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 맞는 설교 



설교는 성경 본문(텍스트)과 현장 상황(콘텍스트)을 두 축으로 갖고 있다. 따라서 효과적인 설교 전달을 위해 한국 사회 를 분석하고 청중을 이해하는 일은 전통적으로 모든 설교자들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의무이다. 성경 본문에 대한 바른 해석 작업이 야말로 일차적으로 중요한 과정이다. 어쨌든 설교자의 사명은 말씀을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필자의 작업은 한국 사회 분석과 청중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는 것이다. 본문과 현장 상황이 적절하게 연결될 때 설교는 제 역 할을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국 사회’를 특별히 언급한 이유는 한국적 상황에 고유한 혹은 독특한 요소들을 찾아보라는 주문이 들 어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우선 이 주제는 두 각도에서 접근이 가능하다. 하나는 설교자와 청중 사이에 한국 사회를 끼우는 것이다. 즉 ‘설 교&nbsp- 한국 사회&nbsp- 청중’의 도식이다. 이 경우는 설교자와 청중을 감싸고 있는 문화적 환경을 고려하 는 것이고, 설교자가 한국 사회나 문화를 여과해 설교해야 청중에게 도달할 수 있겠다는 문제 의식을 다루게 된다. 소위 말하는 현 장 적실성 있는 커뮤니케이션을 검토하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 사회를 청중의 일상적 삶의 현장으로 놓고 설교의 사회적 의미 를 고찰하는 것이다. 즉 ‘설교&nbsp- 청중&nbsp- 한국 사회’라는 도식이다. 이 경우는 설교가 한국 사회 의 구성적/형성적 담론 역할을 할 수 있는지 그 여부를 검토하게 된다. 설교가 한국 사회라는 장(場)에서 어떤 사회적 의미를 갖 고 있는지 고찰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설교 사역이 지니는 시대적 가치를 확인하고 확보하려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 우선 설 교 행위가 갖는 항구적 역할과 의미를 간략하게 정리해 보려고 한다. 어느 시대 어느 현장에서나 설교의 설교됨을 유지하기 위한 기 본 조건을 확보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설교(사역)의 사회적 의미’를 생각해 보고, 마지막으로 한국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환경을 염두에 둘 때 어 떤 설교의 형태가 바람직한지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한다. >> 설교 행위의 항구적 의미: 설교의 설교됨을 확보하라 우 선 우리는 한국 사회에 맞는 설교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원론적인 측면을 살펴보자. 한국 사회의 특성을 고려했을 때 설교자들이 시 대의 흐름과 상관없이 마음을 기울여야 할 부분들이 있다. 즉 ‘지금 여기’가 아니더라도 설교의 설교됨을 확보하기 위한 필수 요소들 이 있다. 물론 여기서도 한국인의 삶의 자리에 대한 고려가 어김없이 배경에 자리 잡고 있다. 

1. 누가 설교해야 하는가?&nbsp- 말씀의 체험자가 돼야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권위의 붕괴 및 부재를 한탄한 다. 교회 현실에서도 목회자의 권위에 대한 성도들의 태도에 이상 기류가 감지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한국인의 심성에서 영 적 권위에 대한 겸허한 자세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한국 교회 성도들도 경전과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의식을 유지하 고 있다. 
그런데 목회자의 권위는 위태롭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목회자나 설교자의 권위는 경전과 하나님 의 권위에 편승하기만 하면 저절로 확보되는 것이 아님을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목회자의 권위는 경전과 하나님의 권위에 덩달아 주어지 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 스스로 확보하고 유지해야 한다는 말이다. 경전과 하나님의 권위를 대변하는 역할을 자처한다고 해도, 목회자 의 권위는 땅에 떨어질 수 있음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목회자나 설교자 자신의 영적 권위는 스스로 세우기도 하고 무너트리기도 하 는 것이다.설교는 독백이 아니라 청중과 대면하는 일이다. 설교자에 대한 청중의 평가나 이미지가 설교의 신뢰도에 직접 영향을 미친 다. 

설교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기본적으로 기독교의 진리에 투신한 사람이어야 한다. 성경의 가르침에 철두철미하게 헌신 한 실천자요, 구도자로서의 삶을 보여줘야 한다. 말씀 진리 앞에서 일체 사심을 접은 설교자라는 청중에게서 믿음과 인정을 끌어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설교자의 권위에 이의를 제기할 청중은 아마 없을 것이다. 청중이 설교자에 대해 ‘가짜 설교자’라는 인 식을 갖게 되면 설교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설교자는 자신이 설교의 중요한 일부를 구성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 다. 어쩌면 설교자 자신이 설교의 내용이라는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따라서 설교의 공신력을 제고하기 위해서 설교자 자신의 공신 력을 높이는 일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설교자의 공신력은 깊은 영성의 굴착과 하나님 면전에서 살아가는 도덕적 삶의 실천을 통해서만 구축될 수 있다. 설교자는 청중 에 앞서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체험한 사람이어야 한다. 설교에는 설교자 자신의 체험의 증언이 배어 나와야 한다. 생활 현장에 살면 서 성령을 따라 사는 모습을 설교자가 먼저 시범을 보여줘야 한다. 그런 다음에 청중에게 실습과 실천을 요구하고 자신을 본받고 따르 도록 진솔하게 권면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설교자와 목회자의 모습에 청중은 마음으로 무릎을 꿇게 된다. 

2. 무엇을 설교해야 하는가?&nbsp- 엄밀한 하늘의 이치가 설파돼야 설교는 무엇보다 예수님이 분부하신 모든 것들을 가르치고 지키게 만드는 사명이다. 따라서 설교는 복음을 바르게 전달하는 것이 우선이다. 
한국 사회 분석과 청중 이해는 설교 사역의 도구적 차원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청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설교 의 기교나 방안 모색을 뒷전으로 놓을 수 없고 효율적인 의사 전달에 심혈을 기울이는 일도 중요하지만, 설교의 본질인 기독교의 진리 를 전하고 진리를 밝히며 그 결과로 청중의 영적 세계와 정신 세계를 바로 잡는 일이 우선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설교를 들은 청중들의 삶 속에서 진리 안에 사귐이 일어나도록 영적 충격을 던져야 한다. 이런 설교의 본질적 임무가 착오 없 이 진행되려면 시대적 추세에 상관없이, 일시적 유행에 흔들림이 없이 엄밀하게 말씀의 이치만 설파되는 것이어야 한다. 설교가 이 시 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의식 구조를 바꾸고 영적 분위기를 형성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청중의 영적 성장과 성숙을 돕는 설교, 하나님의 생각을 전달하는 설교가 돼야 그런 기대를 현실로 만들 수 있다. 오늘의 강 단 현실을 보면 말씀에 대한 깊은 강해가 실종되고 재빠른 적용이 난무한다. 마치 ‘대중 철학’이 제공하는 삶의 원리들을 기독교 로 채색한 듯한 메시지들이 청중들을 현혹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설교가 말씀에 진지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본문 속에 감추어져 있는 묵직한 메시지를 청중의 기호와 입맛에 맞춰 재가공하는 수준의 설교가 주류를 형성하고 있음을 본 다. 이 시대의 흐름이 그렇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은 본문 속에 담겨 있고 본문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깊 은 생각들을 지나치게 단순하고 가벼운 원리들로 코드 변경을 시키는 일은 마치 ‘금을 구리로 도금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점이 다. 이런 설교 경향이 지속된다면 한국 교회 청중의 체질을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 

복음의 진수를 중량감 있게 깨닫고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은 점차 ‘천연기념물’과 같은 존재들로 되 지 않을까 우려된다.설교 사역은 이 시대의 개인과 가정과 국가적 삶의 척도를 제시하는 사역이다. 말씀의 올바른 강론을 통해 영 적 척도가 바로 세워져야 지금 우리의 상태가 바른지 아니면 엇나가 있는지를 평가해 볼 수 있다. 따라서 설교의 내용이 바른 궤도 를 잡고 움직여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3. 어떻게 설교해야 하는가?&nbsp- 한국인의 사고 방식에 조율돼야 설교는 이 시대와 커뮤니케이션을 이뤄야 한 다. 즉 이 시대를 사는 청중들과 의사 소통을 이뤄야 한다. 설교는 청중과 사이에 공감 혹은 동감을 이뤄내야 한다. 동감이 감동 을 낳기 때문이다. 

일단 설교 내용과 전달 방식에 호감이 일어나고 동감이 돼야 청중의 마음이 끌려오게 된다. 그렇게 되려면 설교가 동시대를 살 아가는 사람들이 듣고 이해하며 공감할 수 있는 설교가 돼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설교 양식의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즉 설교 양식 은 얼마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예를 들어, 청중들의 집중력이 과거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는 현상에 주목 한다. 청중들의 집중력을 고려해 설교 구성과 전달하는 방식을 조정한다. 

설교가 효과적으로 들려져야 한다는 측면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설교 양식과 전달 사이에 갈등과 긴장의 요인 을 발견할 수 있다. 설교 양식과 전달 방식이 시대적 제약이나 구속을 전혀 벗어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설교의 시대적 스타일 을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긴다. 각 시대마다 올라오는 새로운 움직임을 파악하고 그것을 설교 양식에 흡수하는 순발력이 있으면 좋 다. 

한국 교회에 설교가 정형화되고 획일화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설교자들 스스로 획일성을 좇아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이 든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적 특징에 이야기식 설교 양식이 적합할 것이다. 이것은 사실 이 시대에 독특한 흐름은 아니 다. 한국인은 전통적으로 이야기식 담론을 특징으로 갖고 있는 민족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연역적 사고에 전혀 친숙하지 않다. 

연역적 사고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 청중들에게 귀납적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지극히 온당한 일이다.>> 설교의 사회적 의미 설교가 이뤄지는 일차적인 장소는 교회 공동체이다. 

설교란 교회 공동체의 고유 영역에 속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즉 설교는 교회 안의 담론이다. 그런데 우리는 설교의 사회 적 의미를 함께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사실 설교가 현실에 개입하고 있다는 측면을 새삼 강조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보 다 중요하게 설교의 사회적 의미가 새롭게 조명돼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1. 설교의 장을 확대해야 한다.
그동안 설교는 지극히 제한된 공간에 제한된 청중과 사이에 자체 담론을 형성하는 차원에 그쳤다. 어느 한 목회자의 설교는 그 설교를 듣는 청중인 교인들에게 영향과 파장을 미칠 뿐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자기 교회 교인들이 다른 목회자들의 설교에 노출되거나 적극적으로 섭렵하려는 것을 그 다지 반기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교인들은 다른 목회자들의 설교로부터 어느 정도 차단돼 있었다. 그러나 요즘에 인터넷이 발달 돼 있고 라디오나 케이블&nbspTV 등으로 기독교 방송이 나가고 있기 때문에 교인들이 다른 목회자의 설교에 노출되는 것 을 막을 방법이 없어졌다. 적어도 기독교계 안에선 설교의 유통 폭이 훨씬 넓어졌고, 교인들이 다른 목회자의 설교를 접할 수 있 는 기회도 상당히 확대되었다. 설교의 장이 확대된 것이다. 
설교의 유통 범위에 변동이 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한국 교회에서 설교의 장이 교인들의 세계에 국한돼 있다 고 할 수 있다. 이전에 민중 교회를 통해 한국 사회의 현실 즉 교회 바깥의 불의한 현실을 설교에 직선적으로 반영했던 때가 있었 다. 필자가 판단하기에 민중 교회가 직면했던 난제는 설교의 대상이었던 민중 교회 청중의 현실과 교회 바깥의 참담한 현실 사이가 실 존적으로 상통하는 경우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설교를 듣는 청중이 피부로 느끼는 ‘나의 현실’과 이념적으로 파악 된 ‘현실’ 사이에 완벽한 일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민중 교회가 청중 확보에 실패하고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 던 여러 요인들이 있겠지만, 아마 이 부분이 그 중에 하나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어쨌든 설교가 교회 바깥의 현실에 직선적으로 관여하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더구나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 들이 교회 안에서 선포되는 설교에 관심을 기울이는 경우란 극히 드물다. 설교가 교회 바깥의 현실에 직접적으로 반응을 보이는 경우 에 정치적으로나 계급적 이해 관계의 상충으로 곤욕을 치를 가능성도 상존한다. 

따라서 적지 않은 설교자들이 교회 바깥의 현실을 설교에 반영하는 데 한계와 부담을 동시에 느낀다. 실상 설교자가 교회 바깥 에 있는 사람들까지 염두에 두고 설교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설교가 교회 바깥 일반 사회의 마당에서 그다 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 사회에서 설교가 차지하는 사회적 의미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강조하 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렇게 돼야 한다는 당위성도 강조해야 한다. 설교는 말 그대로 교(敎) 즉 기독교의 가르침이나 진리를 설(說)하는 것 이고 기독교의 ‘교’, ‘진리’, ‘가르침’은 성격상 교회 안과 바깥의 세상에 두루 연관을 갖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일차적으 로 설교가 청중을 매개로 교회 바깥의 세상과 연결 고리를 맺고 있다. 설교자는 청중에 의해 설교 내용이 현장에서 실천되고 일상화되 기를 기대하고 촉구하게 된다. 

설교자는 사역의 속성상 소위 사회 변혁적 열정을 소유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설교를 통해 한국 사회로 침투 혹은 잠입하려 고 시도하게 된다. 이 부분이 설교자에게 주어진 도전이다. 설교 사역이 청중을 매개로 사회 변혁적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설교자 는 생활 현장과 분리되지 않아야 한다. 

설교가 한국 사회와 접촉할 수 있는 연결 고리는 다양하게 존재한다. 이들 연결 고리를 얼마나 진지하게 활용하느냐 하는 측면에서 설교의 사회적 의미가 확대될 수도 있고 왜소해질 수도 있다. 

2. 설교 언어는 사회 친화적이어야 한다 설교는 청중을 매개로 한국 사회에 개입하고 있다. 설교 행위는 설교를 직접 듣 는 청중과의 정신적 및 영적 교섭이지만, 청중들의 삶이 한국 사회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갖는다는 구조적 및 실존적 연계성으로 인 해 이미 사회적 성격을 부여받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설교의 대상이 되는 청중이 사회적 삶에 참여하는 존재들이라는 현실에서 설교와 사회의 관계를 간접적인 것보다 오히려 직접적 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마땅하다. 설교의 청중은 교회 바깥의 사람들과 동일한 생활 공간을 공유한다. 그들의 삶은 상당 부분 중첩 된다. 같은 직장, 조직, 단체, 업종 등 삶의 중복이 일어나지 않는 공간이 없다. 교회 바깥의 사람들은 청중과 현저하게 다른 사 람들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중요한 가능성이 발견된다. 

한국 교회 청중을 향한 설교는 곧장 교회 바깥의 한국 국민들에게도 들려지고 이해되고 공감될 수 있다는 점이다. 달리 말 해, 교회 안의 청중이 이해하는 설교라면 교회 바깥의 사람들도 이해하지 못할 이유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를 듣는 청중의 현 실 체험과 교회 밖의 사람들의 현실 체험이 상호 부딪히고 교섭하는 폭이 의외로 넓기 때문이다. 

설교는 일차적으로 청중에 의해 ‘나의 이야기’로 수납돼야 한다. 그리고 청중의 이야기는 교회 밖의 사람들에 의해서도 ‘나의 이야기’로 수긍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설교의 언어가 문제로 대두된다. 

설교의 언어나 전달 방식이 한국 사회의 일상 언어에서 분리돼 독자적인 언어 세계를 구축해 가고 있는 한 설교의 한국 화 및 현장화는 요원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설교의 언어와 설교를 통해 전달되는 내용이 교회라는 공간 내부에서만 통하는 언어 가 되면 교회 바깥의 사람들과 소통이 막히게 된다. 한국 교회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가 일반인들이 들어도 흥미와 관심을 유발 할 수 있는 정도의 언어적 친화성/친근성을 확보하는 일이 요긴하다. 

그래야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고 귀를 기울일 수 있는 흡입력 있는 가르침이 설파될 것이고, 설교를 통해 한국 국민들 의 마음이 열릴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설교가 한국 사회 안에서 의미 있는 공간을 당당하게 차지할 뿐 아니라, 교회 바깥 사람 들의 담론 속으로 치밀하게 뚫고 들어가기 위해 설교 언어의 사회 친화성을 회복하는 일이 시급하다. 

3. 설교가 시대 흐름을 조타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설교가 ‘현장 적실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설교의 영향력이 ‘조직 유지용’의 차원을 넘어 불신자들의 마음을 얻는 지경으로까지 확대돼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설교의 현실 개입은 누구나 인정하는 설교의 기능이다. 설교 사역이 존속하는 한 설교의 현실 개입은 피할 수 없 게 된다. 설교는 다양한 현실 삶의 조건과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청중으로 하기 때문이다. 설교를 통해 청중의 영적 성장과 성 숙을 도모하는 것은 양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런 영적 계발이 일상에서의 구체적인 삶과 매개돼야 한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중 요한 부분이다. 

개인적 혹은 집단적 삶의 성공과 좌절을 맛보게 만드는 현실 구조를 파악하지 못하면 설교의 현장 적실성과 청중 설득력은 떨어 지게 된다. 현장 적실성을 확보한 설교의 역할은 무엇보다 구체적인 생존 상황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다 넓은 지평 을 볼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구체적 현장의 삶을 바르게 영위할 수 있는 영적 이치를 제공하는 것이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 설교가 시대적 현실을 향해 예언적 가르침 혹은 선도적 가르침을 선포해야 한다. 설교가 당시 시대와 호흡을 같 이 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 시대 흐름과 엇나갈 수 없는 노릇이지만, 설교는 시대 분위기나 흐름을 비켜서서 비판적 입장 을 끈질기게 견지해야 한다. 설교가 당대 사회의 관심이나 가치나 유행을 반영하는 선에서 멈춰 설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결 국 설교는 한 시대 전체의 사고 방식 및 정신 세계의 흐름에서 불필요하게 소외될 필요도 없지만, 동시에 당시 사회 전반에 대한 질 타와 더불어 적극적 차원에서 방향타 역할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4. 설교자의 현실 인식이 제고돼야 한다.
설교와 한국 사회의 접촉은 설교자 자신을 통해서도 진행되고 있다. 왜냐하면 설교자 자신이 현실에 개입해 살고 있기 때문이 다. 따라서 설교가 사회와 연결되는 고리는 단지 일상의 현실을 살고 있는 청중을 통한 것뿐만 아니다. 현실을 동일하게 살고 있 는 설교자의 주체적 체험이라는 채널을 통해 현실의 정서가 은연중 설교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설교자가 현실적 정서의 흐름에 민감할 경우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현실 삶의 구성 요소에 의해 설교의 내용과 형식을 어 느 정도 규정해 버리는 정도까지 영향을 받게 될 위험성도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설교자는 이러한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인식해 야 한다. 
설교자의 한국 사회의 접촉 부위는 다음 두 가지로 관측된다. 첫째, 설교자의 현실 인식이 설교에 투영된다는 측면이다. 설교 자의 현실 세계 인식이 철저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그렇지 않고 설교자의 현실 인식이 허구적이거나 불철저한 것일 때 설교를 통 해 전달되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현장 적실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를 위해 설교자는 생활 현장에 대한 귀납적 학습을 해 야 하고 지식을 널리 얻고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얻은 지식에 대한 검토와 예민한 반성이 빠질 수 없다. 그리고 현실에 대해 생 각하고 묵상해야 한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바른 분별과 판단을 거쳐 정확한 현실 인식에 도달하기 위함이다. 

둘째, 설교자가 현실을 통해 깨닫는 하나님의 이치가 설교의 깊이를 좌우한다. 설교자가 말씀의 세계로 깊이 들어가 성경의 원 리와 이치들을 체득하거나 체인하고 있다면, 그런 말씀의 실력을 바탕으로 우리 삶의 현실을 보게 될 것이다. 삶의 현실이 보인다 는 것은 ‘지금 여기’의 현실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과 경륜을 본다는 의미다. 바둑의 정석을 깊게 공부하고 바둑을 두는 실력 이 고수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바둑판을 보고 미리 수(手)를 읽는 능력이 생긴다. 태권도의 고수가 되면 상대방의 허점이나 급소 가 눈에 들어오게 된다.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nbsp119:105)라고 했다. 성경의 세계 로 깊이 들어가면 우리 눈에 삶의 현실이 보이게 될 것이다. 설교자는 이 땅의 현실 속에서 성경의 현실을 꿰뚫어 보고, 두 현실 이 서로 대응되는 방식을 볼 수 있는 수준의 투철한 현실 인식을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깊은 설교가 들리게 된 다.>> 

한국 사회에 맞는 설교: 설교의 지향점을 찾는다. 설교가 대 사회적 함의를 갖는다는 측면을 염두에 두고, 이제 우리는 설교 의 구체적인 형태를 각론적 차원에서 짚어보려고 한다. 한국 사회와 청중을 이해할 때 설교의 지향점이 어디에 놓이게 될지 대충 윤곽 을 잡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설교가 청중에게 제대로 접속되려면 한국 사회라는 설교 환경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한국 사회란 정치적, 경제 적, 문화적, 사회적, 종교적, 도덕적 및 심리적 환경 일체를 말한다. 설교의 청중은 일상 생활의 각종 현장이 제기하는 문제들 에 부딪히고 씨름하며 몰입해 살고 있다. 따라서 설교자는 청중이 누구인지 먼저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청중 이해는 청중의 기호에 영합하려는 취지가 아니라 청중과의 바람직한 접속을 이루려는 설교자의 기본적이며 동시에 필수적인 관심 사항이다. 물론 설교자가 마주 대하는 청중은 항상 고정된 청중이 아니다. 

청중은 항상 변하기 때문이다. 주일마다 대하는 같은 청중이지만 그들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청중이 살고 있는 일상의 환경이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그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야 하는 청중도 달라지는 것이다. 

설교자가 청중의 변화를 미처 감지하지 못하거나, 청중의 변화를 자극하는 시대 분위기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면 설교자와 청 중 사이에 거리가 생기게 된다. 설교자와 청중 사이의 소외 현상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 청중의 세계와 아주 동떨어진 세계에 살 고 있는 설교자들이 있음을 종종 보게 된다. 설교자는 청중의 요구와 필요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감각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설교자의 입장에서 파악하고 있어야 할 한국 사회 환경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통시적 환경이고, 다른 하나는 공시적 환경이다. 

통시적 환경은 한국 사회의 역사와 전통과 직결돼 있는 문화 종교적 환경을 말하고, 공시적 환경은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이라 고 부르는 최신 경향들을 포함한 당대의 지적 정신적 및 정치 경제적 현실 흐름을 말한다. 통시적 환경과 공시적 환경을 선명하게 구 분 짓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통시적 환경은 이미 공시적 환경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는 차원에서 상호 연관을 맺고 있기 때 문이다. 그러나 억지로 임의적 구분을 해 보자면, 통시적 환경은 고정된 양상을 띠지만 공시적 환경은 수시로 변화하는 특징을 띤다 고 할 수 있다. 

공시적 환경의 변화가 통시적 환경의 강화 및 약화를 초래하고 있음을 함께 주목하게 된다. 어쨌든 오늘날 우리의 목회 환경이 나 설교 환경은 두 환경의 교묘한 조합을 통해 이루고 있음을 보게 된다. 두 환경의 조합에 대한 예민한 관찰이 효과적인 설교 사역 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1. 통시적 환경: 한국인의 의식 구조 
1) 호의적 설교 환경&nbsp- 영혼을 흔드는 설교를 하라한국의 설교자들은 행복한 설교 환경을 갖고 있다. 최근 목회 환경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이 없지 않음을 알고 있다. 목회하기가 쉽지 않다는 푸념들이 나온다. 

성도들의 기대가 떨어진다거나 설교가 길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지루한 내색을 나타낸다거나 아니면 아무리 설교를 해도 성도들의 삶에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는 외국에 거주하는 관계로 한국의 목회 환경 변화의 내막을 속속들이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적어 도 ‘설교 환경’과 그에 수반하는 ‘성경 해석학적 환경’은 한국과 비교할 만한 지역이 없다는 점이다. ‘설교 환경’이란 설교자 가 성경 본문을 해석하고 해석된 내용으로 강단에서 설파하려고 할 때 수위 조정을 해야 할 압박을 느끼는지 그 유무의 측면을 말한 다. 

필자가 오랜 기간 살았던 영국의 에든버러는 설교 환경이 매우 열악하다. 성도들 중에 비판적/자유주의적 신학에 노출된 사람들이 일부 있기 때문에 설교자는 지레 부담을 느끼게 된다. 

설교자의 성경 해석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노선을 벗어나 체험적이거나 영적인 측면에 대한 강조로 약간이라도 흐르는 경우에 즉 각적으로 부담스런 반응이 돌아온다. 한두 번 그런 반응을 접하게 되면 영적으로 강한 설교나 깊은 설교를 하기가 조심스러워지게 된 다. 

한국에서 설교를 할 때 적어도 영적인 차원과 관련해 수위 조절을 해야 할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거꾸로 청중의 입장에서 설교자가 더 영적 깊이를 소유하고 있기를 기대하고 있는 현실이 역설적으로 설교자에게 부담을 주고 있다. 

이런 설교 환경은 설교자 자신이 성경의 세계로 무한대 진입하는 노력을 경주하도록 채찍질한다. 이런 설교 환경이나 해석학 적 환경에서 설교는 영적 깊이를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외향적으로 볼 때, 객체인 청중의 가볍고 변덕스러우며 대중적인 기호 를 맞추기 쉽지 않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청중의 입장에서 오히려 더 말씀 자체의 영적 깊이에 목말라 하고 있음 을 직시해야 한다. 

청중의 기호나 입맛은 표면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겉만 보고 설교의 수위나 방식을 조정할 이유가 없다. 청중은 가벼운 감 동에 열성적 반응을 보이는 것 같지만 실상 그들은 깊이를 갈구하고 있음을 갈파해야 한다. 청중의 진정한 관심은 하나님의 말씀이 참 되게 선포되고 있는지 여부에 놓여 있다. 

설교가 언어적 유희에 경도되거나 튀는 말솜씨로 청중에게 어필하려 한다면 설교 환경의 진상 파악에 실패한 꼴이 될 것이다.

2) 초월 세계를 향한 열린 태도&nbsp- 하나님을 설교하라한국인의 심성은 하늘을 향해 열려 있 다.&nbsp21세기에 들어선 오늘에도 이런 한국인의 성향에는 큰 변동이 없다. 한국인의 성향은 현실 중심적이기도 하지 만 동시에 초월 세계의 실재를 인정하는 종교성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인과 동양인의 우주관 및 내세관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 다. 한국인은 현세 구복적인 성향과 더불어 현세 초월적 성향도 강하게 지니고 있다. 

두 성향 사이에 형성되는 적절한 긴장 관계가 한국인의 삶에 균형을 잡아주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태도는 현실 문제의 해법 을 초월적인 힘의 도움을 구하는 모습에서 나타난다. 이 땅의 현실을 살아가노라면 누구나 예기치 못한 각종 문제들에 봉착하게 된 다. 자신의 힘에 의지해서 도저히 풀 수 없는 일이 발생할 때 사람들은 초월적 존재를 향해 도움을 청한다. 혹자는 이런 한국인 의 심성이 무속주의의 부정적 영향에 기인하는 것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이런 종교적 감수성의 존속은 한국 기독교를 위한 커다란 자산이 될 수 없다. 서구 정신 세계에서 목격되는 독립 적 사고 내지 합리주의적 사고는 하늘에 대한 의존을 벗어나도록 만들었던 자연 과학적 세계관에 토대를 두고 있다. 성숙한 인간 자화 상은 자신의 실존적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입된다. 초월적 힘에 기대거나 의존하는 것은 현대인의 자질이 아니라 는 교육도 주어진다. 

현대 문명인은 하늘에 의지하지 않는 것으로 의식화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인의 심성에는 초월 존재에 대한 의존도가 살아있음 을 본다. 한 걸음 나아가, 초월적 존재를 향해 열린 태도는 단순히 현실 문제 해결을 위한 수단이라는 차원을 넘어선다. 한국인 들 중에 특정 종교적 전통에 속한 사람들의 경우에 적지 않은 수가 초월 세계를 경험하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다. 최근에 기공(氣 功)이 각광을 받는 것이나 초능력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 고조도 이런 경향을 일부 반영한다. 기독교는 범사에 하나님을 의존하도 록 가르친다. 

또한 현실에서 봉착한 어려움들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앙망하도록 계몽한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의 초월적 간섭 을 통해 현실의 난제들이 풀리는 원리들과 예증들을 무수히 확보하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하늘과 초월적 존재에게 자신의 현실 문 제 해결을 의뢰하는 한국인의 모습은 무조건 배척할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런 성향을 여전히 담지하고 있는 한국 청중을 향한 설교는 하나님에 대한 의존을 현실감 있게 재발견하는 것이어야 한다. 하 나님에 대한 의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수준까지 도달하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 영광의 추구는 결국 인간 존재의 본질을 건드 린다는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나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지 등 우리의 존재 자체를 문제시 삼는 것 이어야 한다. 

이 시대는 너무 분주해서 ‘왜 사느냐?’ 혹은 ‘어떻게 사느냐?’라는 질문으로 묵상할 여유를 갖지 못한 채 삶을 영위하 고 있다. 초월적 존재를 향해 열린 태도를 갖고 있는 청중 심성의 틈새를 뚫고 이 땅의 현실을 넘어 본질적이고 절대적이며 영원하 고 비교할 수 없이 위대한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는 설교가 돼야 한다. 청중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끌어 올려주는 설교가 선포 돼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 의식이 상승하도록 만드는 일이 시대적으로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초월적 힘을 의지하는 한국인의 심성 은 자신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수준에 쉽게 이를 수 있는 장점을 갖는다. 자기 부정이나 자기 포기와 하나님에 대한 전적 인 인정이나 의지가 체계적으로 학습된다면 한국 청중들의 영적 수준은 수직 상승할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그런 학습과 실습이 설교를 통해 구체적으로 전달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설교는 이런 한국인의 심성을 건강하게 자극하고 견인하는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무분별한 현실 집착과 무한적인 경쟁 관계로 돌진하도록 부추김을 당하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삶의 근원적 이슈를 묵상하도록 자극 을 주는 역할이다. 현실에 몰입해 살아가는 청중들을 향해 이 세상을 넘어 존재하는 초월 세계 및 영적 세계의 실재를 환기시키 고 이 땅의 현실을 영원의 차원에서 바라보도록 원근법을 제공하는 일은 중요하다. 

다른 한편으로 설교자가 유의해야 할 측면은 지나친 현세 부정과 현실 도피를 조장하는 설교가 되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한국 인이 갖고 있는 초월 세계에 대한 감도를 지나치게 혹은 무리하게 조장해선 곤란하다. 예를 들어, 초월 세계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청 중의 현실 감각을 마비시킬 위험이 있다. 

극단적 현실 혐오나 현실 부정을 통해 신비주의적 성향을 부추기는 일은 기독교의 가르침과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초월 세계 혹은 영원한 세계의 차원에서 현실을 조망하는 시각이 무차별 매몰되는 현상을 좌시하고만 있어서도 곤란하다. 

성경에 근거한 건전하고 건강한 가르침이 선포되어 현실의 부품 내지 노예 상태로까지 전락해 전전긍긍 일상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이 땅의 청중에게 현실의 무게를 견뎌낼 소망의 빛을 제시해 줘야 한다. 


3) 경전 권위에 대한 순복&nbsp- 실천적 지혜를 설교하라 지금 한국 교회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늘고 있 는 가운데 세속화 경향에 대한 지적이 부쩍 늘고 있다. 더 이상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맹랑한 시대 분위기를 질타하기도 한 다. 그러나 한국인은 전통적인 가르침의 권위에 순복하는 심성을 여전히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경전의 권위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순복은 크게 손상되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권위에 대한 도전 및 저항은 진정한 권위 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억지 권위를 부리려는 사람들에 대한 적대감이 노출되는 것이다. 필자는 여러 경험을 통해 한국 청중은 진 정한 권위 앞에 언제든지 순복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한국 교회 안에서 권위에 위기가 초래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목회자들의 자업자득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설교 는 단순히 성경 말씀에 대한 지적 이해를 도모하는 행위가 아니다. 말씀 강론에 뒤이어 청중의 변화까지 목표로 삼아야 한다.

 ‘이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명쾌한 지침이 주어져야 한다. 청중이 시중(市中)에서 실천할 수 있는 가 르침들이 설파돼야 한다. 생활 현장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의 길을 따르며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설교는 성경에 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길과 생활 현장에서 관찰되는 하나님의 길을 연결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설교는 성경 본문에서 발견되는 메시지를 오늘의 현실에 적용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한국적 개념의 설교는 그 차 원을 넘어서야 마땅하다. 설교자는 성경 본문 투시와 오늘날 현실 투시 사이에 다리를 놓은 경지로 들어가야 한다. 즉 설교자는 성경 에 대한 깊은 학습을 기초로 오늘의 생활 속에서 현재 진행형으로 개입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뜻을 읽어내는 수준으로 돼야 한다는 말이 다. 

시편 기자는 “내 눈을 열어 여호와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nbsp119:18)라는 소망을 읊었다. 성경 말씀의 세계를 오래 힘써 익히고 묵상하면 하나님의 경륜을 파악하는 눈이 트이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땅의 현실을 말씀의 빛에 비춰 오래 익히고 관찰하며 묵상한다면 현실 속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경륜 을 볼 수 있는 눈이 트이게 된다. 따라서 설교자는 성경 본문과 더불어 이 땅의 현실도 밀접하게 관찰하고 주도면밀하게 묵상하는 실 력을 키워야 한다. 설교자가 이 땅의 생활 현장에서, 피조 세계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이치를 찾고 발견할 수 있는 안목이 열 릴 때 그것을 성경의 가르침과 연결할 수 있게 된다. 

설교자는 설교를 듣는 청중들이 살고 있는 생활 현장으로 뚫고 들어가 그들의 삶의 현장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을 밝혀주는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은 전통적인 의미의 적용을 훌쩍 뛰어넘는 경지로 들어가게 된다. 

설교자는 설교를 통해 청중에게 자신이 생활 현장을 통해 보고 깨달은 하나님의 뜻과 경륜을 구체적인 정황과 함께 가르치는 것 이다. 그래야 청중도 설교를 통해 현실 삶을 성경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안목이 열리게 된다. 청중은 설교를 통해 현장에서 드러나 는 무수한 영적 이치와 원리들을 배우고 깨달으며 터득하게 된다. 

그 다음에 청중의 삶 가운데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이치와 원리를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실습하게 된다. 따라서 설교의 적용은 설교자가 강단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청중이 삶의 현장에서 하게 된다. 

여러 가능성 중에 최선의 방도 혹은 가장 시의(時宜) 적절한 이치를 찾아 행동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 바로 설교의 바른 적 용이다. 설교자는 청중에게 실천적 지혜나 생활 지혜를 전수하고, 그것을 청중은 올바른 행동으로 적용하는 일이 바람직한 구조가 된 다. 

4) 감성이 이성에 앞선다&nbsp- 감동이 있는 설교를 하라한국인의 특성을 흔히 이성보다 감성적인 심성에서 찾는 다. 사실 한국인은 매우 감정적인 민족임에 틀림 없어 보인다. 한국인은 ‘정’(情)이 많기도 하고 ‘정’에 약하기도 하다. 

한국인의 인간 관계는 계약에 의한 것보다 다분히 ‘정’에 근거하고 있다. 규정과 법에 따라 허용되지 않는 일들도 ‘인정’ 에 호소하면 융통성이 발휘되기도 한다. 필자가 살고 있는 싱가포르만 해도 한 번 규정을 어겼으면 아무리 호소를 해도 융통성을 보이 지 않는다. 오히려 호소를 하는 한국인이 이상한 사람들로 치부된다. 

한국인의 감성은 음주와 가무를 즐기고 신바람이 날 때까지 놀기를 좋아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한국인의 마음에 여전히 ‘어머 니’의 무조건적 희생적 사랑에 대한 집단적 기억이 강렬하다. 따라서 ‘어머니’를 부르면 코끝이 찡해지는 정서상의 움직임을 보인 다. 한국인은 직관적이어서 치밀한 논리를 통한 설득에 심정적 적응이 매우 더딘 편이다. 

싸움을 하거나 서로 말다툼을 하더라도 술을 한 잔 나누거나 식사를 같이 하는 것으로 엉킨 감정을 풀어버리는 체질이다. 

IMF 사태가 닥쳤을 때 온 국민이 금을 팔아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려고 나섰던 일 등은 한국인의 마음이 움직이면 저력을 발 휘할 수 있음을 보여준 좋은 사례이기도 하다. 흔히들&nbsp21세기는 영성의 시대, 감성의 시대, 영상의 시대, 체험 의 시대라고 말한다. 그래서 예배도 이런 흐름에 맞춰 중심 이동을 해야 한다는 관점들이 조심스레 개진되고 있다. 즉 설교 중심 의 예배에서 신령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예배로의 전이를 전망한다. 여기에 찬양의 비중이 높아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청중의 심령을 만지기에 찬양이 가장 효과적인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측면이 있다. 

한국인은&nbsp21세기가 오기 전에도 두드러지게 영적이고 감성적이며 체험적인 민족이었다는 사실이다. 이성의 시대에 서 감성의 시대로 전이를 말하지만, 한국인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감성 시대를 줄기차게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새 삼&nbsp21세기의 신종 기류로 감성적 코드를 부각시키는 것에는 다소 시대 착오적 발상이 작용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다분히 서구적 시각으로 한국 사회를 재단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이런 관찰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한국 교회는 초창기부 터 감성 목회를 중시해 왔다. 심령 부흥회나 부흥 사경회가 좋은 예가 된다.필자도 어렸을 적에 시골에 살면서 부흥회에 자주 참석했 던 기억이 난다. 

부흥회에 가면 찬양을 크게 많이 불렀다. 기도 시간에 대부분 통성 기도로 큰 소리로 외치며 부르짖었다. 집회 장소가 떠나 갈 듯이 시끄럽게 기도했다. 부흥사들의 설교는 사람들의 감성에 호소하는 메시지가 주를 이뤘고, 설교가 사람들을 울리기도 하고 웃기 기도 했다. 

설교와 예배는 감동 추구가 핵심이었다. 그런 부흥회의 분위기는&nbsp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제동이 걸렸다. 주지 주의적 성경 공부를 강조하는 흐름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 강단 설교는 소위 지성인의 코드에 맞추려고 노력하면서 부흥사 스타일 의 북 치고 장구 치는 감동 코드가 서서히 무시를 당하고 폄하되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부흥사의 이미지가 시대에 한 발짝 뒤처 진 것으로 비쳐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nbsp21세기를 빙자해 감성 코드에 대한 강조가 다시 한국 교회 안에 새롭게 대두되고 있는 현상을 바 라보는 필자의 느낌이 다소 묘하기까지 하다. 한국 교회의 흐름이 감성 추구로 방향이 돌아서는 것에 반감을 가질 이유는 없다. 

다만 감동의 주체가 분위기가 아닌 설교 자체가 돼야 한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할 필요가 있 다.&nbsp1960~1970년대 부흥회가 성행하던 시절에 예배는 신령함 그 자체였다. 청중의 갈급함과 부흥사들의 카리스마 가 상응하면서 뜨거운 분위기를 연출하곤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균형 잡힌 설교와 복음의 파괴력을 소지한 설교의 부재를 한탄했다. 

부흥회를 통한 통속적 말씀 사역이 한국 교회의 경박함과 감정적 치우침의 주 요인이라고 진단하고 질책했 다.&nbsp1980년대 이후 주지주의적 성경 공부의 확산은 성경 지식의 팽창을 가져오고 성도들의 지적 수준을 높여 주었 다. 그러나 왠지 은혜와 감동과 영성에 허점이 생긴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사람들의 신앙 생활도 냉랭해지고 감흥이 사라졌다. 

예전과 같이 마음을 움직이고 불타는 듯한 열정에 사로잡혀 은혜를 체험하고픈 영적 갈망이 상승하게 되었다. 영성이 깊은 강 해 설교가 아닌 무미건조한 본문 설교가 강단을 식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부흥회가 주도하던 시대에 말씀의 깊이에 문제가 있었 고, 성경 공부가 주도하던 시대에 은혜와 영성의 깊이에 문제를 초래했던 것이다. 

21세기에 동일한 현상이 재현되어선 곤란하다.&nbsp21세기에 추구하는 감동은 한국인의 타고난 감성적 심성을 말초 적으로 자극하는 것이 되지 말아야 한다.&nbsp21세기에 추구하는 감동은 말씀의 파괴력을 회복한 감동이 돼야 한다. 다 만 인지적/주지적 말씀 이해 차원을 넘어 심정적/영성적 말씀 이해를 도모하는 말씀 사역의 수준을 구현해야 한다. 즉 말씀이 이성 적 설복을 넘어 감성적 설복에까지 나아가야 한다. 설교가 예배의 핵심에서 물러나도록 하려는 발상은 매우 큰 착오가 아닐 수 없 다. 설교 위치의 자리 바꿈은 교회의 미래를 염려하게 만드는 일이다. 

오히려 설교 사역이 감동 생산의 핵심 역할을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설교가 우리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음으로써 감동과 감격 과 눈물과 회개로 들어가도록 설교 사역이 질적으로 차원 변경을 이뤄야 할 때다.&nbsp21세기야말로 “성령의 검 곧 하나 님의 말씀”(엡&nbsp6:17)을 갖추고, 설교를 통해 사람들의 내면 세계가 흔들리고 심령 골수가 깨어지는 설교 사역 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설교가 깊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 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 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nbsp4:12~13)

2. 공시적 환경: 한국인의 삶의 자리모든 설교는 역사성을 띠게 된다. 설교는 초역사적 혹은 초시대적 행위가 될 수 없 게 돼 있다. 설교가 초월적이고 개인의 영적 구원에 집중하더라도 이미 그것은 역사적 한계 상황을 무시할 수 없으며 역사적 평가 를 벗어날 수도 없게 된다. 그런 점에서 모든 설교 행위는 역사성을 띠지 않을 수 없다. 

1) 정신 세계의 혼돈 상태&nbsp- 영적 척도를 설교하라오늘 우리가 사는 한국 사회의 시대상을 크게 두 측면에 서 진단할 수 있다. 하나는 정신 세계의 붕괴 현상이요, 다른 하나는 삶의 척도가 와해된 현상이다. 두 흐름에 대한 싸움이 앞으 로 한국 교회의 존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란 사실은 이미 적지 않은 사람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한국 사회가 보이는 부정적 흐름의 한 측면은 정신 세계의 황폐화이다. 오늘 한국 사회는 윤리 부재의 상황, 도덕 불감 증, 음란 문화의 확산 및 부정과 부패의 고질화 등 갖가지 병리 현상들을 양산하고 있다. 한국 사회를 어둡게 만드는 부정적 요인들 이 극대화되고 있다. 이혼율이 증가하고 가정 파괴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물질에 대한 숭상 및 성공과 권력을 향한 사람들 의 과도한 집착은 이 시대의 절대적 가치로 군림하고 있다. 도덕이나 정의나 정조나 신념 등은 구시대적 유물인 양 푸대접을 받고 있 음이 우리의 현실이다. 한국 사회에 공동체성을 언급할 토대가 서서히 증발하고 있음을 본다. 개인 이기주의와 집단 이기주의만 난무하 는 동물적 현실이 우리의 자화상이 아닐까 한다. 

이런 한국 사회의 모순과 병리 현상들은 그대로 교회 현실에 반영돼 나타나고 있다. 교회가 사회에 영향을 미치기보다 사회 가 교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형세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로, 보편적 가치 기준과 진리 주장을 무력화시키는 포스트모더니즘이 형성하 는 다원주의와 상대주의의 침투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파장 효과로 인해 기독교 복음에 대한 의구심이 광범위하게 조장되고 있다. 서 로 다름을 인정하고 다양성을 중시하는 시대 경향을 일방적으로 매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원주의는 지역 문화의 활성화에 촉매 역할을 하기도 한다. 서구의 잣대로 타 문화의 가치를 일방적으로 평가하던 시대는 끝나 고 있다. 입장과 입장이 부딪히고, 상충하는 이해 계가 갈등을 만들어내는 시대에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더불어 살아가도록 주문하 는 정신적 환경을 딱히 거부할 명분은 없다. 

다만 이런 흐름이 종교의 영역에서, 특히 기독교의 정체성에 근본적인 회의를 부추기고 있음이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여기 에 그동안 지배자 노릇을 해 왔던 서양 문화에 대한 심리적 반발과 그와 함께 서양 종교로 인식돼 왔던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한 몫 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또한 다원주의와 상대주의의 틈새를 등에 업고 각자 소견에 옳은 대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시대적 방종을 견제할 적절한 장치 가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는 이 시대의 흐름에 삐딱한 경고를 발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아닌가 생각한다. 교회가 이 시대의 모순 과 부조리에 대한 자명종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면 이 시대에 더 이상 소망을 찾을 수 없게 될지 모른다. 

교회가 이 시대와 사회를 치유하고 혼탁한 풍랑들을 막아서는 방파제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정신 세계의 황폐나 다원주 의 및 상대주의의 영향으로 인한 인간 삶의 파편화는 성경 진리의 깃발을 높이 들어야 치유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 설교 는 영적 척도를 세우는 역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진리는 진리여야 한다. 

진리의 설파에 타협과 절충이 있을 수 없다. 점차 무감각해지는 사람들의 양심과 심령에 영적 척도가 엄연히 살아있음을 환기시켜 줘야 한다. 설교가 이 시대를 향한 전투적 성격을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궁핍한 시대&nbsp- 공동체적 당파성을 설교하라1998년에 소위&nbspIMF 위기라고 부르던 경 제 난국이 들이닥친 이후 한국 사회는 지속적으로 궁핍한 시대를 지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직장을 잃고 실직자로 전 락하고 회사들은 도산했으며, 길거리에 노숙자들을 양산시켰고, 빈익빈 부익부의 사회 편중 현상이 심화되었다. 

그 와중에 자살이 급등했고, 경제적 파국으로 인한 이혼율도 부쩍 늘었다. 한국 사회 전반이 불안과 시계 제로의 예측 불허 의 불확실한 상황을 통과하고 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힘겨운 사회 경제적 현실로 인해 버거운 삶을 영위하며 신음하고 있음을 본 다. 교회는 이 땅에 소외되고 버려진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궁핍한 자, 힘없는 자, 소외된 자 및 상처 받은 자들에 대한 끈질긴 관심과 사랑을 보여야 할 때이다. 이제 교회 는 자체 성장을 추구하던 동력에 제동을 걸고 주위 사람들의 아픔에 눈을 돌려야 할 때다. 교회가 사회 봉사에 관심을 쏟고 실제 적 실천에 돌입해야 할 때다. 

교회의 대 사회적 책임이 어느 때보다 절박하게 강조해야 할 그런 때다. 앞서 우리는 설교가 설교자의 현실 인식과 설교자 의 ‘입장’이나 ‘관점’을 은연중에 투사할 수밖에 없는 것임을 살펴보았다. 이와 관련해 설교자가 서 있는 사회적 위치에 주목한 다. 

우리는 이것을 설교자의 계층적 관심 혹은 편향성이라 부를 수 있다. 어느 시대에서나 설교자는 계층적 제약에서 벗어나 있어 야 한다. 어느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듯한 인상을 주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이런 제약성을 민감하게 고려해야 하지만, 설교자가 성 경 자체의 계층성과 당파성을 무시하거나 간과한다면 더욱 곤란하게 된다. 여기가 설교자가 설교자로서 서 있어야 하는 독창적인 위치 요 특수한 입장이다. 

성경은 분명히 가난한 자, 억울한 자, 압제 당하는 자, 연약한 자 등의 무리에 대한 편향적 입장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 다. 여기서 설교자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성경의 당파성 및 편향성은 다른 계층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대립각 을 세우기 위함이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즉 계층간 알력과 투쟁을 조장하는 차원에서 당파성을 드러내는 것이 성경의 의도나 메시지 가 결코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가난하고 압제 당하는 사람들을 향한 당파적 관심은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함께 정의로운 사회를 구축하기 위한 방편으로 강조되 는 것이요, 그런 점에서 성경이 드러내는 당파적 관심은 공동체 전체의 참여를 요청하는 일종의 공동체적 당파성이라 부를 수 있다. 

교회 공동체 전체가 공동체적 당파성을 가지고 가난하고 연약하며,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실천하게 될 때 교회의 공동체성이 빛을 발하게 되고 교회의 생명력이 살아나게 된다. 

3) 자본주의적 가치관의 편향&nbsp- 성경적 가치에 기준한 회개를 전방위로 설교하라한국 사회는 자본주의적 가치관 의 실험장을 방불케 한다. 서구 사회의 다양한 풍조들이 직수입돼 실천되고 있다. 한국 사회의 주도적 가치 혹은 시대적 가치는 거 의 서구 편향적이다. 

한국 사회의 전통적 가치와 문화가 자리다툼을 위한 각축을 벌이고 있지만, 전반적인 한국 사회의 경향은 서구에 경도돼 있음 이 사실이다. 한국 사회가 자본주의화되어 있음은 세속주의, 무한 경쟁, 성장주의, 물량주의 등으로 표출되고 있다. 한국 사회는 세 속 문화가 판을 치고 있다. 한 마디로 ‘잘 먹고 잘 살기’가 이 시대의 핵심 가치로 등장했다. 

윤리와 도덕의 경계선이 무너진 것은 이미 지난 시대의 일이 되었다. 누드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영화 배우들의 선정적 사진 들이 인터넷에 다량으로 돌고 있다.&nbspTV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이혼, 탈선, 불륜, 성매매, 폭력 등과 같은 주제들 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무차별 공략하는 포르노 사이트들은 사람들의 가치관에 심각한 위협을 주고 있다. 

무한 경쟁적 사회 분위기는 더 이상 한국 사회의 공동체성을 언급하기 어색하게 만들고 있다. ‘돈’과 ‘성공’을 위해 전력으 로 질주하는 사람들에게 주변 이웃과 공동체를 마음에 담을 여유가 있을 리 없다. 다른 사람의 희생을 딛고서라도 돈을 벌어야 하 고 출세를 해야 하기 때문에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게 된다.&nbsp1990년대 후반 경제난을 겪으며 중산층이 엷어지면 서 한국 사회의 계층화가 가속되고 있다. 

이제 한국 사회 전체를 공동체적으로 묶어줄 수 있는 이념이나 가치가 상실되어 버렸기 때문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한국을 등 지고 외국으로 탈출하려고 줄을 서는 형편이다. 한국 교회의 현실도 어찌 보면 한국 사회를 축소해 놓은 인상을 준다. 성도들의 삶 을 봐도 그렇고 적지 않은 수의 목회자들도 세속 문화의 마수에 걸려들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세속 문화의 흐름을 막고 설 수 있을 정도의 청렴결백한 신앙인들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목회자는 어떠한가? 최근 ‘에어 컨 목사’로 상징되듯이(모텔 에어컨에 매달려 있다가 떨어져 죽은 인천 지역 어느 목사의 사건) 목회자의 성적 타락이 한국 사회 와 교계에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목회자들의 경쟁은 도를 지나고 있다. 목회 세계에서도 ‘성공’이 절대 가치로 군림하고 있다. 

값싼 은혜를 덤핑 처리하건, 말씀의 순수함을 변질시키건 상관없이 일단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하기만 하면 면죄부를 제공받는 것이 현실이다. 

목회자의 능력, 자질, 인격, 소명까지도 교회의 양적 성장이 판정해 주는 형세가 되었다. 교회 성장을 이룬 목회자들은 새로 운 시대의 새로운 지표로 사람들이 본받고 닮으려는 흠모의 대상으로 된다. 양적 성장을 이룬 교회가 다른 교회들의 자존심과 특수성 을 공허하게 만드는 블랙홀 역할을 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교회 성장의 모델이 되는 대형 교회들이 한국 교회 분위기를 획일화시키고 있음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교 회가 말씀을 중심에 둔 영적 사역인지 아니면 회중을 모으는 종교 사업장인지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겪게 만든다. 양적 성장에서 질 적 성장으로 관심 이동이 일어나야 한다는 외침이 공허한 메아리가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시대의 한국 교회 강단의 설교는 성경적 기준에 입각한 회개를 무차별 설교해야 한다. 물론 시비를 거는 설교가 아닌 거 룩한 설복을 통한 설교가 돼야 한다. 설교는 이런 세속화 경향에 대해 저항하고 중화시키며 해독 작용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성 장’과 ‘경쟁’으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적 가치를 좇다가 함께 침몰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설교의 시대적 사명을 다 시 환기시켜야 한다. 

맺은 말
지금까지 한국 사회의 통시적 및 공시적 환경을 추적해 그에 따라 설교의 형태가 어떤 식이 돼야 할지 생각해 보았다. 이것 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선포돼야 할 설교의 방향성에 대한 일종의 각론적 제안에 해당한다. 설교자의 사명은 본문에 충실함과 동시 에 사회 환경에 정통하는 일이다. 

설교자는 이중 언어자로 통역의 역할을 하는 것에 비견된다. 성경의 언어에 정통해야 하고 동시에 이 땅을 사는 사람들의 현장 언어에도 정통해야 한다. 

본문과 상황이 설교 안에서 균형을 잡지 못하고 있으면 성령님이 역사하실 여지도 그만큼 축소될 것이다. 설교는 본문에 충실하 지도 않고 상황에 적합하지도 않게끔 엉터리로 해 놓고 성령님이 알아서 역사해 주실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다. 

한국 사회의 흐름을 짚어 보고 그 흐름을 감각적으로 수납하면서 설교의 방향과 형태를 적절하게 조정할 수 있다면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가 이 시대를 사는 청중들에게 보다 더 의미 있는 담론으로 들리게 될 것임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