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 있어 기도하라”(마 26:36 ~ 46)

지금 우리는 사순절 기간을 보내고 있고, 다음 주일부터 고난(苦難)주간이 시작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고난주간을 “위대한 주간”이라고 칭할 정도로 교회의 큰 명절로 삼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주간을 이렇게 중요한 날로 지켰습니까? 그것은 이 주간동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많은 것들이 우리를 위해 성취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주간동안 옛 악마의 통치가 해체되고 죽음이 정복되었고 속죄(贖罪)가 이루어졌고 저주의 닫히고 낙원이 문이 열렸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장벽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평화가 하늘과 땅에 가득 차게 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러한 구원의 축복을 더욱 실감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함께 느끼기 위해 여러 가지 형태로 고난절 행사를 했습니다. 
대표적인 행사는 교인들의 [금식(禁食)]이었습니다. 성경학자 [에피파네스]는  "당시의 사람들이 한 주간 금식했으며 특히 마른 고기나 빵 소금 물 등만을 먹을 수 있게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한 주간 내내 식음(食飮)을 전폐하고 금식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2일정도 굶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이 주간동안 가난한 자들에게 자선을 베풀곤 하였으며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도와주는 관습이 있었다" 라고 했습니다. 

또 이 기간 동안에는 종들에게 휴식과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이때에 황제는 죄수들을 석방하는 특혜의 조치도 내렸고 모든 소송과 법정의 재판을 중단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고난주간 목요일은 예수님께서 배반당한 날이기 때문에 특별한 행사를 했습니다. 
서양(西洋)교회에서는 이날 저녁에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기 위해 [성만찬]을 시행(試行)했습니다. 이날에 새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금요일은 [좋은 금요일](Good Friday)이라고 해서 이 날에 기도하고 금식하고 회개하는 자에게는 죄 사함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부활주일 날에도 여러 가지 종교행사를 거행했습니다. 
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콘스탄틴왕 시대에는 이러한 철야행사는 거대한 등불행사를 동반하였다"고 말합니다. 콘스탄틴노플 전역에 횃불이 세워지고 등불이 켜 졌으며 그래서 온통 도시에 정오의 태양을 보듯이 밝았다고 합니다. 교회 내에 횃불이나 등불을 달았습니다. 이렇게 불을 밝히는 것은 부활절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인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령하는 행위로 상징하였습니다. 

▶ 여기에서 우리는 이러한 행사들의 특징과 교훈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예수님의 육체의 고난에 실제로 동참하려고 몸부림쳤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고난을 하찮고 값싼 것으로 전락시키지 아니하면서도 정신적인 고통을 육체적인 고난으로 몸소 체험하고 실감하려고 몸부림쳤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의 고난이 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식하고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더욱 깊이 받기 원하여 몸부림쳤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고난주간에 아무런 의미 없이 바쁘게 지내버리는 현대교회의 교인들은 이런 행위들을 부끄럽게 합니다.  

둘째, 초대교회 성도들은 고난주간에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뿐 아니라 형제의 고난에도 동참하는 아름다운 신앙의 전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고난주간을 가난한 자들과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돌봐주고 노예와 종들을 쉬게 하는 등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와 기쁨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주간으로 삼았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곧 이러한 사람들을 위한 고난이라는 그들의 신앙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셋째, 초대교회 성도들은 고난주간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을 생각하며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종말론적인 영광과 기쁨의 신앙으로 보냈습니다. 이 도시에 횃불을 밝혀 놓고 교회마다 집집마다 등불을 켜 놓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바라보면서 찬양하면서 한 주간을 보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회개하는 새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성만찬을 행하면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함께 참여하는 절기로 삼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주간은 기독교인들에게 큰 절기입니다. 고난 없이 영광도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통이 없었다면 부활의 영광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고난을 멀리하고 영광만 차지하려고 불신앙의 늪에 빠져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부활의 아침이 이 땅에 다시 임하도록 우리 모두 기도할 때입니다.  

정말 고난주간은 우리성도들이 모든 일에 조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준비해야 합니다. 말이나 행실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지 않도록 주의함으로 보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국가에서는 금요일부터 다 부활절까지 다 공휴일입니다. 국가적으로 3일간을 부활절 휴가로 보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주간을 겸손한 마음과 영혼을 여밀고 경건하게 지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부활의 승리를 위한 기도를 드렸던 것처럼 우리도 고난주간동안 특별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금식하는 것도 중요하고, 여러 가지 행사를 갖는 것도 중요할지라도 기도하지 않고서는 결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의 두 가지 핵심 요소는 말씀과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쉬지 않으시고 줄기차게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며 제자양성에 주력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능력 있게 사명을 감당하실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새벽 미명에 일찍 일어 나셔서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또 틈만 나시면 산에 올라가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고통스러운 상태에서도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의 쓴잔을 앞두시고 외롭고 고통스러우나 겟세마네 동산에 나아가 기도의 싸움을 싸우셨습니다. 이 기도의 싸움은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자기와의 투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겟세마네 기도를 통해서 고난의 십자가를 질 영력을 덧입으시고 인류 구속역사를 능히 섬기실 수 있었습니다. 

▶ 그런데 이때에 제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눅 22:44에서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실 때에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올라 갔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 본문 40절을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그렇습니다. 제자들은 다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가슴 아픈 말씀입니까? 이 얼마나 안타까운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왜 제자들이 잠을 잤을까요? 그것은 유월절 만찬 때 양고기를 많이 먹고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셨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마음이 슬프고 피곤했기 때문이었을까요? 대개 마음이 슬프고 피곤하면 잠을 많이 자게 됩니다. 물론 피곤하면 잠을 자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안타까운 말씀을 들으셔야 합니다. 41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이 말씀은 우리가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죄는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이처럼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새워 기도하셨는데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셨던 주님께서 기도하셨는데, 우리가 기도하지 아니하면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기도 없이는 제대로 사랑할 수 없고, 기도 없이는 참된 봉사를 할 수 없고, 기도 없이는 교회학교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칠 수 없고, 기도 없이는 남편을, 아내를 참으로 사랑할 수 없고, 기도 없이는 우리의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울 수 없고, 기도 없이는 하나님의 교회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섬길 수 없고, 기도 없이는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갈 수 없고, 기도 없이는 복음을 전할 용기도 나지 않고, 기도 없이는 이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켜갈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기도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교훈을 함께 생각하면서 다시금 우리들의 마음과 영혼을 여밀기를 원합니다. 

1.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39절)
본문 39절에서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땅에 엎드렸다 ”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세와 복종하는 마음 ”을 보여 줍니다. 또한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는 자세 ”를 보여줍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복종하는 마음으로 땅에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수님은 “내 아버지여!!”라는 말로 기도를 시작하셨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깊은 사랑과 신뢰심을 가지고 계심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힘들고 답답하고 괴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면 기도는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쉽습니다.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왜 나를 이렇게 괴롭게 하십니까?" 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도 의심치 아니하시고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셨습니다. 

물론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실 정도로 예수님께서 받아야 할 잔 곧 십자가의 죽음은 참으로 고통스런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인성을 갖고 계신 분이셨기에 "만일 할 만하시거든" 라는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십자가 고난의 잔을 마시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구원의 역사를 이룰 수 있으면 그렇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연약한 인간의 몸을 입고 계셨기 때문에 할 수만 있으면 고통과 수치의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심한 정신적 고통 가운데서 처절하게 번민하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 그러나 예수님은 이에 머물지 아니하시고 한 걸음 더 나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여기의  '그러나'는 매우 중요한 기도입니다. 이는 자기중심에서 하나님중심으로의 전환이요, 육에서 영으로의 전환입니다. 예수님은 심한 정신적 고통 가운데서도 자신을 기쁘시게 하기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십자가를 회피하고자 한 기도가 아니라 오히려 이를 적극적으로 감당하기 위해 드리는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쳐 복종시킴으로써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자 하는 영적 투쟁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란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렇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보다도 자기의 뜻을 앞세우고 자기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여 "아버지의 원대로 마옵시고 내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가를 찾고 순종하기보다, 내가 원하는 것만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간구합니다. 그리고 그 간구한 것에 대한 응답이 빨리 나오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원망합니다. 나의 소원은 좁고 편협하고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크고 원대하고 완전합니다. 사람이 자기의 뜻을 부인하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쓰실 만한 영적인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깨어서 기도하되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사순절 기간 동안 특히 고난주간에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나의 가정에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시는지, 나의 사업장과 나의 인생에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시는지 알려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내가 아는 것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내가 가진 것도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뜻대로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른 기도는 그 결정에 대해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 혹은 원하는 바를 자신이 뜻이 아닌 주님의 뜻대로 해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나의 모든 것들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 12:2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깨어 있어 기도하되,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조금 후에 벌어질 일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통계나 경험(經驗) 혹은 나타나는 현상만 가지고 될 것이고 생각하고, 사업에 투자하고 모든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의 사업은 이렇게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은 모든 일들을 이렇게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사업이 내 쪽에서 보면 모두 잘될 것 같은데, 하나님 편에서 보면 아닐지도 모릅니다. "주님 이것을 해야 합니까? 하지 말아야 합니까?"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볼 때도 그 사람의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겉보기에는 착하고 좋은 사람처럼 보여도 그 중심은 하나님만 아십니다. 우리는 우리 생명의 내일을 알지 모릅니다. 내 직장의 내일도 모릅니다. 내 삶과 물질이 어떻게 될 것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환경이 내일 어떻게 변할지 알 길이 없습니다. 내일 일을 아는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가진 것으로는 부족하고 내 힘과 능력으로는 모자람이 많습니다. 어떤 측면으로도 알 길이 없으며 그것은 아는 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초월하여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주여 지금 내가 가는 길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이렇게 묻고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분의 지시를 받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우리의 모든 형편과 사정을 아시는 주님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2.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40-41절)
본문 40-41절에서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깨어서 기도해야 할 이유는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위해 기도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오셨는데, 제자들이 깊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이에 베드로를 향하여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시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라고 말씀하신 후에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땅히 기도해야 할 베드로가 기도하지 않고 잠만 자는 것을 보시고 “한시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책망을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책망하심은 베드로를 미워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베드로를 위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 그런데 주목할 것은 베드로의 이런 말씀은 바로 나에게 하시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깨어 있어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에 들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때가 악한 시대입니다. 우리자 자다가 깰 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 13:11에서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깨어서 기도하지 못하고 깊은 잠을 잘 때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 41절의 말씀을 통하여 베드로에게 주시는 음성을 통하여 성령님께서 지금 나에게 주시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시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우리는 깨어서 기도하지 아니하면 사단의 시험을 받습니다. 사단은 강하고 또 간교합니다. 사단의 시험은 유혹입니다. 이 유혹은 달콤하고 힘이 있어 우리의 힘과 지혜로 이길 수 없습니다. 사단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습니다(벧전5:8). 우리가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사단의 시험에 들어 영적 분별력과 영적 힘을 상실하여 사단의 밥이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신은 약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은 약하도다."라는 이 말씀은 육신이 약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육신이 약하기 때문에 더욱 깨어 기도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강하면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약하기 때문에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깨어 기도하게 되면 연약한 육신도 이길 수 있지만, 기도하지 않으면 건강한 육신을 가진 자도 자기 자신 하나를 감당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들은 육신적으로 약한 본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깨어서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에 들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기도하는 사람도 시험을 받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시험을 받더라도 그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깨어 기도하셨기 때문에 마귀의 간교한 계략을 아시고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 큰 시험이 놓여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금 져야 하는가? 왜 지금 인가? 꼭 져야 하는가? 다른 길은 없을까?” 이 시험으로 예수님은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습니다.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통하여 이 모든 시험을 다 이기시고 십자가의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험은 우리를 놀라게 하고 슬프게 하고, 마음에 심각한 고민을 안겨주어 초췌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 시험은 누구에게나 다 온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에게만 시험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에게도 옵니다. 예수님에게도 시험이 있었습니다. 사십일 금식기도하고 난후, 믿음이 좋을 때 시험이 오지 않았습니까? 십자가를 앞에 두고 시험이 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누가 시험을 당하거든, "집사님이 믿음이 약해지셔서 시험이 오는구나."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건강한 사람에게도 오고, 병든 사람에게도 옵니다. 부자에게도 오고, 가난한 사람에게도 옵니다. 건강하고 모든 일이 잘 되어 가면, 믿음생활이 나태해지기 쉽습니다. 바로 그때에 믿음의 시련이 닥칩니다. 가난하면 돈 버는 일 때문에 믿음생활에 힘들어 합니다. 사업이 너무 잘되어도 시험이 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하여튼 누구에게나 어떤 상황에서나 시험은 옵니다. 

그런데, 시험에 들면 안 됩니다. 시험에 든다는 것을 “시험에 빠진다, 시험이 떨어진다, 유혹의 덫에 걸려든다.”는 것입니다. 시험이 와도 시험에 들면 안 됩니다. 넘어지면 안 됩니다. 그런데 만약 깨어서기도하지 못하면 베드로처럼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결국 주님을 버리고 도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깨어서 기도할 때에 시험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시험을 찬바람에 비유합니다. 찬바람이 불면, 어떤 사람들은 "아이 추워."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아! 시원하다"합니다. 찬바람이 분다고 다 감기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몸이 약한 사람이 감기 걸립니다. 강한 사람은 절대로 감기에 걸리지 않습니다. 시험이 오더라도 믿음이 강한 사람은 절대로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넘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믿음이 강한 사람입니까?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늘 기도하는 사람은 시험이 와도 걸려 넘어지지 않습니다. 승리합니다. 아무리 큰 시험이 있을지라도 기도하면 이겨낼 수 있습니다. 승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겟세마네동산의 기도를 통해서 시험을 이겨내신 것처럼 우리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성도는 건강한 성도입니다. 기도하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입니다. 매일 새벽마다 기도하는 교회는 어떤 시험이 와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왜 우리 집안에만 늘 이런 어려움이 닥치나? 왜 나만 이렇게 고생하나? 왜 우리 교회에만 이런 일이 생기나? 아닙니다. 다른 집안에도 여러분이 모르는 어려운 일이 닥칩니다. 다른 사람들도 여러분이 모르는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교회들도 우리가 모르는 시련이 닥칩니다. 나만, 나만, 이런 생각은 버리세요. 그렇게 생각하면 시험에 듭니다. 낙심합니다. 

시험을 당하기 전에도 기도해야 합니다. 시험을 당한 후에도 기도해야 합니다. 시험은 항상 언제든지 우리들에게 옵니다. 그러므로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규칙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매일 새벽에, 매일 저녁 잠들기 전에, 매일 낮에 등 시간을 정해놓고 규칙적으로 기도하십시오. 기도의 습관을 들이십시오. 기도의 습관이 되어 있는 분들은 무슨 시험을 갑자기 만나면, '그래, 이것도 기도하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시험이구나.' 라고 생각하고 깨어서 기도하면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험을 통하여 더 성숙해 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약 1:2-4에서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하면서 시험을 이겨내면 우리의 인격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됩니다. 계속 시험을 이겨냄으로 우리는 점점 성숙한 인격체로 성장하게 됩니다. 주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시험을 이기는 기도입니다. 시험을 이기는 길은 기도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기도함으로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담대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46절)
본문 46절에서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후에 담대해지셨습니다. 하나님께 응답을 받고 나면 담대해집니다. 마음의 평안이 찾아오고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그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이 있었기에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으면 약해집니다. 시험에 듭니다. 본문 69절 이후에 보면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사건이 나오는데, 베드로가 왜 이처럼 약해졌습니까? 그것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라고 말씀하시면서 기도할 것을 거듭하여 당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이러한 주님의 당부를 깨닫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것을 소홀히 했습니다. 기도를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야고보와 요한은 한시 동안도 깨어 있을 없었습니다. 결국 이로 인해서 결국 이들은 시험에 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도할 시간에 기도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잡혀 갈 때에 제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해 버립니다. 

그렇다면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33절)라고 호언장담하며 큰 소리를 쳤던 베드로는 어떠했습니까? 본문 58절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베드로는 주님을 따라가되 “멀찍이”따라갔습니다. 혹시라도 예수님처럼 자기도 잡힐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대제사장 가야바의 바깥뜰에서 하속들과 함께 앉아서 상황을 지켜보던 베드로에게 한 비자가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69절)라고 말할 때에 두려운 나머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하면서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70절)라고 말하면서 앞문까지 나갔습니다. 이때 다른 비자가 베드로를 보고 “이 사람도 나사렛 예수와 함게 있었도다.”(71절)라고 말할 때더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을 모른다 ”고 맹세하면서 부인했습니다.(72절) 그리고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 소리가 너를 표명한다.”(73절)라고 말하니 더욱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저주를 하며 맹세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바로 그때에 닭이 울었습니다.(74절) 이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리라는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습니다.(75절)

그렇습니다. 깨어서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을 받을 때에 두려움에 빠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라는 말을 하면서 기도생활에 힘쓰지 못하는 것을 합리화(合理化)시키고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육신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더욱 더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아니하면 베드로처럼 영적 전쟁에서 두려워할 수 밖에 없고,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깨어서 기도하지 아니하면 영적으로 나약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깨어서 기도하지 아니하면 무능력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깨어서 기도할지라도 엘리야 선지자가 로뎀 나무 아래서 죽기를 작정하는 영적 릴레마에 빠진 것처럼 우리들도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영적인 위기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깨어서 기도하지 않는다면 더더욱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깨어서 기도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가 삼상 12:23에서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않겠노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깨어서 기도하지 않고 쉬는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깨어서 기도하는 사람은 무슨 일이 와도 근심, 걱정이 없습니다. 기도로 준비한 무슨 일이 닥쳐와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기도로 준비한 성도는 모든 준비를 다 갖춘 성도입니다. 하지만 기도하지 않는 성도는 모든 것을 다 갖추었다 해도 그의 준비는 조금 부족한 것입니다. 

중한 병이 걸려도 살 수 있고 아무 것도 아닌 병으로도 죽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내일 일은 일단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다고 해도 그것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완전한 것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늘 속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성도는 여기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기도로 이겨냅니다. 

링컨도 늘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나는 몇 번이고 무릎 꿇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 외에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의 지혜 아니면 모든 사람의 지혜로도 어떤 일에 대하여 대처하는 능력이 불충분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라고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많은 참모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정해도 부족하고 어떤 것을 준비해도 마찬가지로 완전하지 못하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하면 내 부족한 그릇에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시고 구하지 않는 것도 주십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 앞에 기도하는 성도가 승리합니다. 사업의 앞날을 하나님께 여쭤보고 해야 합니다. 정치적인 앞날도 하나님께 여쭤보고 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하나님은 도와주시고 버리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승리자가 되게 하시고 결단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영의 세계는 보이지 않습니다. 사망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지혜로운 성도는 기도합니다. 끝까지 승리하고자 하는 성도는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일이 되고 안 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기도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길을 따라가면 두려움이 없고 염려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깨어서 기도하면 하나님은 그 길을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도록 인도해주십니다. 깨어서 기도하는 사람은 담대합니다.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 4:6-7에서“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에 많은 분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매우 피곤해 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으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바로 이때에 외롭고 괴롭고 답답할 때 우리 모두 예수님처럼 겟세마네 동산으로 나아가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깨어있어 기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영생수의 근원되신 예수님으로부터 영생수를 받을 수 없습니다. 심령이 메마르고 딱딱해 져서 아무런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세상을 이길 힘이 없고 사단의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매일 도전해 오는 마귀와 싸워 이길 수 없고 적당히 타협해 버립니다. 사명의 십자가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깨어서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뜻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불신자들과 똑같이 살아가게 됩니다. 사명을 부담스럽게, 귀찮게 느끼게 됩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짜증을 내고 불평하며 심령과 얼굴은 어두워집니다. 사단은 십자가 지지 않고 사는 것이 현명한 길이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비록 몸이 피곤하고 마음이 힘들지라도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나아가 엎드려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나의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어떠한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지, 진정 나의 인생에서 추구해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깨어 기도하면 나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죄인인가 깨닫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겸손히 하나님께 의지할 때 역사를 능력 있게 감당할 수 있는 힘과 스피릿을 주시고 영적 싸움에서 큰 승리를 주십니다. 또 우리가 줄기차게 중보기도하면 우리교회와 가족, 특히 자녀들이 놀라운 축복을 받습니다. 우리가 깨어 기도하면 내가 바라는 개인적인 꿈과 소원이 얼마나 유치하고 근시안적인가, 이 세상의 영광과 권력이 얼마나 하잘 것 없고 덧없는 것인가 깨닫게 해주시고, 반면에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보여 주십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해 기도드리며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크고도 비밀한 일들을 보여주십니다.(렘 33:3) 우리가 깨어서 기도할 때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가장 먼저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 나라임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기도는 힘든 영적 투쟁입니다. 그러나 영적 투쟁 없이는 영적으로 승리할 수 없습니다. 깨어 기도할 때 영적 분별력이 생기고 또 악의 세력과 싸울 수 있는 영적 힘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무거운 십자가도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동역이 중요합니다. 서로 끌어주고 밀어 주어서 기도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야 합니다. 우리 모두 자기 자신의 뜻을 쳐 복종시키고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겟세마네 기도의 용사가 됩시다!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인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것처럼 우리가 깨어서 기도하되,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십자가를 질 때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친히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피땀 흘리는 겟세마네의 기도를 통해 사단의 궤계를 파하시고 승리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비결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후에 “깨어 있어 기도하라!”는 말씀을 붙잡고 회개하고 깨어 기도함으로써 연약함을 이기고 많은 십자가를 감당하는 능력 있는 하나님의 종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가 깨어서 기도하기만 우리들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일을 넉넉하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벧전 4:7에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며 기도하라."고 권면하시고 있는 지금은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할 때입니다. 고난주간을 즈음하여 우리도 예수님처럼 승리를 위한 겟세마네의 기도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정말 경건하고 거룩한 마음으로 사순절을 기간을 보내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함으로 금번의 고난주간은 정말 새롭게 거듭나고 승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귀하게 쓰임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