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참된 삶”(눅 9:23)

오늘 새벽에는 주님의 십자가를 사랑하는 자들이 따라야 할 삶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금번의 특별새벽기도회를 연례 중에 한번 갖는 행사의 의미로서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내가 왜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하는지? 우리의 사명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순절을 맞이한 지금 많은 교회들이 사순절 특별새벽기도회를 하고 있고, 한국교회가 연합으로 회개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올해에도 “십자가 대행진”을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자는 의미에서 금식운동, 헌혈 운동, 장기기증 운동 등 많은 행사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주님을 따르려는 경건한 몸부림으로서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이러한 행사 계획들도 중요하지만 무엇 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에 대한 우리들의 마음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순절을 맞이하여 우리는 보다 경건된 모습으로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전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이전보다 더 진실해야 합니다. 이전보다도 더 주님께 가까이 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로 다시금 거듭나야 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문의 말씀을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받으실 십자가의 고난을 예고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주님을 따르는 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가장 가치 있는 삶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을 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23절 상)
본문 23절 상반 절에서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이는 자기 자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존재하는 자기가 없다고 부인해야 합니까? 
우리 안에 두 주인을 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6:24). 우리는 자신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던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살던 지를 결정(決定)해야 합니다. 내가 없어지지 않으면 주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으로 온전히 드러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예수님를 따르려면 이 매듭을 분명하게 지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고자 하는 자는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외면해야 합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신을 살아있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갈라디아서2:20). 

죄 가운데 태어난 우리 육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엄청난 일이 벌어집니다. 그러기에 자기 자신에 대한 철저한 부정과 포기만이 예수 안에서 존재할 따름입니다. 내 자신이 죽어 없어져야 예수 그리스도를 얻을 수 있습니다. 내가 죽어져야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온전히 주권을 행사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살아 있는 한 온전한 믿음도 온전한 순종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겠다는 헌신이 포함됩니다. 그러면 그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바로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부인하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볼 때 이루어집니다. 또한 '자기 부인'에는 자신의 욕망에 대한 철저한 거부 의사를 표시하는 모습 가운데 나타납니다. 

여기에서 '부인하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 아르뉴오마이‘라는 말인데, 이 말은 “'No'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 육체는 정욕을 좇게 되어 있습니다. 이기주의(利己主義)로 얼룩진 온갖 게걸스러운 탐욕으로 무장 된 우리의 육체입니다. 끊임없이 죄질 것을 요구합니다. 그럴 때마다 'No'라고 외치며 거부해야 합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 가운데 드러나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는 무조건 'Yes'지만 우리 자신의 요구에는 무조건 'No'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늘 자기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여전히 죄를 가까이 하고 여전히 죄를 즐기려고 드는 육체와의 전쟁입니다. 방심하여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가면 영적으로 손실을 입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대로 살 것을 명하는 데 우리 자신의 육체는 불순종을 꿈꿉니다. 그러기에 'No'라고 분명한 의사를 밝히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자는 자기 자신의 욕구를 다스릴 줄 압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부인하고 또한 자신 안에 감추어진 온갖 욕망을 철저하게 거부하는 모습이 예수 따르는 제자 가운데 나타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 길은 매우 힘듭니다. 자기 자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결단과 헌신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죄의 본성이 여전히 육체 가운데 머무르고 있는 한 육체의 정욕에 대하여 가볍게 무시하며 거부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 따르는 길에는 그 만한 희생과 헌신은 기본인 것을 깨닫게 되면 어찌하든 순종해야 합니다. 힘들게 자기를 부인하고 또한 자신의 욕망에 대하여 아니오 라고 외치는 삶에는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정욕을 극복하면서까지 예수를 좇으려고 하는 것은 바로 생명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얻고 예수 안에서 우리 자신이 발견되기 위함입니다(빌3:8-9). 

2.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23절 하)
십자가는 본래 수치와 고난과 죽음의 표지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십자가, 은총의 십자가, 승리의 십자가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십자가의 고통이 약화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희롱을 당하시고 살점을 떼어내는 날카로운 채찍을 맞으신 후에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시고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죽음의 장소 골고다까지 힘겹게 올라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대못에 박혀 십자가 위에서 사형을 당하셨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많은 고통과 멸시와 천대를 동반하는 참으로 무거운 것입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복음서를 기록한 저자들은 한결같이 이러한 십자가를 회피하지 말고 감당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답게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묵묵히 지시고 감당하신 것처럼 우리 자신의 각자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복음서 기자들이 이렇게 어렵고 힘든 일을 하라고 권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는 배교의 위협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는 박해로 인해서 몹시 위태로운 지경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실로 수치와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를 지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즉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예수를 섬길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그 자체가 많은 사람 앞에서 조롱거리가 되고, 날카로운 채찍과 몽둥이로 심한 매를 맞게 되고, 사나운 짐승의 사냥거리가 되기도 하고, 십자가에 처형되기도 하는 무서운 형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져버리게 되였습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교회들에게 "처음행위를 가지라"(2:5), "죽도록 충성하라"(2:10), "회개하라"(2:16)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배교행위에서 돌이키라는 뜻입니다. 
또 "굳게 잡으라"(2:25),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3:3), "네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3:11), "네가 열심을 내라"(3:19)는 말씀들로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십자가를 진 후에는 반드시 승리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다 당하신 후에 죽음에서 부활하셨고, 승천하셔서 모든 사람의 주로서 높임을 받으셨습니다. 그 분은 장차 만 왕의 왕으로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이며, 온 세상을 통치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서 8:17-18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 켠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롬 8:37에서 바울은,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배교의 위협이 있지만 십자가를 진 후에는 승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서 짊어져야 할 자기 십자가는 억지로라도 짊어져야 할 자기 십자가였습니다. 그래서 계 2:7에서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 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 2:11,17에서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주겠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벽별을 주리라"(2:28), "이기는 자는 . . .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 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3:5),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라"(3:12),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3:21)는 계시록의 말씀들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복음서 기자들이 이 '자기 십자가'를 강조하는 방법이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짊어지신 십자가에 "자기의 십자가"(19:17)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자기 십자가"(마 16:24 막 8:34 눅 9:23)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여기에 "날마다"라는 낱말을 덧붙여 쓰고 있고, 마가는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억지로 진 것을 언급하면서 "억지로" 라도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첫째로 신앙생활 자체가 감당하기 힘든 자기 십자가 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신앙의 자기 십자가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신앙을 저버릴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희망이요 소망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국 이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이 되어야 하며, 신앙의 십자가는 억지로라도 짊어져야 합니다.

둘째로, 사람에게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육적인 자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삶 자체가 십자가입니다. 생로병사가 고난의 십자가입니다. 부모가 없는 것, 가난한 것, 많이 배우지 못한 것, 인물이 잘나지 못한 것, 질병을 앓고 있는 것도 자기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자기 십자가 없는 부자가 없고, 자기 십자가 없는 학자가 없고, 자기 십자가 없는 미남 미녀가 없다는 점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키만 커다란 못생긴 사람이었고, 나폴레옹은 키가 작은 차돌맹이었고, 알렉산더 대왕, 한니발, 그리고 시져는 간질환자였습니다. 
결국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할 것 없이 열등감의 자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기 십자가는(콤플렉스) 장애물이긴 하지만, 더 많은 노력을 촉구하는 자극제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자기 십자가를 적극적으로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짊어지느냐 아니면 소극적으로 부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짊어지느냐 따라서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에 사도 바울은 신앙의 십자가와 자기 열등감의 십자가를 가장 잘 짊어진 사람입니다. 바울은 예수 신앙을 위해서 옥에도 많이 갇히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유대인들에게 39대의 곤장을 다섯 번 이상이나 맞았고, 태장을 세 번 이상 맞고, 세 번 이상 파선 당하여 물귀신이 될 뻔했고, 주리고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으며 살다가 결국에는 사형을 당하여 죽었습니다(고후 11:23-27). 그러나 그는 그의 생애를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 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킨"(딤후 4:7) 승리의 삶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사탄의 사자" 또는 "육체의 가시"라고 말한 결정적인 신체의 결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외모에도 볼품이 없었습니다. 작은 체구, 맞닿은 양미간, 매부리 코, 대머리에 휜 다리를 가진 사람 이였습니다. 바울은 말주변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모든 약점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자기 생애에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기독교를 바울의 종교라고 말할 정도로 로마제국의 온갖 박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그의 선교에 의해서 뿌리를 내렸고 열매를 맺었으며 종국에는 전 로마제국을 복음화하고 말았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눅 9:23)는 제자직에 관한 이 말씀을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예수의 수난예고 다음에 배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제대로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맺는 말 :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분명히 복되고 승리가 보장된 삶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려면 때때로 만나는 고난이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할 때도 있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 바울이 권면처럼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게 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롬 5:3-4). 그러므로 힘들어도 인내해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억지로라도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나가야 합니다. 믿음으로 자기 십자가를 감당하시고 승리하시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