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막 4:1-9)

파종의 달 4월을 맞이하여 우리의 심령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말씀을 통하여 함께 생각해 보면서 주님의 뜻을 알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의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저는 복잡하고 어렵고 고차원적인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항상 주님의 뜻을 바르게 깨닫기를 원하고, 항상 주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영광과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을 위하여 자신을 쳐서 복종할 줄 아는 사람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주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기의 형편이나 자존심(自尊心)보다 주님의 말씀을 더 중시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쳐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보다 주님을 더 신뢰하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인으로 성장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형편과 사정에 묶여 있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리는 신앙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 중에 첫 번째 비유이고 가장 잘 알려진 비유로서 천국을 소유한 심령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겉보기에 아주 평범해 보이고 이해하기 쉬운 말씀처럼 보이지만 생각보다 이 말씀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살펴보기 전에 몇 가지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첫 번째로 주목할 것은 예수님께서 왜 천국 복음의 말씀을 비유로 말씀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비유의 말씀을 공개된 비밀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어떤 사람에게는 공개되었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공개되지 않는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아주 평범한 주제를 가지고 아주 쉽게 이야기 형식으로 말씀을 가르쳐 주셨지만 이것은 오히려 사람들은 이 비유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는 비유로 말씀하시지 않으셨지만 천국복음에 대해서는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본문 9절-10절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귀 있는 자만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해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홀로 계실 때에 “이 비유의 말씀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라고 질문할 정도였습니다. 

▶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천국복음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었지만, 어떤 사람들에게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문 11-12절의 말씀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

그렇습니다. 천국의 비밀이 너희 곧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는 허락이 되었지만, 외인 곧 하나님의 택함을 받지 않는 사람들에게 허락이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택하신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셔서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의 말씀은 어떤 사람에게 공개되었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공개된 비밀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생각해 볼 때에 우리가 본문의 말씀을 보고 듣고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무슨 말씀인지 모르고, 보아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니 재미도 없을 뿐만 아니라 별로 흥미를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의 심령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꿀과 송이꿀보다 더 귀하고 달게 느끼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지루하고 따분하고 별로 입니까?

두 번째로 주목할 것은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하여 우리에게 하시고자 의도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본문 20절에서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끝나는 사람이 아니라 결실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듣고 깨닫도록 은혜를 주신 것으로만 만족 하지 말고,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듣고 깨닫는 자라면 마땅히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행에 옮기는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약 2:17) 행함이 없는 영혼이 죽은 것처럼 죽은 믿음입니다.(약 2:26) 참된 믿음은 결실하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열매가 있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 7:16-18에서 우리가 맺는 열매로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신나무에서 엉겅퀴를 맺을 수 없고,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맺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주님더러 주여 주여 말한다고 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7:21)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불법이며, 주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7:22)
그러므로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열매 혹은 어떤 행동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온전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있느냐 하는 것에 따라서 칭찬을 받을 수 있고, 책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아무리 많은 일들은 행한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뜻에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것은 불법을 행하는 것이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에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서 “천국 복음을 듣고 있는 우리들이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칭찬받을만한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무엇보다도 진지한 청취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가 된다고 할지라도 그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해서도 안 되지만, 그 말씀을 받는 밭 곧 우리의 심령이 박토이면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도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천국 복음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이제는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데, 실천하는 자가 되려면 씨가 떨어져 열매를 맺는 밭 곧 우리의 심령이 지경되지 않으면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 예수님 당시에 주님을 따라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열두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떠받들고,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면서 그분이 요구하는 대로 어디나 따라가려고 결심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주위에는 열 두 제자와 같은 열성은 없지만 예수님에 대해서 그래도 상당한 호기심(好奇心)을 가지고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이적과 기사, 귀신들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치신 일 그리고 먹을 것이 없을 때에 먹을 것을 주시는 그런 광경에 보고 호기심을 가지고 따라 다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 중에는 이런 것에는 아예 관심을 두지 않고 예수님에게 적대(敵對)적인 감정만을 가진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과 행동에서 어떻게 하면 꼬투리를 잡아 그를 괴롭히고 예수님께서는 일에 방해하는 일만 생각하는 악한 무리들 곧 적대자(敵對者)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권위와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천국복음의 씨앗을 뿌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역의 결과는 항상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똑같이 천국의 복음을 전하시는데도 왜 그 결과는 다르게 나타났습니까?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천국의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각각 다른 반응을 나타내기 때문에 생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결과가 나타나는 원인이 전적으로 말씀을 듣는 청중들에게 돌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말씀을, 똑같이 신중한 태도로 전하셨지만 청중의 반응은 무두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그들의 태도가 각각 다르게 때문에 다른 결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지금은 예수님 시대하고는 다릅니다. 그때에는 예수님께서 직접 복음을 전하셨지만 지금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우리들이 성경적으로 해석하여 전하기에 설교자에 따라서 결과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가 탁월해야 합니다. 미숙하게 말씀을 전할 것이 아니라 말씀을 잘 소화해서 알아듣기 쉽게 탁월한 방법으로 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2장 4절에서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탁월하게 전하기 위해서는 준비하고 기도하고 위로부터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설교자가 잘 준비하여 전한다고 할지라도 말씀을 듣는 사람이 그것을 잘 듣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결실하려면 말씀을 받는 밭이 좋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토양에 속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소위 주님의 제자”라고 생각하는 내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스스로를 평가하도록 요구하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이 질문 속에서는 단순히 “교회에 다니고 있는가? 아닌가?”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 하였는가”의 차원에 머물고 있지 않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로 분명한 신앙의 결단과 헌신이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끝까지 제자의 삶을 사는 자가 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언급하시고 네 가지 밭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우리의 영적 상태를 점검해 보고 결단하는 시간을 갖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길가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4절) 
본문의 3절에서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떨어질 때에 들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뿌리는 자는 직접적으로 예수님이시고, 두 번째는 주님의 전도자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설교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길가에 떨어질 때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본문 4절에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길가와 같은 심령이 있다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길가와 같은 마음 밭은 어떤 사람을 말합니까?
이는 명목상의 기독교인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일차적으로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만을 말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이들도 말씀을 들 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지금 교회에 들어 와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건성으로 듣는다면 그 사람은 길가와 같은 심령을 가진 사람입니다.   

따라서 길가와 같은 심령을 가진 사람들의 문제점은 말씀을 듣기는 했지만 그것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큰 문제입니다.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들을 일단 말씀을 들었다는 면에서 이 사람들을 교인이라고 우리가 간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교인이라고 말할지라도 길가와 같은 마음 밭을 가지고 있었기에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행적을 보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 전해 이해하지 못하고 무감각한 상태로 그냥 지나쳐버린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명목상의 기독교인 즉 이름뿐인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실제로 말씀에 대한 열정(熱情)도 없고, 말씀에 대한 사모함도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그의 삶 속에 전혀 뿌리를 내릴 수가 없었던 길가와 같은 밭은 가진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길가라는 것은 주로 팔레스타인에서는 밭과 밭 사이에 난 길을 의미 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로마의 영향으로 그 당시 이미 하이웨이가 닦아지고 있었지만 팔레스타인의 대부분의 길가라는 것은 밭과 밭 사이로 난 그런 길이었습니다. 거기에 농부들도 다니고 그리고 마을 사람들도 다닙니다. 또 지나가는 여행객들도 다닙니다. 한참 다니다 보면 그 길은 아주 빤들빤들해지고 아주 굳은 땅이 됩니다. 

바로 여기에 씨가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씨가 떨어지자마자 어떤 사건이 일어났습니까? 씨가 떨어지자마자 새가 그 것을 쪼아 먹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이에 대해서 주님은 무엇이라고 해석하십니까? 주님은 15절에서 “말씀이 길 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마귀가 말씀을 빼앗아 갑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서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빼앗습니다. 눅 8:12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그런데 기억할 것은 마귀가 언제나 말씀을 빼앗아가지 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에 마귀가 말씀을 빼앗아갑니까? 마 13:19의 말씀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는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마귀에게 빼앗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건성으로 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 말씀의 의미를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사단 마귀가 와서 그 말씀을 빼앗아 버립니다. 

그렇습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사단 마귀에게 말씀을 빼앗긴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새를 무엇에 비교하였습니까? 새는 마귀를 말합니다. 새가 그 씨를 쪼아 먹듯 사단이 내 마음에 말씀이 떨어져서 말씀이 내 마음속 에 들어가기 전에 그 말씀을 낚아 채 갑니다. 마귀가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 마귀에 의해 말씀을 빼앗기고 있는 사람. 그래서 말씀을 정말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오늘 같은 교회 상황에서 어떤 사람을 말합니까? 저는 이런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습관적으로 교회에 오면 조는 사람, 이것이 바로 길가를 대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존다는 것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와서 너무 피곤해서 졸수도 있습니다. 설교자가 얼마나 졸리도록 했으면 졸겠습니까? 그러니까? 설교자도 문제입니다. 얼마나 세상 풍파에 시달려 피곤해 있다가 교회에 앉아서 평안하면 졸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초장부터 조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다 피곤해서 한 번 조는 것이 아니라 주일마다 조는 것입니다. 이것은 뭐가 잘못된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전혀 말씀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재미있는 것이 뭐냐 하면 설교가 딱 끝나면 용하게 깨어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은 말씀을 도무지 자기의 것으로 삼을 기회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피곤해서 조는 것이라면 괜찮은데 만약 사탄의 장난으로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졸고 있다면 그것은 문제가 심각합니다.  

옥스퍼드대학과 캠브리지대학에서 가르쳤던 C.S. 루이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분은 많은 기독교 변증 서적들을 쓰기도 하고, 어린이 문학을 많이 쓰기도 하신 유명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분이 쓴 책 가 운데서 “악마의 편지”(더 스크루 테이프 레터, The screw tape letter)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은 왕 마귀가 조카 마귀에게 쓰는 편지입니다. 아주 재미있습니다. 거기에 사탄의 전략이 아주 투명하게 나타나 있어요. 그중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영국의 노신사, 아주 사회적으로 존경 받는 노신사 한 분이 도서실에 갔어요. 책을 읽습니다. 그러다 기독교 책이 하나 손에 잡혔어요. 그래서 기독교 책을 읽다가 감동을 받기 시작합니다. 나도 이젠 제대로 믿어야 돼. 제대 로 신앙생활 해야 돼. 내 일생이 얼마 남았는데 하나님 앞에 설 준비를 해야지. 뭐 이런 도전을 막 받으면서 숙연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결단을 하고 새로워져야 되는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생각은 중요한 생각입니다. 이 생각 때문에 이 사람의 인생이 바뀔 수가 있습니다. 운명이 바뀔 수가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생각이지요. 이렇게 진지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 속에 무슨 생각이 나냐 하면 점심시간이 다 되었는데, 그런 생각이 나요. 밥이나 먹고 생각하자. 그래서 식당에 들어가서 밥을 먹는 거예요. 밥을 먹다보니까 식권증도 오고, 밥을 먹고 나니까 인생이 다 그런 거지 뭐. 나라고 뭐 특별하게 이 나이에 와서 내가 다시 인생의 길을 바꿀 필요가 있겠는가?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점심 먹고 나서 버스타고 집으로 돌 아 옵니다. 돌아 올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버스타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때 악마는 이 버스 타고 집에 돌아가는 이 노신사의 뒤에서 회심의 미소를 짓습니다. 그런 얘기예요. 

저는 이런 이 야기를 읽으면서 이것이 오늘날 교회당을 채우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교회 와서 주일날 아침 말씀을 들으면서 어떤 날은 그래도 좀 마음에 말씀이 와 닿습니다. ' 맞았어, 나도 새로워져야지. 나도 좀 제대로 믿어보고, 나도 신앙의 길을 추구해야지.'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그런 생각이 딱 드는 순간에 '오늘 설교가 길다. 왜 안 끝나나? 빨리 집에 가서 쉬어야 하는데? ’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이 분의 관심은 오직 집에 가서 쉬고 싶은 마음 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런 분도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분도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이 분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에 그 사람의 뒤에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악마의 모습을 연상해 보셨습니까?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이 세상의 진정한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 마귀는 자기가 이 세상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합니다. 바로 그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도록, 복음이 그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사단이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말씀이 내 마음 속에 파고 들어오지 못하고 이 말 씀이, 이 진리가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는데 사단의 역사가 개제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도무지 말씀이 내 마음 속에 들어가지 못하고 말씀을 빼앗긴 채 말씀을 들었으나 그 말씀을 자기 것으로 하지 못하고 견고하고 굳어 진 마음 그 상태로 오늘도 돌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바로 길가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받은 자는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마귀는 말씀을 빼앗으며, 하나님의 자극에 의해 일을 하게 움직이는 뜨거운 마음을 빼앗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달구어졌을 때 치십시오. 하나님의 성령을 소멸치 마십시오. 이를 위해 마귀부터 제거하십시오. 마귀가 우리를 혼미케 하여 말씀을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하고 들을 때 마귀부터 제압하여야 합니다. 말씀을 충분히 듣고 가서는 마귀들의 새들에게 뺏길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새들에게 받은 말씀을 뺏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씨를 빼앗는 마귀의 잡새부터 제거하여야 합니다.

둘째로 돌밭과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5-6절) 
본문 5-6에서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돌밭과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길가가 명목상의 기독교인을 대표한다면 돌밭은 피상적(皮相的) 기독교인입니다. 피상적 기독교인이란 깊이가 없는 기독교인을 말합니다. 피상적 기독교인도 진정으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 기독교인을 대표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돌밭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을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본문 16-17절에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 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란이나 핍박이 일어난 때 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돌밭과 같은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처음에는 기쁨으로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신기하고 놀라운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이 오래가지 못합니다. 때로는 주님의 말씀이 화근이 되어 핍박과 환난을 만나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고 그의 제자가 되고 제자답게 살아가려는 것 때문에 이 세상에서 비난과 핍박, 모욕을 당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 때문에 당하는 환난과 핍박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환난(患難)을 겪는 것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당연한 현상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그만큼 이 세상과는 이질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포기하는 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태도가 아닙니다.  핍박을 피하기 위하여 마치 예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체하고 그의 말씀을 받지도 않은 것처럼 행동한다면 그 사람은 열매는커녕 아직 제대로 성장하지도 못한 상태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마치 자갈밭에 떨어진 씨처럼, 곧 싹이 나오지만 결국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여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되려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말씀을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예화) 옛날 청교도인들은 기독교인들에게 3가지 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 번째 적은 사탄 마귀이고 두 번째 적은 육신(肉身) 곧 우리 안에 있는 부패한 이기심(利己心),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이기심(利己心), 이것이 신앙생활의 적으로 보았고, 세 번째 적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 잘못된 가치(價値)체계를 갖고 있는 이 세상을 적으로 보았습니다. 이 세 가지가 크리스천의 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 밭을 공격 하고 있는 것이 사탄마귀라면 돌밭과 같은 마음 밭을 공격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육신(肉身)입니다. 즉 우리 안에 있는 이기심(利己心), 부패 한 이기심(利己心), 쉬운 것, 편리한 것만을 추구하는 우리의 육신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더 이상 나에게 편리하지 않다면 쉽게 신앙을 포기할 수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돌밭과 같은 마음 밭을 가진 사람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팔레스타인을 성지 순례를 해보면 이스라엘에 가면 돌밭이 아주 많습니다. 이스라엘은 석회석(라임-스톤, limestone)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실제적으로 돌밭이 많은데, 돌밭은 깊이가 없습니다. 깊이가 없으니까? 열매를 맺지 못하는 그런 일들이 아주 많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이게 무슨 얘깁니까? 처음에는 어떤 신앙생활에 대한 반응을 보입니다. 돌밭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말씀을 들을 때 기쁨으로 받습니다. 말씀에 대한 동의도 하고, 웃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은혜를 받아서 울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간증도 합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그 속에 뿌리가 없어서 잠간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은혜를 받으려는 간절한 마음이 없으면 그 말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감정적으로 받으면 뿌리를 내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결국 환난과 핍박이 올 때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끝에 결국 주님의 곁을 떠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중에도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었을 때 다른 곳으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나의 생명과 구원의 주로 영접해 드리는 데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이와 같은 마음의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어떤 외적인 핍박이 있어도 결코 쓰러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평안한 마음과 기쁨과 또한 믿음을 가져다주며 근심이 사라지고 두려움도 없어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환난과 핍박의 바람이 불 때가 문제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나 설교를 들을 때 "주여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는 은혜 받으려는 갈망하는 마음의 준비가 있어야 하며, 결코 우리의 마음을 강퍅케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돌밭과 같은 마음 밭을 가진 성도에게 말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돌밭과 같은 마음을 가진 교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습니다.(16절) 그래서 이들도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기들도 엄청난 은혜를 받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간증도 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모읍니다. 그는 화려하게 등장합니다. 바람을 몰고 등장해요. 그런데 어느 날 보면 없어 졌어요. 바람과 함께 나타나서 바람과 함께 사라집니다. 이게 돌밭과 같은 교인들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 그런데 돌밭과 같은 심령을 사람들은 본문 17절의 말씀처럼 말씀에 대한 뿌리가 없기 때문에 잠깐 믿다고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면 곧 넘어집니다.(마 13:21), 시험을 받을 때에 주님을 배반합니다.(눅 8:13)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교회에서 볼 수 없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녔지만 이상하다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왜 사라졌느냐? 나중에 알고 보면 아주 치사하고 사소한 이유 때문에 그래요. 교회 와서 누구 하고 싸웠다. “나 그 인간 보기 싫어 안 믿어.”사람이 싫어서 교회에 나오지 않고 사람이 싫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 때문에 신앙을 그만둘 필요까지는 없잖아요. 그런데 아예 신앙을 저 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옳은 길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편한 길이냐 아니냐에 따라 살고자 합니다. 예수 편하게 믿자는 자아라는 돌덩이에 넘어집니다. 이럴 때 고난이 옵니다.  

우리 옛날 선배들은 어떻게 믿었습니까요? 옛날 선배들은 핍박과 환란 속에서도 그 신앙을 견디고 그 신앙을 지켰습니다. 역경이나 환란(患亂)이라는 것은 그 신앙이 진짜냐 가짜냐를 테스트할 수 있는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환난과 역경은 우리의 신앙을 측정하는 바로 미터입니다. 

만약 온전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역경과 환난을 견딥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역경 속에서 빛을 발할 수가 있습니다. 가짜는 역경이 오면 떠나갑니다. “이것이 더 이상 나에게 유익하지 못하다. 편리하지 못하다.”라는 이기심(利己心) 때문에 신앙을 포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돌밭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예화) 중국에 모택동을 통한 문화혁명 이 시작될 때 선교사들이 추방 명령을 받습니다. 다 떠나갑니다. 마지막으로 떠나가던 선교사 한 분이 자기가 전도했던 사람. 자기가 제자 훈련을 시켰던 사람. 이제는 중국 교회의 훌륭한 지도자가 되었어요. 그 목사님을 앞에 앉혀놓고 차를 나누면서 이런 질문을 했대요. 이 선교사님이 걱정이 되가지고. "당신 견딜 수 있겠소? 환란의 비바람이 많은 핍박이 올 텐데 견딜 수 있겠소? 신앙 지키겠소?"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이 중국 목사님이 가만히 있더니 "선교사님.. 차가 뜨겁죠?”“ 그러더니 티백을 빼더니 "이 티백이 이 물이 뜨겁다고 해서 들어갔을 때 차가 맛을 잃어버리나요? 아마 이 뜨거운 물에서 차는 진짜 맛을 낼 겁니다. 저는 이 신 앙이 진실이라는 것을 이 환란 속에서 주님 앞에 입증해 보이겠습니다.”라고 말하더랍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신앙은 역경을 이깁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사실을 믿으십니까? 진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역경을 견딜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돌밭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견디어 내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혹시 내 신앙생활의 행태가 바로 이 피상적 기독교인 돌밭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는지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환난과 핍박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에 가졌던 감격과 기쁨이 다시금 일어나도록 돌밭과 자아를 깨뜨려야 합니다. 돌밭과 같은 장애를 극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아가 깨어져야 깊이 뿌리를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더 성장케 하기 위해 돌덩이를 을 깨뜨리시기를 원하십니다. 깊이 뿌리 내리지 못하는 우리의 믿음을 뿌리 내리게 하기 위해 망치로 우리의 돌을 산산히 깨부수시기를 원합니다. 십니다. 그럴 때만이 진정으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셋째로 가시떨기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7절) 
본문 7절에서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치 못하였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가시떨기와 같은 사람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 밭은 사람은 맹목상의 기독교인을 대표하고, 돌밭과 같은 마음 밭은 피상적인 기독교인을 말한다면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 밭은 세속적 기독교인을 대표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 밭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유혹(誘惑)입니다.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 밭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의 유혹을 결국 이기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무엇이 열매를 맺지 못하게 만듭니까? 가시기운입니다. 가시기운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본문 18-19절에서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리우는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말씀을 막아서 결실치 못했다.”라는 말씀입니다. 눅 8:14 하반 절을 보면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혔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어떤 것이 말씀을 막습니까? 가시기운입니다. 그렇다면 그 가시기운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상의 염려(艶麗), 재리(財利)의 유혹, 기타 욕심. 세상의 가치 체계, 일락(쾌락)이 그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욕망이 하나님의 말씀을 막아 버렸습니다. 욕망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보다 더 큽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데 있어서 가장 큰 방해가 되는 것은 환난이나 핍박만은 아닙니다.  또 다른 종류의 방해물이 등장하는데 바로 재물(財物)의 유혹과 세상의 염려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첫 번째, 두 번째의 전 과정을 무사히 통과했으면서도 결국 주저앉게 됩니다. 기쁨으로 그 말씀을 받았고 환난과 핍박에도 흔들리지 않았지만 결국 이들은 세상 앞에서 굴복하고 맙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천국의 축복을 가져오는 큰 은혜임을 알면서도 이 세상의 유혹에 굴복해 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물질의 유혹이 너무 커서 끝까지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천국의 말씀이 아니라 물질과 이 세상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세상적인 방법과 세상에서의 출세와 명예 때문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진정한 가치를 끝내 찾지 못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사람이 말씀에 대한 열정 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관심도 있습니다. 말씀에 대한 사모함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재물에 대한 욕심, 세상에 대한 욕심이 더 큽니다. 그러기에 결국 말씀에 대한 그의 사모함이 그 열매를 맺지 못한 상태 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하여도 세상적인 염려와 세상적인 돈의 욕심으로 그만 믿음의 생활에서 타락하는 기독교인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예수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까지도 돈의 욕심에 이끌리어 악한 자들로부터 은 30량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악한 자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이로써 돈의 욕심은 하나님의 자녀로 마귀의 종이 되게 합니다.   물질을 얻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고 다른 사람을 속이고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그 외에 온갖 유혹에 시달리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딤전 6:10에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돈의 욕심을 품으려는 유혹과 세상적인 염려를 품고 살던 사람들의 말로가 얼마나 비참합니다.   

어떤 부자 청년 관원이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는 부자였습니다. 청년이었습니다. 관원이었습니다.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진지한 구도자(求道者)의 질문을 갖고 있었어요. "선생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참으로 좋은 질문입니다. 이 청년의 질문 속에는 구도자의 목마름이 스며 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구도자의 목마름을 가지고 주님께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결국 좋은 결실을 얻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어떻게 말씀했어요? 예수님이 사람 만날 때마다 전도하는 방법이 다 달라요. 이 사람이 만약 재물을 잘 관리할 수 있는 사람. 재물이 주인이 아니고 재물을 종으로 삼는 사람. 이런 사람이라면 재물 얘기 꺼낼 필요도 없어요. 그러나 이 사람은 재물의 욕망을 헤어 나올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에 대 한 관심보다 훨씬 커다란 관심이었어요. 이것이 신앙의 길을 가로막 을 것이라는 것을 주님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도전하십니다. "네 재물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 그리고 나를 쫓을 수가 있겠 느냐?"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이 재물이 많은 고로 심히 근심하며 떠나갔다.”(막 10:22) 결국 재물에 대한 욕심을 그 사람은 이길 수가 없었어요. 재물이 그의 신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재물을 가지는 것이 잘못이 아닙니다. 재물을 잘 다스릴 줄 알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재물이 자기의 주인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씀을 하십니까?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눅 1613) 그래서 재물을 “만몬”이라고도 말합니다. “매모니즘”이라고 말합니다. 본래 “만몬”이라는 단어는 "나는 믿는다" 라는 단어에서 나왔어요. "I believe" “나는 믿는다.” 재물을 소유 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지만 재물을 믿기 시작하면 이것은 잘못입니다. 재물이 신앙입니다. 재물이 나의 안정을 보장하고 재물이 나의 구원을 보장 하고 재물이 내 일생의 모든 것인 것처럼 착각하기 시작합니다. 어느 새 재물은 그 사람의 신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두 신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선택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일 2:15에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이 가시 떨기 밭은 없을까요? 

마지막으로 좋은 땅과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8절)
본문 8절에서“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은 마지막으로 좋은 땅과 같은 사람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좋은 땅은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좋은 땅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본문 20절에서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마 13:23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또한 눅 8:15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 좋은 땅을 가진 사람이란 마가의 관점에서 보면 “말씀을 잘 들어서 30배, 60배, 100배로 결실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마태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깨달아 30배, 60배, 100배로 결실하는 사람 ”을 말합니다. 그리고 누가의 관점에서 보면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것을 정리하자면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말씀을 잘 듣는 사람이요, 말씀을 깨닫는 사람이요,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고 인내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좋은 땅과 같은 마음 밭은 사람이 되려면 말씀을 듣는 것으로 끝나지 말아야 합니다. 깨달아야 합니다.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인내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 밭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좋은 땅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 살았던 사람들은 약 50,000(오만) 명 정도였습니다. 팔레스틴 전 지역에는 약 칠십만 명에서 팔십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였었다고 합니다. 율법에 따라 예루살렘 성전을 정기적으로 방문했던 순례객을 합치면 이 숫자는 더 불어나고 따라서 예수님을 만났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의 숫자도 크게 늘어납니다. 어떤 유대 문서에 의하면 유월절에만 약 이백 만 명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찾았다는 과장된 기록이 있습니다.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났고, 주님의 육성으로 하시는 설교를 직접 들었고, 주님의 움직임과 그로 인해 움직이는 이적들을 직접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하는 대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다는 500명의 '형제'들을 모두예수님의 제자로 인정한다고 해도 전체와 비교할 때 이것은 아주 미미한 수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 가운데 극소수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였습니다. '적은 무리'만이 예수님의 입을 통해 나오는 달콤한 하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반면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장 역사적인 순간에 주님을 떠났습니다. 주님을 배신했습니다.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 때문에 예수님에게 접근해 왔으나 이내 실망하고 먼지를 툭툭 털며 떠나가 버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씨앗을 받았지만 이내 열매를 맺지 못하고 말라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아픔은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껍데기만 요란하고 냄새만 피우다가 열매 없이 씻겨 내려가는 사람들이 오늘날도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때와 비교하여 오늘은 더 나은 상황입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조금은 부드러워졌습니까? 모두가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다가와 무릎을 꿇고 그의 발에 입 맞추고 돌아갔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좀 낫다고 할 수 있습니까? 이런 물음에 대하여 솔직하게 대답은 이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왔다가 껍데기만 보고 멀어져 갑니다. 전도자들이 외쳐도 귀담아 듣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목회자나 전도자를 통하여 그리고 직접 성경을 보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는 늘 예수님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울타리 안에 있는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듣고 만지면서도 열매 없는 사람으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며 온갖 집회에 참석하여 천국의 말씀을 늘 듣지만 그것이 자동적으로 발아하여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앗처럼, 우리에게 심겨져야 할 천국의 말씀을 빼앗아 자가 있습니다. 자갈밭이나 가시밭에 떨어진 씨앗처럼 천국의 비밀을 끝내 깨닫지 못하고 결별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이 비유를 선포하신다면 아나 그 때나 다름없는 비애에 젖어 그를 스치고 지나가는 수만 수억의 군중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 결실하는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성실한 마음과 열린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8장 15절에서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 하는 자니라"고 말씀처럼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여기의 착하고 좋은 마음이란 성실하고 선량한 마음을 말합니다. 또한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는다.”라는 말씀이 영어 성경에는 “넓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는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착하고 좋은 마음이란 넓은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것으로 끝나지 말고 순종해야 합니다.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키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왜 말씀을 듣습니까? 지키기 위해서 듣는 것입니다. 왜 설교를 듣습니까? 그냥 듣기 위해서 듣습니까? 지키기 위해서 듣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는 들어야 합니다. 듣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지켜야 합니다. 그러기에 말씀을 내 생활에 옮겨야 합니다. 내가 들은 바 이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지키고 살아야 합니다. 순종해야 합니다.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면 열매는 없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물론 예배를 드리지 않는 사람보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예배를 드리는 만큼 지키는 것도 중요합니다. 성경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물론 성경을 한 장도 읽지 않는 사람보다 읽는 사람이 훨씬 낫습니다. 말씀에 대한 목마름이 없으면 어떻게 읽겠습니까? 그러나 지키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기도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기도한 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물론 기도하지 않는 사람보다 기도하는 훨씬 더 낫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한 만큼 지켜야 합니다.

여러분은 왜 식사를 합니까? 먹기 위해서 식사를 합니까? 아니면 얻어진 에너지 가지고 살기 위해서 먹습니까? 우리가 살기 위해서 먹는 것입니다. 먹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제대로 살 자고, 삶을 살자고 먹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 들으세요? 듣기 위해서 듣습니까? 아닙니다. 이 말씀 붙들고 살려고, 어디에서 삽니까?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업의 장에서 이 말씀 붙들고 제대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자고 말씀을 받는 것입니다. 듣기 위해서 듣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고 삶의 터전으로 나가야 합니다. 삶을 사는 장소인 가정에 들은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고통이 있어도 그 가정의 한 복판에 서셔야 합니다. 직장으로 가야 합니다. 흔들리고 있는 직장에 서야 합니다. 사업장으로 가야 합니다. 흔들리고 있는 사업의 장에 서야 합니다. 다시 일으켜 세우셔야 합니다. 넘어졌을지라도 다시 말씀 붙들고 일어서셔야 합니다. 재기하셔야 합니다. 그곳으로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를 보내시는 삶의 장 한 복판에서 말씀을 붙들고 살 기위하여 이 말씀을 듣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땅과 같은 마음 밭을 가진 사람은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을 붙들고 내 삶의 장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 그 삶의 장의 한복판에서 주께 영광을 돌리는 것, 주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필요로 하십니다. 우리는 좋은 땅과 같은 마음 밭처럼 반응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나의 삶의 영역 속에서 주님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좋은 땅과 같은 마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신학자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구약 성경이며 예수 그리스도시며 강단에서 목사님께서 전하는 설교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큰 의무를 감당하기 위하여서는 기도를 많이 할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해서 교회에 나와서 은혜 받고자 하는 성도들에게 은혜가 되도록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는 여러분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학자 요한 칼빈은 “성경을 읽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마음을 갖고서 읽어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나 들을 때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분명히 알았습니다. 우리는 길가, 돌밭, 가시떨기와 같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좋은 땅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은혜 받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과 성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되 그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자가 될 때에 비로소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 세상은 무척이나 힘듭니다.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환난, 핍박, 유혹, 근심을 단호하게 극복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겠노라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주 앞에 나와 예배드리고 말씀 듣는 일은 즐거운 일입니다. 이제 들으셨다면 이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가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어려워도 우리는 삶의 한 복판에 서서 다시 우리의 사업을 일으키고, 다시 우리의 직장을 재건하고, 다시 우리의 가정을 세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거룩의 말씀, 진리의 말씀, 능력의 말씀, 구원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말씀을 듣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함으로 좋은 땅과 마음 밭이 되어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거두어 주님께 칭찬받는 복된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