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은 과연 사람을 죽이기 위한 법인가?  


하나님은 왜 지키지도 못할 율법을 주셨는가?  
이런 질문들은 교회사에 시대마다 제기 되었고,  
이로 인해 율법주의자와 율법폐기론자들이 서로 신학적 논쟁들을 하여왔다.  
이것은 비단 과거 역사의 일이 아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율법에 대한 잘못된 태도로 인해 교회 안에서 서로 갈등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과연 율법의 성경적이며 교회적 기능은 무엇인가? 

율법의 기능 
율법의 기능을 말하기 전에 먼저 중요한 대 전제를 명심해야 한다. 그것은 율법의 시여자(施與者)자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약 1:21). 다음은 율법의 수혜자가 구속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을 섬기며 열국 가운데 하나님을 드러내야 할 사명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사실이다(출 19:5,6). 그렇다고 하면 율법을 받은 그 백성들의 예배와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과 찬송을 만민 중에 거두시고자 함이었다(사53:7). 다시 말해 율법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에 있지, 사람의 축복과 영화에 있지 않았다. 다만 사람은 율법을 지켜 하나님 영광을 돌려드리는 삶을 살 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축복을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율법을 지키질 못했다. 항상 실패하고 말았다. 율법은 완전한 순종과 마음으로부터의 복종을 요구하였지만, 죄로 인해 부패한 인간의 심성은 하나님의 법에 복종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신 27:26 갈3:13 엡4:19 롬8:7). 인간은 원죄와 자범죄를 늘 안고 살기에 하나님의 율법을 향한 절대 무능과 불능만이 드러낼 뿐이었다. 결국 해 아래 어떤 인생도 율법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린 자가 없으니, 인생은 다 죄인이기 때문이었다(롬 3:23). 

바로 여기에 율버의 기능과 의미가 있다: 1) 율법은 주권주 하나님이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광의 이유와 방도를 알려준다. 2) 율법은 사람이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드려 할 영광의 존재적 사명을 알려준다. 3) 율법은 인간이 결코 ''하나님께 영광''을 이룰 수 없는 본질적 무능의 죄인 됨을 밝혀준다. 그래서 4) 율법은 또 다른 ''하나님 영광의 길''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한다(롬 3:24). 한 마디로 율법은 오직 예수가 은혜임을 일깨우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사람은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과 하나님 영광을 이룰 수 있게 된 것이며, 이것이 복음의 실체이다. 

율법과 은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 악하거나 부족하거나 거짓되지 않고, 거룩하며 선하며 의롭고 완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롬 7:12). 주님께서도 율법을 폐함이 없이 한 점 일획이라도 다 지켜져야 한다고 하셨다(마5:18). 그렇다고 하면 율법에는 주님의 일관된 의지와 뜻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율법 아래서 자신의 부족과 연약과 무능을 발견하는 것이요(롬7:15-24).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과 용서와 평안을 얻고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는 것이니(롬8:1-4), 곧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고 그 덕을 선전하는 것이다(엡 1:6,12,142:3-10). 

따라서 성경에서 율법을 앎은 곧 그리스도 은혜의 그 귀중성과 고상성과 위대성을 발견함이요, 그런 은혜를 바로 깨닫는다고 함은 곧 율법을 아는 것이다. 율법 없이 은혜만을 말하는 자는 방임주의자이며, 은혜 없이 율법만을 말하는 자는 율법주의자이다. 전자는 주관주의적 신앙풍조의 오류에 빠져 감정적 신앙생활로 그릇되기 쉽고, 후자 또한 건조하게 자기도 지키지 못하는 잣대로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상처를 안겨주기 쉬어, 결국 양자는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라고 하신 주님의 뜻을 훼손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집(교회)을 맡는 지혜로운 청지기는 새것과 옛것(은혜와 율법)을 때를 따라 교훈해야 한다고 주님이 말씀하셨던 것이다(마13:52). 이처럼 율법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더할나위 없이 중대한 영향과 의미를 갖는다. 율법이 그리스도인 삶과 실제적으로 어떤 관계를 가질까? 

율법과 그리스도인의 삶 

율법 아래 무능함과 은혜 아래 그 구원의 사랑을 감격한 성도는 틀림없이 성령의 감동을 따라 말씀대로 살고, 말씀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율법의 요구를 이룩하는 사람을 지향하기 마련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자연적으로 율법의 완성이 되고 마침이 되는 원리이다(롬 13:10).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 되고 만다(고전 10:31). 

예를 들면, 다윗이 왕위에 오른 뒤 최초로 중대하게 시행한 일 중에 법궤를 그 성으로 운반한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다윗이 내용적으로 뿐 아니라 상징적으로도 하나님이 이스라엘국가를 다스리시는 신정국가의 체제를 구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운반 도중에 웃사가 죽고, 다윗도 크게 놀라며 두려워하게 되었다(대상 13:9-13). 이 일로 인해 다윗은 자신의 선한 의도마저도 ''하나님의 규례(율법)''에 어긋날 경우 하나님이 진노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깨끗이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후에 다윗은 보다 더 신중하게 만반의 태세로 준비한 뒤에 하나님의 규례를 따라 제대로 법궤를 운반함으로, 온 백성 앞에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존귀를 드러내며 더 큰 찬송과 경배와 영광을 돌려드릴 수가 있었다(대상 15:1-16:36). 

다윗의 밧세바 사건도 그런 경우이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불륜과 살인의 큰 죄악을 저질렀다(삼하11:27). 이 일로 인해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보내어 하나님의 진노를 공지하셨고(삼하 12:1-14), 다윗은 그 율버의 진노 앞에 깨끗하게 자신을 쳐서 복종했고 밧세바가 불륜으로 낳은 첫째 아들의 죽음을 깨끗하게 수용하였다(삼하 12:22-23). 이렇게 하나님의 공의(율법) 앞에 자신의 죄를 철저희 고백하고 시인한 다윗을 하나님이 기뻐하셨고(시51:17), 그에게 밧세바에게서 난 둘째 아들인 ''솔로몬''을 사랑하시어 후임 왕으로 직접 지목하시는 큰 긍휼과 은총을 나타내셨다(삼하 12:24 대상 22:9). 바로 여기에 하나님 주권의 위대성과 율법 아래 있는 인생의 영광돌림이 있는 것이다.  

율법의 목적은 사람들 자신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에 있다. 교회의 존재 의미와 목적 또한 그것이며, 교회의 법도 이를 위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슨 문제이든지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이나 교회 법 앞에서 자신을 비추어 어긋났다고 하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됨을 깨끗하게 시인하고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다윗처럼 보다 신중하게 자신을 살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광을 돌리는 법을 따라야 한다. 비록 그것이 자신의 때를 늦추거나 어려움을 겪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영광을 거두시며, 교회는 교회로서 덕을 세우고, 성도는 성도로서 자기 위치를 확립할 것이요, 그곳에 다윗의 축복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고려신학교 연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