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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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창조자를 기억하라 1" 김정서목사/제주영락교회
네 창조자를 기억하라 1
빌립보서 2 : 6~8
가족들이 모처럼 외식을 하기 위해, 어느 레스토랑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종업원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우리와 눈높이를 맞추어서 주문을 받는 바람에 잠시 당황했습니다. 그러나 참 신선하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고객을 위해 겸손히 무릎을 꿇고 주문을 받는 모습, 웃는 모습으로 깊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모습, 아이들의 포크와 물 컵도 일일이 챙겨 주는 모습 등 그 식당 전체에 대해서 참으로 좋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즐겁게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종업원 한 사람의 겸손한 섬김이 식당 전체의 이미지까지도 좋게 만드는 힘이 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목사인지라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말씀, 교회생활과 연관시키는 습관이 배어버린 탓인데, 누군가는 농담 삼아 이걸 직업병이라고 부르더군요.
새 신자가 우리 교회에 처음 왔을 때, 새 가족반 사람들이 그리고 성도들이 무릎을 꿇고 그들의 눈높이에서 등록카드를 받고, 웃으며 세심하게 배려하는 모습이 식당종업원의 모습과 오버랩(overlap) 되었습니다. 우리의 겸손한 섬김으로 처음 교회를 나온 이들이 하나님에 대해, 예수님에 대해 참으로 좋은 인상을 받을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편지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불렀던 사도 바울 선생님의 말씀이 같은 맥락으로 이해됩니다. 자신을 낮추는 한 사람의 섬김으로 참 많은 유익이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1. 창조주는 마땅히 받으실 영광과 존귀를 우리를 위해 스스로 포기하신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 6절 말씀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본체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외적인 형체의 동일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양태 자체를 일컫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의 본질적 존재가 하나님과 하나라는 증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신 그분이 스스로 하나님 되심을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창조주이신 만왕의 왕께서 스스로 그 왕의 홀을 내려놓으셨음을 말합니다. 이 시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창조자의 모습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권리와 심지어는 존재 자체를 내려놓으시는 모습입니다. 마땅히 받아야 할 영광과 존귀를 스스로 내어버리시는 모습입니다.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마땅히 누릴 권리들을 놓쳤을 때, 몹시 안타까워합니다. 때때로 자신의 권리를 다 주장하거나 찾지 못하면 다른 이들로부터 어리석은 사람 취급을 받기도 합니다. 자신에게 돌아올 존경과 영광을 스스로 포기한다고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협착하고 찾는 이들이 적은 좁은 길을 선택했고 걸으셨습니다. ! 생명을 살리기 위한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그 길을 걸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걷기 원합니다. 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라면 우리의 마땅한 권리와 이익을 기쁜 마음으로 포기할 수 있는 신앙인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2. 창조주는 불타는 사랑으로 종의 형체를 가져 스스로 비하됨을 개의치 않으신 분이셨습니다.
오늘 본문 7절 말씀은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라고 증언합니다. 예수님 당시 종은 사유재산으로 인격적 존재가 아니었고 동물이나 물건과 같은 취급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종된 사람의 형체를 가지셨다는 것은, 마치 사람이 자신이 치는 돼지우리에 들어가서 돼지 취급을 받는 것과도 같은 일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이보다 더한 일입니다. 모두가 자신을 더욱 화려하게 포장하여 드러내고, 치장하여 인정받고, 알리기 원하는 이 세대에 스스로 종의 형체를 가져 자신을 낮추고 비하시키는 일은 우리에겐 이해할 수 없는 일처럼 비춰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확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되어 성결한 존재로 주님께 이르는 것보다, 예수님이 스스로 낮아지심으로 우리의 형체를 입어 우리와 하나가 되시고, 구원자가 되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심이 더욱 유익할 줄 아셨습니다. 이것은 어른이 어린아이의 마음을 헤아려 그의 눈높이로 내려가서 아이와 하나가 되어 함께 뛰놀 수는 있지만, 어린아이가 어른의 마음을 헤아려 말하고 행동하기까지는 성장할 때까지 기다릴 수? 謗?없다는 사실과 같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식인 우리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스스로 성결케 되어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일은 불가능했기에 그분이 친히 종의 형체를 입었습니다. 아이가 거름더미에 빠져 죽어 가는데, 어느 부모가 아이의 생명을 생각지 아니하고 깨끗함과 불결함을 따지겠습니까? 친부모가 아니라도 더러움을 따지지 아니하고 그 속에 들어가서 뒹굴며 그 아이를 살려놓고 볼 것입니다. 태초의 창조 시로부터 말씀으로 현존하시며 창조사역에 동참하신 우리의 창조주이신 예수님은 사랑하는 그의 자녀들을 구하기 위해 종의 형체를 입어 스스로 비하됨을 개의치 않으신 사랑의 구세주이십니다. 그분에게는 사랑하는 자녀만 보일뿐, 세상의 어떤 더러움도 허물도, 자신의 낮아지심조차도 그 사랑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스스로 종이 되고, 낮아지고, 비참해지는 것이 그 분의 선택이었으며, 그 사랑의 선택이 우리를 살린 것입니다.
3. 창조주는 구체적이고 희생적이며 순교적이고 영적인 사랑을 베푸신 분이십니다.
본문 8절 말씀은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입니다. 인류 전체를 사랑하는 사람은 가족을 사랑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은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사랑은 실제적인 삶 앞에서 산산이 깨어져 버립니다.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말로 사랑하신 분이 아니시며, 추상적인 개념으로 사랑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 십자가를 지신 구체적인 사랑이며,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희생을 감수하지 않고 베풀려는 사랑은 동정에 다름 아닙니다. 이것은 자신을 줄 수 없고, 그러기에 이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도 새롭게 할 수도 없는 계산적인 사랑입니다.
또한 사랑은 순교적이어야 합니다. 참 사랑은 목숨을 거는 결단이 따르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한 것입니다.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는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마지막으로 창조주의 사랑은 영적인 사랑입니다. 육체적 삶 안에 제한된 세속적 사랑도 아니며, 시간성 속에 갇힌 한시적인 사랑도 아닙니다. 이것은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영적인 사랑입니다. 이것은 육체를 지나 영원한 생명으로 승화되는 영적인 사랑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영과 그분을 만나는 우리 존재의 근원적 핵인 영과의 소통을 통해 완성되는 영적인 사랑입니다. 성 어거스틴의 고백처럼 이 사랑 안에서 우리는 마침내 참 안식을 누리며, 참된 자유를 맛볼 것입니다.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다함이 없는 영적인 사랑인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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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창조자를 기억하라 1
빌립보서 2 : 6~8
가족들이 모처럼 외식을 하기 위해, 어느 레스토랑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종업원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우리와 눈높이를 맞추어서 주문을 받는 바람에 잠시 당황했습니다. 그러나 참 신선하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고객을 위해 겸손히 무릎을 꿇고 주문을 받는 모습, 웃는 모습으로 깊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모습, 아이들의 포크와 물 컵도 일일이 챙겨 주는 모습 등 그 식당 전체에 대해서 참으로 좋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즐겁게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종업원 한 사람의 겸손한 섬김이 식당 전체의 이미지까지도 좋게 만드는 힘이 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목사인지라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말씀, 교회생활과 연관시키는 습관이 배어버린 탓인데, 누군가는 농담 삼아 이걸 직업병이라고 부르더군요.
새 신자가 우리 교회에 처음 왔을 때, 새 가족반 사람들이 그리고 성도들이 무릎을 꿇고 그들의 눈높이에서 등록카드를 받고, 웃으며 세심하게 배려하는 모습이 식당종업원의 모습과 오버랩(overlap) 되었습니다. 우리의 겸손한 섬김으로 처음 교회를 나온 이들이 하나님에 대해, 예수님에 대해 참으로 좋은 인상을 받을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편지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불렀던 사도 바울 선생님의 말씀이 같은 맥락으로 이해됩니다. 자신을 낮추는 한 사람의 섬김으로 참 많은 유익이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1. 창조주는 마땅히 받으실 영광과 존귀를 우리를 위해 스스로 포기하신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 6절 말씀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본체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외적인 형체의 동일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양태 자체를 일컫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의 본질적 존재가 하나님과 하나라는 증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신 그분이 스스로 하나님 되심을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창조주이신 만왕의 왕께서 스스로 그 왕의 홀을 내려놓으셨음을 말합니다. 이 시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창조자의 모습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권리와 심지어는 존재 자체를 내려놓으시는 모습입니다. 마땅히 받아야 할 영광과 존귀를 스스로 내어버리시는 모습입니다.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마땅히 누릴 권리들을 놓쳤을 때, 몹시 안타까워합니다. 때때로 자신의 권리를 다 주장하거나 찾지 못하면 다른 이들로부터 어리석은 사람 취급을 받기도 합니다. 자신에게 돌아올 존경과 영광을 스스로 포기한다고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협착하고 찾는 이들이 적은 좁은 길을 선택했고 걸으셨습니다. ! 생명을 살리기 위한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그 길을 걸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걷기 원합니다. 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라면 우리의 마땅한 권리와 이익을 기쁜 마음으로 포기할 수 있는 신앙인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2. 창조주는 불타는 사랑으로 종의 형체를 가져 스스로 비하됨을 개의치 않으신 분이셨습니다.
오늘 본문 7절 말씀은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라고 증언합니다. 예수님 당시 종은 사유재산으로 인격적 존재가 아니었고 동물이나 물건과 같은 취급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종된 사람의 형체를 가지셨다는 것은, 마치 사람이 자신이 치는 돼지우리에 들어가서 돼지 취급을 받는 것과도 같은 일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이보다 더한 일입니다. 모두가 자신을 더욱 화려하게 포장하여 드러내고, 치장하여 인정받고, 알리기 원하는 이 세대에 스스로 종의 형체를 가져 자신을 낮추고 비하시키는 일은 우리에겐 이해할 수 없는 일처럼 비춰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확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되어 성결한 존재로 주님께 이르는 것보다, 예수님이 스스로 낮아지심으로 우리의 형체를 입어 우리와 하나가 되시고, 구원자가 되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심이 더욱 유익할 줄 아셨습니다. 이것은 어른이 어린아이의 마음을 헤아려 그의 눈높이로 내려가서 아이와 하나가 되어 함께 뛰놀 수는 있지만, 어린아이가 어른의 마음을 헤아려 말하고 행동하기까지는 성장할 때까지 기다릴 수? 謗?없다는 사실과 같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식인 우리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스스로 성결케 되어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일은 불가능했기에 그분이 친히 종의 형체를 입었습니다. 아이가 거름더미에 빠져 죽어 가는데, 어느 부모가 아이의 생명을 생각지 아니하고 깨끗함과 불결함을 따지겠습니까? 친부모가 아니라도 더러움을 따지지 아니하고 그 속에 들어가서 뒹굴며 그 아이를 살려놓고 볼 것입니다. 태초의 창조 시로부터 말씀으로 현존하시며 창조사역에 동참하신 우리의 창조주이신 예수님은 사랑하는 그의 자녀들을 구하기 위해 종의 형체를 입어 스스로 비하됨을 개의치 않으신 사랑의 구세주이십니다. 그분에게는 사랑하는 자녀만 보일뿐, 세상의 어떤 더러움도 허물도, 자신의 낮아지심조차도 그 사랑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스스로 종이 되고, 낮아지고, 비참해지는 것이 그 분의 선택이었으며, 그 사랑의 선택이 우리를 살린 것입니다.
3. 창조주는 구체적이고 희생적이며 순교적이고 영적인 사랑을 베푸신 분이십니다.
본문 8절 말씀은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입니다. 인류 전체를 사랑하는 사람은 가족을 사랑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은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사랑은 실제적인 삶 앞에서 산산이 깨어져 버립니다.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말로 사랑하신 분이 아니시며, 추상적인 개념으로 사랑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 십자가를 지신 구체적인 사랑이며,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희생을 감수하지 않고 베풀려는 사랑은 동정에 다름 아닙니다. 이것은 자신을 줄 수 없고, 그러기에 이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도 새롭게 할 수도 없는 계산적인 사랑입니다.
또한 사랑은 순교적이어야 합니다. 참 사랑은 목숨을 거는 결단이 따르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한 것입니다.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는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마지막으로 창조주의 사랑은 영적인 사랑입니다. 육체적 삶 안에 제한된 세속적 사랑도 아니며, 시간성 속에 갇힌 한시적인 사랑도 아닙니다. 이것은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영적인 사랑입니다. 이것은 육체를 지나 영원한 생명으로 승화되는 영적인 사랑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영과 그분을 만나는 우리 존재의 근원적 핵인 영과의 소통을 통해 완성되는 영적인 사랑입니다. 성 어거스틴의 고백처럼 이 사랑 안에서 우리는 마침내 참 안식을 누리며, 참된 자유를 맛볼 것입니다.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다함이 없는 영적인 사랑인 까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