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식하는 자가 되지 말라”(막 7:1-23)
본문의 말씀은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외식(外式)에 대해서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죄악(罪惡)에 빠지지 말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보다 더 강조한 것은 외식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에 빠지면 회개(悔改)하고 돌아올 수 있지만 외식(外式)에 빠지면 돌아오기 힘들며 다른 사람에게 악영향(惡影響)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러합니다. 본문 1절-2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바리새인과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 와서 예수님께 모였다가 예수님의 제자 중 몇 사람이 깨끗하게 씻지 않는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어떻게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을 수 있느냐고 예수님을 향하여 공격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장로들의 유전에 의하면 정결 의식이 있는데, 손으로 깨끗하게 씻지 않으면 부정한 손으로 간주했고, 그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문제점은 무엇이었습니까?
첫째로 마음의 청결함보다 육신을 씻는 의식을 더 중시했습니다.(2-5절) 
의식은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의식 자체는 수단(手段)이지 목적(目的)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수많은 조항의 의식들을 만들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의식 준수가 곧 구원의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는 그들은 의식을 절대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식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먼저 살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식 자체는 수단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마땅히 따라야 궁극적인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단순히 몸을 씻고 손을 씻는 것이 영혼을 깨끗하게 할 수 없습니다. 손과 몸을 깨끗하게 하는 것처럼 영혼을 깨끗하게 합니다. 손과 몸을 깨끗하게 하기 전에 먼저 영혼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 21-23에서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명령보다 장로의 유전을 더 중요시했습니다.(6-9절) 
장로의 유전은 말 그대로 장로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입니다. 장로의 유전은 본래 율법을 어떻게 하면 잘 지킬 수 있을까 하는 데에서부터 출발을 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을 흘러서 이런 좋은 생각은 사라지고 율법보다도 장로의 유전을 더 중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장로의 유전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 곧 율법은 제쳐놓고 장로의 유전을 더 절대시 하였던 것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장로의 유전에 근거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기에 그 예배는 하나님께 상달 될 수 없었습니다. 의식적인 예배, 형식적인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아니하십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만이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요 4:24)

셋째로 부모 공경의 의무보다 의식 준수를 더 중요시했습니다.(10-13절) 
부모 공경은 율법에 나타난 자식된 의무요, 참다운 특권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부모 공경의 의무를 회피하기 위하여 ‘고르반’이라는 제도를 이용했습니다. 즉 고르반이란 하나님께 드려진 예물입니다. 그리고 예물을 바치기로 약속하면 꼭 바쳐야 하는 특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의롭지 못한 바리새인들 가운데는 부모님을 공경을 예물까지 고르반으로 바쳤다고 하면서 부모 공양을 거부했습니다. 더욱 파렴치한 것은 고르반이 제물 축적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는 점입니다. 즉 바리새인들은 말로만 고르반이라 하여 재물을 분류해 놓고 실제로는 성전에 바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를 눈 감아 준 제사장에게 그 재물의 일부를 떼 주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패역한 세대를 결코 용납하지 아니하십니다.

넷째로 악한 생각을 품고 있으면 더러운 음식 피하는 것을 중시하였습니다.(14-23절) 
더러운 음식과 정결한 음식의 구분은 율법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보다도 더 많은 구별을 하여 백성들을 정죄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19절 하)고 선포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율법을 숭상하고 장로의 유전을 절대시 하는 바리새인은 물론이고 당대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들었을 때에는 모든 것이 아름다웠습니다.(창 1:31)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들은 다 거룩하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한 후에 피조물에 죄가 반영됨으로서 부정한 것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더러운 것을 피하려면 더러운 음식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식물을 더럽게 한 인간의 죄를 먼저 정화시켜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점을 지적하면서 먼저 마음의 악독을 제거할 때에 장결에 이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더러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장로의 유전에 근거한 정결 의식에만 매달리고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외식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하셨지만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바로 외식(外式)인 것입니다.

▶ 외식(外式)은 겉모양에 대한 집착입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생명, 실체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외식하는 사람은 더 많이 기도하여 생명을 만나려 하기 보다는 가짜를 만들어 놓고 죽을 열심 다하여 섬기며 이를 통해 스스로 위안을 삼고 있습니다. 
외출하고 돌아와서 손을 씻는 것은 죄를 씻는다는 의미이며, 물 뿌리는 것은 정결의식을 의미하지만 이는 다 겉모습에 불과합니다. 이들은 생명을 걸고 이러한 유전을 지키는 것으로 신앙적 안도감을 느낍니다. 갈라디아서 1장 14절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어었다”라는 바울의 고백을 볼 때 사도바울도 이같이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만족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라는 어떠합니까? 말씀으로 채우려기보다는 열심으로 채우려고 하지은 않습니까?
물론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에는 열심히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열심이라면 그 열심은 자기 기분이나 자기 만족 혹은 자기 기분을 위한 것이 될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외식이 될 수 있고, 자기의 잣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게 교만함을 범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에 열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이 충분히 채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생명이며 그 말씀이 들어가면 성장과 성숙이 있으며 풍성함을 누리고 능력을 얻습니다. 말씀이 아닌 열심으로는 성장과 성숙이 없습니다. 

간혹 교회에서 생명 아닌 열심만 있는 사람을 두고 많은 사람이 믿음이 좋다 칭찬합니다. 가정에서도 원만치 못한 부부관계 하에서 아내가 밤새 교회 나와서 열심을 내어 기도만 한다면 이를 두고 믿음이 좋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전자에게는 인간관계를 개선하라, 후자에 대해서는 가정으로 돌아가라고 권유하여야 할 것입니다.

▶말씀이 들어가야 회복이 있습니다. 
극단적인 열심으로 빠지는 것은 생명을 만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만나면 열망이 생기고 저사람 같이 되어야겠다는 말이 흘러나옵니다. 유전을 따르는 것과 우상을 믿는 것은 비슷합니다. 허상과 우상 만들어 놓고 광적인 열심 내는 것은 비슷합니다. 정신적 안도를 누리면서도 이것은 아닌데 하며 감추려 합니다. 니체가 추구한 것도 우상과 허상일 따름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생명입니다. 하나님 만나면 겉 사람 아닌 속사람이 변합니다. 진정한 변화는 내면의 변화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만날 수 있습니다. 예배를 통해 생명과 본질을 만날 수 있고 능력 얻을 수 있습니다. 왜 무력하게 삽니까? 하나님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능력은 문제를 해결하는 힘입니다. 그런데 그 능력은 하나님 만나야 합니다. 생명이 있는 사람은 불을 붙이는 자이며 다른 사람을 벌떡 벌떡 일어나게 만듭니다. 내가 먼저 불이 붙어야 다른 사람에게 불을 붙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귀환 후 먹고 살기 바빴으며 그 결과 무기력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자 학개 선지자가 말씀을 붙잡고 백성들에게 불을 붙였습니다. 학개 1장 14절에서 “모든 백성들의 마음을 흥분시키시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를 들어 솥에 부어진 물을 막대기로 휘젓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영적 모습은 어떠합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으로 충만하십니까? 마음속에 흥분이 있습니까? 말씀에 대한 자각(自覺)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진정 하나님을 만나는 것에 흥분됨이 있어야 합니다.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껍데기가 아닌 생명이 되신 예수님을 만나면 가능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의 나됨의 회복 통해 나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외식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 의식하며 삽니다. 정말 피곤한 인생입니다. 이렇게 사는 이유는 생명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의 모든 근원을 사람에 두다 보니 피곤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우리사회는 이원론의 사회입니다. 선과 악, 소유와 존재,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등으로 양분합니다. 그 가운데서는 인생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참된 생명 임하면 다 누릴 수 있습니다. 인간은 존재만으로 또는 소유만으로 살 수 없습니다. 

빌립보서 4장 12절에서 바울은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도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고백합니다. 그 결과 그는 빌 4장 13절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니라”는 고백처럼 어떤 환경에서도 능력 있게 사역할 수 있었습니다. 진정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는 자의 고백입니다.
생명을 받아들인 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일 수 있으며 다 만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살라!”라고 명하십니다. 우리가 외식 때문에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10대에는 10대 다운 삶, 20대에는 20대 다운 삶을 원하십니다. 생명 임하면 자기 인생 즐기면서 살 수 있습니다. 예배를 통해 생명 만나면 감사와 만족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변화 추구한다는 이름 하에 자기 인생 받아들이지 못하며 시기 질투합니다. 그러나 생명 만나면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을 받아들이고 감사하며 만족하고 삽니다. 지금 가진 것으로도 하나님 만나면 충분히 살 수 있습니다. 이제 입으로는 찬양과 격려와 기도와 말씀을 전합시다. 그리고 온 얼굴로 미소 지읍시다. 손으로 일하며 발로 뛰어 다닙시다. 생명 만날 때 가능해 집니다. 나의 나됨을 가지고 이러한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