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쁘다 구주 오셨네 

마가복음 10:35~45 


오늘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예수님 자신이 밝히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5절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렇게 세상에 오신 목적을 제자들에게 확실하게 밝혀 주시고 계십니다. 지금 온 세상은 “기쁘다 구주 오셨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디를 가나 크리스마스 불빛이 반짝이고 캐롤송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왜 그리스도의 탄생이 기쁜 일이 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목적에서 기쁨이 찾아지기를 바랍니다. 

먼저 오늘 말씀은 배경 설명이 필요합니다. 한 가정의 구성원들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세베대라고 하고, 그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나타나 있습니다. 어머니의 이름은 나타나지 않았는데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바로 살로메입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살로메가 앞장서서 이 일을 주선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마가복음에는 오히려 어머니를 감추고 아버지를 나타냈습니다. 이 가정은 종을 많이 두고 비교적 부유하게 사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주 직업으로 갈릴리 바다에서 어부 생활을 했는데 조상 적부터 그렇게 해 온 듯 합니다. 이 가정은 예수님과 특별 관계를 맺고 있는 집안입니다. 혈연적으로 가까운 친척입니다. 세베대의 아내 살로메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자매지간입니다. 그러니까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과 우리나라 촌수로 이종사촌 형제입니다. 더욱 큰 관계가 맺어진 것은 야고보와 요한 모두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연결되니까 자연히 세베대와 살로메 부부는 자기의 두 아들을 보아서라도 예수님을 적극 협조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이들은 예수님의 공동체를 위해서 재정적 후원자가 되어 많은 돈을 쓰는 집안이 되었습니다. 

또한 성경에 아주 확실하게 나타나는 증거가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 중에 세베대의 아들 요한을 아주 특별히 사랑하셨습니다. 약간의 편애하는 모습이 나타나는데 예수님의 특별 행사의 참석자는 언제나 세 사람으로 성경에 나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 이 세 사람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방에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지만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베드로를 참석시키셔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현장을 하나의 영적 체험 학습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또, 변화산에 올라가셔서 하늘나라 신비 체험을 할 때도 이 세 사람만 초대가 되어 현장을 보게 하셨고, 또 겟세마네 철야기도 때도 이 세 사람이 예수님의 거룩한 초대자가 됩니다. 12제자 가운데 자신의 아들들이 항상 예수님의 특별 관심 속에 있다는 것을 확인한 부모는 어떤 마음을 가지겠습니까? 너무 좋아서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를 위해 열심히 예수님을 도와드렸고 그것이 또한 그들의 기쁨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많이 찾아보듯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왜 예수님을 따랐을까? 무엇을 바라고 그렇게 따랐을까? 그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 나름대로의 분명한 계획과 계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아들이 부모를 떠나 예수님의 제자 역할을 하는데 부모로서 말리지 않고 오히려 열심히 후원하고 있습니다. 왜 후원을 열심히 했을까? 그것도 자신들의 계획과 계산이 다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가 오늘 말씀에 반영되고 있는 것입니다. 12제자 가운데 야고보와 요한은 연령적으로 제일 나이가 어립니다. 마지막 만찬 시간에 요한은 예수의 품에 안겨있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품에 안길 만큼 예수님의 사랑을 체온으로 느끼는 제자가 요한입니다. 이와 같은 특별 사랑 때문에 요한이 죽지 아니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던 것이 요한복음 2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 속에서 되어진 일이 오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야고보와 요한이 직접 예수님께 나와서 자신들의 출세 문제를 요청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마태복음에는 어머니 살로메가 두 아들을 데리고 나와서 요청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는 출세에 대한 욕망을 살로메에게 초점을 맞췄습니다. 여자의 욕심이 아들들을 충동시켜 저렇게 예수님께 부탁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마가는 어머니보다 야고보와 요한 자신들이 출세 욕망이 큰 것이라고 봤기 때문에 다른 기록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님께 출세 부탁을 하게 된 동기는 그동안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아서 절대 예수님이 거절 못하실 것이라고 하는 확실한 믿음의 계산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살로메가 두 아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두 아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한테 엎드려 절하며 구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냐? 가로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그 가정은 왜 별안간 이런 부탁을 예수님께 하게 되었는가? 그것도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 바로 전의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설교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착각을 했습니다. 착각할 만한 설교를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쫓았나이다. 무엇을 얻으리이까? 우리에게 돌아오는 보상이 무엇이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때 제자들 모두는 마음이 흥분해서 자기들에게 돌아올 예수님의 약속을 기대하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내가 예루살렘 올라가겠다.” 채비를 차리게 됩니다. 제자들은 기다리던 때가 왔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아울러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예수께서 일종의 거사를 행하여 로마의 구속으로부터의 자유함을 선언한고 다윗과 솔로몬 시대와 같은 하나님의 백성의 왕국 건설을 하실 것이다. 예수님이 지금 선언하셨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생각에 때를 놓치지 말고 자리를 미리 확보해두는 것이 출세의 방법이라고 약삭빠르게 선수를 쳐서 당돌한 부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요청을 듣고 그들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대답하십니다. 42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권세를 부리는 줄 너희가 알거니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보시고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이 두 사람은 권세를 부리고 싶은 것입니다. 집권자가 되어 사람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마음대로 부리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예수님이 왕이 되시고 예수님 다음의 권세는 자기들 것이라고 생각하고 소원하고 있기 때문에 자리까지 지적하는 일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욕구 가운데 지배 본능적 욕구가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역사의 비극은 이것 때문에 시작했습니다. 세상에는 대장노릇이 좋아서, 왕같이 살고 싶어서, 물리적 힘에 의해 보장되는 안정과 행복을 얻으려고 많은 투쟁을 해왔습니다. 요즘에 우리 사회에 상업 문화를 보십시오. 손님은 왕이라고 합니다. 왕 대우를 누리고 싶어 하는 인간의 심리를 이용해서 장사를 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교회까지 그런 문화가 들어와서 십자가를 진다는 개념은 다 떠나고 교회가 나를 왕 대우 하겠거니 생각합니다. 그래서 얼마나 교회에서 교인들을 왕대우 하는지 말할 수 없이 우리 자신도 모르게 타락되어져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권력이 있으면 생물학적인 안정과 사회적인 안정의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지식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맺어온 끈끈한 혈연적 인간관계를 믿고 예수님이 난처해질 만큼 당돌한 정면 돌파의 선언을 야고보와 요한이 지금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요청을 받으시는 예수님의 생각은 어떻겠습니까? “너희들은 권력을 얻기는 고사하고 권력자들에게 쫓겨날 것이며 권력가들의 임의로 주관하는 권력 행사에 너희가 희생물이 될 것이다. 내가 지금 예루살렘을 올라간다고 선언했는데 권력을 얻으러 올라가는 것이 아니요 죽으러 가는 길이다. 이제 죽음의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너희는 권력의 두 번째 자리와 세 번째 자리를 나더러 달라니 너희가 너희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야고보와 요한의 소원은 평화롭던 공동체를 삽시간에 살벌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라고 했습니다. 왜 다른 제자들이 그 요청을 듣고 분히 여겼겠습니까? 자기들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에 나이도 제일 어린놈들이 감히 그런 요청을 제일 먼저 하다니?’라는 생각 때문에 예수님은 순간적으로 공동체의 평화가 깨져나가는 목회의 어려움을 만나시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님의 제자들이 정말 가야할 길을 그 자리에서 제시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요청한 이 권력적인 소원은 그들만이 아닙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누구에게나 확실히 나타난 문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2000년 기독교 역사를 보면 처음에는 박해만 받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 중 가룟 유다와 요한을 제외하고는 모두 순교 당해 죽었습니다. 그 이후로 바울을 비롯한 수없이 많은 사람이 순교의 피를 흘리면서 살아온 것이 기독교 역사입니다. 주후 313년까지 그런 일이 계속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등장하면서 그때로부터 권력의 힘에 보호를 받는 길을 가게 됩니다. 로마의 막강한 정치력과 헬라 문화권의 혜택을 편리하게 받으면서 유럽 전역에 복음이 확산되어 나갔고 급기야는 교회가 국가 권력과 하나가 되어 통합되는 역사가 만들어졌습니다. 교회가 허락을 해야만 왕이 될 수 있었고 왕이 되는 취임식도 거의가 다 교회 안에서 행해졌습니다. 주교단에서 왕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주어야만 왕입니다. 나폴레옹도 황제 즉위식을 할 때 성직자들이 “나폴레옹은 침략자가 아니냐? 그런 사람이 황제가 되다니….” 그래서 누구도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식을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노틀담 교회에서 성직자들이 왕관을 들고나가 씌워주어야만 왕이 되는데 아무도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노틀담 사원 안에 들어가면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나폴레옹을 바라보면서 전부 팔짱을 끼고 쓴웃음을 짓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 중에 누구든지 한 사람이 나와 나폴레옹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주어야 하는데 아무도 안합니다. 결국 나폴레옹은 자기 손으로 왕관을 쓰고 자기가 썼던 왕관을 벗어 자기 아내 죠셉핀에게 씌워줌으로 나폴레옹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허락하지 아니하면 왕도 되지 못하는 역사에서 오랫동안 살아왔습니다. 모든 국가적 중요 행사는 교회가 허락을 해야만 그 안에서 이루어졌고 교단 총회의 인준을 받아 함께 가는 역사를 살아왔습니다. 핍박을 받던 교회가 정 반대의 길을 걸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 과정에서 교회는 본질적 모습을 잃고 타락했습니다. 교회는 왕같이 지배 본능적 충족의 거대한 집단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서구사회의 기독교 전성기 시절에는 러시아를 포함해서 어느 나라나 인구의 90퍼센트가 기독교인입니다. 서구 사회를 가보면 그 시절에 건축된 교회들이 그대로 있습니다. 어느 마을이나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는 반드시 가장 좋은 자리에 십자가 탑이 높이 솟은 고딕체 교회 건물이 아름답게 세워져 있습니다. 산골짜기에도 농촌에도 마찬가지이고 유럽 전역 어디를 가나 똑같습니다. 저는 유럽 전역을 차를 가지고 다니면서 돌아본 적이 있습니다. 유럽 도시의 특징이라면 세계적 규모의 대 성전이 어느 도시에나 문화재로 남아있어서 365일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토록 왕성했던 기독교가 왜 지금은 석양에 넘어가는 해같이 쓸쓸해졌는가? 그렇게 아름다운 교회들이 지금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이 건물 유지입니다. 사람이 찾아오지 아니하는 건물을 그대로 유지할 것인가? 이것이 제일 큰 고민입니다. 제가 런던에 갔을 때 교회당들이 너무 아름다워 부러운 말을 했습니다. “아! 한국에도 유럽 스타일의 이런 예배당을 좀 건축하고 예배를 봤으면 좋겠다.” 그랬더니 거기 있는 사람이 “목사님, 그럴 필요 없습니다. 런던으로 와서 목회를 하십시오. 저런 교회들 아주 싸게 판다고 나와 있습니다. 돈 몇 십만 달라만 있으면 다 살 수 있습니다. 아주 가격도 쌉니다. 지금 이 런던 시내에만 팔겠다고 내놓은 교회당이 700개입니다. 목사님, 런던에 오십시오. 얼마든지 저 예배당에서 목회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서구 교회가 왜 그렇게 되어졌는가 이유를 밝혀야 합니다. 그리고 그 대책을 세워야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이 땅에서 살아나는 겁니다. 첫 번째 이유가 무엇인가? 교회 본질성 문제가 그것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마저도 권세를 부리고 집권자가 되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야할 길을 제자들의 생각과 정반대의 길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44~45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것이 교회가 갈 길이다. 이것이 내가 가는 길이요 너희가 갈 길이다.” 교회가 가야하는 길은 영원히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하는 것을 교회의 본질성으로 예수님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내가 왜 세상에 탄생했는가? 섬기려 하고 내 목숨까지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주기 위해서 내가 있는 것이다. 섬김을 받지 마라.” 이것이 예수 탄생의 목적입니다. 교회와 권력이 한 자리에 앉아있으면 교회는 타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핍박 시대에 교회는 빛이 났습니다. 여러분, 독일의 경우를 보세요. 세상에서 신학이 제일 발달한 나라가 독일입니다. 저 같은 목회자들은 독일 유학을 했다고 해야 유능한 목회자로 인정받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독일의 교회를 가 보십시오. 그렇게 신학이 발달한 나라가 교인이 없습니다. 종교 개혁을 일으킨 마틴 루터가 독일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왜 교회가 텅텅 비어있는가? 국가 권력 구조 속에 교회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독일은 지금도 목사 월급을 국가가 줍니다. 교회는 되는지 말든지 월급은 정확하게 나옵니다. 국가 공무원입니다. 국가의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국가는 무슨 돈으로 그 많은 성직자들의 월급을 다 내주는가? 국민들이 종교세라고 따로 냅니다. 성직자나 공무원이나 아무 차이가 없는 문화 속에서 사는 독일 국민들이 불평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요 기독교인도 아닌데 왜 내가 종교세를 내서 교회를 살려야 되고 목회자들 월급을 주어야 하느냐? 나는 그런 세금은 낼 수 없다.” 이럴 거 아닙니까? 그러면 국가는 “그러면 내지 말라.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 앞으로 종교세 내지 않겠다고 사인을 해서 내라. 그러면 너는 종교세 면해 주겠다.” 국가가 그렇게 법으로 정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사인을 안 합니다. 교회도 안가고 하나님을 안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니야! 나는 그 사인은 할 수 없어.” 절대로 사인을 안 합니다. 그리고 종교세는 꼬박꼬박 잘 냅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성직자들 월급을 다 국가가 줍니다. 성직자들이 교회는 되든지 말든지 상관 안합니다. “이 교회가 지금 비가 새어서 수리해야 합니다.” “수리하십시오.” 하고 국가에서 수리비를 줍니다. “연료비가 모자랍니다.” “연료비 드리겠습니다.” 국가에서 모두 나옵니다. 그렇게 국가의 보호를 철저히 받는데 왜 교회를 안 나오느냐 말입니다. 교인이 없습니다. 제가 독일교회 몇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교인이 있어야 교회지, 국가 권력 기구와 교회가 한자리에 있는 것이 교회를 쇠퇴시키는 큰 원인이 되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온 것은 섬기기 위해서 왔다.” “얼마큼 섬겨야겠습니까?” “죽기까지 하라.” 이것이 교회의 정신입니다. 

자, 우리 교회가 열심히 하는 일 가운데 어린이 섬기는 일에 큰 비중을 두고 사역을 합니다. 제가 조사해 본 결과는 지금 한국의 어느 교회나 주일학교가 자꾸 쇠퇴의 일로에 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교회 가는 것보다 다른 데가 훨씬 더 재미있으니까 아이들이 잘 안 옵니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많은 교인들이 생긴 것은 그 시절에 주일학교 교육을 너무나도 성실하고 열심히 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교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21세기에는 주일학교 교육, 어린이 섬기는 일을 더욱 열심히 해야만 교회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로마가 그토록 기독교를 핍박하다가 어떻게 기독교 국가가 되었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로마는 군인들이 먼저 기독교인들이 되었습니다. 로마 군인들이란 기독교 핍박의 행동대원 역할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들이 기독교인이 되었는가? 로마 정부가 기독교인 박해 방법 중에 가장 악랄하게 한 것이 기독교인의 재산 몰수입니다. 어떠한 구실을 붙여서라도 재산을 압수했는데, 그 일을 일선에서 행하던 자들이 군인들입니다. 로마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 집에 군인들이 들어가서 재산 몰수를 강요할 때 당시 로마의 사회적 문제였던 장애인과 고아들이 기독교인 집에서 보호받고 있음이 어느 집에서나 발견되었습니다. 기독교인이 살고 있는 집에는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고아들이 한명씩 있음을 보고 군인들이 정부를 향해서 항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훌륭하고 착하게 고아들과 장애인들, 우리들이 다 내어버린 이웃을 섬기는 사람들을 왜 우리가 칼을 들고 들어가서 핍박을 하고 그들의 밥그릇을 엎어야 됩니까? 우린 못하겠습니다. 우리는 도저히 기독교인들을 핍박 못하겠습니다.” 군인들이 돌아섰습니다. “그들은 보상이 없는 일에 충성하고 갚을 것이 없는 사람을 섬기고 살고 있습니다. 왜 그 사람들을 우리가 핍박하며 살아야겠습니까?” 그 힘이 확산되면서 군인들이 돌아서고 결국 그 힘에 의해서 로마가 굴복하고 기독교 국가 선언이 이루어지는 역사를 만들어냅니다. 섬기는 힘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성탄절을 맞이해서 일부러 계획을 해서 미얀마에 다녀왔습니다. 56명의 목회자, 170명의 신학생, 30명의 고아를 만나고 왔습니다. 거기 신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는 기숙사는 하늘이 훤하게 내다보입니다. 비가 오면 비가 철철 새는데도 거기서 170명의 신학생들이 기숙을 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불쌍하고 가난한 미얀마의 복음을 위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 학교 교장 선생님은 우리 갈보리 교회에 유학 와서 나오고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이 주신 후원금을 가지고 수백 개의 크리스마스 봉투를 만들어서 “우리 갈보리교인들이 여러분들에게 보내는 크리스마스 선물입니다.” 하면서 똑같이 나누어주고 잘 섬기고 돌아왔습니다. 온 세상이 지금 “기쁘다 구주 오셨네” 라고 노래를 부르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말씀대로 모든 인간을 섬기셨고, 인간 구원 성취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 희생 시키면서 우리를 섬겨주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탄생은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으려 하는 공동체는 멸망합니다. 섬기는 공동체는 행복해 집니다. 섬기는 사람은 영원합니다. 성탄의 의미는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내 목숨까지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의미입니다. 모두 성탄의 기쁨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섬기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잘못 생각하면 주님의 생각과 정 반대의 길을 제자들과 같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 오셨는가? 왜 그의 탄생이 기쁜 것인가? 오늘 말씀을 생각하면서 의미 있는 성탄절을 맞이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