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막 7:24-30)
본문의 말씀은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여인은 유대인들이 더럽게 여기는 이방 여인이요, 더러운 귀신들린 딸을 가진 초라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딸에 대한 불타는 사랑이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자존심(自尊心)과 감정(憾情)을 극복하고 겸손히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믿음에 감동 받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도 이 믿음을 배워 예수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Ⅰ. 주여, 옳소이다(24-28절) 
2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게네사렛 땅을 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셨습니다. 두로는 갈릴리 서북방 약 60km 지점 지중해 연변에 있는 도시로서 과거 지중해의 해상권을 쥐고 있던 페니키아의 수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곳 두로의 한 집에 들어가 조용히 쉬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대한 소문이 이곳까지 퍼져서 도저히 자신을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더러운 귀신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 발아래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기를 간구하였습니다. 귀신들린 딸을 둔 여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이 여인은 아마도 딸에 대한 각별한 사랑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여인은 사랑하는 딸을 어찌하든지 고치기 위해 유명하다는 많은 의사는 다 찾아 다녀 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딸을 위해서 무조건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간절히 도움을 자마자 구했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이 주님께 나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26절에 보시기 바랍니다. 이 여인은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시의 헬라인들은 다른 민족을 야만인으로 취급할 정도로 문화적인 우월감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수로보니게”란 말은 시리아와 베니게의 합성어로서 시리아 지역에 속하는 베니게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베니게(페니키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에 대해 강한 적대감을 품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문화적(文化的), 민족적(民族的) 배경을 가진 여인이 유대인인 예수님 앞에 나아와 엎드리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인은 어찌하든지 어린 딸을 구해야겠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이런 민족적, 문화적 배경을 다 극복하고 예수님 앞에 나아와 꿇어 엎드렸습니다. "예수님 내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 주세요, 내 딸을 구해 주세요!" 여인의 기도는 참으로 간절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을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본문 27절을 보십시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는 여인에게 너무나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자녀'란 선민 이스라엘을 가리키며, '개'란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 취급하며 무시했습니다. 예수님도 바로 이런 식으로 이 여인을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까지 이렇게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자기에게 믿음으로 나오기만 하면 기쁜 마음으로 영접하고 도와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도와주시기는커녕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리고 나와 엎드린 이 여인을 개 취급하시며 모욕적인 말로 물리치셨습니다. 한마디로 '너는 선민이 아닌 이방인이기 때문에 은혜를 베풀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만민의 구주가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는 정말 예수님답지 않은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로부터 이런 모욕을 받는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는데 아무리 이방인이라고 해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직접 대놓고 개 취급을 하다니 이는 참으로 참기 힘든 일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께로부터 박대를 받으면 정말 갈 곳이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이 여인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이는 여인에게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이 있는가 테스트해 보시기 위함입니다. 이 테스트는 사람을 실족시키기 위한 테스트가 아니라 아브라함을 시험하사 마침내 그에게 진정한 축복을 주셨듯이 주님의 크신 축복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여자는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28절을 보십시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시인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조금도 반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개라고 하시면 개라고 시인하였습니다. 보통 여자들 같았으면 아마 크게 반발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무리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힘든 말씀이라 할지라도 "Yes, Lord!" 하며 '아멘'으로 응답했습니다. 그녀에게는 "No!"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인은 "그러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말함으로 주께서 다만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부스러기라도 얻고자 하는 이 여인은 주님께 은혜 받기 위해 자신의 자존심을 온전히 꺾은 것입니다. 물론 이 여인은 헬라인으로서 지성이 있고 자존심이 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예수님의 모욕적인 말을 재치 있게 받아 넘겼습니다. 이 여인은 감정을 이기고 자신을 이겼습니다. 이 여인은 실로 지성과 유머, 재치가 넘치는 위대한 여성이었습니다. 

그러면 여인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첫째, 예수님 앞에서 자아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개같이 비천하고 은혜 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존귀한 자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것도 어딘가 쓸 만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라고 착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오랜 신앙의 경력을 내세우며 헛된 자만심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볼 때만이 우리는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 자존심을 꺾을 수 있습니다. 
과거 우리는 이방인으로서 하나님도 모르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행하며 멸망할 수밖에 없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었습니다(엡2:1-3) 우리는 모두 탐욕, 정욕, 거짓으로 물들어 개와 같이 비천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보배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일방적인 은혜를 입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를 기억할 때 자존심을 부인하고 겸손하게 주님께 은혜를 구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왕이 되었지만 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그는 늘 자신이 과거 양떼를 치며 양 똥이나 만지던 비천한 목동 출신임을 기억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발견할 때 은혜에 감사하고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는 여인으로 하여금 예수님의 모욕적인 말에도 요동치 않고 겸손하게 은혜를 간구하게 하였습니다. 만일 여인이 조금이라도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인격을 불신했더라면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마는...."하면서 더 이상 말없이 낙심해 돌아가 버렸을 것입니다. 
믿음이란 어떤 경우에나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그의 사랑을 의심치 않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그의 사랑을 의심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많은 환난과 핍박을 받았지만 조금도 기죽지 않고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매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가 어떤 형편에 처할지라도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그의 사랑을 의심치 아니할 때 믿음의 여유를 갖게 되고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셋째, 선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하며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자녀 삼으신 하나님의 주권을 깊이 인정하였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사람보다 못한 것이 뭐가 있길래 그 쪽은 자녀고 나는 개냐며 따지거나 불평불만을 갖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무시를 받는 중에서도 예수님을 "주여(Lord)"라고 불렀습니다. 여인은 주 되신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자세가 삐뚤어져 있으면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을 등지고 돌아서 버립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뭔가 마음에 안들면 불평하는 마음을 갖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대적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주권신앙이 있으면 불평하기보다 감사하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고자 의도하신다는 믿음을 갖습니다. 

무엇보다 나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깊이 인정하면 어떤 상황 가운데서라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다보면 하나님의 뜻으로만 인정하기에는 너무나 힘든 일들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정말 이것을 하나님의 주권으로 인정해야 하는가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들도 많은 것입니다. 
특히 이러한 일들이 나에게 심한 고통과 슬픔과 절망을 주는 모습으로 다가올 때 그러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심하게 흔들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사실입니다(롬8:28)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결코 실패가 없으십니다. 우리를 반드시 best way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주님의 주권을 인정한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을 배워야겠습니다. 그리하여 현재 우리의 짧은 생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어려움들 가운데서도 인내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성숙한 종들이 되어야겠습니다.  

Ⅱ. 이 말을 하였으니(29,30) 
2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예수님은 여인의 말에 크게 감동을 받으시고 그 믿음을 축복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5:28에서는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때 여인의 말은 믿음의 말입니다.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에서 '이 말'은 모든 의심과 불신을 뛰어넘는 믿음의 말입니다. '이 말'은 겸손하게 은혜만을 간구하는 지혜의 말입니다. "이 말을 하였으니" 여기서 우리는 말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입이 있다고 말을 함부로 하기 쉽습니다. "내 입 가지고 내가 말하는데 뭐가 어때?"하며 생각나는 대로, 함부로 불신적인 말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불신적인 말이 미치는 영향은 지대합니다. 
민수기 14장에 보면 가나안 땅을 탐지한 열 두령들은 불신적인 말을 하여 온 이스라엘 백성들로 범죄케 하고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엎드러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는 믿음의 말을 하였기 때문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축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 속담에도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말을 토대로 우리에게 행하십니다. 우리가 항상 "나는 안돼, 이 것은 정말 안돼"하는 소리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정말 안되게 하실 것이고, "나는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믿으면 된다"는 말을 하면 하나님께서 과연 불가능한 것도 되게 하십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자기 입술의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믿음의 말은 긍정적입니다. 불신의 말은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 믿음의 말은 창조하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말을 기뻐하시고 그 믿음대로 역사하십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여인의 '이 말'을 들으시고 응답하셨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예수님은 이렇게 믿음의 말을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우리가 믿음의 말을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대로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마음으로 주님을 믿고 겸손히 나오는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이런 자들에게 응답하시고 그 능력을 베푸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구든지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예수님께 나아가면,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치유시키시며 은혜 부어 주십니다. 주님 앞에는 해결 받지 못하는 문제는 없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의 은밀한 소원을 아뢰어 응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 나온 인생을 결코 그냥 돌려보내지 않습니다. 반드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반드시 응답을 주십니다. 여러분의 상한 심령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고침을 받기를 바랍니다. 회복되기 바랍니다. 이제 이 새벽에 여러분의 소원을 아뢰어 응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