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회퍼, 디트리히(Bonhoeffer,&nbspDietrich,&nbsp1906-1945)의 삶

1. 들어가는 말
본회퍼는 신학사(神學史)에 있어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엄청난 분량의 제안(提案)들을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다양한 해석을 허용하는 단편적인 작품들을 남겨 놓았다.
그의 위대한 영향력은 그의 학문적인 저작으로만은 해명될 수 없고, 오히려 신학과 삶의 역사의 관련에서 해명될 수 있다.

2. 약력
1906년&nbsp2월&nbsp4일 : 본회퍼는 블레슬라우(Bleslau)에서 출생했다. 그의 부친은 블레슬라우대학에서 정신병학(精神病學)과 신경학(神經學)을 위한 교수로 활동했다.
1912년 : 가족이 베를린으로 이주함.
1923&nbsp-&nbsp1928년 : 본회퍼는 튀빙겐대학과 베를린대학에서(특히&nbsp- 하르나크에게서)신학을 공부했다. 나중에 그는&nbsp- 바르트와 더욱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1927년 : 본회퍼는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학위논문은 <성도의 교제>&nbspSanctorum&nbspcommunio,&nbspNeuausgabe&nbsp1986년).
1928&nbsp-&nbsp1929년 : 바르셀로나(Barcelona)에서 전도사 생활을 함.
1930년 : 베를린대학의 조교(助敎)로서 조직신학을 위한 교수자격 논문(<행위와 존 재>&nbspAkt&nbspund&nbspSein)을 썼다. 미국 뉴욕에서 연구를 위해서 체류했 고,&nbsp2년 동안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함.
1933&nbsp-&nbsp1935년 : 영국 런던에 있는 독일인 교회의 목사로 활동함.
1935년 : 본회퍼는 핑켄발데(Finkenwalde)에 있는 고백교회의 신학교(Predigerseminar)를 맡았 고 그 학교가 문을 닫을 때까지(1937년), 공동체적인 삶의 형태를 이끌어 왔다(<<신도의 공동생 활>>&nbspGemeinsames&nbspLeben&nbsp1938,&nbsp1983). 
그 이후에&nbsp1936년과&nbsp1941년 사이에 본회퍼는 점증(漸增)하는 압력을 받게 되었다: 교직 박탈, 강연 금지, 집필 금지와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1938년 : 그는 히틀러(Hitler)에 반대하는 저항 운동과 긴밀하게 접촉하고 그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1943년 : 체포됨.
1945년&nbsp4월&nbsp9일 : 플로센뷔르크(Flossenburg) 포로수용소에서 처형되었다 (<<항거와 복종, 옥중서간과 수 기>>&nbspWiderstand&nbspund&nbspErgebung.&nbspBriefe&nbspund&nbspAufzeichnungen&nbspaus&nbspder&nbspHaft,&nbspposthum&nbsp1951,&nbspNeuausgabe&nbsp1990).

3. 본회퍼의 신학과 생애
가장 큰 주제이면서도 유일한 주제는 ‘이 세계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현실성’이었다. 본회퍼는 이 현실성을 우선 교회론 적으로 파악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이 같은 시도에서 경험적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育身)으로 해석했다: “그리스도는 공동 체로 실존하신다.”
본회퍼는 개시(開始)된 교회의 투쟁(Kirchenkampf)을 참된 교회와 거짓된 교회 사이의 대립으로 경험했다.  그로부 터 “고백”(Bekenntnis), “복종”(Gehorsam), “제자직”(Nachfolge)과 같은 개념들이 그리스도의 현실성 을 식별할 수 있는 구성적인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다.
(<<나를 따르 라>>&nbspNachfolge,&nbsp1937,&nbspNeuausgabe&nbsp1989, “알 면서도 의식적으로 독일 고백교회를 떠나는 자는, 자기 자신을 구원에서 벗어나게 하는 자이다”).&nbsp1930년대 말 경, 고백교회에 대한 실망과 교회와 무관했지만, “바른 일을 행한” 저항운동가들과의 만남은 본회퍼로 하여금 그의 명제를 새롭게 강 화 확대시키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본회퍼는 이제부터 세계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권(主權)의 현실성에 대해서 묻는다(<<윤리 학>>&nbspEthik,&nbspposthum&nbsp1949,&nbspNeuausgabe&nbsp1992). 그 러나 그것은 비종교적인, 성숙한 세계에 대한 그리스도 주권의 현실성에 대한 추구였다. 본회퍼는 현대인의 이러한 성숙성 (Mundigkeit)과 비종교성(Religionslosigkeit)을 “욕설하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그리스도교 복음을 “비종교 적”이며 “세속적”으로 해석하고자 했다. 이러한 프로그램의 배경에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종교적, 형이상학적 표현방식들이 그 본질 에 속하지 않으며 오히려 배제될 수 있다는 확신이 세워져 있었다. 본회퍼 자신은 이러한 예리한 프로그램을 더 이상 관철시킬 수 없 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