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란 무엇인가? “사울: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않는 것”삼상15:17-23

지난 주일 "나그네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 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나그네를 돌아보지 않고 자기와 자기 가족만을 돌아보는 것이 죄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나그네를 무시하고 멸시하는 사회가 되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집단 이기주의에 사로잡혀서 나와 생각이 다르고 나와 생활습관이 다른 나그네들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불행한 사회가 되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를 찾아온 탈북자들을 의심하고 정죄하는 사회, 돈을 좀 벌어보겠다고, 옛날 우리들이 독일이나 중동을 찾아갔듯이, 우리 나라를 찾아온 외국인 나그네들을 멸시하고 착취하는 사회가 바로 우리의 사회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 목요일 추석날 나그네를 제대로 돌아보지도 못하고 나그네를 제대로 사랑하지도 못한 죄를 속죄하는 마음으로 저의 집사람과 강변교회 성도 3사람과 함께 여러분들이 자발적으로 헌금한 사랑의 헌금을 가지고 하루 종일 노숙자 나그네들과 중국인 노동자 나그네들을 돌아보고 사랑과 위로와 말씀을 전달하는 일을 조금 했습니다. 이선희 목사님이 어제 밤 늦게 저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왔습니다. 

 “ ‘목사님 말씀이 마음에 많이 왔어요.’ 표현이 조금 이상하지요? 11일 밤 ‘중국인 추석수련회’에서 설교하신 목사님의 말씀을 들은 중국인 형제가 보인 반응입니다. 한국말을 잘 모르기에 은혜 많이 받았다는 표현을 이렇게 하는 것 입니다. 부모님과 형제들 그리고 살던 고향을 떠나 타국에 와서 보내는 명절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더욱 외롭게 만듭니다. 함께 일하던 한국인 동료들이 떠나고, 소리를 내며 돌아가던 기계들도 멈추고, 공장 식당에서 밥 해주던 아주머니들마저 고향으로 가게 되면 라면을 끓여 먹어야 하는 이들의 외로움은 더욱 가중됩니다. 

이 외로운 나그네들을 위하여 목사님과 강변의 가족들이 이번에도 기꺼이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추석수련회를 하는 중국인 200명의 식대와 간식비로 준비해 오신 200만원과 귤 10상자 그리고 김해성 목사님 용돈 20만원 제 용돈 20만원 함께 자리했던 류전도사 10만원 또 집사님이 전해주시라고 주었다는 스타킹 한 보따리를 받고서 ‘목사님! 전번 학기에 장학금을 주셨던 중국동포 류영준 전도사 학비 좀 주세요.’ (류전도사는 안산중국인교회에서 사역하는 연변 과기대 출신의 합신에서 M.Div 과정 중에 있는 중국동포임) ‘작년 여름 방학 식당에서 한달 일하고 100만원을 벌어서 학비에 보탰었는데 이번 방학 때에는 교회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중국인들을 섬겼기에 학비가 없습니다.’ 하고 말씀 드리자 목사님은 다시 지갑을 여셨습니다. 지갑에 있던 만원짜리 20장을 꺼내시면서 나 이제 천 원짜리 몇 장 밖에 없어 하시며 지갑 속을 보여주실 때 목사님은 모르시죠? 그때 눈물이 핑 돌면서 뭉클했던 제 가슴을요. 제가 모자란다고 50만원을 달라고 말씀 드리자 이제 없는데 하시다가 아! 사례비 받은 것이 있다 하시면서 가방을 뒤적거리셨고, 집회를 가셔서 강사료로 받은 15만원을 봉투째 주시고도 모자라 함께 오신 이용환 집사님의 주머니까지 열어 채워주셨습니다. 그날 목사님 앞의 제 모습이 어땠는지 아세요? 아빠 앞에 엎드려 세뱃돈 받는 아이의 심정이었습니다. 응석도 하고 투정도 부리면서 조금 더 달라고 하는 아이의 마음으로 떼를 썼지요. 즐거웠습니다. 어른이 되고는 누구에게도 해 보지 않은 투정을 목사님 앞에서 하면서 든든했습니다. 용기가 생겼구요. 힘들 때 언제든지 뛰어가면 등을 두드려주실 목사님이시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목사님! 전방에서 싸우는 군사들이 후방의 지원이 없으면 이길 수 없듯이 저희들이 전방에서 외국인 노동자와 중국 동포들을 만나지만,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강변교회와 같은 후방의 지원이 없다면 결코 이 사역을 지속적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목사님과 강변교회 모든 성도들의 심으심을 통하여 지구촌 곳곳에서 구원 받은 성도들이 있음을 주님 만나는 그 날에 밝히 알게 되겠지요. 이번 추석에 만 여명의 중국 동포들, 1,200명의 각국 외국인들, 200여명의 중국인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심겨진 복음의 씨앗이 열매 맺어 거두게 되는 그 날에 ‘씨를 뿌릴 때에 나지 아니할까 슬퍼하며 심히 애타했던 우리는 감사할 것 입니다. 귀한 그 일에 쓰임 받았음을 인하여 크게 감사할 것입니다.목사님 그리고 강변의 모든 가족 여러분! 고맙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계속 비빌 언덕으로 서 있어 주십시오. 사랑합니다. 2003년 9월 13일 이선희 드림” 삭막한 우리 사회이지만 이렇게 외로운 나그네들에게 조그만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정성껏 사랑의 헌금을 해 주신 여러분들에게 다시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아침에는 죄란 무엇인가 라는 주제로 14번째 설교를 합니다.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않는 것”이 죄입니다. 사울은 처음에는 아버지의 말씀과 사무엘의 말씀과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한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왕이 된 다음에 사무엘의 말도 듣지 않았고 여호와의 목소리도 듣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시작을 잘 하다가 마무리를 잘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새 신자 때에는 사모하는 마음도 있고 순종하는 마음도 있고 뜨거운 마음도 있었는데 어느덧 사모하는 마음도 없어지고 순종하는 마음도 없어지고 뜨거운 마음도 없어지는 불행한 경우가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이 시작은 잘 했는데 마무리를 잘 못했습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2:1,3). 에베소 교회 신자들도 시작은 잘 했는데 마무리를 잘못했습니다.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2:4). 사울은 시작은 잘 했는데 마무리를 잘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의 세 가지 죄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경 말씀이 사울의 세 가지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째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는 죄를 범했습니다.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여호와의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행하였나이까”(삼상15:19). 사울은 처음에는 아버지의 말씀과 사무엘의 말씀과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한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 기스가 암나귀를 찾아오라고 했을 때 곧 암나귀를 찾으러 길을 떠났고, 선지자 사무엘이 사울의 머리에 기름을 부은 다음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가라고 했을 때 곧 몸을 돌이켜 하나님의 산으로 향했고,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했을 때 하나님의 신에 감동하여 순종하며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왕이 된 다음에 사무엘의 말도 듣지 않았고 여호와의 목소리도 듣지 않았습니다. 
 성경말씀이 거듭해서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고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부지런히 가르치라”(신6:4,6,7).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으리라”(신6:3).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7:24).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어떤 자녀들이 귀하고 예쁩니까? 부모님을 존경하며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는 자녀들이 제일 귀하고 예쁘지요. 그래서 성경은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고 했습니다(엡6:1). 어떤 아내가 귀하고 예쁩니까? 남편을 존중하며 남편의 말을 잘 듣고 순종하는 아내가 제일 귀하고 예쁘지요. 그래서 성경은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했습니다(엡5:22). 어떤 신자들이 귀하고 예쁩니까? 주의 종들을 존중하며 주의 종들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는 신자들이 제일 귀하고 예쁘지요. 그래서 성경은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가장 귀히 여기라”고 했습니다(살전5:12,13). 어떤 제자들을 예수님이 귀하고 예쁘게 보셨습니까?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는 제자들을 제일 귀하고 예쁘게 보셨지요. 베다니 마리아는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눅10:39) 라고 했는데 예수님이 그를 너무나 귀하게 보시고 예쁘게 보셨습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10:42).
 사울이 처음에는 아버지의 말씀과 사무엘의 말씀과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한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왕이 된 다음에는 사무엘의 말도 듣지 않았고 여호와의 목소리도 듣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왕이 된 다음에 두 가지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첫째는 사울이 길갈에서 사무엘을 끝까지 기다리지 않고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번제를 하나님께 드린 일입니다. 사무엘이 길갈에 도착한 후 사울이 번제를 드린 것을 알고 이렇게 책망했습니다.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삼상13:13). 둘째는 사울이 아말렉을 친 다음 하나님이 사무엘을 통해서 명한 대로 그들을 다 진멸하지 않은 것입니다. 양과 소의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했지만 가치 있고 좋은 것은 진멸하지 않은 것입니다. 탐욕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시며 책망하셨습니다. “내가 사울을 세워 왕을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삼상15:11). 사무엘은 사울을 책망하며 불순종의 죄 위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했습니다.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여호와의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행하였나이까”(삼상15:19).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15:22,23). 
 기독교는 들음의 종교이고 순종의 종교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사랑도 들음에서 오고 구원도 들음에서 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15:10).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라”(요14:23). “내 말을 듣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요8:51). 기독교는 들음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고통 소리도 들으시고 우리들의 신음소리도 들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소리도 듣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의 목소리도 듣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가르치심의 목소리도 듣습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는 양의 신음 소리를 듣습니다. 설교는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고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의 음성을 듣는 시간입니다. 이 들음의 관계가 중단될 때 모든 것이 중단되고 맙니다. 이 들음의 관계가 파괴될 때 모든 것이 파괴되고 맙니다. 믿음도 사랑도 구원도 기쁨도 축복도 모두 사라지고 맙니다. 은혜를 받는 길은 듣는 길입니다. 그래서 저녁 예배도 열심히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은 일곱 교회를 향해서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라는 말씀을 일곱 번이나 하셨습니다. 행복한 성도는 듣는 성도들이고 행복한 자녀는 듣는 자녀들이고 행복한 부부는 듣는 부부이고 행복한 사회는 듣는 사회이고 행복한 교회는 듣는 교회입니다. 사무엘의 말에 다시 한번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둘째 스스로 자기를 높인 교만의 죄를 범했습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삼상15:17). 사울이 처음에는 자기를 지극히 작게 여겼습니다. 처음에는 지극히 겸손했습니다. 선지자 사무엘이 자기를 가리켜 이스라엘이 사모하는 지도자라고 했을 때 사울은 자신을 가리켜 “가장 작은 지파에 속한 가장 미약한 사람”이라고 겸손하게 대답했고, 사무엘이 자기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려고 했을 때 사울은 행구 사이에 숨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왕이 된 다음에는 자기를 크게 여기며 교만해졌습니다. 사울은 왕이 된 다음에 스스로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위한 기념비를 세우며 교만해졌습니다.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삼상15:12). 
 성경말씀이 거듭해서 강조하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낮추며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잠3:34).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그 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18:4).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23:23).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4:6).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4:10).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5:5). 
 기독교는 겸손의 종교이고 낮아짐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지만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사도 바울이 서술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낮추되 자기를 가리켜 시궁창에 버려지는 음식물 찌꺼기라고 묘사했습니다. 우리가 겸손과 낮아짐을 상실할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상실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사랑과 축복에서 끊어지고 맙니다. 사울은 교만하다가 하나님의 은혜에서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축복에서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자기의 체면과 주장과 고집을 버리지 못하는 교만한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지고 맙니다. 은혜를 받는 길은 겸손의 길이고 낮아짐의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삼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치시면서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라고 말씀했고 섬김을 받지 말고 섬기라고 말씀했으며 서로 발을 씻기며 서로 사랑하라고 분부했습니다. 낮아지는 길이 사는 길이고 겸손해 지는 길이 사는 길입니다. 사울은 높아지다가 건방져지다가 망했습니다. 

 셋째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시기한 분노의 죄를 범했습니다. 
 사울은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도 않고 자기의 고집과 교만을 버리지도 못하다가 결국 시기와 분노의 죄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어린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고 백성들의 칭송을 받는 것을 보고 사울은 시기와 분노에 휩싸였습니다.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얻을 것이 나라 밖에 무엇이냐 하고"(삼상18:7,8).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을 사울이 보고 알았고 사울의 딸 미갈도 그를 사랑하므로 사울이 다윗을 더욱 더욱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니라"(삼상18:28,29). 
사울은 평생 다윗에 대한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분노에 사로잡혀 사는 불행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 평생 다윗을 쫓아다니며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진 사람, 겸손의 자리에서 멀어진 사람,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진 사람은 결국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분노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가인이 그와 같은 죄에 빠졌었습니다. 아벨이 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을 보고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분노에 사로잡혀서 그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분노는 사람의 살과 뼈를 썩게 하고 마음과 영혼을 죽게 합니다.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잠14:30).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욥5:2). 이웃이 잘 되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사람은 몸과 마음과 영혼이 건강하고 아름답게 됩니다. 그러나 이웃이 잘 되는 것을 보고 배가 아파하면 몸과 마음과 영혼이 병들고 죽게 됩니다. 시기와 질투와 분노가 많은 사람은 그것을 없애버리도록 힘쓰고 또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시기와 분냄"을 벗어버리고 사랑과 참음의 열매를 맺으라고 권면했습니다. 
 저는 시기와 질투와 분노를 품지 않도록 훈련해오고 있으며 비교적 시기와 질투와 분노를 품지 않습니다. 어제 아침 명성교회에서 김삼환 목사님, 최성규 목사님, 박종순 목사님 등 여러분들과 함께 회의도 하고 식사도 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명성교회와 인천 순복음교회가 계속해서 크게 부흥하고 귀한 사역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 중심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며 두분 목사님에게 감사와 기쁨의 마음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대형교회들이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는데 두 교회가 우뚝 서서 사회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사울은 마지막까지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분노에 사로잡혀서 살다가 불행한 마지막을 맞았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울은 시작은 잘 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했고 지극히 겸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왕이 된 후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도 않았고 겸손하지도 않아서 결국 사울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택하신 것을 후회하셨다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라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 이니라"(삼상15:10,11). 저와 여러분들도 처음에 시작은 잘 했는데 마지막에 잘못할 수가 있습니다. 처음에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교회의 일군이 되었지만 마지막에 하나님의 후회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을 소홀히 하면 그렇게 될 수가 있고, 자기를 낮추는 겸손을 상실하면 그렇게 될 수가 있고, 남이 은혜 받고 축복 받는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미워하고 분노하면 그렇게 될 수가 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한 말씀을 다시 읽으므로 설교를 마칩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음이라.”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시기 바랍니다.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마음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화내는 대신 칭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후회의 대상이 되지 말고 하나님의 칭찬과 기쁨의 대상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