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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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616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1-6)
본문의 말씀은 “하나가 되라”고 권면의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 되어 화목에 힘쓰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목적에 합당한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만물을 하나로 창조하셨습니다. 사람, 민족, 언어, 사상, 문화가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저지른 죄는 이 모든 것을 파괴하였습니다. 죄(罪)로 인하여 인간은 하나님과 갈라졌고, 천국과 갈라져 영원한 지옥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형제가 갈라지고, 언어가 갈라지고, 그 후 인간의 역사는 분단과 전쟁과 갈등과 반목으로 얼룩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화평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하나님과 우리를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갈라진 하늘과 땅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이었습니다.(엡 1:10).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 바로 이 분단된 죄인들의 삶을 하나 되게 하심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새사람은 반목과 분리된 모든 상황이 하나로 통일되는 경험을 누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하나님과 하나 되어 화목하십니까? 여러분의 가정은 하나 되어 화목하십니까? 여러분은 교회 안에서 하나 되어 화목하십니까? 죄(罪)는 분리되고 갈라지게 합니다. 마귀는 반목하게 합니다. 교회가 하나 되어야 세상이 이를 보고 배웁니다. 교회는 정당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파가 있어 반목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에게 자랑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분열된 옛 생활」을 청산하고 「하나 된 새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함께 있는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열의 모습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비롯하여 모든 교회들은 분열과 다툼으로 교회가 시험에 빠질 수 있다는 위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옥에서 간곡한 마음으로 부탁하고 있습니다. 「하나 된 새 생활」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분열된 옛 생활」을 버리고 우리 모두 하나 되어 평화를 누리는 새 생활」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도 있을 수 있는 분열과 다툼을 버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갈라지고 등 돌리고 미워하고 비판하고 욕하고 싸우는 일을 청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하나입니다(4절). 지체 된 성도들 사이에 반목과 대립은 곧 죽음입니다. 성도들의 속에 거하시는 성령도 한분입니다(4절). 성령 충만 사람들이 싸우는 일은 성령을 모독하는 일이요, 멸시하는 일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소망하는 하나님의 나라도 하나입니다(4절). 천국 소망이 있는 사람들이 시기와 질투를 일삼는 일은 스스로 천국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 전에 서로 다를 수밖에 없어, 반목하고 시기하는 생활을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 우리는 한 주님,한 믿음, 한 세례, 한 하나님 아버지를 모신 「하나 된 새 생활」을 하도록 하나님은 원하십니다(5-6절).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 됨을 힘써 지켜야 합니까?
1. 부름에 합당한 생활이기 때문입니다.(1절)
본문 1절에서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할 이유는 부름에 합당에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1장→복 주심에 대하여 2장→은혜 주심에 대하여 3장→일꾼 삼으심에 대하여 4장→합당한 생활할 것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군인에게는 군대생활, 학생에게는 학업생활, 주부에게는 주부생활이 있듯이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 되어 화목을 이루는 생활」이 있어야 합니다. 이는 불러주신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땅한 생활입니다.
2. 성령께서 주신 선물입니다(3절)
본문 3절에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 됨을 힘써 지켜야 할 이유는 성령께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체험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증거가 하나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교회는 성령이 충만하여 안으로는 서로 하나 되어 화목하고, 밖으로는 복음을 전파하는 모습을 가집니다. 성령이 오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그대로 우리들에게서 나타내십니다. 성령의 인격을 우리들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 되기 위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첫째로, 겸손한 마음입니다.(2절)
겸손은 낮추어진 마음입니다. 스스로 노예와 같이 자신을 여기는 마음입니다. 자기의 가치를 수준이하로 낮추어 그렇게 취급하기를 원하는 마음입니다. 고대사회(古代社會)에서는 겸손은 매우 경시되었습니다. 겸손은 약한 자들의 것으로 간주되었고, 굽실거리며 복종하는 노예의 모습을 나타낼 때 겸손이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겸손은 주님의 마음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6)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한마디로 겸손의 삶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신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의 겸손의 극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겸손(謙遜)이란 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태도"인 것입니다. 빌 2:3에서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겸손은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이 없으면 그것은 교만한 것입니다. 대개 교회에서 시험받을 때가 언제입니까? 자존심이 상할 때입니다. 자존심을 주(主)존심(存心)으로 바꿉시다. 겸손만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물은 낮은 곳에 고입니다. 하나님의 복과 은혜도 낮은 마음에 임합니다. 우리가 겸손할 때에 하나 될 수 있습니다. 겸손한 마음을 갖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 됨을 지키지 위해서는 겸손해야 합니다.
둘째로, 온유한 마음입니다. (2절)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온유를 매우 찬미하였습니다. 그는 온유를 중용의 덕으로 보았습니다. 즉 "지나치게 분노하는 것과 전혀 분노하지 않는 것의 중간"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이 온유라는 단어는 길들여진 짐승에 대해서도 사용되었습니다. 즉 사나운 야생동물을 잘 길들여서 사납지 않게 하고 짐을 나를 수 있게 되면 그것을 가리켜 온유해졌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온유함이란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됨으로 생기는 신의 성품입니다.“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배우라”(마 11:29) 온유라는 말은 결코 연학함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은혜를 받은 자가 자기의 힘을 조절함으로써 지니게 되는 부드러움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할 것은 무기력해서 온유한 것이 아니라 힘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기에 절제하는 것입니다. 온유는 그리스도의 통치의 수단입니다. 온유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모욕을 받고도 묵묵히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하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기쁘게 순복하고 사람의 약점이나 실수에 대해서는 억제하고 부드럽게 대하는 태도입니다.(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마음입니다)
셋째로, 사랑해야 합니다.(3절)
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오래 참습니다. 내게 피해를 주는 사람에 대하여 용서하므로 견디는 마음입니다. 딤전 1:16에서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께서 오래 참으신 것처럼 오래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내게 대하여 용서하시므로 오래 참으심을 생각하면 그 어떤 사람에 대하여 견딜 수 있을 것입니다. 떠나고 싶은 마음, 버리고 싶은 마음이 가정에서 교회에서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에게는 그 사랑을 써 볼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내 옆에서 속썩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고전 13:4에서 “사랑은 오래 참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②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용납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하나 되려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용납한다는 의미는 '상대방을 자기에게 맞춰 바꾸려는 의도가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있는 그대로 먼저 받아 주셨습니다. 찬송 349장의 후렴에서 바로 이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용납(容納)이란 다른 사람의 실수와 허물에 대하여 이해하는 태도입니다. 잘못한 사람에 대하여 책벌을 보류하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롬 2:3-4에서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납하신 것처럼 우리도 피차도 용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남에 대하여는 얼마나 엄격합니까?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는 얼마나 관대합니까? 주님의 주신 성품은 이와 반대입니다. 용납하는 마음은 마지막 때를 맞이한 우리를 가져야 절대적인 기본 자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벧전 3:8에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3절)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사탄은 문제를 상대방에게서 찾게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 되기 위해서는 “내 탓입니다...나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러한 깨달음은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에 가능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라면 모든 문제를 자기 자기에게서 원인을 찾으려고 합니다.(욘 1:12) 그리할 때에 성령께서 주시는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분열은 불신앙의 소치입니다. 눅 21:17절에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스스로 분쟁하며 나뉘고 다투는 결과는 필연적으로 패망과 자멸입니다. 이 원리는 개인에게도, 집안에도, 나라에도, 또한 신앙 안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분열과 나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분열과 나뉨은 불신앙에서 비롯되는 죄악(罪惡)된 행위입니다.
어떤 것을 인식하느냐에 따라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그 행동이 각각 달라집니다. 그래서 어떤 사상을 동조하는 사람들끼리 그리고 이해관계가 같은 사람들끼리 모이고 당파를 짓고 연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율법과 의식에 집착하고 자신들이 확립한 전통을 버리려 하지 않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주님께로부터 심한 질타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편견과 아집과 이해관계가 진리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외식적인 율법주의에 매달려서 목소리 크게 내기와 명분 싸움에 집착하는 사례가 있습니다. 진정으로 진리에 관한 교리가 아니라. 당파적인 이해관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명색이 교리싸움이라고 하여 교회를 사분오열(四分五裂)시키고 나뉘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울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며 나아가 세상 불신자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불신케 만들고 많은 선량한 신자들을 낙망시키는 등의 엄청난 악을 초래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열과 나뉨은 죄악입니다. 믿음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입니다. 내 가슴속에 분열의 씨가 잠재되어 있지는 않는지 가슴 깊이 살펴보아 통회하고 회개함으로 깨끗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2. 우리가 하나 될 이유는 무엇입니까?(4-6절)
우리가 주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교회 성도들의 일치와 하나 됨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요 17:11에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존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 되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마음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희생이 따르는 실천적 사랑을 행치 않기 때문입니다. 희생이 따르는 실천적 사랑을 행치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빌2:5-8) 그러므로 이제 완악함을 버리고 우리는 일치와 하나 됨을 명령하시는 주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 4-6절에서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 됨의 원리로서 삼위일체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① 한 몸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고전 12:13.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노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는 모두 한 몸이고 몸은 오직 하나인 것입니다. 한 성령 안에서 내주하시고 감화하심으로 하나의 유기체가 되었습니다(고전 12:13, 롬 8:9,11)
② "한 성령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하나 됨을 이루게 하는 역사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충만한 베드로가 설교를 할 때 각기 다른 말을 사용하는 지방의 사람들이 자기네의 언어로 들었던 사건이 있습니다. 이 사건이 바로 성령의 사역인데 바벨탑이후에 분열되고 흩어졌던 사람들이 성령으로 하나가 됨을 보여주는 사건인 것입니다. 우리는 한 성령을 소유하고 있는데 그 성령의 사역이 하나 되게 함이라는 것입니다.
③ 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어느 날 우리를 부르셨는데 그 부르심은 같은 부르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부르심을 통하여 우리는 한 소망을 갖게 되었는데, 그 소망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나라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공동체입니까?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기에 우리는 하나라고 바울은 과감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④ 한 주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나의 주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도 성령의 사역입니다.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할 수 없느니라"고 고전12:3.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고백하는 순간에 우리는 같은 한 주님을 소유한 한 식구가 된 것입니다.
⑤ 같은 믿음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믿음의 형태가 조금씩 다를수 있습니다. 어쩌면 조금씩 다른 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모두 같은 믿음입니다.
⑥ 같은 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한 분 주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고 세례를 받으며(고전 613-15 세례(洗禮)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나의 모든 죄가 씻음을 받았다는 우리의 믿음과 고백의 표현입니다. 이 세레가 우리에게 있어서 모두 같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 모두는 그러한 의미에서 침례를 받은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때나, 지금이나, 한국이나 미국이나 우리가 선교하는 아프리카에서도 같은 의미로 한 침례를 베풀고 있는 것입니다.
⑦ 한 하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분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신 6:24) 이것은 우리의 하나 됨에 대단히 큰 근거를 제시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믿는 우리의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명심하여야 합니다.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은 만유의 아버지시며, 만유 위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며, 만유를 통일하시는 하나님이시며, 만유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부름 받은 부름의 소망은 모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축복들로서 우리가 같은 목표와 상급을 바라보고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같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한 가족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① 우리는 한 성령으로 한 몸을 이루었습니다. ② 한 가지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③ 한 주님에 의해 하나로 만들어졌습니다. ④ 한 하나님의 주관 하에 놓여있습니다.(4-6절) 여기에서 “성령으로 한 몸을 이루었다”라는 말은 “지체가 되었다”라는 말입니다. 한 몸에는 수많은 지체가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몸을 아끼고 사랑합니다. 눈의 시력이 약해 졌다고 뽑아버리고 새로운 안구로 이식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몸에 붙어있는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각자의 소망이 달랐습니다.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었습니다. 오직 지옥의 형벌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주안에서 천국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는 이제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성령으로 새롭게 변화되고 있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주 안에서 하나된 우리들을 주님께서 보호하여 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교회는 성도들은 하나 되기에 평화에 힘쓰는 생활을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화평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의 평화가 온 세상에 전파되기를 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에 합당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하나 된 새 생활을 누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교회 아름다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참된 성도는 교회 출석이나 이름만 등록시켰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성품을 본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인내와 희생과 섬김과 용납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오래 참기를 싫어하는 이 좁은 마음을 옛사람과 함께 장사지내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변화 받은 새사람으로 날마다 거듭나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 되는 주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주 안에서 하나 될 수 있는 일에 힘쓰는 가운데 주님의 교회를 더욱 사랑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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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말씀은 “하나가 되라”고 권면의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 되어 화목에 힘쓰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목적에 합당한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만물을 하나로 창조하셨습니다. 사람, 민족, 언어, 사상, 문화가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저지른 죄는 이 모든 것을 파괴하였습니다. 죄(罪)로 인하여 인간은 하나님과 갈라졌고, 천국과 갈라져 영원한 지옥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형제가 갈라지고, 언어가 갈라지고, 그 후 인간의 역사는 분단과 전쟁과 갈등과 반목으로 얼룩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화평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하나님과 우리를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갈라진 하늘과 땅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이었습니다.(엡 1:10).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 바로 이 분단된 죄인들의 삶을 하나 되게 하심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새사람은 반목과 분리된 모든 상황이 하나로 통일되는 경험을 누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하나님과 하나 되어 화목하십니까? 여러분의 가정은 하나 되어 화목하십니까? 여러분은 교회 안에서 하나 되어 화목하십니까? 죄(罪)는 분리되고 갈라지게 합니다. 마귀는 반목하게 합니다. 교회가 하나 되어야 세상이 이를 보고 배웁니다. 교회는 정당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파가 있어 반목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에게 자랑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분열된 옛 생활」을 청산하고 「하나 된 새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함께 있는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열의 모습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비롯하여 모든 교회들은 분열과 다툼으로 교회가 시험에 빠질 수 있다는 위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옥에서 간곡한 마음으로 부탁하고 있습니다. 「하나 된 새 생활」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분열된 옛 생활」을 버리고 우리 모두 하나 되어 평화를 누리는 새 생활」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도 있을 수 있는 분열과 다툼을 버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갈라지고 등 돌리고 미워하고 비판하고 욕하고 싸우는 일을 청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하나입니다(4절). 지체 된 성도들 사이에 반목과 대립은 곧 죽음입니다. 성도들의 속에 거하시는 성령도 한분입니다(4절). 성령 충만 사람들이 싸우는 일은 성령을 모독하는 일이요, 멸시하는 일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소망하는 하나님의 나라도 하나입니다(4절). 천국 소망이 있는 사람들이 시기와 질투를 일삼는 일은 스스로 천국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 전에 서로 다를 수밖에 없어, 반목하고 시기하는 생활을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 우리는 한 주님,한 믿음, 한 세례, 한 하나님 아버지를 모신 「하나 된 새 생활」을 하도록 하나님은 원하십니다(5-6절).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 됨을 힘써 지켜야 합니까?
1. 부름에 합당한 생활이기 때문입니다.(1절)
본문 1절에서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할 이유는 부름에 합당에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1장→복 주심에 대하여 2장→은혜 주심에 대하여 3장→일꾼 삼으심에 대하여 4장→합당한 생활할 것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군인에게는 군대생활, 학생에게는 학업생활, 주부에게는 주부생활이 있듯이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 되어 화목을 이루는 생활」이 있어야 합니다. 이는 불러주신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땅한 생활입니다.
2. 성령께서 주신 선물입니다(3절)
본문 3절에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 됨을 힘써 지켜야 할 이유는 성령께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체험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증거가 하나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교회는 성령이 충만하여 안으로는 서로 하나 되어 화목하고, 밖으로는 복음을 전파하는 모습을 가집니다. 성령이 오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그대로 우리들에게서 나타내십니다. 성령의 인격을 우리들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 되기 위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첫째로, 겸손한 마음입니다.(2절)
겸손은 낮추어진 마음입니다. 스스로 노예와 같이 자신을 여기는 마음입니다. 자기의 가치를 수준이하로 낮추어 그렇게 취급하기를 원하는 마음입니다. 고대사회(古代社會)에서는 겸손은 매우 경시되었습니다. 겸손은 약한 자들의 것으로 간주되었고, 굽실거리며 복종하는 노예의 모습을 나타낼 때 겸손이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겸손은 주님의 마음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6)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한마디로 겸손의 삶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신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의 겸손의 극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겸손(謙遜)이란 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태도"인 것입니다. 빌 2:3에서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겸손은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이 없으면 그것은 교만한 것입니다. 대개 교회에서 시험받을 때가 언제입니까? 자존심이 상할 때입니다. 자존심을 주(主)존심(存心)으로 바꿉시다. 겸손만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물은 낮은 곳에 고입니다. 하나님의 복과 은혜도 낮은 마음에 임합니다. 우리가 겸손할 때에 하나 될 수 있습니다. 겸손한 마음을 갖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 됨을 지키지 위해서는 겸손해야 합니다.
둘째로, 온유한 마음입니다. (2절)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온유를 매우 찬미하였습니다. 그는 온유를 중용의 덕으로 보았습니다. 즉 "지나치게 분노하는 것과 전혀 분노하지 않는 것의 중간"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이 온유라는 단어는 길들여진 짐승에 대해서도 사용되었습니다. 즉 사나운 야생동물을 잘 길들여서 사납지 않게 하고 짐을 나를 수 있게 되면 그것을 가리켜 온유해졌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온유함이란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됨으로 생기는 신의 성품입니다.“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배우라”(마 11:29) 온유라는 말은 결코 연학함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은혜를 받은 자가 자기의 힘을 조절함으로써 지니게 되는 부드러움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할 것은 무기력해서 온유한 것이 아니라 힘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기에 절제하는 것입니다. 온유는 그리스도의 통치의 수단입니다. 온유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모욕을 받고도 묵묵히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하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기쁘게 순복하고 사람의 약점이나 실수에 대해서는 억제하고 부드럽게 대하는 태도입니다.(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마음입니다)
셋째로, 사랑해야 합니다.(3절)
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오래 참습니다. 내게 피해를 주는 사람에 대하여 용서하므로 견디는 마음입니다. 딤전 1:16에서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께서 오래 참으신 것처럼 오래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내게 대하여 용서하시므로 오래 참으심을 생각하면 그 어떤 사람에 대하여 견딜 수 있을 것입니다. 떠나고 싶은 마음, 버리고 싶은 마음이 가정에서 교회에서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에게는 그 사랑을 써 볼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내 옆에서 속썩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고전 13:4에서 “사랑은 오래 참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②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용납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하나 되려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용납한다는 의미는 '상대방을 자기에게 맞춰 바꾸려는 의도가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있는 그대로 먼저 받아 주셨습니다. 찬송 349장의 후렴에서 바로 이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용납(容納)이란 다른 사람의 실수와 허물에 대하여 이해하는 태도입니다. 잘못한 사람에 대하여 책벌을 보류하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롬 2:3-4에서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납하신 것처럼 우리도 피차도 용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남에 대하여는 얼마나 엄격합니까?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는 얼마나 관대합니까? 주님의 주신 성품은 이와 반대입니다. 용납하는 마음은 마지막 때를 맞이한 우리를 가져야 절대적인 기본 자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벧전 3:8에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3절)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사탄은 문제를 상대방에게서 찾게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 되기 위해서는 “내 탓입니다...나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러한 깨달음은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에 가능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라면 모든 문제를 자기 자기에게서 원인을 찾으려고 합니다.(욘 1:12) 그리할 때에 성령께서 주시는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분열은 불신앙의 소치입니다. 눅 21:17절에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스스로 분쟁하며 나뉘고 다투는 결과는 필연적으로 패망과 자멸입니다. 이 원리는 개인에게도, 집안에도, 나라에도, 또한 신앙 안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분열과 나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분열과 나뉨은 불신앙에서 비롯되는 죄악(罪惡)된 행위입니다.
어떤 것을 인식하느냐에 따라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그 행동이 각각 달라집니다. 그래서 어떤 사상을 동조하는 사람들끼리 그리고 이해관계가 같은 사람들끼리 모이고 당파를 짓고 연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율법과 의식에 집착하고 자신들이 확립한 전통을 버리려 하지 않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주님께로부터 심한 질타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편견과 아집과 이해관계가 진리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외식적인 율법주의에 매달려서 목소리 크게 내기와 명분 싸움에 집착하는 사례가 있습니다. 진정으로 진리에 관한 교리가 아니라. 당파적인 이해관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명색이 교리싸움이라고 하여 교회를 사분오열(四分五裂)시키고 나뉘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울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며 나아가 세상 불신자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불신케 만들고 많은 선량한 신자들을 낙망시키는 등의 엄청난 악을 초래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열과 나뉨은 죄악입니다. 믿음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입니다. 내 가슴속에 분열의 씨가 잠재되어 있지는 않는지 가슴 깊이 살펴보아 통회하고 회개함으로 깨끗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2. 우리가 하나 될 이유는 무엇입니까?(4-6절)
우리가 주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교회 성도들의 일치와 하나 됨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요 17:11에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존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 되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마음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희생이 따르는 실천적 사랑을 행치 않기 때문입니다. 희생이 따르는 실천적 사랑을 행치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빌2:5-8) 그러므로 이제 완악함을 버리고 우리는 일치와 하나 됨을 명령하시는 주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 4-6절에서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 됨의 원리로서 삼위일체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① 한 몸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고전 12:13.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노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는 모두 한 몸이고 몸은 오직 하나인 것입니다. 한 성령 안에서 내주하시고 감화하심으로 하나의 유기체가 되었습니다(고전 12:13, 롬 8:9,11)
② "한 성령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하나 됨을 이루게 하는 역사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충만한 베드로가 설교를 할 때 각기 다른 말을 사용하는 지방의 사람들이 자기네의 언어로 들었던 사건이 있습니다. 이 사건이 바로 성령의 사역인데 바벨탑이후에 분열되고 흩어졌던 사람들이 성령으로 하나가 됨을 보여주는 사건인 것입니다. 우리는 한 성령을 소유하고 있는데 그 성령의 사역이 하나 되게 함이라는 것입니다.
③ 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어느 날 우리를 부르셨는데 그 부르심은 같은 부르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부르심을 통하여 우리는 한 소망을 갖게 되었는데, 그 소망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나라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공동체입니까?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기에 우리는 하나라고 바울은 과감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④ 한 주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나의 주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도 성령의 사역입니다.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할 수 없느니라"고 고전12:3.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고백하는 순간에 우리는 같은 한 주님을 소유한 한 식구가 된 것입니다.
⑤ 같은 믿음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믿음의 형태가 조금씩 다를수 있습니다. 어쩌면 조금씩 다른 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모두 같은 믿음입니다.
⑥ 같은 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한 분 주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고 세례를 받으며(고전 613-15 세례(洗禮)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나의 모든 죄가 씻음을 받았다는 우리의 믿음과 고백의 표현입니다. 이 세레가 우리에게 있어서 모두 같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 모두는 그러한 의미에서 침례를 받은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때나, 지금이나, 한국이나 미국이나 우리가 선교하는 아프리카에서도 같은 의미로 한 침례를 베풀고 있는 것입니다.
⑦ 한 하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분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신 6:24) 이것은 우리의 하나 됨에 대단히 큰 근거를 제시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믿는 우리의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명심하여야 합니다.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은 만유의 아버지시며, 만유 위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며, 만유를 통일하시는 하나님이시며, 만유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부름 받은 부름의 소망은 모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축복들로서 우리가 같은 목표와 상급을 바라보고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같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한 가족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① 우리는 한 성령으로 한 몸을 이루었습니다. ② 한 가지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③ 한 주님에 의해 하나로 만들어졌습니다. ④ 한 하나님의 주관 하에 놓여있습니다.(4-6절) 여기에서 “성령으로 한 몸을 이루었다”라는 말은 “지체가 되었다”라는 말입니다. 한 몸에는 수많은 지체가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몸을 아끼고 사랑합니다. 눈의 시력이 약해 졌다고 뽑아버리고 새로운 안구로 이식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몸에 붙어있는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각자의 소망이 달랐습니다.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었습니다. 오직 지옥의 형벌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주안에서 천국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는 이제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성령으로 새롭게 변화되고 있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주 안에서 하나된 우리들을 주님께서 보호하여 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교회는 성도들은 하나 되기에 평화에 힘쓰는 생활을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화평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의 평화가 온 세상에 전파되기를 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에 합당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하나 된 새 생활을 누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교회 아름다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참된 성도는 교회 출석이나 이름만 등록시켰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성품을 본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인내와 희생과 섬김과 용납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오래 참기를 싫어하는 이 좁은 마음을 옛사람과 함께 장사지내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변화 받은 새사람으로 날마다 거듭나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 되는 주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주 안에서 하나 될 수 있는 일에 힘쓰는 가운데 주님의 교회를 더욱 사랑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