비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인간적으로 목표를 이룬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결혼해서 후손도 없었고, 돈을 벌어서 그는 땅에 쌓아둔 것도 없었으며 정치를 해서 정권을 잡은 일도 없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아무런 업적을 남긴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죄수로 괴수로 죄인의 괴수들과 함께 십자가에 처형되는 죄인중에 죄인 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분명히 비젼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비젼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내가 세상에 온 것은 내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오 나 보내신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보내신이의 뜻은 내게 주신자중에서 하나두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그를 살리시는 것이라. (요 6:37)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수가성 우물가에 한 여인과 몹시 그는 피곤한 가운데에 대화하고 있었습니다. 지아들은 먹을 것을 구하러 동네에 나갔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을 구해서 가지고 와서 랍비여 잡수소 말할 때 내겐 먹을것이 있느니라. 선생님 누가 갔다주었습니까. 내 양식은 내 보내신이의 뜻을 행하며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신 뜻을 이루는 것이 자기가 먹는 양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양식은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양식은 나를 만족 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애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나의 생명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내게 힘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나를 만족케 하는 것이다. 이렇게 양식으로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저는 얼마전에 대학을 다니는 한 대학생에게 물었습니다. 
'자네 목표가 뭔가' 
'예, 서울대학 이옵니다.' 
'그래, 서울대학 들어가야지 공부열심히 해서 들어가소.' 
'그 다음 목표가 뭔가' 
'예,사법고시에 합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할려고 그래' 
'예, 판검사를 하던지 변호사를 하던지 그럽니다.' 
'해야되 열심히 공부하소'. 
'그 다음 목표가 뭔가' 
'예, 이제 출세를 하던지 아니면 이제 변호사로써 돈을 많이 버는것입니다. 
'그 다음 목표가 뭔가' 
'예, 부잣집 딸하고 결혼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의 목표가 뭔가' 
'예 계속 돈을 버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벌 작정인가' 
'몽땅 벌 작정입니다.' 
'그 다음엔 할 일이 뭐라고 생각 되는가.' 
'그 다음 목표는 늙으면 은퇴해서 세계일주나 하고 편안히 먹고 살려고 생각 합니다.' 
'살기만 할것인가' 
'때가 되면 죽겠죠.' 
'그래 그걸로 끝나는가' 
'더 생각해 본적 없습니다.' 
'아 그래 자네 목표는 참 한심스럽네. 분명한 비젼을 가져야 될것이거늘 자네는 하늘이 준 비젼이 없네 겨우 땅위에 먹고 살고 그렇게 먹고 살다 죽을 바에야 뭣땜에 공부를 그렇게 죽어라고 하는가 적당히 다같이 하소. 그리고 편히 살다가 가소.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 그렇게 살바에는 그게 낫겠네.' 
오늘 우리는 분명히 비젼과 욕망은 다름니다. 
욕망은 나의 소원이요. 비젼은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욕망은 내 정욕의 산물이고 비젼은 성령의 은사입니다. 
욕망은 자기가 개인적인 야욕을 성취하는것이고, 비젼은 공동체 나라와 민족, 이웃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려고 하는 꿈입니다. 
욕망은 목표를 세워 성공 하는것이고 비젼은 자기의 위대한 인격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욕망은 의욕의 성취이나 비젼은 사명의 성취인 것입니다. 사명감을 가진 자만이 비젼이 있는 것입니다. 
욕망은 죽음으로 끝나나 비젼은 죽음으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오늘 우리 사랑하는 성도들이 단기적인 목표를 가지고 사는것도 중요하지만은 높은 비젼 하늘로부터 준 소명을 가지고 그 소명을 성취해가는 목표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한 그 그리스 헬라어의 뜻은 "τετελσται" 라는 말입니다. 
"다 이루었다". 이 말은 종들이 주인의 명령에 일을 다 마치고 주인에게 가서 "τετελσται "주인님 다 했습니다. 이 뜻입니다. 
또 다른 말로 말하면 제상들이 하나님 앞에 재물을 드릴 때 흠없고 점없는 깨끗한 재물을 자지고 "τετελσται" 주님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재물을 주께 드리나이다. 
또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그 수없는 세월을 자기가 머릿속에 가지고 있던 그의 청사진을 가지고 그림을 다 완성한 후에 "τετελσται" 완성했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또 "τετελσται" 는 장사하는 사람이 이제 돈을 다 빚진 것을 갚았다. 남의 돈을 꾸어쓴 것을 다 갚았다고 말할 때 "τετελσται" 다 갚았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서 '오 아버지여, 나는 종으로 이땅에 오소서 아버지의 명령을 순종하고 다 완성 했습니다'. "τετελσται" 
주님은 우리들을 위해서 화목 재물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로 만백성의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예수 점없고 흠없는 어린양 예수 "τετελσται" 나는 재물이 되옵니다. 
주님은 미래의 이 천국을 꿈꾸면서 미래의 하나님의 나라를 머릿속에 상상하면서 이 하나님의 나라를 메시아로써 완성 하면서 "τετελσται" 그러면서 우리의 죄값을 친히 치루시고 모든 우리의 죄값을 다 치루 시면서 '아버지 내가 십자가 상에서 피흘림으로 만백성의 죄값을 다 이빚을 청산 하나이다.' "τετελσται"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