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습니다.”(요&nbsp1:1-4,14-18)

신앙고백에 있어서 두 번째 고백은 기독론(基督論)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은 기독교 역사상 매우 중요 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의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라는 신앙고백이 사도신경 전체의 반 이상 을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고백은 우리의 지식, 우리의 논리로 볼 때 문제가 많기 때문에 그만한 고백이 필 요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 역사상 가장 우여곡절(迂餘曲折)이 있어 왔고, 많은 회의가 소집되었고 또 전(全) 로마제국이 들썩 거리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삼위일체 하나님 중 제2위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 곧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 도를 믿사오니”라는 부분에 대하여 함께 살펴보면서 우리의 신앙고백을 점검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은 유일하신 분이심을 내가 믿습니다.
신앙고백에서 「그 외아들」이란 말은 유일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라고 하는 것 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외아들”이라는 말입니다 (마&nbsp1:23,&nbsp27:54,막&nbsp3:11,행&nbsp9:20) 신약 성경은 이 와 같은 사실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 성경에서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사용하신 것은 「성육신(聖肉身) 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초대 교 회가 강조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롬&nbsp1:3,4에서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웟의 혈통에서 나 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라고 말씀하고 있 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얼른 생각하기에 “아! 하나님은 복도 없다. 어떻게 아들이 하나뿐인가?”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 다. 실제로 이슬람교도들은 기독교를 비판할 때 바로 이렇게 합니다. “하나님이 어디 결혼을 했니? 만약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다 면 하나님의 아내는 누구냐?” 그들은 이런 식으로 기독교를 완전히 만화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슬람교도들뿐만 아니라 만은 사람들 이 무의식적으로 위와 같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조심해야 할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외아들」에서의 「외」라는 것은 「독특한」이란 뜻입니다.
여기의 「외」란 말은 둘이 아닌 하나라는 뜻이 아니고 「독특한」이란 뜻입니다.(요일&nbsp4:9, 요&nbsp3:16,18)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외아들」이라는 말은 보통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처럼 그런 정상적인 관계 가 아니라 독특한 관계에 있는 아들이란 뜻입니다. 

둘째로 「외아들」이란 말속에는 「태어난」이란 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말 번역에는 그저 「외아들」이라고 되어 있는데 영어 번역에만 「유일하게 태어난」이란 뜻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 문 글자로는 「독생자」라는 말입니다. 그 대표적인 말씀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 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말씀입니 다(요&nbsp3:16) 또한 요한복음&nbsp1장에는 「독생자」라고 하는 말이 두 번 나오는데&nbsp14 절에서 “독생자”라고 했고,&nbsp18절에 “독생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독생자」라는 말씀에 서 「생」(生)자라는 말을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독생자이시지만 우리처럼 낳아지지 않고 낳아진 것입니다. 낳지 않고 낳아 진 아들 그 이름이 하나님의 독생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독특하게 낳으신 아들」이란 뜻입니다. 

그렇다고 주의할 것은 「낳으셨다」라고 하니까? 마치 ‘어머니가 아들을 낳듯이 하나님께서 낳은 분’이란 뜻이 아닙니다.  이 것은 성경이 의도하고 있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체를 가지고 계시지 않는데 어떻게 아들을 낳습니까? 그러므로 여기에 서 「낳는다」라는 말은 생물학적(生物學的)인 뜻이 아닙니다. 성부 하나님은 제1위 하나님이시고, 성자 하나님은 제2위 하나님이시라 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제1위 성부가 첫째이고, 제2위되신 성자는 둘째고 그런 차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 속에는 하나님 과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동등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본래 삼위일체(三位一體)라는 말은 “단일한 신성에 삼위(三位 : 성부, 성 자, 성령)가 계시나 그 본질은 동등이시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요&nbsp1:1,18에서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 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고 말씀하고 있고,&nbsp1038에 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 고 요&nbsp14:9에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 로 사도 바울은 는 말씀과 빌&nbsp2:6-7의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 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라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등하시다. 따라서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시다」라는 것이 결정되기까지 는 많은 시간과 분쟁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문제를 먼저 들고 나온 사람은&nbsp3세기의 유명 한 교부 「오리겐」입니다. 「오리겐」은 헬라 철학에 능통한 사람이요, 플라톤 철학을 가지고 기독교를 해석하려고 했습니다. 이것 을 소위 「유출설」(流出說)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유출」(流出)이란 말은 양동이에 물을 많이 부으면 물이 넘쳐흐르듯 이 「넘쳐흐른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리겐」은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유출된 분”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즉 하나님이 충만해 서 마치 양동이에서 물이 흘러나오듯이 흘러나온 것이 예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리겐」은 온 우주가 다 하나님으로부터 유출(流出)된 것이라고 하면서 제일 먼저 유출된 것이 예수님이 고 그 다음에 유출된 것이 우주(宇宙)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로고스」(Logos)이라고 불렸습니다. 여기의 「로고 스」(logos)란 “말씀”이란 뜻인데 바로 요한복음&nbsp1:1에 있는 말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리겐 은 이 「로고스」는 완전한 하나님도 아니요, 완전한 피조물도 아니요 중간쯤 되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반신」(半神= 온 전한 신이 아닌 반쪽 신이라는 뜻)이라고 불렸습니다. 
초대교회에 이러한 이론이 퍼지니까 초대 교부들이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해서 반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논쟁(論爭) 이 격화되었습니다. 그때 당시의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대제」가 회의를 소집하였고, 그는 외교 전술을 써서 뜻이 분명치 못한 용어 를 사용함으로 분쟁을 일단락 시켰습니다. 이때 그가 사용한 단어가 헬라어로 「호모우시오스」(Homoousios)라는 말인데 이 말 은 “본질이 같다”라는 뜻입니다. 말입니다. 즉 “하나님과 예수님이 본질이 같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듣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오리겐 학파」에서는 이것을 유출설(流出說)에 맞 추어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또 오리겐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요한복음&nbsp1:1,18의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 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는 말씀과 빌&nbsp2:6-7의 “예 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 이 되었다”라는 말씀에 맞추어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콘스탄틴 대제」의 지혜로 인하여 잠시 동안 문제가 해결 된 듯 하였지만 오래 가지는 못했습니다. 

그 후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아리우스」(Arius)라는 사람이 태어났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도시에 있는 한 교회의 장로였는데, 또한 철학자였습니다. 「아리우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하다고 하면 말이 안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둘이든지 아니면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든지 해야지. 하 나님 아버지도 아니고 그렇다고 피조물도 아니면 예수님은 도체야 뭐냐? 아예 성부와 성자의 구별 없이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하든 지 아니하면 예수님은 사람이라고 해야지, 이것도 아니고 본체가 같다니 말이 안된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생각해 도 우리의 작은 두뇌로서 예수님이 하나님이면서 또한 하나님과 다른 분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논리적으로 깨 끗하게 해결하려고 한 사람이 곧 「아리우스」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리우스는 “① 예수님은 성부와 비슷하다. 따라서 예수님은 영혼 이 없고 로고스(Logos)가 곧 영혼이다 ② 예수님은 무(無)로부터 창조된 피조물이다. 그러나 특별하게 피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의 아들이라고 부를 수 있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리우스」는 삼위일체를 부인하고 제2위되신 성자 예수님을 부인(否 認)하였습니다. 

이것은 논리에 아주 들어맞는 이론처럼 보입니다.  하나도 틀린 곳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주 훌륭한 이론 같습니다. 그 러나 아리우스의 주장은 그의 상관이라는 할 수 있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더」와는 의견이 달랐습니다. 알렉산더는 성경 을 아주 열심히 공부하는 학자였습니다. 그가 보기에는 아리우스의 이론이 복음을 파괴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리우스 와 알렉산더 사이에 충돌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였던 「유세비우스」란 사람은 아리우스의 의견에 동조했습니다. 그는 그 당 시 콘스탄티노플에 살고 있던 콘스탄틴의 아들 「콘스탄티우스」 황제에게 잘 보여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인 알렉산더를 파면시켰습니 다. 그리고는 다시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호모이오스」(Homoios)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헬라어로 「비슷하다」라는 뜻입니 다. 그 전까지는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본질적으로 동일한 본체”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 본질 이 같다)라고 했는데 이제는 「호모이오스」(Homoios = 비슷하다)라고 해서 “하나님과 예수님은 비슷하다”고 고쳐 버렸으니 완 전히 아리우스파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때에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 후임으로 들어 온 주교가 유명한 학자 「아타나시우스」였습니다. 그는 이러한 결정에 반대하 여 일어났습니다. 아무리 황제가 주장한 것이라도 그것은 복음의 근본적인 파괴라고 반항하였습니다. 그러나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화 가 나서 「아타나시우스」를 파면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아타나시우스」는 숨어 피해 다니면서 계속해서 팜플렛을 써냈습니다. 성경 의 가르침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나님과 비슷한 분이 아니라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성부와 동질이다. 그리스도 는 완전한 신이요, 완전한 인간이다”라고 계속해서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와의  계속됨으로  분쟁으로 인하여 교회가 분열될 위기에 처하자 「콘스탄틴 대제」는 주 후&nbsp325년에 종교회의를 소집했는데, 이 회의를 「니케아 회의」라고 합니다. 이때 「니케아 회의」에서 “예수 그리스 도는 하나님과 동질이시며 완전한 신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시다”라고 결정하고, 춘분 후 만월이 지난 첫째 주일을 부활절로 제정하 고, 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이단자로 규정하여 추방하였습니다. 그리고 콘스탄틴의 아들 「콘스탄티우스」가 물러가고 「데오도시우 스」(Theodosius) 대제가 황제로 등극하면서&nbsp381년에 제1회 공의회를 소집했는데, 이 회의를 「콘스탄티노 플 회의」라고 합니다. 「콘스탄티노플 회의」에는 신학자&nbsp150명이 모여 지난&nbsp60여년간 끌어오던 “하 나님과 예수님에 관계에 대한 논란”을 끝냈습니다. 바로 이때 사도신경을 구체화하여 결정하여 기독론에 대한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 다. “.... 하나님은 독생자이시요 모든 시간 이전에 아버지로부터 독생하시고 빛으로부터 온 빛이요 참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참 하 나님이시며.... 곧 하나님과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분이시다” 이 신앙고백은 오늘날 기독교의 정통 교리로 카톨릭과 개신교 가 다같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 교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교회는 그 이후&nbsp1,600여년 동안 존재해 왔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사실을 가만히 생각해 볼 때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의 논리에 대하여 승리한 하나의 큰 승리입니 다. 인간의 논리로 따져 볼 때에 예수님과 하나님은 다르면서 또 같은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 회는 그 후&nbsp1600여 년 동안 말이 안 되는 논리에 맞지 않는 교리 위에 서 있었으며 그것을 통하여 수 십억의 사 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가 인간의 지혜를 이기고 승리한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하 여 “나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라는 고백 속에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서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심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2.예수님은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심을 내가 믿습니다.
우리말 신앙고백에는 「우리 주」라는 먼저 나옵니다. 그러나 원문에는 「우리 주」라는 말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 뒤에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라는 말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란 말도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간단한 것 같지만 그러나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 다. 요&nbsp20:31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 게 하려 함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래 예수란 말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고 나사렛에서 자라시고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로마 군인들에게 의하여 십자가에 못 박 혀 죽은 사람을 뜻합니다. 따라서 예수라는 말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곧 구원자」(마&nbsp1:21)라 는 뜻으로 보통 「구원자」란 뜻을 지닌 히브리어 「여호수아」의 영국식 발음으로 보통 유대인들 가운데 있을 수 있는 특별하게 신성시 되지는 않는 이름으로 예수님은 최초 나사렛 예수라 불리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의 살아 계신 하나님 아들이십니다”라 고 고백하였습니다(마&nbsp16:16)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그리스도」라는 말은 헬라어의 「크리스토스」(Χρἰστος)에서 유래한 것으로 구약 성경이 말하는 「메시야」를 말합니 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야」라는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메시야」란 “하나님의 기 름 부음을 받은 자”(요&nbsp1:41)란 뜻으로서 성경에서 「기름 부음」이란 직분을 임명하는 의식으로 구약의 경우 선지 자, 제사장, 왕 등을 임직할 때 기름을 부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행하신 일도 이와 같은 세 가지 직 분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선지자으로서의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말씀)을 계시 받아 백성들에게 선포하며 알려주는 자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 받아서 먼저 아는 사실 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권면하고 경고하고 위로하며 축복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시는 동안 제자들과 함께 많 은 사람들을 가르쳤고, 그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마4:23)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선지자라고 불렀습니 다. 마&nbsp2:11에는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둘째로, 제사장으로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 시대에 제사장은 제물을 가지고 가서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자입니다. 이때 제사장의 손에 의하여 제물로 드려지는 짐승은 범죄(犯罪)한 인간을 대신하여 죽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을 가리켜 인류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대제사장이라고 하였습니 다. 히&nbsp7:17에 는 예수님을 가리켜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제 사장은 그가 죽으면 아들이 대를 잇게 되지만 예수님은 영원토록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 죄를 대신 맡아 주시고 항상 기도해 주십니 다.  그래서 히&nbsp7:25에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 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셋째로, 왕으로서의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계&nbsp196에 보면 예수님을 가리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때에 동방에 서 온 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고 했습니다 (마&nbsp2:2) 이는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사 자기 교회를 통치하시며 신자의 마음을 지배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 입니다. 엡&nbsp1:22에서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고 했습 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머리”란 왕적 권세를 나타내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영적 왕권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또 한 예수님은 만물을 지으신 창조의 근본이며 모든 생명의 원인자 곧 예수 그리스도는 우주적 왕권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 은 성부와 함께 세상 만물을 다스리시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nbsp28:18에서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 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왕적 권세를 가지고 세상 마지막에 다시 오셔서 새 하늘 과 새 땅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계&nbsp21:5)

따라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라 함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메시야로서 구원의 소식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으 며 오직 예수님 만이 모든 인간을 죄악으로부터 구원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도 믿고, 「메시아」도 믿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에서 예언하신 오실 「그리스도」에 대해 서 믿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것은 믿지 않습니다. 유대교에서는 그러기에 그들은 지금도 「매시야」를 기 다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지 못합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님이 구약 성경이 가리키는 메시아라 는 사실을 못 믿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기독교와 유대교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고백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하신 자시요,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서 갈릴 리에서 활동하시고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그가 바로 구약 성경에서 예언한 메시 아 곧 우리의 구세주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바이고 신앙고백에서 말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일체 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도 요한복음&nbsp10:30에 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나」ꡕ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땅위에 육신을 입으시 고 오신 그는 하나님과 동등하시고 본질상 다름이 없으신 분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성부 하나님 아버지와는 구 별되는 것입니다. 그 구별과 차이는 다름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의 차이입니다. 성부는 성자를 보내신 자요, 성자는 성부의 보내심 을 받은 자이다. 성자 곧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 곧 성부와 동일하셔서 늘 함께 계시고 우주의 권세 를 장악하고 계십니다. 

3.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 되심을 내가 믿습니다.. 
베드로가 마&nbsp16:16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고 했던 것처럼 초대교 회 성도들 앞에서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 니라 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행&nbsp2:36) 또한 사도 바울은 고전&nbsp12:3에서 “그러므로 내 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 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의 「주」(主)라는 말은 주인 또는 주권자를 의미합니다. 구약의 경우 「주」라는 말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대 명사」였습니다. 제3계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말씀에 따라 히브리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이라 는 말이 나올 때마다 이를 “주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주(主)”라는 말을 그냥 존경하는 뜻으로 일반에 사용된 경우 가 더러 있으나 이 말이 우리의 신앙고백의 뜻으로 쓰이게 될 때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성(神聖)의 대명사요, 절대적인 구속력을 행 하시는 의미를 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로, 유일하신 주권자(主權者)가 되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주」(큐리오스 ,Κὐριος)라는 말의 개념은 종이 자기의 상정을 부를 때에 신하가 임금을 부를 때 또는 여인 이 자기의 남편을 향하여 사용한 용어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오직 하나 뿐 인 주님이시요, 다른 주인이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구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 서 벧전&nbsp1:18,19에서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 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치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마6:24, 눅16:13)과 충성스러운 신하에게 두 임금이 있 을 수 없는 것(계&nbsp19:16) 또한 현숙한 여인이 다른 남편을 둘 수 없는 것(벧 전&nbsp3:6, 잠&nbsp31:10-31)과 마찬가지로 오직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적어도 우리가 예수님 을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한다면 일생을 예수님만을 섬기겠다는 결심을 보여야만 합니다. 때때로 시험(試驗)이 오고 유혹이 와도 변 절하지 아니하고 일편단심(一片丹心) 신앙의 정절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께 충성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옛날 임금을 섬기는 충성스러운 신하들은 나라에 위기가 있게 되면 자기의 몸을 돌보지 않고 목숨을 바쳐 임금에게 충절을 지켰 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주(主)”는 주권자로서 우주적 통치권을 의미합니다. 마&nbsp28:18에서 “하늘과 땅의 모 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하였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nbsp2:9-11에서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 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내 인생에 있어서 유일하신 주권자(主權者)요, 나의 걸음을 주장하시는 분으로 믿고 그의 말씀에 따라 충성할 것을 약속하는 의미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생사대권이 주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主)라고 할 때 나는 그의 종이라는 뜻을 지닙니다. 신약성경을 기록한 사도들은 대부분 그의 초두에 자신 을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종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바울이나 야고보나 베드로 등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습니 다. 종은 주인의 소유물입니다. 고대 로마 사회에서 종을 가구의 일부분으로 생각하였고, 가축처럼 마음대로 부리며 시장에 내어다 팔 기도 하였습니다. 종은 자유나 권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의 존재(存在) 가치가 주인을 위해서만이 인정됩니다. 생사주권(生死主 權)이 주인의 손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주」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살고 죽는 문제까지 포함하여 그의 존 재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뜻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nbsp1:20-21에서 “나의 간절 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 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요&nbsp1:1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 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는 말씀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의 “태초”라는 말은 「처음」 혹은 「제일 처음」이란 말 로 히브리어로는 「베레쉬트」(תיꚍאꕊꔶ)(창&nbsp1:1)라고 하고, 헬라어로 「아르케」(ἀρχή)(요1:1)라고 합니 다. 
그런데 창세기에서 말하는 「태초」(太初)란 말은 우리의 시간개념(時間槪念)에 헤아릴 수 없는 때를 가리켜 말하는 것인 데,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그의 권능의 말씀으로 창조하신 그 바로 제일 처음을 말하는 것이고,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태초」(太 初)란 땅위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가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탄생하신 그 때가 그의 시작이 아니라 태 초 곧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기 시작하셨을 때 혹은 창조를 시작하셨을 때 이미 성자 곧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하나님께서 함께 계셨다 는 것을 밝히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 말한 태초(太初)라고 한 것은 우주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과 비교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사용한 것입니 다. 따라서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제2위되신 성자되신 하나님은 만물이 아직 창조되어 있기 전에 영원히 성부 하나님께 함께 계셨 고, 친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따라서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는 우주의 만물을 장악하시고 통치하시고 계십니다. 그래 서 요&nbsp3:35에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라고 했고, 요&nbsp1:3에 보 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 은 “만물의 모든 것이 예수님을 통해서 창조되었고 따라서 우리도 예수님의 피조물이다”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은 우리 의 주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nbsp1:12절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 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주님께서 이전에도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또 사람을 창조하셨 으니까 원칙적으로 모두 다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이제는 좀 특별한 관계에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뜻입니 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도 우리 마음대로 되는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입니 다. 요&nbsp1:13절에 보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서 난 자들이니라” 고 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사람의 육정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의도로 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 서 전적으로 우리를 자기의 백성으로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nbsp100%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요,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 로 우리가 “전능하사...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라는 고백은 예수님은 나의 구세주요, 메시아요, 하나님 의 독생자이심을 믿는다는 고백이요, 동시에 예수님은 온 우주의 주인이 되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만물이 창조되기 전 에도 그는 아버지의 뜻을 말씀하시며 성령의 빛으로 우주를 비추어 주신 분으로서 말씀이 되신 분이십니다. (히&nbsp1:3, 골&nbsp1:15-17,요&nbsp3:35)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라는 신앙고백 없이는 결코 기독교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 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은 기독교인의 신앙고백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교회에 나가서 은혜로운 설 교, 굉장한 기적, 감동되는 교훈을 아무리 많이 보고 들을지라도 이 핵심적인 교리를 모르고 신앙고백을 하지 아니하면 기독교와는 관 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고백이 그렇게 간단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 주 후&nbsp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까지 많은 투쟁을 걸쳐서 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많은 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많은 책 들이 나오고 많은 토론회가 벌어졌습니다. 황제가 개입되고 정치가 개입되었습니다. 온 지중해 연안이 들 꿇었습니다. 그런데 신비스럽 게도 가장 비논리적인 이 교리가 교회의 공식 교리로 채택되고 이것이 그 후 오늘날까지 정통 교회의 교리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것 은 정말 신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이 고백을 형성하는데 역사 하셨음을 우리는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위대한 전통 속 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비 온 후에 갑자기 솟아난 버섯처럼 그렇게 세워진 교회가 아닙니다. 선지 사도가 터를 닦 은 전통 속에 우리가 지금 속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공적(公的)교리(敎理)라는 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가 감히 팽개칠 수 없고 무시할 수 없는 것임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