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누가복음 19:1~10
 
신문을 읽거나 TV의 뉴스 보도를 들으면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한번 이 세상을 확 뒤집어 놓을 수 없을까?' 잘못 들으면 오해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한데, 좀더 신앙적인 표현으로 바꾸어 말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좀더 선하고, 좀더 정직하고, 좀더 정의로운 사회로 바꿀 수 없을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현실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하기를 사모한다면 아마 한두 번씩은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해보았을 것입니다. 얼마나 거짓됩니까? 얼마나 음란합니까? 얼마나 사치스럽습니까? 얼마나 잔인합니까? 얼마나 포악합니까? 얼마나 불법이 난무하고 있습니까? 이런 현실을 보면 누구든지 '이 세상 좀 바꾸어 놓을 수 없을까?' 하고 질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고민과 함께 떠오르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코드가 무엇인가? 기독교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는가? 교회가 과연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오직 교회만이, 복음만이,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사실을 저는 한번도 의심해본 일이 없습니다. 

한편 이런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요즘 국가적으로 앓는 열병 중 하나로 '사치'를 지적할 만큼 그 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국가에서 발표한 통계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 20억 이상의 재산을 소유한, 소위 백만 장자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약 5만 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 재산을 숨겨 놓고 신고하지 않는 사람도 많으므로 그 수치는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한 10만 명 정도로 추정한다면 1인 당 가족 5명씩 계산해서 부유층에 속하는 사람들로 약 50만 명을 잡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가 이렇게 사치의 열병을 앓고 있는 것도 이 50여만 명의 책임이 크다고 봅니다.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백화점의 명품 코너를 안방 드나들 듯이 다니고, 해외 여행을 다녀올 때면 고가의 제품을 맘껏 사가지고 오기 때문에 좋지 못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절제하면서 검소하게 사는 사람들, 소박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우롱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처럼 50여만 명 되는 사람들이 우리 나라의 이미지를 사치하는 나라로 바꾸어 놓을 만큼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1,000만 명 기독교인 중 90%는 제쳐놓고 10%에 해당되는 100만 명만 가지고 이야기해 봅시다. 이들 100만 명이 정말로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한다면 얼마든지 우리 사회를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돈 있다고 제 맘대로 쓰는 몇 십만 명의 사람들이 한 나라의 이미지를 사치에 들뜬 모습으로 바꾸어 놓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제구실을 하는 100만 명만 있다면 충분히 이 세상을 바꾸어 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직 교회만이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대안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삭개오의 이야기를 보면 우리가 복음을 가지고 세상을 바꿀 수 있음을 재차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여리고에서 세리장으로 있던 사람입니다. 여리고는 '하나님의 낙원'이라는 뜻을 가진 아름다운 도성이자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이런 부촌에서 세리장의 자리에 앉을 정도면 그가 얼마만큼의 재력을 소유한 자인지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세리는 유대인들이 백안시하는 네 부류의 사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창녀나 이방인, 죄인처럼 취급받던 사람이 바로 세리였습니다. 로마제국은 식민지마다 세무공무원을 파송하여 식민지에 있는 사람들을 착취했습니다. 이를 위해 현지인을 고용했는데, 그들로 부과한 세금을 걷도록 할당제 형식으로 책임을 맡겼습니다. 그러면 이 현지인들은 자기 동족들에게 가서 세금을 거둬 들여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특별히 열심이 있고 능력이 탁월한 사람을 뽑아서 팀장 역할을 하는 세리장으로 세웠습니다. 따라서 삭개오가 얼마나 자기 동족에게 미움을 받았을지 충분히 이해가 가는 부분입니다. 

당시 세금을 산정하는 기준이 있었겠지만, 대부분 세리들이 나름대로 각 가정마다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호주머니를 채우려면 규정보다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해야 했을 것입니다. 삭개오라는 이름의 뜻은 '의로운 자, 순결한 자'라는 뜻입니다. 결국 삭개오는 자기 이름값을 못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가 어떻게 동족으로부터 따돌림을 받으면서도 안면몰수하고 자기 인격과 가문을 팔아 돈 버는 데만 생명을 걸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개인에게 있어서는 퍽 불행한 사람임에 틀림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 가십니다. 그런데 중간에 여리고로 통과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이미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문이 여리고 도성에 퍼져 있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TV나 신문 등 정보를 들을 수 있는 통로가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기한 것이나 유명한 사람이 나타나면 한데 몰려가 구경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동네를 지나간다고 하자 동네 사람들이 몰려 와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 주변을 둘러싸고 같이 걸으면서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한 말씀이라도 귀담아 들으려는 아름답고 멋진 진풍경이 벌어진 것입니다. 삭개오도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는 하던 일을 제쳐놓고 달려 나왔습니다. 거리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는 유난히 키가 작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가까이 접근은커녕 사람들 틈에 끼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체면 불구하고 옆에 있는 뽕나무로 기어 올라갔습니다. 그리고는 어린애들이 하듯이 뽕나무에 걸터앉아 예수님이 지나가기 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명심하고 넘어가야 될 중요한 첫 번째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세상에서 부유하게 사는 사람,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 자기의 어떤 꿈을 이루었다고 하는 사람 가운데에는 삭개오처럼 영혼의 갈증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자기 내면에 큰 구멍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더 나은 것이 있을 텐데. 이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있을 텐데. 그것이 무엇일까?' 하는 어떤 갈증이 있습니다. 이 갈증을 늘 마음에 담고 있다가 위대한 스승, 예수님이 오신다는 밀을 듣자 한번 만나봐야 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들의 내면에는 죄책감과 갈증, 허무감이 있습니다. 어쩌면 영적으로 뽕나무에 올라가 앉아 있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가 전하기만 하면 예수님을 받아 들이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세상의 것으로 만족과 평화를 얻을 수 없다는 사실에 다른 대안을 찾아 애쓰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을 어떤 눈으로 봅니까? 마음에 큰 구멍을 가진 사람으로 봅니까? 그들의 마음 속에 공허감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고 봅니까? 아니면 그들이 살고 있는 큰 집만 눈에 들어옵니까? 아니면 그들이 앉아 있는 지위만 눈에 들어옵니까? 아니면 그들이 소유한 막대한 재산만 눈에 들어옵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의 눈은 사람을 바로 보는 눈이 아닙니다. 

우리는 바로 보아야 합니다. 집을 볼 필요가 없습니다. 재산을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이 꾸미고 사는 것들을 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눈을 가지고 그들의 내면 깊은 곳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마음에 큰 공간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그들에게도 예수님을 전해야 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드디어 예수님이 지나가십니다. 예수님이 나무 위에서 기다리고 있는 삭개오를 모르고 지나가실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다 알고 계시고 기억하시지만, 특별히 한 사람을 아시고 기억하십니다. "삭개오야, 내려오너라." 그가 삭개오인지 어떻게 아셨겠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만이 아시는 특별한 역사였습니다. "삭개오야,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저녁에 너희 집에 들어가 유하여야 하리라." 그 말을 듣고 삭개오가 나무에서 내려와 예수님을 모시고 자기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마주 앉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마주 앉은 것입니다. 삭개오의 죄와 온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어린 양이 되어 죽으실 속죄 주 예수 그리스도와 마주 앉은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서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그 자리에서 영혼이 깨어나지 못한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얼마 후 삭개오가 벌떡 일어나더니 주님 앞에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재산 절반을 정리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가난한 자를 생각하라. 가난한 자를 도와주라."는 말씀이 있지만 자기 재산을 반이나 처분해서 가난한 자를 도와주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자 삭개오가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그분의 맑은 눈동자 앞에서 자신의 추잡한 모습이 얼마나 노골적으로 드러났는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명령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액수인 자기 재산의 반을 가난한 자를 위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더 나아가 "주님, 제가 세리로서 토색하여 손해를 끼친 사람이 있다면 장부를 확인해서 4배로 갚겠습니다." 이것도 대단한 일입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배상의 액수는 1/5입니다. 토색한 것의 1/5만 더 얹어서 갚으면 됩니다. 그런데 4배로 갚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요구하는 액수의 20배를 갚겠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감동을 많이 받았으면 예수님 앞에서 이런 약속을 하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삭개오를 보고 예수님께서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삭개오가 일어나서 자신의 변화 받은 모습을 간증하자 비로소 예수님이 구원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놓쳐서는 안될 두 번째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바로 만나면 삭개오처럼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삭개오처럼 변화 받았을 때에 비로소 구원 받았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옛날의 삭개오는 예수님 앞에서 죽었습니다. 돈이 우상이었던 삭개오는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예수 안에서 다시 살아난 삭개오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렇게 변한 삭개오를 보시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 구원 받았구나.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구나. 너야말로 영생을 소유한 거룩한 백성이 되었구나."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삭개오의 변화는 크게 3가지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돈에서 마음이 떠나 버렸습니다. 삭개오처럼 돈을 밝히던 사람도 없었습니다. 삭개오처럼 돈이 하나님이 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오죽하면 이름과 가문, 믿음, 동족까지 팔아가면서 돈에 매달렸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돈에서 마음이 떠나버렸습니다. 돈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진정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그 마음에서 우상이 없어집니다. 돈이 우상이었던 사람은 돈에서 마음이 떠나게 됩니다. 명예가 우상이었던 사람은 명예에서 마음이 떠나게 됩니다. 정욕이 우상이었던 사람은 정욕에서 마음이 떠나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이런 변화가 우리 안에서 일어납니다. 과연 우리 자신에게도 이런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한번 살펴 보십시오. 변화가 있다면 내가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한국교회의 비극은 입으로는 예수를 고백하면서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떠드는데도, 실상 내면은 돈의 노예가 되어 돈에게 끌려 다닌다는 것입니다. 돈이 하나님이 되어 버렸습니다. 돈 이야기만 하면 믿음도, 하나님도 다 소용없고, 돈이 전부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이 사회가 안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 믿는 사람과 다른 점이 없기 때문에 사회가 변화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우상에서 돌아섭니다. 

돈이 우상이었던 사람은 돈에서 자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만약 이런 사건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았다면 지금 일어나기를 기도하십시오. 아니면 내일이라도 일어나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주님께서 이 집에 구원이 임하였다고 말씀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삭개오의 변화를 보십시오. 그는 고통 당하는 이웃에 대해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난한 사람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다만 내가 잘 살고, 내 자식을 행복하게 해주려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 만나자 가난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의 신음소리가 귀에 들어왔습니다. 이처럼 이웃을 보는 눈이 바뀐 것입니다. 

진정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이웃을 생각합니다. 이웃을 사랑합니다. 가난한 자들을 염두에 두고 나누어 쓰려고 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 믿고 변화된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입으로는 예수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아직도 이웃에 대해서 관심이 별로 없습니까? 항상 우리 집, 우리 자식에만 관심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변화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임하였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둘째로 삭개오에게 일어난 중요한 변화는 자기의 죄에 대해서 회개하는 마음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토색했다는 것은 해를 끼쳤다는 말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세금을 과하게 부과해서 착취를 했으니 그것은 나쁜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일을 했으면 당연히 회개하고 보상까지 하겠다고 것이 삭개오의 생각이었습니다. 
흔히 "예수 믿고 죄 용서 받고 변화 받았다."고 말은 하면서도 옛날에 다른 사람들에게 끼친 피해에 대해서는 진정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변화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만나면 삭개오처럼 변화할 수 있습니다. 돈에서 마음이 떠날 수 있습니다. 이웃을 향해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서 진정한 회개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삭개오처럼 변화만 된다면 이 사회가 안 바뀔 수 있겠습니까? 우리를 만나는 사람들이 감동을 안 받을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우리에게 이런 변화가 잘 일어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살아계신 주님께서 이 자리에 임재하셔서 삭개오를 만나시듯 우리를 만나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진정한 변화와 역사가 일어납니다. 

삭개오의 이야기에서 주목해야 될 세 번째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이야기의 속편입니다. 성경에는 삭개오의 속편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떠나셨습니다. 이제 삭개오는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예수님 앞에 한 약속을 잘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는 그 약속을 행동에 옮겼습니다. 재산을 정리해서 반을 나누고는 그 동네의 빈민촌을 찾아 다니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제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기절초풍했을 것입니다. 세리장으로서 악명 높은 그 사람이 갑자기 천사의 얼굴을 하고 나타나 "지금까지 당신들이 그렇게 어렵게 사는 줄 미처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만나 내 자신이 잘못된 것을 발견했습니다. 작은 것이지만 받으세요." 하면서 집집마다 다니면서 구제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 사실이 여리고 성을 들썩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장부를 들고는 자기가 토색한 집안에 찾아가 "내가 당신 집에 세금을 지나치게 부과하여 토색했습니다. 약 10만원 정도를 토색한 것 같은데 여기에 4배를 보태서 50만원을 드릴 테니 받으십시오." 하면서 손해액을 배상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내 자신이 잘못된 것을 발견하고 이렇게 회개합니다.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말한다면 얼마나 큰 충격을 받겠습니까? 이로 인해 여리고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을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도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면 이런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 주변에 삭개오와 같은 부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남을 짓밟고 성공하면 그것으로 인생의 소원성취를 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찾아가서 예수님을 전하면 굉장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이구, 저 사람이 저렇게 잘 살고 교만한데, 예수 믿으라는 말로 찔러 봐야 피도 안 날 텐데..." 하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막상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생각지도 않은 사건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음이 비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바로 전하기만 하면, 우리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주기만 하면 그들이 예수 믿고 삭개오처럼 변화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변화 받은 그들을 통해서 한국 사회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얼마나 붙들 것이 없어서 허우적거리고 있는지 신문지상을 통해서 많이 봅니다. 타임지에 실린 기사 하나를 소개합니다. 아시아에서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나라로는 다섯 나라를 들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외도율이 가장 높은 나라가 대한민국이라고 합니다. 한국 성인남녀 2,350만 명 중 약 20%에 해당하는 450~500만 명이 외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서로 모르게 잘못된 관계를 가집니다. 미혼의 젊은이들도 혼전에 벌써 탈선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외도입니다. 

서울 고검 검사가 쓴 칼럼에서 이에 대해 탄식한 것을 보았습니다. 최근 명단이 공개된 미성년 성폭행자 대부분이 20대부터 40대까지인데, 그들 중에는 교수, 교사, 의사, 약사, 언론인, 영화감독, 회사원, 외국인 강사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무차별적으로 가담해 있었습니다. 그런대로 성공했다는 사람들, 잘 산다는 사람들, 자기가 목표한 만큼 재산을 모았다는 사람들이 이런 짓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외도 정도가 아니라 좀더 흥미와 자극을 더하고자 어린 미성년자에까지 접근했다는 점에서 타락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고검 검사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지금 이 나라의 성적 타락은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다. 우리 나라처럼 유흥업소가 많은 나라도 없고, 우리 나라처럼 접대여성이 혹사당하는 나라도 없고, 우리 나라처럼 성폭력이 많은 나라도 없다." 아무래도 범죄자들만 다루는 전문직에 있는 사람의 말이므로 더 신빙성이 있을 것입니다. 

잘 살면 잘 살수록 이런 일들이 더욱 비일비재합니다. 나중에 성으로도 만족하지 못하면 마약에까지 손을 댑니다. 그래서 오늘날 마약 사범이 얼마나 많이 퍼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이런 데 빠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그들의 마음에 구멍이 나 있기 때문입니다. 벌면 벌수록, 성공하면 성공할수록 마음에 있는 공허가 더 큰 입을 벌리고 더 좋은 것, 더 쾌감을 주는 것, 더 자극적인 것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들을 내버려두면 안됩니다. 그들에게 전도해야 됩니다. 

그들도 삭개오처럼 주님을 만나기만 하면, 변화 받은 그들 한 사람을 통해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런 사람이 변화되어 하나님 앞에서 바로 쓰임을 받으면 이 세상이 바뀝니다. 이 세상이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빌리 그래함이 뉴욕에서 전도집회를 할 때였습니다. 그때 미국 북동부 지역에서 가장 큰 회사를 경영하는 필립스라는 사장이 있었습니다. 마침 그가 그 전도집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그는 37살에 수석 부사장이 되었고, 40세에 CEO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만큼 탁월하고 성공에 대한 집착이 강하며 돈에 대한 애착이 심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오직 성공하기 위해서 외길을 달려온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복음을 듣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사람이 달라졌다는 것은 생각, 가치관, 인생관, 물질관, 대인관계 등 삭개오처럼 모든 것이 다 바뀐 것을 말합니다. 그 역시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회사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주변의 친구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저 사람 달라졌다. 무언가 달라졌어." 하고 말할 정도로 변했습니다. 

어느 날 밤 늦게 필립스를 찾아온 손님이 있었습니다. 닉슨 대통령의 친구이자 특별 고문 겸 보좌관이었으며, 잘 나가는 워싱턴의 변호사였고, 유명한 독설가이기도 했던 찰스 콜슨입니다. 당시 워터게이터 사건으로 상당히 어려운 궁지에 빠져있을 때였습니다. 단 둘이서 응접실에 앉자 마자 찰스 콜슨이 필립스에게 이렇게 말을 돌렸습니다. "필립스, 내가 보기에 자네는 전에 비해 완전히 변해 버렸어. 나는 자네에 관해 좀 듣고 싶네. 그 동안 자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오늘 밤 얘기해줄 수 없겠나?" 그 말을 들은 필립스는 그날 밤 하나님께서 전도의 기회를 주신 줄 알고 간증하기 시작했습니다. "콜슨,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밤낮없이 일해서 성공한 사람이었어. 가지고 싶은 것은 다 가진 사람이었지. 하지만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었어. 나는 정말 허전했어. 때로는 한밤 중에 일어나 침실 복도를 거닐거나 몇 시간씩 바깥 어두움을 쏘아보곤 했네. 내 인생에는 큰 구멍이 나 있었네. 나는 중요한 것이라곤 하나도 가지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어. 그러던 어느 날 출장 차 뉴욕을 가게 되었는데,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전도집회가 있다는 말을 들었지. 거기를 가면 무언가 해답을 얻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참석해 보았네. 그런데 설교를 들으면서 나에게 모자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비로소 발견하게 되었다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시지 않았다는 것이고, 나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지 않았다는 것이었어. 그런데 이것이 나에게 결정적으로 문제였다는 것을 비로소 발견하게 되었다네. 그래서 지체하지 않고 그 시간 나는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셔 들였어. 그러자 신비한 평화가 내 안에 임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 옛날 같으면 전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삶에 대한 만족과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네. 이것이 나의 이야기야. 내가 변화 받은 이야기지. 콜슨, 자네도 이 시간 그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다네. 나하고 손잡고 기도하세. 예수님이 자네를 만나주실 꺼야." 그리고는 손을 잡고 둘이서 기도했습니다. 

콜슨이 그 순간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일종의 에너지 같은 것이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고 말입니다. 감정이 솟구치면서 거의 울음을 참을 수 없을 지경까지 복받쳐 올랐습니다. 겨우 참고 기도를 끝낸 다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밖으로 뛰어나가 차에 올라탔습니다. 그런데 시동을 걸려고 열쇠를 찾는 동안 눈물이 비오 듯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차를 몰고 집을 빠져나올 동안 눈물을 억제할 수가 없어 차를 길 옆에 세우고는 정신 없이 한 시간이 넘도록 혼자서 울었다고 합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 마치 물속을 헤엄치는 것처럼 흐느꼈을 정도라고 그는 말합니다. 그런데 그가 흐느껴 우는 동안, 마치 해방되고 있다는 놀라운 감정을 경험하기 시작했고, 그의 눈물이 온 몸에서 솟아나면서 깨끗이 씻어내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기도라는 것을 주님 앞에 해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변화되었습니다. 주님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했습니다. 콜슨은 그날 밤을 평생 잊을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 해 1974년, 그는 워터게이트 때문에 유죄 판결을 받고 7개월 동안 복역했습니다. 그런데 출감 후 교도소선교회를 조직해 전 세계 형무소 수감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일평생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그를 통해서 얼마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교도소 문화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재소자들의 인권 문제가 개선되기 시작했습니다. 전세계의 교도소에 수감된 많은 죄수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절망에서 소망을 찾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는 현재 1,000여 개 넘는 방송망으로 전달되는 라디오 프로그램인 브레이크포인트의 진행자입니다. 또한 기독교의 현대고전으로 평가 받을 만한 우수한 책들을 수십 권이나 썼습니다. 1993년에는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 상까지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지칠 줄 모르고 교도소를 찾아 다니며 복음을 전합니다. 그 한 사람 때문에 사회의 가장 참혹한 곳에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콜슨이 필립스를 찾아왔을 때만해도 이제 그는 별 볼일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쉬웠을 것입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으면 그는 사회로부터 완전히 매장당할 것이고, 다시금 재기하기란 거의 가능성이 없는 초라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필립스가 콜슨을 전도하고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 그를 통해 이 세상이 바뀌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 자신이 변해서 이 세상을 바꾸어야 하고, 그 다음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을 전도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함으로 그를 통해 하나님의 기적이 온 세상에 파급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을 바꾸는 대안입니다. 이것이 이 사회를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능력을 믿습니다. 주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날 변화의 역사를 믿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보고 낙심만 하지 하십시오. 불평만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바로 되면 세상이 바뀝니다. 우리를 통해 주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면 세상은 바뀝니다. 진짜 예수를 만난 변화를 우리가 세상에 보여 줄 수만 있다면 세상은 바뀝니다. 이런 꿈을 가지고 이번 대각성전도집회를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