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에 해야 할 일
(눅10 : 25 - 37) 2004. 03. 07 주일 낮 설교
(25)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30)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35)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아멘.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성악가 소프라노 조수미씨가 한국에 공연차 나갔다가 친구들과 노래방에 갔답니다. 조수미씨가 멋지게 노래 한 곡을 불렀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70점밖에 점수가 안 나왔답니다. 여러분! 조수미씨가 노래방에서 70점 맞고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궁금하지요? 적어도 "뭐 이딴 기계가 있어. 이 노래방 기계 엉터리야!"라고 화를 냈거나 "어휴 내가 연습 좀 더해서 다음에는 백 점을 맞아야지", 아마 이런 식으로는 반응하는 안 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목소리와 노래에 대해서 자부심이 있기 때문에 노래방의 점수가 그녀에게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합니다. 오늘 사순절 두 번째 주일을 맞아 사순절을 보내면서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여러분! 세상이라는 노래방이 여러분에게 70점 아니 낙제점인 59점을 주더라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써 긍지를 가지고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느냐? 라는 질문을 할 때에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써 삶의 기준을 어디에 두었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질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우리에게 확실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율법에 무엇이라 기록하였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였나이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으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기준에 따라 세상 노래방이 주는 점수에 삶의 자세가 좌우될 수도 있고 반대로 세상이 주는 점수에 전혀 지장 받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 기준은 내가 무엇이 되어야하느냐? 하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이 되어야합니까? 이 말은 우리 교회가 무엇이 되어야 하느냐? 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한 마디로 어떤 사람이 되어야합니까?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세상점수는 어떻게 남들이 쳐다보는 높은 나무에 올라가느냐?에 온통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의 평가는 어떻게 남들에게 인정받아 높은 점수를 얻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얼마나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1.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이 목적을 가장 잘 설명하는 단어가 바로 <예배>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예배할 목적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모이는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내가 예배를 통하여 어떻게 그 분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느냐?와 같은 말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서 예배보다 더 중한 것은 없습니다. 만약 예수 믿는 어떤 사람이 갑자기 스타가 되어 소위 잘 나가는 사람이 되고 온 세상이 알아주는 인물이 되었다 합시다. 그런데 이 사람이 너무 너무 바빠서 예배 드리는 생활을 지속 할 수 없게 되었다면 그는 세상에서 성공자라 불릴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비참한 실패자가 됩니다. 또 아무리 열심히 주의 일한다 하더라도 예배보다 더 중요하고 예배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4:10에 보면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에도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 그것이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어떠한 봉사나 사역보다 훨씬 우선 순위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떠한 의무감에서 예배를 드려서는 안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기쁜 마음으로 예배 드리는 것이 예배자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시34:3「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 이름을 높이세」라고 했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요즘 여러분 예배의 자세는 어떻습니까? 예배를 위하여 얼마나 기도하며 준비하고 예배에 얼마나 정성을 쏟고 있습니까? 사순절을 지내면서 회복해야 할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바른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데 정말 최선을 다하여 기꺼이 감사와 정성으로 드리는 귀한 예배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2.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한다는 말.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구원하시고 자녀 삼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이웃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섬김으로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을 섬기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관심은 얼마나 섬김을 받고 얼마나 대접받는 인생으로 사느냐에 있지만 그리스도인의 기준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막10:45「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성도로서 해야되는 중요한 일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그들의 아픔을 치료해 줌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평가도 여전히 세상의 방식대로 평가합니다. 그래서 세상적인 기준으로 점수가 좀 올라가는 것 같으면 "아멘 할렐루야"하고 점수가 좀 떨어지는 것 같으면 내가 언제 예수 믿었느냐? 는 듯이 교회를 등지고 세상으로 나가는 일들이 많아요. 그야말로 노래방 점수에 따라 기분이 왔다 갔다 하는 식으로 사는 교인들이 많단 말입니다. 그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조차 성도의 신실함을 얼마나 교회 출석을 잘하고 교회에서 무슨 직분을 가지고 있느냐로 그 사람의 믿음을 평가합니다. 이러한 현실을 보시고 예수님은 무어라고 말씀 하실까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자들아!」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자들아!」 라고 책망하십니다.
왜냐하면 예배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고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일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문제는 예수님의 대 강령인 사랑의 실천을 외면하면서 자기가 신앙생활을 썩 잘하고 있다는 것으로 착각하고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바로 오늘 예수님 앞에 나아온 율법사가 그렇습니다. 이 율법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께 묻습니다.「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우리는 여기서 율법사에게 치명적인 신앙의 약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1)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는 질문에서는 지금까지 신앙생활은 했지만 영생 얻는 길을 아직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눈으로 보면서도, 많은 죄인들이 믿고 구원 얻은 길 되시고 진리 되시고 영원한 생명 되시는 예수님을 제대로 모른 채로 신앙생활 했다는 것입니다. 영생의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고 내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할 때 나의 구원은 이루어진 줄 믿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두 번째 뭐라고 질문합니까? 
2)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참 딱합니다. 이 사람은 성경에 그 많은 율법을 따르며 살았고 또 영생을 사모하는 열심도 남도다 있는 사람인데 정작 자기의 이웃이 누구인지 조차 모르고 신앙생활 했다는 것은 이 율법사에게는 치명적인 신앙의 약점입니다. 왜냐하면 이웃을 외면하고 혼자만 복 받고 영원히 살겠다고 신앙생활 하는 것은 기독교의 참 신앙이 아닙니다. 그럼 여러분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많은 교인들이 오늘 말씀에 나오는 율법사같이 모든 종교적 의식을 행하고 교회의 행사에 잘 참석하면서도 정작 신앙의 중요한 핵심을 모르는 분들이 뜻밖에 많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무엇 하는 사람입니까? 하나님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내 이웃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사랑을 합니까? 어떤 사람은 교회 안에서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이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웃이니 서로 용서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좋아하자. 물론 교회 안에서부터 당연히 그래야 하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우리에게 언제까지 너희들끼리 끼리만 맨 날 좋아 할거니? 하고 물으십니다. 내 이웃이 누구 이니이까 ? 여러분의 이웃이 누구인지 오늘 분명히 알고 가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이웃을 가르켜 주시기 위해 비유로 이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는데 마침 한 제사장이 그를 보고 피하여 가고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던 중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기름과 포도주로 그 상처에 붇고 싸매어 주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자비를 베푼 자니이다.」「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바로 우리의 이웃 강도 만난 자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이웃을 말합니다. 한번 따라 합시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그리스도인의 삶의 평가기준은 예수님이 말하는「참된 이웃」이 되는데 있습니다. 얼마 전 한국의 KBS 방송 '119 구조대'라는 프로에 이런 내용이 방영되었습니다. 
대구 달서구 본리동에 있는 어느 교회 앞에 누군가가 이불보에 아기를 싸아 버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교인들이 애기를 보았지만 아무도 선뜻 그 아이를 맡지 않고 전부 외면하였답니다.
결국 지나가는 신문배달원이 소방서에 신고하여 고아원에 맡겼다는 이야기입니다. 자식을 버려야만했던 엄마의 사정이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아이를 교회 앞에 놔두면 그래도 믿음 좋은 교인이 데려다가 잘 키우지 않겠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교회 앞에 갖다 두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엄마가 이 방송을 보았다면 얼마나 교회에 대해 실망하겠습니까? 부끄럽지만 오늘 우리 교회의 현주소입니다. 말로는 선교도 잘하고 구제도 잘 하는데 정작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에, 내가 꼭 손을 내밀어 도와주어야 할 일은 결정적인 순간에 외면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찌 버려진 애기 이야기뿐이겠습니까? 오늘날 교회 안에 자기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강도 만난 자를 외면하는 제사장 같고 레위인과 같은 종교인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로마서 8장을 보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 즉 예수 믿고 나면 생각이 바뀐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할 땐 육신으로 생각하던 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 성령의 생각으로 바뀐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성경공부 합니까?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고 성경을 암송하는 이유는 그것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인용하거나 설명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말씀을 듣고 알고 깨달은 후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들어도 순종하지 않으면 예수 믿어도 생각이 안 바뀝니다. 생각이 안 바뀌면 행동도 습관도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가 제사장이든 레위인이든 그가 목사든 집사든 항상 자기 생각하기에 바쁩니다. 그래서 강도 만난 자를 보는 순간에 생각이 안 바뀐 제사장도 레위인도 이 사람 도와주다가 나까지 강도 만나면 어쩌지? 하고 줄행랑 친 거 아니겠습니까? 이 사람 도와주다 내 볼일에 차질이 생기면 결국 나만 손해지. 더욱이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니깐 제 갈 길로 간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사마리아인일지라도 내가 이 사람 안도와 주면 이 사람은 살기 힘들겠구나. 그러니 일단 생명부터 살려놓고 보자. 그래서 가던 길 멈추고 자기 가 여행 중에 쓰려고 준비한 기름과 포도주로 싸매어 주고 주막까지 데리고 온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이란 가던 길 멈추고 상대방의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왜냐구요? 우리 모두는 죄로 인해 완전히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는데 우리도 그러한 가운데에서 조건 없이 구원을 받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입장이 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지 아니했더라면 이 사건은 아이들의 동화로 끝났겠지만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경험한 엄연한 현실이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평가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은 영적으로 보면 우리 주위에 강도 만나 죽어 가는 자들이 동네마다 직장마다 거리마다 즐비합니다. 너무나 많다 보니 우리 모두 무감각해져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쳐 버립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가서 제자 삼으라 !" 아무 생각도 없이 자기 기분에 취해 찬양을 잘도 부릅니다. 
성도 여러분 ! 
이 시간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너는 삶의 가치 기준을 어디에 두고 사느냐?" 혹시 세상 노래방 점수에 우쭐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면 내가 열심히 일하는 것 남이 안 알아준다고 속상해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평가 기준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사랑하느냐?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이 땅에 살아가는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은 여러분의 참된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강도 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을 못 본척하고 잘 살아가면서도 자신들이 꽤 괜찮은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써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이 사순절에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웃에게 이 복음을 전해야합니다. 전도란 이웃을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내가 먼저 싸매어 주는 마음과 행동과 사랑의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막과 같은 교회로 데리고 와서 그들이 쉼을 얻고 치유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본문말씀 앞에 23절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종용히 말합니다.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을 알려면 누가복음 10장의 내용을 알아야 하는데 이런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70인의 제자들을 세우고 둘씩 둘씩 짝지어 전도하라고 파송한 사실이 있습니다. 
저들이 전도하고 돌아 왔을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본 눈이 복이 있다고 하신 말씀입니까? 바로 구원할 생명 즉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아니하고 주막인 교회로 데리고오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에 있어서 주인공은 지위나 직분이 아니라 역할입니다. 
어떤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주인공이 될 수도 있고 엑스트라가 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지금 생명 살리는 역할을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마 제사장이 돌아와서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르죠. "여러분 오늘 나는 강도 만난 사람을 만났습니다. 여러분이 기다리고 있어서 못 돌보고 바삐 왔지만 여러분들은 사람들 없는 으슥한 길로 다니지 마십시오. 강도 만날지도 모르니까요. 괜히 주의 종이 말할 때 귀담아 듣지 않다가 낭패 당하지 말고 잘 들으시오". 또 레위인도 집에 돌아와서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했을지 모릅니다. "나 오늘 강도 만난 사람 만났는데 사람은 역시 죄 짖지 말고 살아야 돼.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지었는지 죽을 지경이 되도록 맞았는데 불쌍해서 못 보겠더라고...? 제가 왜 이런 말을 합니까? 우리 주위에 죽어 가는 영혼 살리는 일에는 관심 없고 이런 말장난만 하는 자들이 왜 득실거립니까? 그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바로 깨닫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십자가에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생활 잘해야 합니다. 교회 출석하고 십일조 드리고 교회 안에서 직분자로 불려지는 것이 신앙생활의 전부는 아닙니다. 자신의 신앙생활을 어떠한 종교적인 행위로 스스로 위로 받으려고 하지마십시오.
여러분! 강도 만난 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 그것은 곧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배 끝나고 나서 인사 나눌 때 "목사님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라고 인사하는 분들이 더러 계십니다. 여러분! 그런데 은혜 받았다는 것이 뭡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마음이 전도의 동기가 된다면 전도는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속에 믿지 않는 가족이나 친지를 볼 때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나 정말 그리스도인인가 점검 해봐야 합니다. 누가복음 6:48「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였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뭐라 말씀하십니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제사장 같이, 레위인 같이, 아니지요! 사마리아인 같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찾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갖다 부어야 합니다. 
싸매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막인 교회로 데리고 와야 합니다. 
이 말은 죽어 가는 자를 살리려면 헌신적으로 돌보고 교회로 인도해야한다는 말입니다. 
죽어 가는 자 살리는데는 부비가 더 들면 부담하려고 하는 헌신적인 마음의 자세가 되어있지 아니하면 살릴 수가 없습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 정성을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강도 만난 자의 주막이 되어야합니다. 물론 교회는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장소입니다. 
그리고 강도 만난 자의 주막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의 교회는 강도 만난 자의 주막이 되어야 합니다. 
죽어 가는 영혼 살리는 일에 최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보다 교회가 하는 일에 더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정작 나는 옆 사람에게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습니까? 
존 스탓트 목사는 「옆 사람에게 관심 없는 예배는 바른 예배가 아니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교회 처음 나오는 사람을 배려하고 모두가 특별히 생각해주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세요. 
그럼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답이 나올 것입니다. 
지난주에 드린 태신자 작정 카드를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휴지 버리듯 여기 저기 굴리지 마시고 전도할 대상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면서 기록하여 꼭 내십시오.
다음 주일부터 자리 정돈부터 새롭게 합시다. 교회에 처음 나온 분들이 은혜 받을 수 있는 자리를 몇 자리 비워두셨다가 안내위원이 그 자리로 꼭 안내하여 은혜 받도록 서로 배려하십시오.
또 예배드리기 전에 준비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좋은 노래도 계속 들으면 듣기 거북하기 때문에 잔소리 같은 광고는 잘 안 하려고 합니다. 그동안 수없이 광고하고 설교시간에 여러 차례 말씀드려도 예배준비 하는 일 셋업하는 일 같이 하자고 해도 하는 사람 한 두 명만 지치도록 하지 2년이 넘도록 여전히 못들은 척하고 못 본척한다면 그런 마음으로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는지 저는 궁금합니다. 예배 시작 한 시간 전에 나와보세요. 그리고 함께 준비하고 열심히 기도 드린 후에 예배를 드려보세요. 예배가 달라져요. 식사 마치고 뒷정리하는 일도 그래요. 자기 일처럼 마음을 드려서 함께 하시면 잠깐 끝나는데 그걸 매주 도와달라고 목사가 소리치면 몇 사람이 오고 아니면 별 관심이 없어요. 그리고 특히 새로 나오신 분들에게 좀더 관심을 쏟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바른 예배가 드려져야 하고 강도 만난 자의 주막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여러분의 이웃이 누구인지 꼭 발견해야 합니다. 아무리 바빠도 가던 길 잠깐 멈추고 주막인 교회로 데리고 오도록 힘써야 합니다. 세상살이 지친 자들이 여기 와서 쉼을 얻고 용기를 얻어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먼저 믿은 우리가 돌보고 사랑의 행동으로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실천이 사순절을 보내는 우리에게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명령을 다시 한번 따라하십시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아멘 !

기도에 초청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외아들을 죽이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떤 방법으로 사랑하고 계신지요? 우리가 하나님 사랑을 가장 잘 표현 할 수 있는 방법은 정성이 담긴 예배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얼마만큼 사랑한다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한 주간 동안 예배를 위해서 어떠한 준비를 하고 계십니까?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에 나오십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무엇 때문인지 이 시간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예배에 성공해야 신앙생활에 성공할 수 있고 신앙생활에 성공해야 축복된 인생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준비된 예배를 위해서 여러분이 무엇을 할 것인지 묵상하며 여러분의 몸을 산 제사로 드리도록 결단의 기도를 하십시오.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의 이웃은 누구이냐?"고
여러분에게 그 이웃은 어떤 존재입니까? 
강도 만나 아파하는 사람들을 무심코 지나쳐버리거나 외면하고 살지는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그 영혼들도 여러분과 동일하게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사랑의 헌신을 통해서 그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전도할 대상을 생각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전도 대상자를 품으십시오.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주시라고 간절히 기도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