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식의 참된 의미”(고전 11:23-29)

20세기 현대신학의 거장 칼바트(K. Barth)는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가지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는데, “말씀”과 “성례전”입니다. 왜냐하면 건강한 교회의 표징(사인)이 바로 말씀선포와 성례전과 권징이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교회라면 이미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선포되어져야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 부름 받은 주의 종들은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설교 시간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선포해야 합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백성들은 설교 시간들을 통하여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듣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신실하게 선포되지 않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일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건강한 교회를 위해서 성례전을 행하도록 하셨는데, 세례와 성찬입니다.  
세례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모든 죄를 십자가를 통해 씻어주심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었음을 믿습니다.”라는 신앙의 고백을 공적으로 인정하는 법적인 예식입니다. 세례를 통하여 내가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가 된 것을 신실하게 고백할 뿐만 아니라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 계심을 선언하는 예식입니다. 그러기에 세례는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기초입니다. 세례를 받아야만 정식 교회의 멤버가 됩니다.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집니다. 그리고 성찬식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얻습니다. 
교회가 행하는 다른 성례전은 성찬식입니다. 이것을 거룩한 만찬이라 하여 성만찬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성찬식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최후의 만찬에서 유래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애찬식과 성찬식이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교회에 모일 때 각자 자기가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가지고 옵니다. 그리고 서로 나누며 사랑을 고백하는 잔치가 벌어집니다. 이것이 사랑의 잔치(love feast)입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의 살과 피를 나누는 성찬식이 진행됩니다. 

▶▶ 그런데 본문에 나타난 고린도 교회에 애찬식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먹는 것 때문에 갈등이 생긴 것입니다. 그 이유인즉 이렇습니다. 각자 음식을 가지고 와서 함께 나누는데 끼리끼리 모이는 편당이 생겼습니다. 부자는 부자끼리, 가난한 자는 가난한 자들끼리 자연스럽게 편이 나누어졌습니다. 부자들은 당당하게 음식을 내놓고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음식이 변변치 않은 가난한 자들은 의기소침해졌습니다. 열등감과 수치심에 빠진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부자들이 지나치게 설쳤던 것 같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눈치를 보고 멈칫거리는 사이에 부자들이 자기들끼리 음식을 먼저 먹어버렸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배가 고팠습니다. 이런 상황을 안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하였던 것입니다. 본문 22절에 보면 "너희들이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네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는 왜 하나님의 전에 모여서 부자들끼리 어울리고, 먹고 마시므로 가난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집에서 먹고 마시라고 질책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는 죄(罪)라는 것입니다.

(적용) ▶▶ 고린도 교회의 모습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은 아닌지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조차 학력, 직위, 재물을 따진다면 그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사회에서 약자로 기죽은 자들이 교회에 오면 살판나는 곳이 바로 교회이어야 합니다. 머리 좋고, 똑똑한 사람, 부자들은 세상에서도 당당하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교회에서까지 그들이 상을 차지하면 미련하고, 가난한 자들이 설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연약한 자들이 교회에 오면 "나도 할 수 있구나, 나도 사랑 받는 주님의 자녀이구나. 내가 세상에서는 어울릴 수 없는 분이지만 교회에서는 한 형제로 자매로 만날 수 있구나."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그런 점에서 내가 남보다 더 배웠다고 생각하시면 교회 안에서 더 겸손해져야 합니다. 
내가 더 많이 가졌다면 그것이 사치스러운 모습으로 비추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남보다 더 많은 은사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자랑이 되지 않도록 낮아져야 합니다. 약한 자들은 작은 말 한마디, 일에도 상처를 쉽게 받습니다. 강한 자들은 그런 걸 가지고 뭘 그러느냐고 말하지만 약한 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장난으로 개구리에게 돌을 던지지만 얻어맞은 개구리는 죽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나의 작은 말 한마디, 행동이 약한 자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습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총으로 약한 자들을 붙들어 주고, 일으켜 주는 지혜로운 평화교회 성도님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튼 고린도 교회의 잘못된 애찬식은 말씀 선포 후에 이어지는 성찬식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서로가 마음이 상한 상태에서 온전하게 성찬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성찬식의 중요성과 참여하는 태도를 강조합니다. 성찬식은 예수님이 친히 제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유월절 만찬을 베푸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후에 성찬식을 거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축사하신 후에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23절)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24절) 식후에 잔을 가지시고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25절) 말씀하셨습니다.

▶ 그렇다면 주님이 주시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성찬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장로교 요리문답에 의하면 "주의 성찬은 곧 성례이니 그리스도의 정하신 대로 떡과 포도즙을 주며 받는 것으로 그 죽으심을 나타내는 것인데, 합당하게 받는 자들은 육체와 정욕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그의 몸과 피에 참여하여 그의 모든 혜택을 받고 은혜 가운데서 영적인 양육과 장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웨스터민스터 소요리문답  96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함께 살펴보면서 성찬식의 참된 의미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신앙생활을 다시금 돌아보는 시간을 갖기를 원합니다. 

1. 성찬식은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깊이 생각하고 기념해야 합니다.(25절) 
본문 25절에서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성찬식은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깊이 생각하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여기의 "나를 기념하라. 이를 행하라"는 말씀의 뜻은 형식적 성찬식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떡을 들고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때를 따라 성찬식을 베풀고 떡과 잔으로 주님의 죽으심과 그 고통을 기념하는 것은 나 때문에 죽으셨고 나 때문에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예화) 어느 잡지에 실린 글입니다. 어떤 어머니가 신장병으로 사경을 헤매는 아들을 위해 자신의 신장을 이식해 주었습니다. 그 당시 어머니는 48세였고, 아들은 중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신장을 이식받은 아들은 빠른 속도로 건강이 회복되어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했습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도 다녀왔고 회사에 취직하고 결혼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수술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돼 수술 후 3년 되던 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던 날부터 하관식을 하는 날까지 아들은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은 채 대성통곡(大聲痛哭)을 했습니다. 아들의 통곡소리 속에는 "엄마, 나 때문에, 나 때문에∼"라는 절규가 섞여 있었습니다.   그는 어머니가 세상 떠난 지 20년이 돼가지만 매 주말마다 어머니 묘소를 찾아가 꽃을 꽂아드리고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엄마, 감사해요. 저 때문에 생명을 버리신 엄마의 그 숭고한 사랑 이 생명 다하는 날까지 잊지 않고 살게요. 엄마 천국에서 만나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우리가 성찬식을 거행합니까? 나 때문에 죽으셨고, 나는 주님 때문에 생명을 얻었고 영생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2000년 전 이 땅에 오신 것을 기념하고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가르치신 것, 모범을 보인 것을 기억해야 하겠지만, 떡을 먹을 때마다 나를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또 잔을 들 때는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신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은혜를 깊이 생각하는 예식이 이 성찬식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양손과 양발에 못이 박혀 몸이 찢기신 분입니다. 또 물과 피를 다 흘리신 분입니다. 왜 주님이 그렇게 몸을 찢고 피를 다 흘리셨습니까? 우리가 지은 죄와 허물 때문입니다.

이사야 53장 5-6절에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 죄를 지어 사망의 길로 갔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받을 죄악을 주님에게 담당시키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몸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누구 때문에 영생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잘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 주님의 십자가로 인한 것인데, 우리는 이를 잘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여러 가지 일을 하고 바쁘게 살다보면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주님은 이 큰 은혜를 잘 잊어버리는 우리의 맹점을 잘 아셨기 때문에 이와 같은 성찬식을 제정하여 떡을 먹고 잔을 나누면서 주님을 기념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그렇게 몸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신 희생 때문에 죄 사함을 얻게 되었고 평화스러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떡을 먹고 잔을 마시면서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또 그 동안 죄 가운데 산 것을 회개하며 또 앞으로는 그런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이 예식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2. 성찬식을 통하여 우리의 사명을 확인해야 합니다.
본문 26절에서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성찬을 받으면서 우리의 사명을 다시금 확인해야 합니다. 성찬식은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재림하시면 성찬식이 끝납니다. 왜냐하면 어린양 되신 예수님과 함께하는 혼인잔치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천국에서는 먹고 마실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성찬식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가지 우리는 나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증거 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찬을 통하여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시는 것은 과거의 주님을 기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주님께서 이 땅에 재림하실 때까지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찬식은 이러한 사명을 다시금 다짐하는 시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를 위해 몸을 찢고 피를 흘리신 우리 주님을 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실 때까지 미래의 소망을 갖고 우리는 이 사실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만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삼일 만에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승천하사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실 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분부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다시 오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 우리의 모든 고통과 괴로움, 이 세상에서 겪는 어려움은 다 해결이 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는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이것이 제일 큰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이날까지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환난과 어려움을 극복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구원의 주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정말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아는 성도라면 구원의 은혜를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우리의 큰 사명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이 복음 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얻은 자가 가져야 할 본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이것을 위해서 우리를 이 땅에 남겨놓으셨습니다. 또한 이를 위해 우리에게 건강과 물질, 재능, 시간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가정공동체도 우리끼리만 오순도순 살라고 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이루어 다시 오실 주님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공동체인 평화교회도 다시 오실 주님을 전하는 것이 사명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해야 할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도 자식들 사랑하고, 자식을 키우고, 직장에서 일하고 돈을 벌며,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사회인으로서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서 우리의 가장 중심적인 사명, 으뜸가는 사명은 우리 주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다 버리시고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다 흘리신 주님의 은혜,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 주님이 오실 때까지 해야 할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위해 살아왔습니까? 얼마나 복음 전하는 삶을 살았습니까? 
우리가 살아온 것을 보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면서 살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기보다 이 세상적인 것, 잠시 있다가 없어질 것을 구하며 살아온 우리가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제는 성찬식을 통해 전도하지 못했던 것을 회개하고 앞으로 전도하는 삶을 살겠다는 굳은 결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이 예식을 거행하면서 우리들 속에 한 영혼을 귀중히 여기는 마음, 주님의 죽으심을 땅 끝까지 전하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들이 회복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3. 성찬식을 통하여 나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27절)
본문 27절에서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성찬식을 통하여 나 자신을 살펴보야 합니다. 
초대교회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은 “회개하지 않고 성찬을 먹는 것이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했고, 벵겔은 “자기 성찰 없이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했고, 앨포드는 "주의 죽으심에 대한 올바른 이해나 믿음없이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본문 28절을 보면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찬식은 먹고 마시고 즐기는 만찬이나 회식이 아닙니다. 자기를 살피고 주를 생각하며 먹고 마시는 거룩한 예식인 것입니다. 배부르게 먹고 취하도록 마시는 것은 보통식사인 것입니다.  

본문 28절의 "자기를 살피고"라는 말씀은 "자기 죄를 회개하고, 자기를 다듬고"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29절의 "주의 몸을 분변하라"는 말씀은 주님의 희생과 그 고통을 깊이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고, 바울은 "너 자신을 살피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지런히 남을 살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살피고, 눈치를 살피고, 약점을 살피지만 정작 자신은 살피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너 자신을 살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웃이나 가족, 동료나 교우들에게 서로 나쁜 감정이 있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본문의 말씀을 오해하는 분이 계십니다. 회개도 않고 성찬에 참여하지도 않겠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매우 곤란한 생각입니다. 주님의 자녀라면 반드시 성찬에 참여하여 다시금 우리의 신앙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참여하지 말고 다시금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생각해 보라는 의미에서 자신을 살피라는 것이지 완벽한 사람만이 성찬에 참여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완벽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시간 성례를 집례 하는 목사조차도 완벽하지 못합니다. 여러분도 완벽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은 완벽하지 못하기에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주님을 다시금 바라보면서 겸손한 심령을 갖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흘리신 보혈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처럼 이 시간 우리들의 자범죄를 고할 때에 주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겸손한 심령으로 성찬에 참여하실 때에 성령 하나님께서 임재하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몸과 피를 내어주신 주님께 감사할 때에 더 큰 기쁨과 감사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4. 성찬식을 통하여 성도 간의 하나됨을 회복해야 합니다.(고전 10:16-17)
고전 10:16-17에서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로 하나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찬식을 통하여 다시금 형제의 사랑과 교제가 회복되어야 할 중요한 지체임을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천국에서 만날 자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한 피에 참여한 자이며 한 몸에 참여한 자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과 한 몸에로 연합이 이루어지면 당연히 주님의 한 몸으로 지체된 우리는 하나 됨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세계에 있는 모든 교회들의 의식이 다릅니다. 그러나 다를 수 없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찬식입니다. 주님 앞에 부름 받은 성도는 모든 것이 다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한 몸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형제요 자매라고 부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 생명을 얻은 존재들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분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그렇게 교회 안에 복잡하고 미묘한 갈등이 있을까요? 특별히 이민사회를 보면 문제가 심각합니다. 교회가 없을 때에는 교민들끼리 서로 어울리고 잘 지냈는데 교회가 생기면서 갈등과 싸움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바울과 게바파, 예수파 싸웠듯이 말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한국 교계 안에도 이런 아픈 상처와 갈등으로 신음하는 많은 영혼들이 있습니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지도자들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목회자가 바른 의식을 가지고 이끌어 가지 못한 잘못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 점에서 같은  목회자로서 부끄럽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나를 드러내고자 하는 교만함이라고 봅니다. 교회는 내가 드러나는 곳이 아니라 모든 일에 주님이 드러나야 합니다. 건강한 교회는 인간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고 주님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내가 살아나면 교회는 시끄러워 집니다. 자기의 자존심을 살리고, 자기의 능력을 드러내고자 하면 갈등이 발생합니다. 

교회는 서로가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세례를 받고, 한 몸에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도 하나이고, 믿음도 하나이고, 세례도 하나이고, 하나님도 하나입니다. 우리는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같은 성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엡 4:4-6) 그러기에 서로 생각이 다르고, 주장하는 바가 다를지라도 내 생각을 앞세워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덕과 질서를 앞세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의 위치를 잘 지켜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추한 것은 자기의 위치를 망각하는 것입니다. 머리는 머리에 붙어 있어야 멋있습니다. 머리가 음식 속에 들어 있으면 불쾌합니다. 침은 입 속에 있어야 음식을 소화시켜 줍니다. 그런데 옆 사람의 볼에 침이 붙으면 금방 멱살을 잡습니다. 남편은 사랑하는 아내 곁에 있어야 행복한 보금자리가 됩니다. 남편 옆에 엉뚱한 여자가 있으면 불륜이요 간통이 되는 것입니다.

서로의 위치를 지키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말 이전에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위치를 지키게 될 때 권위를 인정받게 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권위가 아닌 내적인 권위, 섬김의 권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서로 간에 신뢰가 생깁니다. 서로를 격려하고 붙들어 줄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들이 점점 모아질 때 교회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성도 간에 서로 사랑하고, 진심으로 아픔을 보듬어 줄 수 있는 지체가 될 수 있습니다. 성찬식을 통하여 자신의 위치를 돌아보며, 회복할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나누어진 마음들이 서로 보듬고 하나 됨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거기서도 내 아내, 내 남편, 내 자식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한 가족이 되어 남자와 여자, 부모와 자식을 떠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고 모두 자녀가 되며, 형제자매가 됩니다.

주님은 자기의 육신적인 가족들이 찾아 왔을 때 "누가 나의 모친과 형제와 자매들인가?" 하시고는,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천국까지 영원히 남는 관계는 바로 이 믿음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이 관계를 매우 소홀히 합니다. 그리고 혈연적인 관계,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관계만 중요시하고 살아가기가 쉬운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알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를 불러 모아 떡과 잔을 나누게 하시면서 우리의 영적인 관계를 다시 확인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가족들은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더 가까워지고 가족적인 사랑이 튼튼해지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런 성찬식을 통해서 비록 우리들이 육신적인 가족들처럼 많은 음식들을 자주 나누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의 몸을 상징하는 떡을 나누고 또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나누면서 우리가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요 자매들인 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찬을 나누는 이 아침에 주님의 살과 피를 통하여 참다운 회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안에 주님 보시기에 합당치 못한 것이 있다면 이 시간 조용히 회개의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직 용서하지 못한 자들이 있다면 주님 앞에 용서를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아직 내 안에 미움의 감정이 있다면 사랑으로 변할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엄청난 죄악으로 죽었던 나를, 지옥에 떨어졌던 나를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셨고 버리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붙잡고 있는 많은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주님 끊을 것은 끊고 버릴 것은 버릴 수 있도록 힘과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다시금 형제와의 사랑과 교제가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다시금 우리 안에 성령의 은혜가 회복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송가 185장은 프란시스 리들리 하버갈(F.R. Havergal)이 십자가 위에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피 흘리시는 '이 사람을 보라'는 그림을 보고 감명을 받아 쓴 찬양입니다. 이 찬양을 믿음의 고백으로 부르며 주의 성찬에 나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내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