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nbsp6: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는 배고픈 돼지가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한 꿀꿀거림이 아니라 자신 의 생명이 보존과 모든 필요의 충족이 하나님 아버지께 달려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기도입니다. 여기의 "일용할 양식"이란 "계속되 는 모든 날의 양식"(Bread&nbspfor&nbspthe&nbspcoming&nbspday)라 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에게 있어서 일용할 양식에 만족(滿足)한 사람들이 얼마나 됩니까?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이 최소한 일용 할 양식을 공급받음에 있어서 주님을 의지하고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지금까지 주님 없이도 씩씩하게 잘 살아왔고, 또 살아 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양식이 절박하던 시대에는 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가 절박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 이 풍부한 식생활(食生活)을 하는 시대에는 매일 먹는 양식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삶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 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는 명령은 지키지 아니해도 괜찮다는 말씀 입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시대를 따라 아무리 풍요로운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 다. 우리가 아무리 시대를 따라 풍요한 삶을 누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단 하루만이라도 인생들에게 식물을 주시지 아니하면 그들 은 굶어 죽을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지 아니할지라도, 육체의 양식을 정상적으로 공급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된다 면 아마도 그들은 약탈과 방화나 범죄를 통해서라도 먹을 것을 탈취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 해서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것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우리가 왜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까? 
⑴ 모든 삶의 영역에서 겸손하게 온전히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의뢰하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에게 있어서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는 것은 언제 관심거리였고,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이렇게 일용할 양식을 위해 하 나님을 의뢰하지 않는 사람들이 다른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 든 좋이 한결같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인정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매일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므 로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겸손하게 온전히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의뢰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데에 목적 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일용할 양식만을 위해서 기도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이심을 가슴 깊이 느끼며,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어떤 사이인지를 깨닫는 더 깊은 영적 사귐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제자들의 먹는 문제에 얼마나 신경과 관심을 갖고 계셨는지에 대하여 알지 못합니다. 주님 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도망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을 게네사렛 호수가에서 주님께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이 아침상을 차리시는 일이었습 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요&nbsp21:12) 또한 주님은 말씀을 그리워서 벳세다 광야에 모인 무리들 을 위하여 먹을 것을 예비하심으로 그들의 허기짐을 염려하셨습니다(요&nbsp6:5)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비난받으 신 죄목 가운데 하나는 죄인들과 함께 먹고 세리들과 함께 양식을 나누신 것입니다(눅&nbsp19:7)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매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먹고 살아가는 인생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⑵ 우리로 하여금 나그네 된 자로서의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나그네 인생입니다. 따라서 이 땅에 천년만년 살 것처럼 이 땅에 너무 많은 것을 쌓아 두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 한 사람은 결코 나그네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너무 많은 것을 쌓아 두고 살아가 지 말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마&nbsp6:19,20) "... 오직 너희를 위하여 땅에 쌓아 두지 말라... 오직 너 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따라서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은 우리는 나그네 인생임을 철저하게 인식(認識)하라는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나그네 는 나그네의 길에서 집을 짓지 않습니다. 나그네의 사랑은 스치는 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본향에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십니 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며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 라 증거 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을 나타냄이라"(히11:13-14)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보다 세상 물질을 의지하며, 하나님께만 바쳐져야 할 우리의 마음이 썩어질 것들에 바치고 있습니 까?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마 6:19) 이 말씀을 보면 우리들이 얼마나 자주 주님의 당부를 실천하며 살아가지 못하였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 미 얼마나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사람들로 전략되어 버린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는 이 기도를 가르치시면 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데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에게 마음을 두지 못하고, 물질에 집착하며 여러 해 동안 쓸 물건을 쌓아 놓 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경고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를 하면서 우리의 모든 생명과 삶이 하나님께만 의탁되어 있음을 기억하면 서 나그네 된 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할 존재임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⑶ 우리로 하여금 자족(自足)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사치나 쾌락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거부(巨富)가 되었다는 이삭의 기도를 기억하면서 (창&nbsp26:12-18) 자신도 모르게 거부가 되기를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 는 안됩니다. 그래서 아굴은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 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도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다"라 고 기도하고 있습니다(잠&nbsp30:8-9) 그러므로 이 기도를 통하여 자족하며 감사하며 살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 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도 말아야 하고(마6:8)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야 합니다(마6:31-33) 탐 식(貪食)하는 것도 죄(罪)입니다(잠23:2-3)

일용할 양식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멋있는 삶을 창조해 나가는 원동력입니다. 그래서 그레고리(Gregory) 는 "꼭 필요한 것들 외에 관심을 가지지 마십시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우리 마음은 욕심과 탐욕으로 가득차게 되고 결국 우리의 삶 은 그릇된 길로 나아가고 말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웃보다 더 많이 가지지 위해서 욕심을 부리고 사치와 허용을 부릴 때 범죄 (犯罪)하게 됩니다. 우리는 욕심 때문에 다른 어떤 이웃이나 대상이 울게 되고 슬픔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 식 탁에 진수성찬(珍羞盛饌),산해진미(山海珍味)를 올려놓기 위해 다른 사람의 눈에 눈물을 흐르게 한다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이 웃 사랑을 모독하는 무서운 불신앙적 범죄 행위로서 주님은 그러한 대상들을 용서치 않으십니다. 

⑷ 우리가 정당하게 노력한 만큼 하나님으로부터 채워지기를 기쁘게 여기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약 여러분 가운데 "주옵소서"라고 말한 후 팔짱을 끼고 음식이 입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모두 다 굶어 죽 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음식을 만들어서 기도하는 사람의 입에 억지로 넣어 주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어떤 일을 손 하 나 까딱하지 않고 이룩할 수 있는 주문이나 알라딘의 요술램프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을 떠나서 는 어떤 양식을 얻을 수 없다는 깨우쳐 주려는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인의 모든 필요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된다는 사실 을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과 함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양식을 위하여 하나님께 구하면서 수고하고 힘 써 땀 흘리는 이에 인색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열매를 거둔다는 사람과 자신의 노력을 수단으로 하여 하나님 께 아름다운 열매를 공급해 주신다는 믿음 속에서 일하는 자의 즐거움을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⑴ 과다한 사치와 부를 축척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의 범위는 결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먹을 것이나 빵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여기 에서 일용할 양식이라 함은 단순히 빵이 아니라 빵과 함께 우리의 의복과 거처와 나가서는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교육과 모 든  문화 혜택까지 포함한다. 그러나 이 속에 귀금속은 들어가지 않는다"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기도를 통하여 깨달아야 할 것은 과다한 사치와 부(副)를 축척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 에 들어갈 수 없고,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는 것보다 쉬우니라"(막&nbsp10:25) 우리는 욕심을 부리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잠&nbsp30:7-9,딤 전&nbsp6:8,히13:5) 그런데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가난할 때에 주님의 이름에 대한 뜨거운 헌신을 간직했던 사 람들이, 배부르고 여유 있어진 후에 주님에 대한 충성심(忠誠心) 사라지고 물질적인 삶 한 가운데로 안주해 버리는 연약성에 대해 서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인간의 연약성을 미리 하시고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구하며 살아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⑵ 우리는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존재(存在)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기도를 가르쳐 주신 주님 앞에 겸손해져야 합니다.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일같이 하루 쓸 양식을 구하 기 위하여 들판으로 나갔던 것처럼 우리도 매일매일 우리의 일용할 것들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것은 우리 의 모든 삶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의존되어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삶의 모습을 보십시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사랑과 은혜에 부합(附合)하지 못하면 살아가고 있습니 다. 주님의 은혜를 배반하기 일수이고, 하나님의 은총을 패역으로 되 갚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이러 한 인생을 사랑하셔서 일용할 양식을 구할 것을 가르치면서 우리에게 다시금 하나님의 은헤를 공급해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무엇이관 데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등지고,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계십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부양할 의무 도, 책임질 의무도 없으십니다. 다만 우리 인생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서 숨쉬도록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참 좋으신 분이십 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끼니 끼니마다 넘쳐흐르는 감사 속에서 주님과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⑶ 굶주린 이웃으로 하여금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런데 주님은 왜 일용할 양식이 "내가"아닌 "우리"라고 말씀하셨 습니까? 여기에서 "우리"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을 때마다 다른 사람들 도 그렇게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들도 자신에게 필요 한 양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이 세 상에서 굶주리지 않고 살아가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기도를 할 때마다 나 자신은 물론이고 굶주린 이웃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 니다.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지금 지구 한 모퉁이에서 일년에 약&nbsp9,500만 명 ∼&nbsp3,500만명 정도가 굶어 죽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대다수가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입니다. 그 러기에 우리는 이 기도를 할 때마다 그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부요함 속에 살아가기 때문에 물질의 부족으로 고통받는 이웃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 이 배부르면 사람의 고통이 생각나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이 기도를 할 때마다 굶주린 이웃에게도 일용할 공급해 주실 것 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하나님이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게 하시는 도구가 되는 삶을 살도록 도와 달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⑷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양식에 대하여 천주교는 성체(聖體) 곧 주님의 최후 만찬 석상에서의 빵(주님의 몸을 상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 서 어거스틴은 성찬 예식은 매일 거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주기도문의 이 기원은 "매일 거행되고 받아야 할 성찬을 위한 기도" 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매일 성찬 예식을 거행해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이것만이 옳다고 고집 부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러 나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육신을 빵 뿐만 아니라 영혼의 양식 곧 하나님을 매일 공급받아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 기 도는 "내가 곧 생명의 떡(Bread)이니.."(요6:35)라는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매일의 필요한 능력 과 도움과 힘을 공급받지 못하면 하루도 살아갈 수 없음을 고백하는 기도입니다.

성경은 일용할 양식에 대한 배경을 광야 생활을 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급하셨던 [만나 사건]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 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 사 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3) 그래서 예수님께서 광야에 서 시험받으실 때에 먹을 가지고 시험하는 사탄에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마&nbsp4:4)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광야로 나왔을 때 그들에게 재일 문제가 되는 것은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가지고 나 온 먹을 것들은 정확히 두 달 보름만에 바닥이 났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 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 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출16:4)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만나(이것이 무엇이냐?)] 사건은 보도 듣도 못한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새벽에 이슬이 내 릴 때에 지면이 어떤 것이 서리와 같이 깔리고, 그들은 그것을 모아다 가루로 만들었습니다. 꿀 섞인 과자와 같이 맛있는 음식을 만 들 수 있는 반죽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매일 일용할 양식을 그런 방식으로 거두어 왔던 것입니다(출16:14-15,31,시 78:24) 하나님은 만나 사건을 통하여 우리의 영혼이 매일매일 내리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양식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깨 닫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양식은 육적인 양식뿐만 영혼의 양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은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말씀이 아니면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죄와 슬픔이 가득한 이 어두운 세상 속에 서 믿음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여기의 만나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의 예표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nbsp6:33-35) 영적 양식을 먹지 아니하고도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도 없 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 달라고 기도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만나"가 새벽에 내렸다는 사실입니다. 만나는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 는 대낮이 아니라 한적하고 고요한 시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잠자리에 깨어나기 전에 내렸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시간에 고용한 중 에 내렸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혼의 양식도 번잡하고 바쁜 삶 속에는 쉽게 공급받기가 어렵다는 교훈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혼 의 양식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우리의 속 사람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들려 오는 신령한 말씀의 은혜 없 이, 비밀스런 경건(敬虔)의 은혜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만나가 새벽에 내렸듯이, 예수님께서 새벽 미명에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가지셨던 것처럼 우리도 새벽의 시간을 통 하여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교제해 주시고 거룩한 은혜를 내려 주시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 나를 먹어야 하루의 삶을 살 수 있었던 우리는 영혼의 만나를 먹어야 하루를 살 수 있는데, 그 영혼의 만나는 새벽에 내려지는 것임 을 기억해야 합니다. 새벽에 주시는 영혼을 만나를 먹는 사람은 세상을 이길 힘을 공급받고, 험악한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 게 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시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육신의 배부름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대하며 식탁 앞에서 기도 할 때마다 우리는 종류가 또 다른 굶주림이 하나님을 향해 눈뜨는 우리의 영혼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속 사람에 게도 일용할 양식을 내리셔야 할 절박한 필요를 깨달아야 합니다. 매일 주시는 하나님의 양식으로 어두운 세상을 헤쳐 나가며 살아가도 록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으로 빛을 삼고, 진리로 등불을 삼아, 넘어지지 않고 또 쓰러지지 않 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의 길을 달려가기 위하여 우리의 영혼의 양식을 구하려 주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성경을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나그네 된 우리의 인생 길에서 하나님 의 말씀이 우리의 노래가 되도록 기도하십시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그 말씀을 멀리 떠나 있는 어리석은 이 세상이 아버지께로 돌아오기 를 꿈꾸며, 겉 사람과 동일한 속 사람의 건강을 힘입어 험한 세상을 싸우며 나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 자체가 주님께서 가 르쳐 주신 기도의 고백이 되어 살아갈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 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은 최소한 그 옛날처럼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 할 때처럼 처절한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제는 더 이상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닙 니다. 양식을 얻지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매일매일 숨쉬는 순간마다 양식을 주시는 주님을 기억하며, 주님의 은혜 에 감사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이제는 단순하게 육체의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한 일용할 양식을 구함이 아니라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 을 주시는 주님을 깊이 느끼는 축복, 영혼의 참된 만족을 위해서 생명의 양식을 주님을 철저하게 의지하는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 으로 축원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