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아들 [사 9:6 ~ 7, 마 1:21 ~ 25] 
 

오늘은 성탄주일이며 송년주일 입니다. 예수님의 오심과 더불어 인간의 역사가 마무리됩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오심으로 2005년이 마무리됩니다. 우리 가운데 오시는 예수님을 의미 있게 맞으시고, 한 해를 잘 마무리할 수 있는 복된 성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에는 더욱이 인간의 모든 역사가 종식되고 하나님의 나라의 새로운 역사로 시작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기도 합니다.
  성탄은 칼 발트의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의 아들이 역사의 단면에 부수고 들어오신 사건(inbreaking)입니다. 또 다른 표현을 보면 예수님이 인간의 역사를 자르고 오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세상에 들어오셔서 인간을 구원하시고 함께 하신 사건입니다.
  조선 시대의 소현세자를 아시지요? 인조의 맏아들이며 이름은 ‘왕’입니다. 그는 1625년인 인조 3년에 세자로 책봉 되었습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강화 삼전도에서 조선왕이 굴욕적인 항복을 합니다. 소현세자는 자진해서 훗날에 효종인 봉림대군과 주전파 대신들과 함께 인질로 청나라 심양(瀋陽)에 가서 9년을 인질로 살았습니다. 그는 심양에서 현실적으로 청의 존재를 인정하고 양국간의 문제 해결 조정자로서 재량권을 행사하였습니다. 1644년 9월에는 명나라를 정벌하는 청나라 군사를 따라 베이징에 70여 일를 머물면서 독일인 신부인 아담 샬에 의하여 천주교와 서구 과학문명을 받아들였습니다. 서구의 지식을 배워, 천문, 수학, 천주교 서적과 여지구, 천주상 등을 가지고 왔습니다. 1645년 다시 그가 서울에 돌아오게 되는데 조정은 서인이 반청친명정책(反淸親明政策)을 고수하여 세자의 태도에 부정적이었습니다. 인조마저도 세자가 심양에 있을 때의 태도에 부정적이었습니다. 세자는 귀국한지 2개월 만에 원인 모를 병으로 급사하였습니다. 세자의 사인을 규명해 달라는 청을 인조는 무시하고 서둘러 입관하였습니다. ‘인조실록’에는 시신은 9혈에 출혈이 있었고, 피부는 진흑(盡黑)으로 변해 있었다고 합니다. 세자빈도 역모를 꾸몄다고 하여 그의 가족들과 함께 죽임 당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생각하니 갑자기 소현세자 생각이 났습니다. 아들이 부왕을 대신하여 자청하여 볼모로 잡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본국에 돌아왔지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아들이 대신 볼모로 잡혔고 억울하게 죽은 것은 예수님을 조금은 닮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남을 구원하는 죽음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은 아들이 자청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고소한 것을 보면 억울한 누명입니다. 예수님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은 남을 구원하는 죽음이었습니다. 세상을 바꾸어 놓는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로 오신 사건입니다. 그러나 어떤 역사적 사건과 비교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역사로 들어오신 사건은 유일한 사건이며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청하신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주신 사건은 하나님이 자신을 포기하신 사건이었습니다.
  한 농부가 아들을 너무 심하게 농사일을 시키는 것을 보고 이웃 농부가 농작물을 키우기 위해 아들들을 그렇게 심하게 일을 시킬 필요가 있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농부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농작물을 키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들들을 키우고 있소”. 하나님은 아들을 심하게 키우고 있습니다. 아들로서는 당할 수 없는 심한 일을 당하게 하십니다. 할 수 없는 일을 아들에게 하신 아버지입니다. 우리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이렇습니다.
  이사야 9:6-7에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이름을 이렇게 말합니다.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입니다. 이 모두가 오실 메시야의 이름입니다. 이름은 그의 사명이며 그의 성품입니다. 아들을 이렇게 영광스런 이름을 주어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미국의 이야기입니다. 20세 미만의 젊은이들에게 온라인 상 토론주제 1순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문신, 피어싱, 신체이식과 같은 신체 변형(body modification)입니다. 줄여서 bod mod라고 합니다. 성탄은 예수님의 신체변형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가지시고 이 땅에 오신 놀라운 사건입니다. 성탄의 의미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시 보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의 아들은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입니다.

  21절에는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예수님의 사명입니다. 곧 구원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에게 주신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가 되게 하시려고 형상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가 분리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더 이상 하나 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분리된 것을 하나 되게 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나면서부터 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원죄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그냥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죄의 뿌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죄를 짓게 됩니다. 다윗은 이런 인간의 죄의 모습을 모태에서부터 죄로 잉태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20장에는 포도원의 일꾼들이 주인의 종을 죽인 비유의 말씀이 있습니다. 포도원의 일꾼들은 수확기가 되어 주인이 하인을 보냈을 때에 소산을 주지 않고 주인이 보낸 종을 때리고 쫓아냈습니다. 마지막에 주인은 종들은 때리고 쫓아내지만 자신의 아들은 공경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아들을 보냅니다. 그러나 일꾼들은 주인의 아들이 오는 것을 보고 상속자인 아들을 때리고 죽이자고 하여 죽입니다. 이것은 선지자들을 멸시하고 때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아들을 보냈더니 죽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은 새로운 경기가 아니라 새로운 작전이었습니다. 포지션 변경이 아니라 새로운 선수였습니다. 그 선수는 하나님의 맏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전보다 완전히 새로운 작전이 필요한 것입니다. 율법으로 살던 사람들이 은혜와 사랑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작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짓게 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셨던 하나님은 사랑으로 말미암아 살게 하셨습니다. 은혜로 살게 하신 것입니다.
  죄는 생명을 잃게 합니다. 생명을 얻게 하는 데는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이 오셔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오심을 “그 안에 생명이 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친히 자신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떡이라”고 하십니다. 생명이신 주님이 오셔야 생명을 주십니다. 아니면 죽음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 3:36에는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합니다. 요한일서 5:12에는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구원자이십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2:30에는 시므온이 예수님을 보고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라고 합니다. 주님을 보면 구원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계실 때에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라고 조롱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조롱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남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분입니다.
  ‘한계가 없는 인간’(The Unlimited Human)이란 컨퍼런스가 열린 적이 있었습니다. 인간에게는 한계(limit)는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제한(limitation)은 분명히 있습니다. 모든 것이 가능하나 모든 것이 다 허락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잠재력은 무한합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개발해도 다 못한다는 말이며 특권은 반드시 경계가 있습니다. 수평선은 끝없이 펼쳐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수평선 또한 반드시 끝나는 지점이 있습니다. 알버트 슈바이처는 천재와 바보의 차이는 제한된 곳이 어딘지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 아들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아들의 이름을 부르고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게 하십니다.

  임마누엘을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주셨던 이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예수님의 사명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여기가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뜻의 ‘에벤에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의 ‘임마누엘’, 하나님이 친히 예비하신다는 뜻의 ‘여호와 이레’ 이 세 단어는 가장 힘 있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 사랑이라고 합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는 네 가지 중요한 신앙의 기틀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창조의 신앙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고 하는 임마누엘 신앙입니다. 셋째는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신앙입니다. 넷째는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재림신앙 입니다. 이 가운데 임마누엘은 가장 현재적인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하는 믿음입니다.
  성탄은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 임마누엘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시간 속에 그이 아들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된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희생이 곧 성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구원과 축복하신 사건이 성탄입니다.
  이사야 7:14에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합니다. 마태는 이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또 이사야 8:8에는 “임마누엘이여 그의 펴는 날개가 네 땅에 편만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없이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하나 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죄는 분리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떨어져 있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하나님은 다시 하나 되게 하시기를 원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기대하십니다. 죄의 문제는 아버지께로부터 분리된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단절되었습니다. 인간 사회는 개선할 수 있으나 오직 하나님만이 재창조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단절된 사이를 다시 하나 되게 하신 것입니다.
  임마누엘은 다시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시고, 세상과 분리되게 하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의 성품이며, 하나님의 일이며,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인간에게는 희망이며 의지입니다.
  텔레비전 프로에 보면 ‘그 사람이 보고 싶다’, ‘꼭 한번 만나고 싶다’ 등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가족들이 다시 만나게 하는 프로가 있습니다. 이런 프로를 보면 공영 방송의 힘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시청자들은 텔레비전을 보면 마치 자신의 일 같이 눈물을 흘리며 그 아픔과 감격에 빠지기도 합니다.
  다시 만남은 좋은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서로 분리되었다가 다시 하나가 됩니다. 가족에게 있어서 분리는 그 자체가 죄입니다. 원망이며 악한 것입니다. 다시 만남은 그 자체가 좋은 것입니다. 선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루어진 임마누엘은 언제까지인지 아십니까? 마태복음 28:20에 말합니다.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 한번 임마누엘은 영원한 임마누엘입니다. 세상 끝날 까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유대인 소녀가 독일 경찰에게 쫓기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을 수색 체포하는 동안 그녀의 부모는 벌써 독일 경찰에 붙잡혀 끌려갔습니다. 용하게도 이 소녀는 ‘왈소’라고 하는 곳으로 도망하여 산 속에 굴이 있어서 굴속에 숨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화란 신학자 요하네스 할켄딕(Johannes Halkendijk)이란 신학 교수가 굴속에서 입수한 소녀의 메모지를 공개하였습니다. 메모지에는 세 마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첫째, ‘나는 지금 빛나는 태양을 보지 못하나 밖에는 찬란한 태양이 있음을 믿는다’. 둘째, ‘이런 험악한 세상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을 나는 믿는다’. 셋째, ‘지금 하나님은 말씀하지 않고 계시나 이 굴속에서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심을 믿는다’ 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우리에게도 이런 임마누엘의 신앙이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결론 

  1차 세계대전이 한참일 때에 미군 해병대가 참호에서 적과 처참하게 싸우고 있었습니다. “공격하라”는 명령에 총알이 빗발치듯한 전장에서 격렬하게 싸우다 “퇴각하라”는 명령으로 모두가 후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병사는 옆에 있던 전우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에 그는 피를 흘리며 참호 밖 멀리에 있는 전우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전우를 구하러 가겠다고 하였지만 “안돼”라는 부대장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그는 부대장의 명령을 어기고 전우에게고 다가갔습니다. 피를 흘리고 있는 전우를 데리고 오는 동안 전우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부대장은 화가 났습니다. 자신의 부하가 명령불복종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나?” “당연합니다. 친구의 마지막 말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자네의 생명을 걸만큼 가치 있었나?” “예, 친구의 마지막 말은 생명을 걸만큼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의 마지막 말이 무엇이었길래 가치가 있단 말인가?” “그 친구의 마지막 말은 ‘자네가 와줄 줄 알았네’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걸만큼 가치 있는 일을 위해 오셨습니다.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적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그 분이 이 땅에 오실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그 분을 보내실 줄을 알았습니다. 오늘 그 분이 우리에게 오시는 것입니다. 오늘 그 분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가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주님이 강림하셨습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어느 때까지 기다릴까요?”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기다리던 메시야는 생명을 걸만큼 가치 있고 소중한 일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성탄의 의미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아들을 맞이하여 생명을 얻는 전혀 새로운 성탄을 맞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임마누엘의 주님과 더불어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시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