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환 목사 칼빈과 언약

 

(김인환 박사는 총신대학교에서 오랫동안 구약학을 가르쳐온 분이다. 이 글은 김인환 박사가 총신대논총에 기고한 글로 칼빈주의 신학과 언약신학의 관계성을 제시하고 있다.)

 

I. 서론

 

한국개신교의 전통적 신학은 칼빈주의 신학 혹 개혁신학임은 이제 보편화 되었다. 이 칼빈주의 혹은 개혁신학은 언약신학이다. 그러나 우리 한국 개신교에는 칼빈주의 신학이란 곧 언약신학이라는 사실이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필자가 총신대학교와 신학대학원에 재학 중일 때 교수님들에 의해 구약과 신약에 아주 빈번하게 등장하는 언약의 문제가 조직신학이나 성경에 관한 여러 과목에서 간간히 언급되긴 했으나 칼빈주의를 언약신학으로 동일시하여 체계적으로 가르쳐지지 않았다. 그저 언약을 하나님의 약속 정도로 생각하면서 언약과 약속을 혼용해 사용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비록 박형룡 박사님의 조직신학 책에 언약의 문제가 다루어지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직신학의 많은 주제 중 한 주제에 지나지 않을 뿐 그 언약을 그의 신학의 바탕이나 틀이라고 여길 만큼 언약의 문제가 박형룡 박사님의 신학의 중심점이 되지 않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그 결과 한국 개신교에는 언약신학이 생소하게 되었고 칼빈주의가 곧 언약신학임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1970년데 말부터 Westminster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유학생들이 귀국해 본교 강단에서 강의하게 되면서 성경신학을 소개하게 되고 이때부터 서서히 언약신학이 논의되기 시작하다가 필자가 1982년부터 유학에서 귀국해 본교 신학대학원에 언약신학과 성경신학 강좌를 개설하여 이를 본격적으로 가르치고 또 대학에서 칼빈주의 강좌와 필자가 담당하게 된 구약의 여러 강좌에서 이를 본격적으로 가르치게 되면서부터 칼빈주의와 언약신학이 일치함을 주지시키기 시작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과거에 이런 강좌가 개설되어 체계적으로 강의가 이루어진 적이 없다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입증해 주기 때문이다. 그 이후 성경신학을 연구한 많은 교수들이 영입되어 강의를 해 옴으로 적어도 우리 교단의 젊은 목회자들은 이제 언약신학이 칼빈주의 신학임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아직도 조직신학이나 역사신학, 실천신학에서 이러한 관점이 충분히 소화되어 그 신학 영역이 언약신학적 안목으로 정착되지 않는 현실이기에 칼빈주의가 언약신학으로 동일시되어 칼빈주의를 칼빈주의답게 이해하고 그것을 우리들의 삶에 적용하여 진정한 칼빈주의자로서의 역동적 삶을 실천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우리 교단의 80년대 이전에 총신을 졸업한 대부분의 목회자들에게는 여전히 이런 신학이 생소하게만 여겨지는 현실을 감안할 때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서구의 신학계에서는 그것이 자유주의이건 보수주의이건 간에 칼빈주의 신학 혹 개혁신학이란 곧 언약신학이라는 사실에 대해 이견이 없다. 우리들의 칼빈주의와 같은 복음주의적 신학의 입장을 견지하는 세대주의 신학은 그 신학적 입장에서 우리들의 전통적 개혁신학과 같거나 유사한 것이 너무도 많기 때문에 상당한 신학적 식견을 갖지 않고는 사실 그 구분이 쉽지 않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세대주의 신학자들도 자신의 신학과 우리들의 전통적 개혁신학을 구분하면서 우리들의 개혁신학 혹 칼빈주의 신학은 언약신학이라고 명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한국 개신교가 칼빈주의임을 자처하면서도 이런 언약신학을 소홀히 한다던가 칼빈주의 신학을 한다면서 칼빈의 개인적 신학입장을 그대로 고수하는데만 몰두한다면 한국개신교의 칼빈주의를 세계의 개혁교회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올바르게 발전시키기는 어렵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칼빈주의란 칼빈의 신학을 그대로 고수하는 신학이 아니라 칼빈이 이해하였던 성경관에 기초여 그 성경의 가르침을 더욱 분명한 체계로 성숙시키는 성실한 하나님의 사역자들의 사상의 유기적 체계를 일컫기 때문이다.

 

칼빈의 주석과 그의 대작 기독교강요를 읽어보면 칼빈은 구속역사의 관점에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고 하나님의 모든 구원활동을 이해하였으며 흔히 칼빈의 중심 사상인 하나님 주권사상도 이러한 그의 구속사의 안목에서 성경을 이해한 결과임을 알 수 있다. Westminster 신학교에 제출한 Ph. D. 논문에서 M. W. Karlberg는 칼빈의 신학은 본질상 성경신학적인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한국개신교가 칼빈주의를 강조하면서도 구속역사의 안목에서 형성된 언약신학을 소홀히 한 채 칼빈주의를 철학적이거나 교리적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신학과 교회에 적용한 나머지 오늘의 한국개신교 신학과 교회는 사변화되어 있거나 경직되어 있으며 이를 혐오하는 일반 풍조에 발맞추어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채 아예 오순절 교회의 체험 우선주의를 비롯하여 우리 주변에 범람하는 각종 교회성장지상주의 신학을 수용한 혼합주의로 전락되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한국개신교회가 이를 잡아 하루 속히 올바른 칼빈주의를 확립하여 본래의 칼빈주의의 역동성에 힘입은 신앙과 신학, 교회 생활을 정착시키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는 칼빈주의가 지향하는 삶 전체의 전 포괄적인 하나님 나라를 정착시키고 그리스도가 왕으로 통치하는 문화, 학문, 교회와 우리들의 개인생활을 추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 날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가 칼빈주의를 언약신학으로 정착시켜 세계의 개혁교회와 어깨를 나란히 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먼저 이와 상관된 중요한 오해를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 그 오해란 다름 아니나 많은 학자들은 칼빈은 언약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 언약사상을 그의 신학의 중심으로 삼지 않은 이상 칼빈주의가 언약신학으로 동일시되는 것은 어디가지나 칼빈 자신의 사상이라기 보다는 후대의 칼빈주의 학자들에 의해 발전된 결과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성립된다면 칼빈과 현대의 칼빈주의는 별개의 것이라는 주장이 성립된다. 이런 주장은 매우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칼빈주의란 칼빈의 신학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칼빈이 가졌던 신학적 안목을 기초로 하여 이루어진 삶의 체계이다. 그러므로 칼빈주의 신학이 반드시 칼빈의 신학 그 자체일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칼빈주의 신학이 칼빈의 신학사상을 떠난 별개의 신학일 수는 없는 것이다. 칼빈의 신학적 안목을 기초로 세워진 사상이 칼빈주의라고 한다면 칼빈주의는 분명 칼빈의 신학을 기본으로 하여 그의 신학을 계승 발전시킨 신학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과 칼빈주의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칼빈주의가 언약신학과 동일시되는 시점에서 칼빈과 언약신학이 상관없다는 주장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기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본 고에서는 칼빈과 언약신학의 상관관계를 논하면서 이런 모순점이나 오해를 제거하고자 한다. 미리 결론을 말하면 흔히 주장되는 바와 같이 칼빈은 결코 언약의 문제를 소홀히 취급하지 않았고 오늘의 언약신학의 바탕과 내용이 비록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미 칼빈의 신학에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칼빈의 신학이 곧 언약신학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이 문제를 칼빈의 주요 저서인 기독교강요와 그의 주석을 분석함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II. 문제제기

 

먼저 이런 분석에 들어가기 전에 일반적으로 어떤 논거에 따라 칼빈과 언약신학이 별개의 것이라고 주장하는가에 대한 여러 견해들을 소개하면서 그 문제점을 파악하고자 한다. 문제를 제기하는 학자들은 칼빈이 언약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가졌고 성경의 언약이 그의 모든 신학에 얼마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에 그 논란의 초점을 맞추어서 언약신학의 기원에 그 논란의 중심점을 두고 있다. 이를 간략히 정리해 보자.

 

근간 세대주의의 정당성을 변호하는 Dallas Seminary의 Ryrie 교수는 세대주의가 근간에 발생한 하나의 신학체계임으로 교회는 이런 사상체계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는 O. T. Allis의 주장을 논박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체계화된 언약신학은 최근의 것이다. 그것은 초대교회 때 분명하게 정립된 교리가 아니다. 중세시대의 교회지도자들은 결코 이를 가르치지 않았다. 종교개혁의 지도자들은 심지어 이를 언급도 하지 않았다. 진정, 하나의 체계로서의 언약신학은 세대주의보다 결코 오래된 것이 아니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의 선임 세대주의자 F. Lincoln의 입장에 동조하여 다름과 같이 더 부연해 언약신학이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이 아님을 주장했다.

 

“루터, 칼빈 혹 멜랑톤이 죄, 부패, 구원 등등 언약과 관련된 주제들을 논의하면서도 그들의 저술 속에서 언약신학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들은 언약의 개념을 체계화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칼빈은 구속적 계시의 연속성과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언약의 개념에 대해 언급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언약신학이 아니다. 이런 종교개혁의 중심 지도자들 속에서 언약신학이 발견되어지는 것은 언약신학자가 일반적으로 다루는 내용일 뿐이며 17세기에 보다 더 풍성하게 잘 발달된 언약신학이라는 용어에 한정할 수 있는 그런 언약신학은 아니다.”

 

Ryrie의 연구에 의하면 언약 혹 연방신학의 개념이 가장 최초로 나타나는 것은 A. Hyperius, K. Olevianus, R. Eblinus 등 종교개혁 후 시대를 이끌어가던 지도자들의 신학이며 영국과 화란에서 목회하며 언약신학 혹 연방신학을 가장 잘 체계화시킨 Coccesius의 선생 W. Ames가 최초로 행위언약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Ryrie의 이런 입장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언약신학이 칼빈의 후대에 발전된 신학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에 의해 대체적으로 공통적으로 주장되는 입장이다. H. Roston III 역시 언약신학을 집대성했다고 평가되는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와 칼빈의 신학을 비교하면서 칼빈은 언약신학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으며 언약신학의 여러 새로운 내용들은 모두 그의 후계자들의 업적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입장은 이들의 시대보다 훨씬 전의 학자들에게도 발견된다. J. Orr는 Calvinism에서 언약신학은 칼빈이 죽고 난 다음 개혁신학에서 근본적으로 발달된 세 가지 신학 중의 하나였다고 주장했다.

 

P. Miller도 17세기의 New England의 Puritan 신학을 분석하면서 그들의 신학은 비록 칼빈주의에 전적으로 헌신된 입장이 아니지만 언약신학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언약신학의 은혜언약이라는 기본적 개념은 칼빈의 신학체계에는 별로 강조되지 않는 것이었으나 후기 개혁신학자들이 예정론, 하나님의 작정, 택자와 불택자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 등에 대해 지나치게 학문적으로 강조하는 것에 대한 정통 개혁신학자들의 반발로 강조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들은 칼빈의 기본적 사상체계에다 은혜언약의 체계를 가미하여 알미니안주의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우월성을 보호하고 무율법주의에 대항하여 도덕적 책임성을 보존하는데 역동적으로 사용하였으며 그 결과 칼빈이 제네바에서 기초를 놓은 신학체계와는 다른 신학체계를 세우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Miller는 이 언약신학은 칼빈주의와는 다른 신학이라고 했다. 즉 칼빈에게서 기원되지 않은 신학이라는 것이다. 칼빈과 언약신학의 관계를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이런 주장 이외에도 한편 칼빈과 은혜언약과의 관계를 인정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 칼빈과 행위언약과의 관계를 부정하는 입장들이 언약신학자들의 주장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19세기경 전통적 개혁신학이 도입하기를 꺼려 하던 성경신학적 방법론을 과감하게 정통개혁신학과 접목시켜 활용하면서 정통개혁신학적 성경신학의 기초를 놓은 구 Princeton 신학교의 성경신학 교수 G. Vos는 칼빈은 언약을 자주 언급하면서도 그의 신학의 중심점으로 삼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언약을 부수적이긴 하나 하나의 독립된 주제로 삼아 이론을 세운 개혁신학자들의 선두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은 오로지 은혜언약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칼빈이 행위언약에 대해 얼마나 언급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논하지 않았다. 이런 입장은 J. Murray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Murray는 칼빈의 신학에서 타락 전 언약에 관한 특별한 개념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이에 비해 Calvin 신학교의 교수였던 A.A. Hoekema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은혜언약 교리가 17세기에 화란의 Cocceius와 영국의 청교도 신학자들에 의해 기원되었다는 사실은 전혀 사실과 다른 오해임을 강조하였다. 그에 의하면 이미 2세기의 Irenaeus가 이 교리를 가르쳤으나 중세 시대에 이 교리가 별로 거론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이미 16세기의 Zwingli와 그의 후계자 Bullinger에 의하여 이 교리가 가르쳐졌고 Calvin은 그의 기독교강요, 주석, 그의 설교에서 이 교리를 가르쳤으며 은혜언약의 교리는 칼빈의 사상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Hoekema는 비롯 Kuyper가 주장한 바 즉 행위언약에 관련된 영적 진리는 Calvin의 가르침에서 발견된다 하더라도 Calvin은 행위언약은 가르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D. A. Weir도 1984년 영국 St. Andrews 대학교에 제출한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역시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하였다. 그는 칼빈은 은혜언약의 중요성을 많이 다루어왔지만 행위언약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연방신학을 가르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칼빈의 신학 속에서 행위언약적 요소를 전혀 발견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다. 그는 칼빈의 기독교강요에서 칼빈이 하나님과 아담의 에덴 동산에서의 관계가 본질적으로 언약적인 것으로 간주한 증거를 인정하면서도 그는 행위언약과 칼빈은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칼빈이 죽은 후 80년이 지난 다음 Westminster 신앙고백서에서 행위언약을 언급하게 된 그 뿌리는 1562년 Z. Ursinus가 하나님의 주권과 아담의 타락에 대한 10여년의 논쟁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데서 기원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Ursinus는 동료 신학자 C. Olevianus, T. Cartwright, D. Fenner, F. Junius 등과 맥을 같이 하고 있으며 1590년 이후로 이 연방신학은 전 유럽을 석권하며 만개하였다고 주장했다.

 

이런 입장은 스스로 문제를 노정하고 있다. 칼빈과 언약신학과의 관계를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입장은 이미 칼빈과 은혜언약과의 관계를 인정하는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칼빈의 저술 속에서 후기 언약신학자들의 주장들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주장은 그 설득력을 잃고 있다. 또 칼빈과 언약신학과의 부분적 관계를 인정하는 입장, 즉 칼빈은 은혜언약은 강조하였으나 행위언약은 가르치지 않았다는 입장은 스스로의 논리적 모순점을 노정하고 있다. 이들에 의하면 칼빈의 저술 속에서 은혜언약이라는 어휘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칼빈은 언약이라는 어휘를 사용하면서 후기 언약신학자들의 은혜언약에 관련된 많은 내용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이들은 칼빈이 은혜언약을 중시했다고 주장한다. 이와 더불어 이들은 칼빈의 신학 속에서 후기 언약신학자들이 주장하는 행위언약의 요소가 반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칼빈이 행위언약을 가르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만일 칼빈에게서 행위언약적 요소를 발견했다면 왜 칼빈이 행위언약을 가르쳤다고 주장하는 것을 꺼리는가? 행위언약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은혜언약에 관련된 내용만큼 행위언약에 비중을 두지 않아서인가?

 

만일 칼빈이 은혜언약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은혜언약에 관련된 많은 내용을 칼빈이 취급하고 있다는 이유로 칼빈은 은혜언약을 중시하였다고 주장할 수 있다면 칼빈이 행위언약에 관련된 내용들을 비록 작은 분량에서나마 취급하고 있다면 칼빈은 행위언약에 대한 기초를 놓았다고 주장할 수 있지 않는가?

 

Karberg와 Lillback은 Westminster 신학교에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에서 칼빈이 어떠한 역사적 배경에서 언약에 관한 인식을 하게 되었으며 그의 신학에 이런 역사적 배경이 어떻게 언약신학을 반영되었는가를 연구 보고했다. 그들에 의하면 언약에 관한 교리는 Irenaeus와 Augustine 때부터 이미 다루어지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Lillback은 특별히 칼빈이 얼마나 Augustine의 신학에 의존하였는가를 밝히면서 이미 Augustine에게서 소위 행위언약에 대한 언급이 발견되는 이상 칼빈이 이를 놓칠리 없었다는 사실을 강조했고 칼빈과 언약신학, 특히 행위언약과의 상관성을 강력히 옹호했다.

 

그는 “칼빈이 만약 이런 문제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면 그의 시대의 문화적 신학적 맥박으로부터 비켜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현재 그가 평가받는 것처럼 거장의 주석가와 신학자로 여겨지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이런 그의 결론과 평가를 칼빈이 얼마나 언약에 관련된 어휘를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사용하고 있는가를 조사하면서 반증하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칼빈이 스스로 최종적으로 개정한 그의 걸작 기독교강요 1559년 판을 분석해 볼 때 언약에 관련된 직접적 단어만 적어도 273회 정도 나타나고 있다고 하였고 언약과 관련된 다른 유사한 어휘를 모두 고려한다면 그 빈도수는 매우 강력하다고 했다. 그는 이것을 칼빈의 신학의 중심점이라고 알려진 삼위일체라는 어휘의 빈도수 26회와 비교하고 또 언약이라는 어휘가 그의 기독교강요 각권의 주제와 관련해 얼마나 사용되고 있는가를 밝히면서 “칼빈은 언약이라는 개념을 한 화제라는 개념이나 혹 몇몇 학자들이 제언하는 것처럼 어떤 단일한 분명한 주제라는 개념으로 사용하지 않고 있음이 이러한 자료 분석의 결과를 통해 볼 때 명백하다. 대신 칼빈은 언약이라는 술어를 그의 전 역작을 총괄하는 광범위한 주제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말로 바꾸어서 말하면 언약은 칼빈 신학의 불가분의 요소로 나타나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더욱이 동시대의 종교개혁 지도자였고 오늘날 복음주의의 태두라고 말할 수 있는 Luther가 언약에 대해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을 감안할 때 칼빈의 언약에 대한 이런 이해와 사용은 그의 신학의 특징을 Luther의 복음주의와 구별되게 하면서 언약신학의 기초를 놓았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오늘날 언약신학은 하나님과 그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사이에 근본적으로 언약의 관계가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한다. 이 언약의 관계는 인간이 창조되는 그 순간부터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며 이를 전통적으로 행위언약으로 명명하였으나 근간에는 이를 주로 창조언약으로 고쳐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인간이 타락된 이후에 하나님이 이 언약을 갱신하여 타락한 인간과 다시금 언약을 맺고 구속 역사 속에서 이 창조언약을 계승 성취해 가시다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성취하여 그의 백성들과 더불어 새언약을 맺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좀 더 세부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이 창조언약의 관계에서 하나님은 언약의 종주 왕이 되시고 그의 형상으로 창조한 인간을 자신의 언약의 복속 왕으로 삼아 자신이 창조한 세상을 그의 영원한 영광스러운 왕국으로 그가 안식할 영원한 안식처가 되도록 땅을 채우고 땅을 정복해야 할 의무를 부여하였다고 한다. 창조주는 그의 형상으로 창조한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대리하여 그가 창조한 피조의 세계를 다스리게 하되 자신에게 순종하며 충성을 다하도록 요구하였다.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 그들을 복주시므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안식에 참여하여 영원한 축복을 누리도록 보장받게 되었다.

 

반면 불순종하면 하나님은 그를 저주하여 그들을 죽게 하겠다고 하였다. 창조주 하나님은 완전한 상태에 있는 인간의 마음속에 이 법을 새겨 놓으시고 이 법을 시행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주셨다. 이를 가시화하기 위해 동산 중앙에 있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지 못하도록 규정하였고 또 한편 생명나무를 세워 그들의 순종에 대한 영생을 보증하였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의 형상으로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였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한 몸이 되게 하는 결혼제도를 설정하시고 노동의 제도를 설정하여 충성스럽게 일하게 하시고 하나님 자신이 6일 동안 창조하시고 7일에 안식한 그의 안식을 따라 인간에게 안식의 제도를 설정하여 매 7일마다 안식하게 하므로 노동의 속박으로부터 인간을 자유하게 하면서도 또한 그 날에 인간의 모든 삶의 열매를 하나님께 헌납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의 언약의 종주왕 되심을 고백하고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언약으로 말미암아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의무를 지고 있다고 헸다. 그러나 인간은 이 창조언약을 어기고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축복에 이르지 못하고 하나님의 저주아래 놓이게 되었고 인간은 이런 창조언약을 성취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의 원래의 완전한 상태로 회복되기 위해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에게 은총을 베풀어 그들과 더불어 새롭게 언약을 맺으면서 이 창조언약을 갱신하였다는 것이다. 이 언약을 은혜언약 혹 구속언약이라고 명명한다. 이 구속언약은 구속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다른 여러 인물과 더불어 갱신되어 오면서 유지 성취되어 오다 제2의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 맺어진 새언약 속에서 완전히 성취되어졌다는 것이다.

 

III. 칼빈과 행위언약

 

칼빈의 기독교강요와 그의 주석, 설교에 나타난 내용들을 종합해 볼 때 칼빈은 분명히 은혜언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행위언약이라는 언약신학의 특징적 명칭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오늘날 행위언약의 제반 요소와 본질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칼빈은 실질적으로 적어도 언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타락 전 에덴 동산에서의 아담과 하나님의 관계가 언약적임을 설명했다. 그는 기독교강요에서 “이들은 [생명나무와 무지개] 아담과 노아는 성례라고 간주하였다. 나무가 그 자체에게 줄 수 없는 불멸의 생명을 그들에게 제공해 준다거나 무지개(반대쪽에 있는 구름 위에 태양의 빛이 반사된 것에 지나지 않는)가 물을 멈추게 하는 효력을 가졌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그의 언약들의 증거들과 인봉들이 되게 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그것들에게 새겨져 있는 표식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칼빈이 이렇게 언약을 복수로 지칭함으로 하나님이 아담과 노아와 가진 관계가 모두 언약적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노아와 맺은 관계가 언약적이기에 무지개를 그 관계의 표징으로 삼았음과 같이 하나님이 아담과 맺은 관계가 언약적이기에 생명나무를 그 관계의 표징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칼빈은 타락 전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는 언약의 관계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인식은 비록 칼빈이 이처럼 언약이라는 술어를 직접 사용하지 않지만 언약적 관계를 반영하는 다른 여러 성격과 요소를 가지고 이를 설명하고 있다.

 

칼빈은 어거스틴의 입장을 설명하면서 인간은 범죄하므로 하나님의 왕국에서 추방되었다고 했다. 이것은 아담이 타락전 하나님의 왕국에 있었다는 것이며 아담이 타락전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 또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을 때도 도덕적으로 완전한 상태에 있었다고 이해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서 이 법에 순종하게 될 때 인간은 드디어 하나님이 허락하신 최상의 복된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 점을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두 그루의 나무 즉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주신 것과 더불어 설명한다. 이 두 그루의 나무를 성례적 나무로 일종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고 이해했다. 세례와 성찬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세례는 외적인 의식이나 성례이다. 마찬가지로 에덴 동산에 두신 두 그루의 나무도 외적인 상징으로 이러한 성례라는 것이다.

 

칼빈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고 이 말씀은 그리스도로 성육신하였으며 그리스도는 언약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칼빈이 생명나무를 언약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보았다면 결국 이 생명나무는 언약의 상징이라는 결론이 가능해진다. 칼빈은 성례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언약의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처럼 타락 전 에덴 동산에 하나님이 성례를 세웠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나님과 에덴 동산의 아담 사이에 언약의 관계가 성립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성례를 세운 목적은 무엇인가? 칼빈은 하나님이 이런 외적 표적을 사용해 성례를 세움으로 모든 것의 실재를 충분히 보거나 깨달을 수 없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깨닫게 하고 그 은혜에 집중하고 사로잡혀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완전성에 도달하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했다.

 

칼빈은 타락 전 에덴 동산에 아담을 위해 세우신 성례들도 역시 동일한 목적으로 세워졌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이 생명나무를 주신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그에게로 오를 수 없음을 인식하였기에 아담으로 그의 생명이 누구로부터 오게 되었는가를 올바르게 인식하게 하면서 오직 하나님께만 의존하고 하나님과만 교제하면서 그의 삶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더욱 풍성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데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인간이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복되게 살고 또 합리적으로 살아가는 생활의 유일한 법칙일고 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성문화된 법이란 곧 이스라엘 민족에게 언약의 법으로 주신 십계명을 가리킨다. 칼빈은 이렇게 창조 시에 아담에게 주신 법과 십계명의 상호 연관성, 그 연속성을 강조하였다.

 

칼빈은 이처럼 타락 전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가 언약적이었음을-비록 구체적인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나타내고 있다. 칼빈의 이런 신학 사상은 소위 칼빈 이후에 등장하는 언약신학자들의 내용과 부합함을 고려할 때 후기 언약신학자들이 그들의 신학을 칼빈과 무관하게 발전시켰다기 보다는 칼빈의 이런 전체적 사상의 테두리 속에서 칼빈이 기초를 놓은 신학을 언약신학의 체계 속에서 행위언약이나 은혜언약 등의 명칭 등을 개발해 보다 명료하게 발전시키고 구체화하면서 묘사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면은 칼빈의 종말론적 창조관을 통해서도 분명해진다.

 

IV. 결론

 

지금까지 칼빈주의 신학과 언약신학이 왜 동일시되어야 하는가를 논하기 위해 칼빈의 기독교강요와 그의 주석들을 분석하면서 그의 저술 속에 나타난 특별히 행위언약의 요소들을 살펴보았다. 지금까지의 분석의 결과는 칼빈의 사상은 오늘날 언약신학자들이 주장하는 내용들과 전혀 다르지 않음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펴본 칼빈의 저술 속에 나타난 칼빈의 언약은 구원의 한 면을 설명하는 좁은 의미에서의 그의 신학의 한 주제가 아니라 창조, 타락,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속역사의 모든 진행과정과 그에게서 이루어진 구원의 전체를 체계화시켜주는 한 중심 사상이며 그의 신학의 핵심으로 이해해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비록 칼빈이 창조언약 혹 행위언약, 구속 언약 혹 은혜언약 등의 언약신학의 핵심적 체계의 명칭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나 그 모든 요소들을 충분히 깨닫고 그것들을 사용해 그의 신학 체계를 제시하고 있는 한 우리들은 칼빈의 신학을 언약신학이라고 결론짓는데 주저할 이유가 없다고 하겠다.

 

지금까지 한국개신교가 칼빈주의 신학 전통을 유지해 오면서도 이런 칼빈주의 신학의 핵심이며 그 체계인 언약신학을 정립하여 실생활에 적용 실천하지 못하므로 사변화되었거나 경직되었으며 일종의 구호로 전락하게 만들었으며 하나님의 교회를 분열시키는 무기로 성도들의 삶을 이원화시켜 성도의 삶을 하나님이 구워한 이 세상에서의 책임을 무관심하게 만드는 반면, 극단적인 저 세상 지상주의로 정착시키는 도구가 되어 왔다.

 

그래서 칼빈주의자로 지칭하는 신학자, 목회자, 칼빈주의를 연구하고 그 신학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칼빈주의 연구소와 칼빈주의 신학교와 그 교회들 모두가 오히려 가장 비칼빈주의적인 사고와 생활을 서슴지 않는 결과를 빚었다. 우리는 칼빈의 신학체계에서 출발한 언약신학을 정착시켜 이러한 비칼빈주의적 모습을 크게 반성하고 올바른 칼빈주의의 역동적 삶을 살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