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느껴질 때 해야 할 일”(시 13:1-6)

일본 작가 “엔또 슈샤구”가 쓴 작품 가운데 「침묵(沈黙)」이라고 하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일본에 들어온 기독교, 천주교가 박해를 당할 때 극심한 박해로 많은 성도들이 순교를 당한 역사적인 사실을 주제로 해서 쓴 책입니다. 박해자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십자가(十字架)를 좋아하니까 그 십자가에서 죽어 보라며 다음과 같은 고통을 주었습니다. 바닷물이 빠진 다음에 바다 한가운데에다 십자가(十字架)를 세워 놓고 거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묶어 놓았습니다. 잠시 후 밀물 때가 되면 물이 점차 차오릅니다. 그러면 물 속에 푹 잠겨서 꼼짝없이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단숨에 죽이지 않고 오랜 시간 고통 속에서 죽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때에라도 예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버리면 용서하겠다는 조건(條件)을 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교인이 여기서 순교를 당하게 되는데, 물이 점점 차오릅니다. 그들은 계속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이것을 지켜보는 한 성직자는 멀리서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안타까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침묵하시나이까?” 이런 순간에 왜 하나님은 잠자코 계시느냐고 목을 놓아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그때 그의 귀에 하나님의 음성이 강하게 들려왔습니다. “나는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저들의 고통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침묵하시지 않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집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정말 침묵하신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義徒)와 목적(目的)을 깨닫지 못하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서 고통스럽기만 합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信仰生活)을 하면서 언제가 가장 고통스럽고 힘들었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침묵(沈黙)하신다고 느껴질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멀리 계신다고 느껴질 때입니다. 고난(苦難)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데 하나님께서 침묵(沈黙)하실 때의 절망(絶望)합니다. 바로 이때에 우리는 종종 극심한 고통(苦痛)과 영적 상실감(喪失感)을 느낍니다. 이것이 우리의 연약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는 머리로는 하나님께서 침묵(沈黙)하시는 것도 다 이유(理由)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沈黙) 속에서는 교훈(敎訓)이 담겨져 있다는 것도 잘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느껴질 때에 솔직히 힘이 많이 듭니다. 

▶▶ 신앙생활을 즐겁고 기쁨으로 해야 하는데, 기도하여도 응답이 없다면 목소리를 높여서 기도한다는 것은 쉽지 않는 일입니다. 솔직히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에 힘이 듭니다. 물론 어려운 중에도 헌신하고 봉사하면 축복은 아닐지라도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믿음을 갖고 시종여일(始終如一)해야 합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느껴질 때에 딜레마에 쉽게 빠질 수 있습니다. “내가 계속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가? 내가 계속해서 기도생활을 하는가?”라고 고민할 수도 있습니다. 

▶▶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우리들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들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탄식은 하박국 선지자에게도 있었습니다. 합 1:2에서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라고 탄식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도 참으로 고통스러운 가운데 이러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6절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때까지니이까?”라는 탄식의 소리가 4번씩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지금 다윗은 원수 때문에 육체적, 정신적으로 극한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도대체 '어느 때까지'(1,2절) 인내해야 하는지 하나님께 반복해서 물으며, 자신의 답답한 사정을 아룁니다. 다윗은 지금 계속되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 혹시 나를 잊으신 것은 아닌지, 혹은 주님께서 자기에게 얼굴을 숨기신 것은 아닌지,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2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지금 다윗은 심각한 고민을 합니다. 다윗은 고난 때문에 자신이 '혹 사망의 잠을 자게 되지는 않을까?', '원수가 이겨서 기뻐하기는 않을까?'를 상상(想像)하면서 고통스런 시간을 보냅니다.(3,4절)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록된 말씀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말씀을 비탄시라고 합니다. 다윗은 자기 자신을 선민 이스라엘의 왕으로 택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자기 자신을 조롱하고 능멸하는 원수들이 날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외면하시고 계시며 침묵하고 있는 것과 같은 답답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이는 아마도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오랜 방랑 생활을 하는 중에 그 영혼이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기록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 그렇다면 정말 다윗은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느껴질 때에 다윗은 고민만 했습니까? 절망만 했습니까? 좌절의 강가에서 앉아만 있었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다윗은 신앙의 거인다운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주목할 것은 정말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절망 가운데 있는 상황 속에서도 다윗은 결코 탄식과 절망의 단계에서 머물고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세 단계로 되어 있습니다. 탄식과 절망의 단계, 기도의 단계, 찬양의 단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순서적(順序的)이고 점진적(漸進的)입니다. 좌절(挫折) 중에 오래 빠져 있던 사람이 드디어 기도의 자리로 옮기게 되고 기도의 자리에 들어간 사람이 드디어 찬양의 고지에 올라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모습을 본문에서 보게 됩니다.
▶▶ 그렇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들이 보여야 할 모습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비록 짧은 시이지만 본시를 끝까지 읽는 이들로 하여금 극심한 고통 중에서의 애끊는 절규가 어떻게 거친 파도 후의 잔잔한 바다처럼 고요한 평화로 변할 수 있는 지를 감동 깊게 전해줌으로써 여호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의 위대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어느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까? 탄식과 절망의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까? 아니면 기도의 자리로 올라섰습니까? 아니면 찬양의 고지를 정복하고 서 있습니까? 가장 이상적인 현주소는 찬양의 고지에 오르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은혜 받고 절망에 있던 사람이 기도의 자리로, 기도에 자리에 있던 사람이 찬양의 자리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높이 찬양하며 영광 돌리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느껴질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제 러면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생각해 보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1.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느껴질 때에도 절망과 탄식하지 말아야 합니다.(1-2절) 본문 1-2절에서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느껴질 때에 절망과 탄식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 다윗도 절망과 탄식하였습니다. “어느 때까지입니까?”라는 절규를 네 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좌절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느껴질 때에도 절망과 탄식하는데 머물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절망감(絶望感)보다 무서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절망감에 빠지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고난당하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일평생 고난이 없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물론 그 사실을 누구나 잘 알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왕 당하게 되는 고난이지만 비껴가기를 기대하는 바램들이 다 있습니다. 만일 태풍처럼 진로를 바꾸지 않고 정면 대결을 해야 한다면 세력이 좀 완화되어 약하게 오거나 눈 깜짝 할 사이에 재빠르게 통과해 주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본문 1-2절에서 반복적으로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입니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때로 원치 않는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것 중에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춥고, 배고프고, 일이 안 풀리고, 몸 아픈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사랑을 기대했던 사람으로부터 까닭 없는 오해와 배신을 당하는 일일 것입니다. 지금 다윗이 그의 장인 사울 왕이나 친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고난을 당하고 충성스런 부하들이 자기를 떠나 적장의 편에 붙어서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배신을 당하던 그런 상황에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인간들로부터 그와 같은 고통을 당하게 될 때 마지막 도피처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그 같은 고난을 피하거나 아니면 아픔이 덜 고통스럽게 되기를 원하는 소원과 기대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지금 그와 같은 기회도 차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정말 신앙의 사람을 무엇보다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환경이나 사람 때문에 시달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와 같은 고통 중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보지만 마치 하나님이 외면하시거나 버리신 것처럼 침묵만 하시는 것처럼 생각될 때입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지금 그러한 처지에서 고민하며 답답한 마음으로 교회를 다니고 있는 사람이 없습니까? 그러나 알고 보면 그와 같은 고통은 나만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죄인이기에 그와 같은 고통을 당할지라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이지만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시며, 옳은 일만 하시고, 사람들을 사랑하기만 하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배신과 버림을 당하시고, 마지막 십자가에서는 하나님께마저 버림을 당하셨던 분입니다. 막 15:34에서 “제 구 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철저하게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실 때가 있으셨습니다. 

▶▶ 또한 그와 같은 고난을 당한 사람을 예수님이 아닌 다른 사람 중에서 손꼽는 다면 바로 오늘 시편 기자 다윗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부부와 친구가 서로를 버리는 배신과 버림의 전성기를 이루고 있는 시대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하나님마저 인간들처럼 이해관계(利害關係)나 자존심(自尊心)이나 감정(感情) 때문에 사랑하는 백성의 고통을 외면하시고 몰인정하게 버리는 분이실까요? 결코 아닙니다. 인간의 지나친 기대와 성급함이 하나님을 그렇게 오해하는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상 12:22에서 “여호와께서는 너희로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을 기뻐하신 고로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시편 기자 다윗도 그와 같은 시험에 빠져 인생살이가 힘들다고 해서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잊어버리시고, 외면하시고, 버리셨다고 생각하면 절망적인 탄식의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절에서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라고 말씀하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윗과 같이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라고 절망하고 탄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러한 고난과 고통은 나만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신앙의 선진들이 그러한 고난을 겪었습니다. 예를 들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낳고 난 다음 무려 십 삼년 동안 아브라함과의 교제가 단절된 상태에서 침묵하셨고, 이삭은 결혼하여 이십년 동안 기도를 했어도 응답이 없었고, 동방 제일가는 믿음의 사람 욥은 소중한 십남매 자녀들과 재산과 건강을 다 잃었어도 하나님이 침묵하신 채 묵묵부답이셨었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절망만하고 탄식만 하지 않았습니다. 육신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찬송가 344장에서 찬송하고 있는 것처럼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며 이 귀에 아무 소리 아니들려도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섰습니다. 믿음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공적인 삶을 살았던 믿음의 선진의 참 면모는 도저히 일어설 수 없었던 상황 속에서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다시금 일어섰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절망과 탄식이 없었기 때문에 아니라, 그런 상황 속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일어설 때에 하나님께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워주셨고, 다시금 새로운 힘을 주셨습니다. 

▶▶▶ 이러한 모습은 오늘 본문에 나오고 다윗에게도 있었습니다. 성경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무려 십년 동안 하나님이 침묵 하신 채 응답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그러나 다윗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절망만 하고, 탄식만 하지 않고 기도의 단계로 나아갔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진면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①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에 조급(躁急)함으로 하나님을 원망(怨望)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사야서 40장에 보면 바벨론의 포로(捕虜)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침묵(沈黙)하실 때에 조급(躁急)함으로 하나님을 원망(怨望)하였습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사 40:27) 이 말씀은 하나님의 침묵에 대하여 원망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책망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상(仔詳)하게 응답(應答)하실 때가 있고, 어떤 때는 침묵(沈黙)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또 하나님의 침묵에는 깊은 뜻이 있음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침묵(沈黙)하셔도 우리를 잊으신 것이 아닙니다. 졸고 계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그곳에 계시고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십자가(十字架)에 달려 고통(苦痛)당하실 때 침묵(沈黙)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잊으시지 않으셨으며 부활(復活)의 영광(榮光)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聖道)는 하나님의 침묵(沈黙)에 대하여 조급(躁急)하게 원망(怨望)하지 말고 차분하게 하나님의 은총(恩寵)을 기다려야 합니다.
②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침묵(沈黙)하실 때에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도 중요(重要)합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전 32-8에서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어야 역사(役事)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시편 37편 기자는 7절에서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침묵(沈黙)하시더라도 낙심(落心)하지 말고 하나님의 때가 찰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중요(重要)합니다. 
③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同一)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히 13:8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고, 약 1:17 하반 절에서 “...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환경(環境)과 상황(常況)에 따라서 자기 자신이 유익(有益)한대로 행동(行動)하는 변덕(變德)쟁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결코 변덕(變德)을 부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同一)하신 분이십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침묵(沈黙)하신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변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오랫동안 침묵(沈黙)하셨으나 결국 애굽에서 고통(苦痛)당하며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들으시고 구원(救援)하셨습니다.(출 2:24)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約束)하신 반드시 이루시고 마시는 그런 분이십니다. 그래서 히 6:14에서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라고 말씀처럼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복(福)을 주셨습니다.

▶▶ 여러분 중에 혹시라도 절망과 탄식 가운데 계신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조급증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을 믿으면서 다웟과 같이 기도의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2.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느껴질 때에도 기도해야 합니다.(3-4절) 본문 3-4절에서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내가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느껴질 때에도 기도해야 합니다. 

▶▶ 그렇습니다. 다윗은 절망과 탄식의 단계에서 머물지 않고 기도의 단계로 나아갔습니다. 
참 믿음을 가진 사람과 거짓믿음을 가진 사람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서 나옵니다. 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처음에는 좌절하고 항의도 하지만 얼마 후에는 진지하게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하는 자리로 들어가게 됩니다. 탄식에서 기도로 돌아서는 것은 고통 속에서 가장 먼저 체험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윗은 이 기도 시간을 통해서 드디어 ‘내게 무슨 죄가 있나’,‘내가 무엇을 회개하지 않았는가?’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나의 눈을 밝히소서"라고 기도합니다(3절). 이 기도에는 육신의 병을 치료해 달라는 것뿐만 아니라 병 때문에 영혼이 몹시 어두워져 있으니 영혼을 밝게 해 달라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영육(靈肉)간에 사망의 잠을 자지 않기를 기도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잘 믿는는 다윗이 비참하게 죽어버리면 하나님을 안 믿는 원수들이 기뻐하며 하나님을 조롱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매 앞에 장사가 없다는 속담처럼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고난 앞에 약해지는 법입니다. 다윗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고난이 극심해질수록 주변에 신뢰하였던 사람들이 떠나가고 원수들은 기세가 등등하여 압박의 수위를 더하고 있는데 하나님마저 침묵하실 때 그 마음이 얼마나 고민이 심하였었는가 하는 심정이 오늘 성경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본문 2절에서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라는 말씀에서 ‘경영하고’라는 말은 깊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회의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서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고난 중에서 시편 기자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고 있는가를 짐작케 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지막 도피처는 물론 하나님뿐이시며, 도피 방법은 기도뿐이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하나님 또한 그렇게 하면 구원하여 주실 것을 성경에 약속하셨기 때문에 고난 중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시 50:15에서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 58:9에서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렘 33:3에서“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이렇게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 65:24에서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가슴 설레는 말씀입니까? "부르기 전에 응답하겠고, 말을 마치기 전에 들을 것이다"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에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고통 중에 부르짖는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절망만 하지 말고, 탄식만 하지 말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성숙한 성도라면 아무리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느껴질지라도 결코 좌절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교회에 다녀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견디기 힘들고 참아내기 힘든 문제를 만날지라도 쉽게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쉽게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과 같이 기도함으로 참아내야만 합니다. 다윗과 같이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기도해야 합니다. 자포자기(自暴自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밤이 깊으면 새벽이 가까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터널로 들어가는 시간이 오래 걸릴지라도 반드시 터널의 끝은 있습니다. 산이 아무리 높아도 정상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느껴질 때처럼 고통스런 시간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할지라도 다시금 용기를 갖고 기도해야 합니다. 다윗은 견디기 어려운 절망적인 환경에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할지라도 하나님이 묵묵부답 침묵만 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어떤 기도를 했습니까?

① 다윗은 자신이 영적 나태함에 빠지지 않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시편 기자는 견디기 어려운 고난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의 침묵으로 인해 자신이 낙심하고 좌절하여 영적으로 사망의 잠을 자게 되지 않기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그래서 본문 3절에서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라고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도 시편기자처럼 너무 고난이 오래 지속되고 끝이 보이지 않고 그것을 견뎌낼 힘이 없어지게 되면 하나님을 바라보는 영적인 시력을 상실하므로 인해 사망의 잠에 빠지게 될 우려에 대한 염려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믿지만 기도의 응답이 속히 이루어지지 않고 고난이 너무 오래 지속되면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이 무너지면서 마치 불이 꺼진 등대처럼 영적인 어두움에 빠져 좌초하기 쉬운 법입니다. 

잠은 피곤한 육신을 쉬게 하고 재충전하여 다음 날 아침 자리에서 힘차게 일어나 미루었던 일을 힘차게 하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추위에 길을 잃은 조난객이나 침상에서 호흡을 몰아쉬고 있는 중환자에게 잠은 곧 죽음을 재촉하는 것이기 때문에 뺨을 때리며, 눈을 뜨라고 소리를 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정치와 경제의 불황으로 인해 나라가 어렵고 계속되는 불경기와 취업난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는 현실입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도 예외는 아니며 그 고난의 한 가운데 함께 무리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고 생각하다가도 너무나 되는 일이 없고 일이 꼬여만 갈 때 시편 기자와 같이 신앙의 잠이 바로 사망의 잠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영적으로 깨어 있는 생활을 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시편 기자처럼 온갖 배신을 다 당하시고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지새우며 하나님께 기도하실 때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의 응답은 찾아 볼 수 가 없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제자들은 사망의 잠에 빠져 잠을 자고 있었으나 예수님은 깨어서 응답이 없는 기도를 세 번씩이나 거듭하시면서 절망의 어두움을 몰아내셨을 때 마침내 천사가 예수님을 도왔을 때 예수님이 하신 일은 십자가의 고난을 피하신 일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더욱 뜨겁게 기도하신 일이었습니다.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눅 22:43-4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지금 우리가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바로 사망의 잠을 자지 않고 깨어서 십자가를 바라 볼 수 있는 눈, 천국을 바라 볼 수 있는 눈, 나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하나님의 축복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어 달라는 성숙한 기도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요청되는 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살전 5:5-6에서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② 다윗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기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4절)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안 믿고를 막론하고 그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게 될 때 무엇을 더 걱정하고, 염려하는가 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가치관과 소망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견디기 어려운 고난 중에서 무엇보다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지 않으실까 하는 염려와 더불어 또 하나 크게 염려한 것은 그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하는 성숙한 기도였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본문 4절에서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내가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당시 문화는 전쟁을 하더라도 아군과 적군의 싸움이 아니라 아군의 신과 적군의 신과의 싸움으로 간주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을 이기는 것은 상대방이 믿는 신을 이기는 것이며, 아군이 지는 것은 내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 패배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개개인의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의 번영과 실패의 원인이 각자가 믿는 신의 섭리로 말미암는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의 실패가 내가 믿는 신의 영광과 직결되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윗이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것은 자신의 고난으로 인해 주변에 원수들이 자기를 버렸다고 하는 비난하고 조롱하는 것과 더불어 원수들의 신이 자기가 의뢰하는 여호와 하나님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할 것에 대한 염려였습니다. 사람들이 원치 않는 고난을 당할 때 그로 인해 염려하게 될 때 그 염려가 여러 가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고난으로 인해 물질적인 손해를 보지 않을까, 건강을 잃게 되지 않을까, 명예를 놓치지 않을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되지 않을까 제각기 염려를 하게 됩니다.

▶▶ 그렇다면 그 중에 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일까요? 
물론 말할 것도 없이 비록 억울한 고난을 당해 여러 가지를 다 잃는다고 할지라도 그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질까 전전긍긍하며 염려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만사가 형통하게 될 때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앞서간 신앙의 선진들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때는 모진 고난 중에서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마지막 순교할 때까지 고난 중에서 주님을 시인하고 자랑하고 증거 할 때였습니다. 오히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의 더 깊이 체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라도 다윗과 같은 상황을 만난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바로 지금이 우리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염려하는 사람들인가를 분명하게 보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 모범이 바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신 예수님입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짐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고 계속해서 기도했습니다.(단 6:10)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분명히 풀무불 속에 던짐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면서 우상숭배를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리하지 아니할지라도 그들은 결코 타협하지 않고 기도했습니다.(단 3:18) 이것이 참된 신앙의 저력입니다. 믿음은 파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처럼 기도하는 것으로만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께 찬양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에도 하나님께 찬양해야 합니다.(5-6절) 본문 5-6절에서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느껴질 때에 하나님께 찬양해야 합니다. 본문의 기자 다윗도 절망과 탄식에 단계에 있었지만 그 단계에서만 머물지 않고 기도하는 단계로 나아갔고 이제는 하나님을 향하여 찬양하는 단계로 나아갔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느껴질 때에 결코 원망과 불평하지 않고, 기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 성경에는 고난 중에서 찬양으로 승리한 경우가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면 역대하 20장을 보면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이 몇 마온 사람과 함께 여호사밧을 치려고 나아옵니다. 바로 이때에 여호사밧은 여호와께 순종하여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양함으로 연합군을 물리쳤습니다.(대하 20장 21절)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 16장에는 바울과 실라의 찬양이 나오는데, 그들은 심하게 맞고 옷이 찢기고 몸은 엉망이 되었지만 오히려 그들은 기도하고 주님을 찬양 했습니다. 그때에 땅이 진동하고 감옥 문이 열리고 매인 것이 다 풀려졌습니다. 그리고 간수와 그들의 가족이 세례를 받고 결국 온 구라파에 복음이 전파되는 복음의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찬양에는 우리의 어려움을 극복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기도하는 단계에서 하나님께 찬양하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다윗이 참으로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께 승리의 찬양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첫째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5절 상) 본문 5절 상반 절에서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하는 사람은 다윗과 같이 아무리 힘이 들고 어려워도 그 상황과 상관없이 승리의 찬양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의 ‘인자하심’이란 히브리어로 “헤세드”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본래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은총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이 말은 종종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신 것, 또는 그 언약에 대해 신실히 이행하시는 것을 나타내는데, 이때에 하나님의 약속 이행은 그 약속에 대한 의무 이행이 아닙니다. 도리어 자기 백성이 먼저 그 약속을 제대로 이행치 않아 하나님께는 그 약속을 지켜야 할 하등의 의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은총으로 약속을 지켜 주시는 사랑이 헤세드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여기의 인자란 말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뜻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한번 맺으신 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은 감정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약에 충실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우실 때는 항상 피로 세우셨습니다. 구약에서 보듯이 피 없이 세우는 언약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경우에 충실한 언약은 항상 피로 세우셨고 그것이 약속 있는 사랑이 되었습니다. 피로 인해서 증명된 언약을 깨닫는 순간에 다윗은 언약을 믿고 새롭게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 3장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성실하신 하나님으로 인해서 극적인 반전을 이루고 있습니다.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애가 3:20-24) 예레미야 선지자는 성전과 나라와 언어와 정체성과 신앙까지도 잃어버린 가운데서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심을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깨닫게 되면 고통 속에서도 승리의 찬양을 할 수 있습니다.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고통스런 시간들을 통하여 지금까지 지나온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지금까지 자기 자신이 살아 온 것을 자신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응원과 풍성하신 인자하심 때문이었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에 다윗의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찬양이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신비스런 현상입니다. 아직 병이 나은 것도 아니고 현실은 그대로입니다. 

다윗은 기도 중에 하나님과 자기의 문제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외면하시는 것처럼 행동하시는 것은 무엇보다 다윗으로 하여금 다시금 순수하고 아름다운 믿음을 갖게 하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을 깊이 깨닫게 될 때에 다윗은 다시금 하나님을 향하여 찬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다윗도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한때에는 나약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부재중이시거나, 자기를 버리신 것처럼 오해하고 낙심하고 절망하는 절망과 탄식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자하심을 깨닫게 된 다윗은 이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함으로 승리의 찬양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변덕스런 인간처럼 변심하고 배신하는 분이 아니시며, 한번 택하시고 사랑하시는 사람은 영원불변토록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심을 다윗은 고난과 고통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잊고 있었기 때문에 절망했지만 이제 깨닫게 된 이후에 다시금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 49:15-16에서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결코 잊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그렇게 부정적이고 절망적이던 다윗이 한 순간에 딴 사람으로 바뀌게 된 것은 환경이 변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고난 중에서 건져 내셨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의 처지가 일순간에 순경으로 바뀌어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환경의 변화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은혜를 받은 다윗의 마음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의 외적인 환경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으나 마치 산모가 산달이 가까워오게 되면 아이가 더욱 자라 마침내 진통 끝에 옥동자를 출산하는 것처럼 고난 중에 참다운 믿음을 키워 마침내 출산의 기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둘째로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구원을 기뻐했기 때문입니다.(5절 하) 본문 5절 하반 절에서 “...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구원을 기뻐했기 때문에 승리의 찬양을 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기뻐 할 때에 우리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능력입니다. 구원은 내가 한 것이 아니며 내 부모가 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받은 자들입니다. 그것은 누구도 앗아갈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누구도 우리를 망하게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구원을 이야기할 때에 ‘과거형’의 시제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다윗을 어려운 환난에서 구원하여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시 17:7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그 일어나 치는 자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인자를 나타내소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오른 손으로 구원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 18:2에서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 18:50에서 "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영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 62:1에서 "[다윗의 시, 영장으로 여두둔의 법칙을 의지하여 한 노래]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라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곤란 중에 부르짖을 때에 우리를 환난에서 구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시 34:6) 그러기에 다윗은 시편 44:6에서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도 나를 구원치 못하리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시 44:7)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시 95:1)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해야 합니다.(시 96:2) 지금의 다윗이 있었던 바로 하나님의 구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은 다윗은 기도 중에 깨닫게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승리의 찬양을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라도 힘들고 어려움은 분이 계십니까? 다윗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바로 나의 하나님이신다는 것을 명심합시다.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후대하심을 기억하였기 때문입니다.(6절) 본문 6절에서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다윗이 승리의 찬양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후대하심을 기억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서 기도해 보니 하나님의 후대하신다는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하나님의 후대하심을 기억하면서 승리의 찬양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후대하여 주십니다. ‘후대’라는 말은 대단히 큰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후대하신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까말”이라고 하는데, 이 말의 뜻은 “보상한다, 갚아주신다”라는 뜻으로 선과 악 모두에 적용되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선(善)이든 악(惡)이든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갚아주신다는 말입니다. 이는 부모가 손님에게는 따뜻한 밥으로 대접하지만 자식에게는 때로 찬밥을 줄지라도 홀대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이 하나님의 후대하심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선으로 보상해 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확신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용어는 인간의 어떠한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된다는 식의 사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Calvin)

그렇습니다. 비록 다윗은 지금 고난 중에 처하고 있는 것을 하나님이 침묵하시고 계시지만 이러한 침묵의 시간들을 통하여 ① 자신의 잘못된 성품이나 죄를 회개하게 하시고, ②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시고, ③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뢰하며 살게 하시고 ④ 현재 고난을 당한 것만큼 장차 하나님께서 다 보상해 주실 것을 깨닫게 하시는 기회인 것을 알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모세도 시편 90:15-16에서 “우리를 곤고케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의 화를 당한 연수대로 기쁘게 하소서! 주의 행사를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저희 자손에게 나타내소서.”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다윗의 믿음대로 다윗의 고난은 무한이 계속되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니 다윗의 고난이 끝이 났고, 그를 괴롭히던 대적과 원수들은 패배를 당하고 고난을 당하던 다윗은 다시 승리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믿음의 회복으로 말미암아 고난 중에서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이미 받은 구원의 기뻐하고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적극적인 믿음의 사람으로 회복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지금까지 후대하여 주셨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새의 막내 아들인 다윗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그들 세우시고 기름을 부으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 분은 다윗을 사자 같은 짐승으로부터 구원하시고 골리앗으로부터도 지켜주셨습니다. 또한 사울왕의 계획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를 품에 안아 주셨고 다윗이 왕이 된 후에도 숱한 쿠테타와 위험 속에서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같이 한결같으신 분이십니다. 변하는 것은 늘 우리 쪽 이었고 하나님은 결코 변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항상 변치 않는 분입니다. 

(예화) 어느 미국 목사님의 간증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미국에는 나병환자들을 격리하는 섬이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그 중에 한 섬으로 단기 선교를 떠나셨습니다. 일정한 기간 동안 열심히 선교를 하고 마지막 날이 되어 이제 마지막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회중에게 부르고 싶은 찬양이 있으면 함께 찬양하자고 제안을 하였습니다. 그들 중에 어느 한 자매가 몸을 돌려서 목사님께로 향하며 말했습니다. 그 자매는 자신의 흉찍한 얼굴 때문에 목사님의 비위가 상할 것이 두려워 항상 등을 돌려 앉았습니다. 그 자매는 코도 없어지고 얼굴이 너무나 많이 상해 있어서 사람의 얼굴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 자매가 선택한 찬양은 이것이었습니다.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에 내려주신 주의 복을 세어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주의 크신 목을 네가 알리라 ’(찬 489장) 

여러분은 이곳 일본에 오셔서 많은 어려움을 겪으신 분들입니다. 그 많은 역경 속에서 하나님은 은혜와 축복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나름대로 이제 안정되고 자녀들도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믿는 성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후대하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이 은혜와 축복을 잊지 않고 살 때에 어두움을 깨뜨리는 찬양을 드릴 수 있는 것이고 우리가 다시 일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이런 찬양이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멜로디이며 천국의 멜로디입니다. 이것은 성도들만이 부를 수 있는 찬양입니다. 우리는 어두운 세상 속에서 이 찬양을 가지고 담대히 일어나야 합니다. 바울과 실라의 역사처럼 우리도 그렇게 하여 우리 주위의 사람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하며 하나님의 나라가 펼쳐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주의 인자하심과 변함없으심을 의지하고 그 분이 주신 구원과 후대하심을 붙잡으며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역동적인 찬양이 끝나지 않게 하고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오히려 더욱 그렇게 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어렵고 힘든 세상을 살아가면서 감당하기 힘든 고난이 오래 지속되어지게 되면 시편 기자처럼 때로는 하나님이 버리신 것처럼 생각이 될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때로는 믿음 없는 사람처럼 마음에 근심이 가득해지고, 그로 인해 믿음을 포기하거나, 기도를 중단하고 싶은 시험을 받을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누구도 원치 않는 고난이라는 도구는 두 가지 용도로 사용되어집니다. 하나는 고난이라는 도구는 하나님을 이전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하게 만드는 연단과 훈련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고난이라는 도구는 사단이 성도들을 시험하여 하나님 사랑을 의심하고 낙심케 하는 도구로도 사용합니다.

오늘 다윗이 어느 때가서야 종식될지 모르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잊으시며, 숨기신다고 오해를 할 정도로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그러한 상황에서 사단이 의도한대로 낙심하고 좌절하며 하나님을 버리는 어리석은 자리에 빠지지 아니하였습니다. 다윗이 고난 중에 모든 것을 다 잃었을지라도 마지막까지 놓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의심하지 않고 끝까지 신뢰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힘이었습니다. 그 사랑과 자비는 오늘 우리에게도 계속되고 있음을 믿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레미야 애가 3:31-33에서 “이는 주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임이며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니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물론 우리가 어느 때 끝이 날지 모르는 고난을 당하게 될 때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헛되도다." 라는 악한 생각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에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을 신뢰하고 믿음을 회복하는 기회로 삼으셔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 어느 때 끝날지 모르는 절망적인 환경에 처하여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는 믿음과 값없이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하였을 때 고난의 현실 속에서 내뱉던 근심과 탄식이 기쁨과 찬송이 회복되어진 것입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도 예외가 될 수 없다고 생각되어집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믿음이 약화되거나 구원의 감격을 상실하지 말고 오늘 성경의 시편기자처럼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과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회복하고 시편 기자처럼 원망과 불평을 감사와 찬송으로 바꾸는 역전의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시편 71:14-15절에서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더욱 찬송하리이다.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이렇게 고백하며 찬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이 겪고 있는 오늘의 고난이 믿음을 약화시키는 시험이 아니라 도리어 믿음을 견고케 하는 연단의 기회로 삼는 성숙한 믿음의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느껴질 때에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탄식과 절망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탄식과 절망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단계에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의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로 인하여 다시금 하나님을 찬양하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함으로 다윗처럼 궁극적인 승리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