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와 같은 선교사   
수리남=안석렬 선교사 

많은 선교사들이 한국 이름보다 성경적인 이름을 선교지에서 사용한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한국이름이 현지인들의 발음체계 에 맞지 않아 어렵기 때문이고, 다른 이유는 성경의 인물과 같은 삶을 살고 싶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 이름도 석렬 (Seok&nbspRyeol)이라는 이름 대신 사무엘(Samuel)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사무엘이라는 이름의 발음이 비슷하 고, 나 역시 사무엘처럼 살고 싶기 때문이다. 후배 중 하나는 예레미야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내가 예레미야의 이름을 제목에 올 린 것은,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예레미야와 같은 선교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서이다. 

수리남에서 만난 바바라(Babara)라는 미국 여 선교사는, 미국 남침례교 선교회에서 협력선교를 위해 파송된, 두 선교 사 가족과 함께 수리남에 온 독신 선교사였다. 늘 빨간 픽업 트럭을 물고 다녔는데, 차 뒷칸에 지붕을 덮어 사람들을 태우고 다녔 다. 

지금도 차 뒷칸에 지붕을 만든 차를 보면 바바라 선교사 생각이 난다. 그 선교사가 하루는 배를 타고 선교지를 방문하고 돌아 오는 길에 잘못 되어, 한쪽 발이 선창가와 배 사이에 끼어 회복할 수 없는 큰 상처를 입고 급히 미국으로 후송되었다. 그 일 로, 엄지부터 차례로 발가락 세 개를 잘라야 했는데, 담당의사는 발가락 다섯 개를 다 자르는 것이 신을 신거나, 다른 활동하기 에 더 편할 거라고 조언을 해 주었다. 바바라는 다섯 발가락을 다 자르고, 팔과 몸 여러 곳의 살을 떼어 발가락 부분에 이식을 하 고는 수리남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바바라는 전과 다름없이, 미국 사람으로 보이기보다 나이 많은 인도 할머니같은 인상이지만, 언제 나 웃는 얼굴로, 불편함 없는 듯, 전에 하던 일을 그대로 했다. 인도계통의 마을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가르쳤 고, 또 앞으로 일할 교회 반주자를 키우기 위하여, 몇몇 아이들을 뽑아, 피아노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몇 년 전에, 자신의 전 인생을 바쳐 사역한 수리남을 떠나 미국으로 되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선교회 가&nbsp30년 넘게 세 가정의 선교사역을 후원했지만, 결실이 너무 적다고 미국으로 돌아오도록 조처했으며, 그중 한 가정 은 네델란드에 파송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전도해서 얻은 교인들을 위해, 시내 기독교 학교의 교실을 빌려, 계 속해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배려하고 떠났었다. 

작년&nbsp12월, 내가 안식년에서 돌아왔을 때, 바바라 선교사가 수리남에 와 계신다고 해서 반가운 마음으로 찾아 간 적이 있었다. 인도계통의 사람들을 위한 전도사역을 위해 몇 개월 동안 협력자로 일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 후 바바라 선교사 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고 그나마 그동안 학교에서 모이던 예배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다시 강 건너 다른 처소로 옮겼다고 했다. 교 인들은 아이들까지&nbsp30명이 모인다고 했다. 며칠 전, 바바라 선교사와 가까이 지내던 분을 만났는데 바바라 선교사 가 다시 수리남으로 돌아온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선교부가 그를 파송하는 것이 아니라, 바바라 선교 사가 이제는 은퇴했으므로 선교부에서 나오는 연금을 가지고, 다시 수리남에 와서 살기 위해 온다는 것이다. 

비록 적은 숫자이지만, 일평생을 바쳐 키워온 생명들이기에 그들이 있는 곳에서 함께 살고 싶어하는 선교사들의 마음과 바바 라 선교사의 사랑을 헤아려 본다. 가끔 우리 부부의 사역을 돌아보면서, 기대처럼 성장하지 않는 교회들을 바라보며 마음이 아프고 심 하게는 다른 마을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바바라 선교사를 생각한다. 예레미야 같이, 수없이 외치고 애썼어도 적은 결과를 얻 은 것 같이 보이는 선교사들! 그러나 어떠한 고난과 역경이 있더라도 이겨내고, 자신에게 맡겨진 양떼를 끝까지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선교사, 남들이 얻는 많은 결실에 흥분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바바라 선교사의 모습에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운 다.  

강석근 기자 / 기독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