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섭리 

(눅8: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앞에서 우리는 군대귀신 들린자의 구원을 살펴보았습니다. 그에게는 믿음이란 것 자체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귀신에게 이미 그의 정신을 빼앗겨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에게서 귀신이 나갔을 때 그는 정신을 차리고 주 앞에 무릎을 꿇고 주를 따르기를 간구하였습니다. 그는 예수에 대한 믿음의 지식을 갖지 않았어도 영적세계의 체험을 통하여 그의 영이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세계는 우리가 언제 예수를 믿었느냐가 아니고 나의 영이 영적 실체를 알고 있는냐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8장 후반부에 나오는 회당장 야이로와 혈루병 여인을 통하여 한 인간이 구원의 믿음을 발견하게 되기까지의 투쟁과 과정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말하고자 할 때 믿음이 있다 없다. 또 어떤 믿음이냐, 얼마나 큰 믿음이냐로 말합니다만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궁국적으로 죄인된 인간이 구속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앞에서 말했듯이 신적세계의 입문이며(faith) 그리스도의 말씀을 신뢰(trust)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에 살펴 볼 것은 회당장 야이로와 혈루병 여인의 구원의 과정 속에 나타난 믿음의 소재와 발견과정 그리고 믿음의 완성에 관한 일들입니다. 야이로 회당장 이야기는 지식과 명예를 존중하는 현대인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회당장은 한마디로 말해 유대교의 교회로서 유일신을 섬기는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적, 정치적 네트워크입니다. 이 조직의 배후는 유대교의 핵심 구심체 바리새인들로서 장로와 제사장과 서기관들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고 그 조직은 예루살렘 성전을 모체로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회당장이란 유대인의 예배처소를 관리 감독하는 사람으로 유대인 사회의 유력자이며 이방인 도시에서는 유대인의 대표이기도 합니다. 회당장은 예배의 공동체 회의의 사회와(눅13:14) 안식일에 선지서를 낭독하고(눅4:16), 설교할 사람을 선택합니다(행13:15). 신약성경에는 야이로 회당장 외에 후일 그리스도인이 된 그리스보와 소스데네가 소개되고 있습니다(행18:8). 오늘 우리의 위대한 믿음의 발견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은 야이로로부터 출발합니다. 

이 사건은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 중풍병자의 구원사건 이후 예수께서 가버나움의 마태에 집에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실 때 발생된 일입니다(마9:18, 막521). 이 때 바리새인들은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느냐?"고 시비를 걸어 왔었습니다. 또 요한의 제자들도 나아와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왜 금식을 하지 않느냐?"고 힐책하였습니다. 

이것은 종교적 의식에 관한 논쟁입니다. 따라서 이 당시 유대인들의 종교적 쟁점은 그들의 행위를 따라 의인과 죄인으로 나누는데 있었습니다. 이때 주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라 말씀하시며, 새 포도주는 새부대에 담아야 둘이 다 본전된다는 비유로 어떤 의식에 취한 사람들 속에서는 스스로 개혁을 이룰 수 없음을 설명하셨습니다. 

예수의 발 앞에 무릎을 꿇은 야이로는가버나움의 회당장으로서 그의 12살난 딸이 병이 들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마태는 "내 딸이 방장 죽사오니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서 '방장'은 생사의 초급을 다투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 발 앞에 오기까지 딸을 살리기 위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취하였을 것입니다. 종교적 의식은 물론 유명한 의원과 좋다는 약과 민간 요법은 다 사용하였을 것입니다. 

그가 예수께 "그 몸에 손을 얹어 달라"고 요구한 것을 보아 그는 예수께서 손을 얹어 고치시는 것을 목격하였으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안식일에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을 목격하였을 것이며(막1:26), 또 손이 마른 사람의 손을 만져 고치신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막3:5). 이것은 안식일 날 모두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또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신 것과 중풍병자의 이야기를 소문으로 들었을 것입니다. 

유대교 조직의 한 일원인 그로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명예를 모두 내려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믿는 순간 그는 유대교 공동체에서 출교를 당하여 더이상 그는 회당장이나 또 바리새인의 조직에서도 살아갈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무남독녀의 열두살난 딸의 죽음을 놓고 어떤 방법을 찾지 못한 야이로는 마지막 결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예수께 무릎을 꿇는 순간 그동안 자기가 쌓아온 명예와 부귀를 모두 버려야 한다고 할 때 이런 결단은 결코 쉬운 일일 수 없습니다. 명예를 생명으로 삼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야이로는 딸을 위하여 자신의 삶의 수단을 버리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결심을 수행하기 위해 예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었습니다. 정말 위대한 용기였습니다. 그는 생명이 삶의 수단보다 귀하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그에게 영혼의 구원을 향한 믿음이 있었을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유교신자이며 구청장인 당신이 죽어가는 딸을 살리기 위한 길이 예수 밖에 없다고 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창조자이신 것을 깨닫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무릎을 꿇겠습니까 아니면 죽어가는 딸을 살릴 분이 예수였기 때문에 무릎을 끓었겠습니까? 죽느냐 사느냐 하는 순간에는 믿느냐 안믿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오직 살아야 하는 수단과 방법만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에 옹위되어 회당장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그때 갑자기 주께서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고 물으셨습니다. 옆에 있던 제자들이나 주위 사람들은 사람들이 백설치듯 하는 가운데 예수를 밀친 것을 묻는 것을 이상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라" 하셨습니다. 

이때 치유를 받은 혈루병 여인이 숨길 수 없음을 알고 나와 자신이 옷에 손을 대었음과 치유받은 사실을 고백하였습니다. 여기서 혈루병이란 출혈이 멎지 않는 율법이 정한 부정한 부인병으로 사람들과 격리되어 살아야 했으며 그가 앉은 자리에 누가 앉아도 부정한 자로 여겨 정결의식을 행해야 했습니다. 

마가는 "열두해를 혈루병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롬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더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와서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막5:25-28)고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서 이 여인은 '구원'이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병이 하나님 앞에 죄인 것을 알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구원할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열두해 동안 의사들의 치료를 받으며 자신의 병은 하나님만이 치료하실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이 가라"하셨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나이가 삼십대인 예수께서 그녀에게 "딸아"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의 소문을 듣는 순간 그가 오시기로 하신 하나님의 아들 구속자 그리스도이심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현장 속에서 속이 타는 사람은 회당장 야이로였을 것입니다. 딸이 곧 숨이 넘어가려고 하는데 숨이 넘어가면 끝나는데 도중에서 이러한 일이 발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회당장은 그 여인의 간증을 들으며 내심 부끄러었을 것입니다. 사실 자기에게는 그 여인과 같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목적은 다만 딸을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두려워 하던 일이 일어 났습니다. 하인들이 달려 "당신의 딸이 죽었으니 더이상 선생을 괴롭게 하지 마십시요"라고 전한 것입니다. 이때 그 사람들은 예수를 가리켜 "선생"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예수는 선생의 위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는 두려워 떠는 야이로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구원'을 말씀하셨습니다. '믿음'과 '구원'의 관계를 설명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앞에서 풍랑을 만나 두려워하며 예수를 깨운 제자들에게 "너희의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하고 책망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많은 사람들의 믿음이 영혼의 구원에 있지 않고 현실의 문제에 급급하고 있음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야이로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가신 주님은 죽음의 의식을 행하는 집사람들에게 "울지 마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셨습니다. 마가는 그 말씀을 듣고 그들이 비웃었다고 기록 하였습니다. 주님은 야이로 부부와 베드로 요한과 야고보만을 데리고 방에 들어가 "소녀야 내가 말하노니 일어나라"(막5:41) 말씀 하셨습니다. 

여기서 소녀는 믿음을 위하여 무엇을 준비하였을까요? 그녀가 죽기전에 예수를 믿었을까요? 물론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소녀는 회당장의 가문에 귀한 딸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성장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녀는 이제 성인이 되어 결혼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이 소녀가 죄가 있어서 죽은 것도 아니고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은 것도 아니라 생각됩니다. 다만 그 소녀는 하나님의 뜻대로 태어나서 하나님의 뜻대로 주어진 삶을 살다가 하나님의 뜻대로 죽고 또 하나님의 뜻대로 다시 살아 난 것입니다. 우리는 군대귀신 집힌 사람이나 열두살난 회당장의 딸이나 그들의 구원과 믿음에 대하여 아무말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구원이라는 관점을 우리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질병에서의 치료 귀신에게서의 구원이라는 관점 즉 인생의 불가항력적인 문제로부터의 해결이라고 생각하는데 예수께서 말씀하신 구원은 영생에 이르는 구원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즉 우리의 생명이 육체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사건 속에서 믿음과 구원, 죽음과 생명에 관한 지식에 대한 인간의 한계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군대귀신 들린 자로부터 야이로 그리고 혈루병 여인과 열두살 난 딸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발견하기 까지의 이 땅에 사는 우리의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믿음은 영혼의 구원을 위한 매게체이며 그것은 영적세계의 체험 즉 영원한 생명을 얻는 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더이상 이것이 구원이다 저것이 구원이다 말하는 우리의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 낮 열두시간과 또 하루밤 열두시간 속에 숨쉬고 잠자고 하는 한낱 인간입니다. 믿음과 구원은 오직 그의 섭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