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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자”(딤전 2:1-4)
지금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할 때입니다. 어제 우리는 삼일운동이 일어 난지 84주년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점점 삼일운동 정신이 퇴색되고 있습니다. 삼일절은 우리 민족이 살아있음을 드러낸 쾌거요 민족정기를 드높인 민족운동입니다. 삼일운동은 한일합방(1910년, 융희 황제)으로 단절되었던 한민족의 역사와 나라를 다시계속하게 한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참으로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어느 때보다 삼일절은 우리에게 깊은 감회를 주고 있습니다. 바로 지금이 삼일운동 정신이 되살아나야 할 때이고, 조상들의 슬기가 필요할 때입니다.
이런 때에 교회가 민족 앞에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1910년 융희황제가 일본의 폭력으로 한일합병에 굴복하자, 뜻있는 인사들은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1918년 세계 제1차 대전 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 원칙]을 선언하니 이에 발맞추어 나라와 민족을 잃은 슬픔의 한이 요원의 불꽃처럼 퍼져 나갔습니다.
독립선언서의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기독교인이 16명, 천도교인이 15명, 불교인이 2명이었습니다. 기독교 대표 이승훈 씨와 천도교 대표 손병희 씨와 불교대표 한용운 씨의 3대 종교가 하나로 뭉쳐, 나머지 30인과 같이 독립선언서를 작성하는 일이 국내에서 전개하였습니다. 마침내 고종황제 국장일에 전국 각처에서 몰려와 탑골공원에서 3월 1일 기미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이 운동을 위해 집회 수는 1542회, 동원된 인원은 2백2만3천명, 살해된 자 7만5백9명, 부상자 1만5천9백명, 검거 투옥된 자가 4만 6천 948명, 불탄 교회 47교회, 2개 학교, 민가 715호가 소실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삼일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하였고, 교회가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삼일운동 당시에 한국교회의 교인은 2천만 국민 가운데 1.5%인30만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힘이 있고, 생명이 있는 성도들이었고 나라의 지도자 중에 교인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합니까? 교회가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지금이야말로 교회가 바로 설 때이고, 교회의 지도자와 성도들이 바로 설 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민족은 다시금 제2의 한국전쟁과 같은 매를 맞을 수밖에 없고, 제2의 IMF라는 매를 맞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 25일에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 정부가 출범했습니다.
그리고 27일 새 정부 내각이 발표가 되었는데, 영남 출신 7명, 호남출신이 4명으로 영남출신이 호남의 배 가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성과 40∼50대의 약진이 주목됩니다. 뿐만 아니라 헌정사상 처음으로 4명의 여성장관이 탄생했고 40대가 3명, 50대가 15명이나 됐으며 60세 이상은 1명에 불과합니다. 특히 강금실 법무부장관의 경우 사상 최초의 여성 법무장관이면서도 나이 역시 46세로 최연소란 점에서 이번 조각에서 최대의 파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에 민주당은 개혁과 안정을 조화시킨 내각 구성이라고 환영하고 있고, 한나라당은 너무 파격이고 시험적이라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국민들도 이러한 내각 구성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생각이 각각 다를 것입니다. 저도 이 점에 대해서 평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지금이 바로 우리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할 때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애국이란 나라를 사랑하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성경이 가르치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가 자유, 인권, 사랑이 있는 평화로운 나라가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삼일절을 맞아 자주운동, 신앙운동, 애국운동이 다시금 뜨겁게 일어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정치에 간섭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정치에 대한 교단의 입장을 지지합니다. 전통적으로 한국 기독교는 정치 참여하는 일에 매우 소극적인 입장을 취해 왔습니다. 이는 복음주의의 전통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예수님은 나라와 교회를 분리하셨고 둘 다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느 시대나 나라가 교회를 지배하는 독재정권은 망했으며 교회가 나라를 지배하면 타락했습니다. 나라와 교회는 서로 인정하고 협력하고 함께 백성의 편이 되어야 살 수 있습니다.
과거 역사에 보시면 교회가 나라를 지배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교회가 나라를 다스리던 때가 있었습니다. 중세기에는 교회가 나라의 왕을 임명 하던 시대였습니다. 또 거꾸로 나라의 지도자들이 교회의 지도자들을 임명하고 교회를 사사건건(事事件件) 간섭하는 그런 역사의 암흑시대도 있었습니다. 이때에는 철저하게 정교분리가 요구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결코 그리스도인들이 정치를 외면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어서 안 됩니다. 정치라는 것은 외면할 수도 없고 또 외면해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 최근에 우리나라는 계속적으로 어려운 역사적 시련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바로 지금은 분명 나라를 생각할 때입니다. 바로 지금은 나라를 위해서 기도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당연한 일입니다. 구약 성경의 여러 곳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위기에 봉착했을 때에 기도했던 것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사무엘 선지자를 중심으로 한 미스바의 회개 운동, 에스더와 모르드개를 중심한 금식기도 등은 우리에게도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디도데에게 “위정자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권면에 대해서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냥 기도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결코 정치나 나라의 역사에 대해서 무관심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느 도시를 가든지 자기 민족의 회당을 먼저 찾았고 거기서부터 먼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 민족들에게도 그들이 그들의 나라와 역사를 위해 기도해야 할 중요한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의 이러한 권면은 바로 우리들에게도 적절한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국난의 심각한 어려운 징후를 겪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나라를 생각하며 철저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까?
1.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의무이며 책임이기 때문입니다.(1-2절 상)
본문 1절과 2절 상반 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성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되 특별히 위정자의 위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로"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어떤 논리적 순서를 가르치기 위한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영역에서 우선순위로 신경을 써야 할 중요한 것이다는 강조하기 위한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선순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삶의 영역에서 우리가 많은 의무를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리스도인으로 우리가 많은 의무를 가지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의무, 기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곧 위정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나라와 민족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① 구국 기도의 방법
교회가 위해서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이에 대해서 바울은 본문 1절 하반 절에서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간구, 기도, 도고, 감사로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기도의 여러 형태입니다.
여기에서 ① "간구"라는 것은 "특별한 애원"을 뜻합니다. ② "기도"라는 것은 "성도가 하나님으로 더불어 교통하고 기원하는 모든 행위"를 총칭하는 것을 뜻합니다. ③ "도고"라는 것은 "타인을위해 대신하는 기도"를 뜻합니다. ④ "감사"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베푸심에 대한 좋은 감정"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런 기도의 형태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읅 언급한 의도를 파악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방법으로 동원하여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한마디로할 수 있는 모든 방법. 사용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형태의 기도를 동원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이처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 당시의 임금들은 네로와 같은 로마의 황제들을 가리킵니다.
그 황제들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황제 밑에서 통치하던 이른 바 헤롯 대제 같은 왕들이나, 헤롯 안티파스나 헤롯 아켈라오 같은 분봉 왕들이나, 빌라도 같은 지방 총독들이나, 기타 높은 지위를 받고 백성을 관장하는 여러 류의 관리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나타내신 명령은, 교회가 예배 중에 올릴 기도의 내용입니다. 즉 예배의 공중 기도 중에 모든 시대, 모든 지역, 모든 나라들 가운데 백성을 통치하는 여러 류의 관리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 당시나 지금을 막론하고 지상에 자리 잡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소유한 공동 기도의 원리입니다. 그들 중에는 무신론자, 유물론자, 진화론자, 우상숭배자, 더욱이 교회를 박멸하는 박해자들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교회는 그 위정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택자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구속 경륜의 성취를 위한 한 도구요 수단들로서, 하나님이 세웠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받은 여러 류의 권세는 모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일반 은총인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들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일꾼이라고까지 하였습니다(벧전 2:13-17).
디모데를 향한 사도의 명령과 권면은, 교회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중 특별히 위정자를 위하여 기도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초기 교회는, 세상에 통치권을 가진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교회가 받은 신성한 필수적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회는 자신들을 박해하는 자들까지도 은혜의 자리로 인도하기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위정자들을 위해서 기도는 하지 않고 비판만 일삼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나라의 지도자들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입니다. 비판이나 비난에는 돈이 들지 않아요. 입만 벌리면 됩니다. 우리가 쉽게 비난할 수가 있습니다. 쉽게 비판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기도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기도는 일종의 노동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여러분은 기도의 역사를 믿으십니까? 우리의 기도가 역사를 바꿀 수 있다 이 사실을 참으로 믿는다면 우리가 한나라 역사의 운명을 짊어지고 기도한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그것이 우리가 첫째로 할 중요한 일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예화) 메리 여왕이 스코틀란드를 통치할 때 역사적으로 가장 어두운 시대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종교는 부패했습니다. 도덕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정치는 표류하고 있었습니다. 메리 여왕 자신이 불륜의 범죄를 저지르고 있었고, 민족은 우상숭배의 깊은 심연 속에 떨어졌습니다.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이 캄캄한 민족의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엎드려서 이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이 스코틀랜드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아니면 차라리 나에게 죽음을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한 사람은 [잔 낙스]라는 개혁자입니다. 본래 존 낙스의 자서전을 읽어보면 이 잔 낙스는 아주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이 개혁 운동을 하면서도 메리 여왕이 무서운 나머지 두 번씩이나 도망을 갔습니다. 불란서로 도망을 가고 스위스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러나 이 결사적인 기도, 금식기도하면서 완전히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갑자기 아주 담대한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거꾸로 이젠 메리 여왕이 존 낙스를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영국의 전 군대보다도 존 낙스의 기도를 더 두려워한다고 말했습니다. 마침내 존 낙스는 그의 기도와 그의 투쟁을 통해서 민족을 재건시키고 개혁하는 위대한 일을 성취할 수가 있었습니다. 복음으로 민족을 구하는 위대한 사역을 성취하였습니다. 그것은 기도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며 기도할 때라고 생각됩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역사의 자리야 말로 우리의 기도를 필요로 하는 시간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적으로 나라와 위정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만이 우리 민족의 새로운 출구를 열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할 것은 그리스도인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도에 따르는 책임 있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다른 사람들에게 본을 끼치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기도는 기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도에 따르는 책임 있는 행동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령 우리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하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면 기도한 다음에 가만히 계십니까?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셨다. 반드시 믿는다면 하나님이 내게 양식을 주실 것이다. 어디에서 양식을 줄 것인가, 어떤 방법으로 줄 것인가? 일자리를 찾아야 마땅하지 않으십니까? 그리고 일을 하셔야지요.
그렇습니다. 기도는 언제나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그 기도에 합당한 책임 있는 행동을 요구합니다. 같은 주기도문 가운데 우리는 어떤 기도를 하도록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까? “나라에 임하옵시고 또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나라에 임하옵소서”라는 것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도 임하여 달라고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뜻이 이 나라에도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기도를 했다면 이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우리가 행동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어떤 행동이 요구됩니까?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일들을 최선을 다하여 감당합니다. 그리고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독교 역사의식을 갖고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기를 소원하면서 생업에 최선을 다해서 종사해야 합니다. 기도한 만큼 나라와 민족에 유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 우리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할 이유는 우리가 경건하고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입니다.(2절 하)
여기의 "고요하다, 평안하다"라는 것은 모두 형용사로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이 "고요하다, 평안하다"라는 이 표현들은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행복의 일반적 삶의 정황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고요하다"라는 말은 [소요스러움]이 없는 외적인 삶의 정황을 나타내 주고있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평안하다"라는 말은 불안이 없는 내적인 삶의 정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안으로 불안하지 않고 또 밖으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삶의 정황 우리는 모두 이런 삶의 환경 속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환경을 우리가 요구하고 이런 환경 속에서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것은 "그저 편안히 먹고 살자"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바울은 더 중요한 이유를 제시합니다.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그런데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앞에 또 앞서서 강조하고 있는 두개의 단어가 있습니다. 무슨 단어가 강조되었습니까? "경건과 단정한 중에서"라는 말씀입니다. 이 두가지 단어는 매우 유사하면서도 강조점에 차이가 있는 단어입니다,
우선적으로 "경건"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관계에서 쓰여 지는 단어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삶의 태도, 하나님을 향한 닮아가는 삶의 덕목을 강조할 때 경건이라는 단어가 쓰여 집니다. 영어로 "경건(敬虔)"이라는 말은 "하나님 같은 혹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닮아가는 인격"을 말합니다. 그 다음에 "단정"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 우리가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질서있는 삶의 모습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고요. 또 이웃들과 사람들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건강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에 고요하고도 그리고 평안한 삶의 정황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얘기를 지금 나라의 지도자를 위한 기도 속에서 하고 있습니까?
이 지도자의 역할, 정치인의 역할 다시 말하면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의 그 결정은 바로 우리의 삶의 질을 결정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살아가는 삶의 상황이 어떻게 되느냐에 가장 중요헌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이 바로 정치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치인들의 이 정치적인 액션에 무관심 할 수가 없습니다. 또 누가 정치를 하느냐 여기에 무관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합당한 사람들이 세워지도록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 이웃들과 바른 관계 속에서 한 평생의 삶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 이런 정치의 영역 속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 우리의 미래, 우리의 평안의 미래 또 우리의 고요함의 미래, 우리의 복된 삶의 미래를 결정하는 일에 있어서 그들의 영향력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치의 영역에 무관심 할 수 없다고 성경을 가르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고, 위정자들을 위해서 기도할 이유는 이 세상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폭풍들이나, 전쟁과 반란의 회오리바람 등으로 국토의 평화를 깨뜨려 버리는 일로 인하여, 세상 가운데 자리잡은 교회가 영적 평화에 손해를 입지 말기를 위함입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의 난폭 때문에 교회가 영적인 평화를 파괴 당하지 않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3. 우리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3절)
그래서 3절에서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만한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받으실만한 것이니”라는 말씀은 신약성경에서 이곳과 딤전 5:4에서만 나오는 단어로서 “기쁘게 받아들이다”(아포테코마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중보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며 또한 기뻐받으시는 기도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단지 이기적이고 정욕을 좇아 간구하는 기도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응답하지 않으시지만(약 43) 교회가 나라와 위정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선히 여기고 기뻐하는 일입니다.
교회가 위정자들을 위하여 기도함은 하나님 자신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제사가 되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통치자들을 임명하시고, 또 그들을 합당하게 통치하고, 주장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 역사에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한국교회는 애국적인 전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선교 10년이 막 지났을 때 민비(1897년 명성황후)가 일본인 자객에 의해서 암살당한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났습니다. 선교사들은 국왕을 위해서 각국 공사관들과의 통역을 비롯한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이 지난 뒤 민중들 사이에 '선교사가 국왕을 구했다' 는 소문이 돌았고 교인들의 숫자도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일본이 한반도 지배를 강화하려들자 교회는 국가와 국왕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1896년 국왕 탄신일에는 이를 기념하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서대문 밖의 정부청사를 빌어서 개최된 이날의 예배는 최초의 공개적인 대규모 집회였습니다. 교인들도 주일마다 대문에 국기를 게양하여 애국정신을 널리 알렸습니다. 그 결과 일반 국민들의 개신교에 대한 거리감을 해소하게 되었습니다. 이후로도 교회는 국가가 어려울 때마다 나라를 위한 기도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이러한 애국정신은 YMCA, YWCA, 면려청년회의 조직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승리하고, 영국과 동맹을 맺는 한편 미국과 비밀협약을 맺어서 한반도에 대한 지배를 강화해 나아갔습니다. 1905년에는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여 본격적인 식민화 로 나아갔습니다. 1907년에는 군대를 해산하고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습니다. 1910년에는 한일합방을 이 루고 식민지 지배를 완성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나라의 운명이 어려워질 때에도 교회는 계속 성장하였습니다. 1901년에 평양에 장로회신학교가 설립되어서 한국인 목회자 양성이 시작되었습니다. 1907년에는 장로교회는 전 한반도를 묶어 하나의 독립노회인 '독노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이 노회에서 최초로 한국인 목사 7명이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 중 한명인 이기풍 목사 는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되었습니다. 이 때 장로교인의 수는 7만 명으로 증가되어 있었습니다. 1912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창립되었습니다. 총회는 창립 기념으로 중국 산동성에 3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1907년 1월에 전국적인 대 회개 및 부흥운동이 시작되었다. 평양에서 시작된 이 부흥의 불길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선교사 하디(R.A.Hardie, 한국명:간하베), 져다인(J.L.Gerdine)와 한국인 목사 길선주 등이 전국을 누비면서 사경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이 부흥운동은 수년에 걸쳐서 전국의 교회로 퍼졌으며, 국경을 넘어서 중국으로까지 전파되었습니다. 이 운동은 한국교회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였습니다. 많은 한국인들이 이 운동으로 인해서 기독교 진리를 새롭게 터득하게 하였고, 교회도 급격하게 성장하였습니다.
새벽기도회와 통성기도, 사경회라는 토착적이고 독특한 한국교회의 특징이 확립되었습니다.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선교사가 함께 협력하고,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교파를 초월해서 운동을 전개하는 동안에 연합(에큐메니칼) 정신이 구현되었습니다. 이 운동을 통해서 한국교회는 비로소 민족교회 로서의 틀을 잡아나가게 되었습니다. 이 운동은 1910년에 100만 명 구령운동으로 이어져 나아갔습니다.
바로 이러한 정신이 1919년 3월 1일에 정오에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에 대해 항거한 3·1 독립만세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3·1 만세운동은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웠으며 응축된 독립운동의 에너지를 한반도 전역으로 퍼뜨려 독립을 이뤄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삼일절을 맞이하여 기독정신의 계승과 나라와 민족을 위해 적극 나서야 합니다. 3·1 정신이 기독정신에 입각한 애국애족의 정신이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굳게 서서 조국의 번영과 민족복음화 운동에 힘써야 합니다. 또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혼란스러운 시기에 각계각층의 지도자들이 3·1정신을 이어받아 국가의 안녕을 위해 최선의 다해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어려운 시기에 먼저 교회 갱신을 통해 교회의 위상을 정립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4. 우리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평화로운 선교활동을 위해서입니다.
본문 4절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교회가 외적으로 내적으로 영적 평화를 누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 궁극적 목적은 결국 사람을 구원하는 선교적 목적을 이루기 위함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는” 이것이 교회가 영적 평안을 가져야 될 이유요 목적입니다. 물론 여기 '모든 사람의 구원'은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모든 세대, 모든 인종, 모든 나라를 가리킵니다(행 13:48). 말하자면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모든 자손들을 총칭하는 말입니다(눅19:9,10).
그렇습니다. 교회가 위정자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될 이유가 명백해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기 위함입니다. 나라가 불안하고 동요하면, 교회가 평화로운 선교 활동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교회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면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성경을 보면 구약시대 이스라엘이 국난을 당할 때마다 전 국민이 한 자리에 모여 금식하고 회개하며 기도했습니다. 남녀노소(男女老少) 모든 백성이 몰수로 모이라 했습니다. 미스바성회(삼상 7:5,6)와 여호사밧왕 시대(대하20:3,4), 요엘 선지시대(욜1:14 2:15,16), 그리고 여호야김왕 때(렘 36:9) 그러했습니다.
이처럼 모이고 힘을 합쳐 국가와 민족과 이웃을 위하여 기도하면 이것이 곧 교회 부흥으로 이어집니다. 1970년대 초 기독교 인구가 270만 명이었을 때 엑스플로 ’74 대회에 등록신자가 323,419명이었습니다. 연인원 250만 명이 여의도광장에 모여 4박 5일 간 철야기도를 드렸습니다. ’77성회,’80세계복음화성회,’84세계기도성회,엑스플로 ’85성회,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성회 등 일련의 초교파적 민족단위의 대성회를 통해 연합함으로써 한국교회가 급성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다시금 구국 기도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물론 한국교회처럼 모이기에 힘쓰는 나라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차츰 모이는 일이 식어가고 있으며 교회 안팎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일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라"(히 10:25)고 하십니다. 초비상 시기에 절대 필요한 것은 구국기도운동입니다.
우리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면 전도의 문이 열릴 것입니다.(골 4:3 계 3:7, 8, 20 마 7:7).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었더니 문이 열렸습니다. 사도행전의 부흥의 비결은 기도, 특히 마음을 같이하여 함께 모여서 기도한 것이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래서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부흥의 비결은 첫째도 기도, 둘째도 기도, 셋째도 기도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기적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5.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애국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애스더와 모르드개가 이스라엘 백성을 말살하려고 하만의 계획 앞에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자세를 가지고 구국 기도를 위한 금식에 들어갔고, 하나님께서 이를 응답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기에서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부림절의 기원입니다.(에스더 4:4-17)
여러분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다면 애스더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애국하는 길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우리 사회가 이기주의에 빠지고 나라나 동족보다는 개인의 영리만을 추구하고 모든 것을 돈으로 할 수 있다는 황금만능주의(黃金萬能主義)의 사상이 팽배한 때에 에스더와 같이 모르드개와 같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기 위해 자신들의 모든 것을 버리는 그런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민족을 위해 간구하고자 한 에스더의 선포의 때와 같이 우리는 지금 금식하며 주님 앞에 부르짖으며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느헤미야처럼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2500년 전에 바사나라에 살았던 유대사람 느헤미야은 바사나라에 포로로 잡혀왔던 유대인 자손중의 한 사람으로서 왕에게 인정을 받았던 술관원이었습니다. 느헤미는 비록 식민지 출신이었지만 비교적 출세를 한 사람으로서 얼마든지 자기 자신과 가정을 위해서 ‘누리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냥 편하게만 지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자기의 조국이며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에 대해 늘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느헤미야는 국가와 민족의 형편에 대해서 매우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슬퍼했습니다.(느 1:4) 뿐만 아니라 느헤미야는 국가 민족을 위해 기도했습니다.((느 1:4`-`5) 느헤미야는 조국의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한 느헤미야는 먼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는 조국의 문제를 자신의 마음속의 안타까움으로만 남겨두지 않고 하나님께 드릴 기도의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 염려를 기도로 바꾼 예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모세와 초대교회의 사도인 바울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출 32:32,롬 9:3) 그렇습니다. 바로 지금이 모두가 한 마음으로 겸허히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며 애통하며 금식할 때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애국하는 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은 어느 때보다 나라와 위정자를 위하여 기도할 때입니다. 우리는 위정자들을 향한 실망과 비판에 하기에 앞서서 기도해야 합니다. 감사하게도 우리 한국 교회는 이런 축복을 받았습니다. 과거 이승만 정부, 장면 정부, 박정희 정부, 전두환 정부, 노태우 정부, 김영삼 정부, 김대중 정부 아래서도 한국교회는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고, 위정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남북통일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나라는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더욱이 군사적으로 위태로운 위기 속에서도 여전히 건재하고 있습니다.
정말 어느 때에는 망하는 나라 같았으나 흥했습니다. 무명한 나라 같았으나 유명했습니다. 없는 나라 같았으나 부유했습니다. 안되는 나라 같았으나 결과적으로는 되었습니다. 정말 오뚝이 같은 나라라는 기분을 느낍니다. 그 분명하고 확실한 이유는 한국과 한국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한국이 받은 기독교적 축복 때문에 이 나라는 살아 왔고, 지금도 살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신앙과 예배! 한국 교회의 하나님을 향해 올리는 불타는 구령과 구국의 기도! 그리고 한국교회가 세계영혼을 향하여 하나님께 받은 선교 비전(vision)을 위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셨기에 이렇게 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새롭게 출범한 참여 정부인 노무현 정부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지금 우리는 매우 심각한 위기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민족의 범죄를 회개하고 우리 자신이 주님 앞에서 모든 잘못된 삶을 다시 고치고 기도로 하나님 앞에 엎드린다면 하나님께서 이 땅을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시도록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이 땅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이 스코틀랜드를 구원하였던 존 낙스처럼 쓰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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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할 때입니다. 어제 우리는 삼일운동이 일어 난지 84주년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점점 삼일운동 정신이 퇴색되고 있습니다. 삼일절은 우리 민족이 살아있음을 드러낸 쾌거요 민족정기를 드높인 민족운동입니다. 삼일운동은 한일합방(1910년, 융희 황제)으로 단절되었던 한민족의 역사와 나라를 다시계속하게 한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참으로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어느 때보다 삼일절은 우리에게 깊은 감회를 주고 있습니다. 바로 지금이 삼일운동 정신이 되살아나야 할 때이고, 조상들의 슬기가 필요할 때입니다.
이런 때에 교회가 민족 앞에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1910년 융희황제가 일본의 폭력으로 한일합병에 굴복하자, 뜻있는 인사들은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1918년 세계 제1차 대전 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 원칙]을 선언하니 이에 발맞추어 나라와 민족을 잃은 슬픔의 한이 요원의 불꽃처럼 퍼져 나갔습니다.
독립선언서의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기독교인이 16명, 천도교인이 15명, 불교인이 2명이었습니다. 기독교 대표 이승훈 씨와 천도교 대표 손병희 씨와 불교대표 한용운 씨의 3대 종교가 하나로 뭉쳐, 나머지 30인과 같이 독립선언서를 작성하는 일이 국내에서 전개하였습니다. 마침내 고종황제 국장일에 전국 각처에서 몰려와 탑골공원에서 3월 1일 기미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이 운동을 위해 집회 수는 1542회, 동원된 인원은 2백2만3천명, 살해된 자 7만5백9명, 부상자 1만5천9백명, 검거 투옥된 자가 4만 6천 948명, 불탄 교회 47교회, 2개 학교, 민가 715호가 소실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삼일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하였고, 교회가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삼일운동 당시에 한국교회의 교인은 2천만 국민 가운데 1.5%인30만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힘이 있고, 생명이 있는 성도들이었고 나라의 지도자 중에 교인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합니까? 교회가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지금이야말로 교회가 바로 설 때이고, 교회의 지도자와 성도들이 바로 설 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민족은 다시금 제2의 한국전쟁과 같은 매를 맞을 수밖에 없고, 제2의 IMF라는 매를 맞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 25일에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 정부가 출범했습니다.
그리고 27일 새 정부 내각이 발표가 되었는데, 영남 출신 7명, 호남출신이 4명으로 영남출신이 호남의 배 가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성과 40∼50대의 약진이 주목됩니다. 뿐만 아니라 헌정사상 처음으로 4명의 여성장관이 탄생했고 40대가 3명, 50대가 15명이나 됐으며 60세 이상은 1명에 불과합니다. 특히 강금실 법무부장관의 경우 사상 최초의 여성 법무장관이면서도 나이 역시 46세로 최연소란 점에서 이번 조각에서 최대의 파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에 민주당은 개혁과 안정을 조화시킨 내각 구성이라고 환영하고 있고, 한나라당은 너무 파격이고 시험적이라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국민들도 이러한 내각 구성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생각이 각각 다를 것입니다. 저도 이 점에 대해서 평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지금이 바로 우리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할 때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애국이란 나라를 사랑하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성경이 가르치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가 자유, 인권, 사랑이 있는 평화로운 나라가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삼일절을 맞아 자주운동, 신앙운동, 애국운동이 다시금 뜨겁게 일어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정치에 간섭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정치에 대한 교단의 입장을 지지합니다. 전통적으로 한국 기독교는 정치 참여하는 일에 매우 소극적인 입장을 취해 왔습니다. 이는 복음주의의 전통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예수님은 나라와 교회를 분리하셨고 둘 다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느 시대나 나라가 교회를 지배하는 독재정권은 망했으며 교회가 나라를 지배하면 타락했습니다. 나라와 교회는 서로 인정하고 협력하고 함께 백성의 편이 되어야 살 수 있습니다.
과거 역사에 보시면 교회가 나라를 지배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교회가 나라를 다스리던 때가 있었습니다. 중세기에는 교회가 나라의 왕을 임명 하던 시대였습니다. 또 거꾸로 나라의 지도자들이 교회의 지도자들을 임명하고 교회를 사사건건(事事件件) 간섭하는 그런 역사의 암흑시대도 있었습니다. 이때에는 철저하게 정교분리가 요구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결코 그리스도인들이 정치를 외면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어서 안 됩니다. 정치라는 것은 외면할 수도 없고 또 외면해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 최근에 우리나라는 계속적으로 어려운 역사적 시련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바로 지금은 분명 나라를 생각할 때입니다. 바로 지금은 나라를 위해서 기도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당연한 일입니다. 구약 성경의 여러 곳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위기에 봉착했을 때에 기도했던 것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사무엘 선지자를 중심으로 한 미스바의 회개 운동, 에스더와 모르드개를 중심한 금식기도 등은 우리에게도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디도데에게 “위정자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권면에 대해서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냥 기도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결코 정치나 나라의 역사에 대해서 무관심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느 도시를 가든지 자기 민족의 회당을 먼저 찾았고 거기서부터 먼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 민족들에게도 그들이 그들의 나라와 역사를 위해 기도해야 할 중요한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의 이러한 권면은 바로 우리들에게도 적절한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국난의 심각한 어려운 징후를 겪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나라를 생각하며 철저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까?
1.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의무이며 책임이기 때문입니다.(1-2절 상)
본문 1절과 2절 상반 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성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되 특별히 위정자의 위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로"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어떤 논리적 순서를 가르치기 위한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영역에서 우선순위로 신경을 써야 할 중요한 것이다는 강조하기 위한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선순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삶의 영역에서 우리가 많은 의무를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리스도인으로 우리가 많은 의무를 가지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의무, 기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곧 위정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나라와 민족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① 구국 기도의 방법
교회가 위해서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이에 대해서 바울은 본문 1절 하반 절에서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간구, 기도, 도고, 감사로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기도의 여러 형태입니다.
여기에서 ① "간구"라는 것은 "특별한 애원"을 뜻합니다. ② "기도"라는 것은 "성도가 하나님으로 더불어 교통하고 기원하는 모든 행위"를 총칭하는 것을 뜻합니다. ③ "도고"라는 것은 "타인을위해 대신하는 기도"를 뜻합니다. ④ "감사"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베푸심에 대한 좋은 감정"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런 기도의 형태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읅 언급한 의도를 파악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방법으로 동원하여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한마디로할 수 있는 모든 방법. 사용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형태의 기도를 동원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이처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 당시의 임금들은 네로와 같은 로마의 황제들을 가리킵니다.
그 황제들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황제 밑에서 통치하던 이른 바 헤롯 대제 같은 왕들이나, 헤롯 안티파스나 헤롯 아켈라오 같은 분봉 왕들이나, 빌라도 같은 지방 총독들이나, 기타 높은 지위를 받고 백성을 관장하는 여러 류의 관리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나타내신 명령은, 교회가 예배 중에 올릴 기도의 내용입니다. 즉 예배의 공중 기도 중에 모든 시대, 모든 지역, 모든 나라들 가운데 백성을 통치하는 여러 류의 관리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 당시나 지금을 막론하고 지상에 자리 잡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소유한 공동 기도의 원리입니다. 그들 중에는 무신론자, 유물론자, 진화론자, 우상숭배자, 더욱이 교회를 박멸하는 박해자들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교회는 그 위정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택자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구속 경륜의 성취를 위한 한 도구요 수단들로서, 하나님이 세웠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받은 여러 류의 권세는 모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일반 은총인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들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일꾼이라고까지 하였습니다(벧전 2:13-17).
디모데를 향한 사도의 명령과 권면은, 교회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중 특별히 위정자를 위하여 기도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초기 교회는, 세상에 통치권을 가진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교회가 받은 신성한 필수적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회는 자신들을 박해하는 자들까지도 은혜의 자리로 인도하기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위정자들을 위해서 기도는 하지 않고 비판만 일삼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나라의 지도자들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입니다. 비판이나 비난에는 돈이 들지 않아요. 입만 벌리면 됩니다. 우리가 쉽게 비난할 수가 있습니다. 쉽게 비판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기도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기도는 일종의 노동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여러분은 기도의 역사를 믿으십니까? 우리의 기도가 역사를 바꿀 수 있다 이 사실을 참으로 믿는다면 우리가 한나라 역사의 운명을 짊어지고 기도한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그것이 우리가 첫째로 할 중요한 일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예화) 메리 여왕이 스코틀란드를 통치할 때 역사적으로 가장 어두운 시대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종교는 부패했습니다. 도덕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정치는 표류하고 있었습니다. 메리 여왕 자신이 불륜의 범죄를 저지르고 있었고, 민족은 우상숭배의 깊은 심연 속에 떨어졌습니다.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이 캄캄한 민족의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엎드려서 이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이 스코틀랜드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아니면 차라리 나에게 죽음을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한 사람은 [잔 낙스]라는 개혁자입니다. 본래 존 낙스의 자서전을 읽어보면 이 잔 낙스는 아주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이 개혁 운동을 하면서도 메리 여왕이 무서운 나머지 두 번씩이나 도망을 갔습니다. 불란서로 도망을 가고 스위스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러나 이 결사적인 기도, 금식기도하면서 완전히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갑자기 아주 담대한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거꾸로 이젠 메리 여왕이 존 낙스를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영국의 전 군대보다도 존 낙스의 기도를 더 두려워한다고 말했습니다. 마침내 존 낙스는 그의 기도와 그의 투쟁을 통해서 민족을 재건시키고 개혁하는 위대한 일을 성취할 수가 있었습니다. 복음으로 민족을 구하는 위대한 사역을 성취하였습니다. 그것은 기도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며 기도할 때라고 생각됩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역사의 자리야 말로 우리의 기도를 필요로 하는 시간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적으로 나라와 위정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만이 우리 민족의 새로운 출구를 열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할 것은 그리스도인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도에 따르는 책임 있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다른 사람들에게 본을 끼치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기도는 기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도에 따르는 책임 있는 행동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령 우리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하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면 기도한 다음에 가만히 계십니까?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셨다. 반드시 믿는다면 하나님이 내게 양식을 주실 것이다. 어디에서 양식을 줄 것인가, 어떤 방법으로 줄 것인가? 일자리를 찾아야 마땅하지 않으십니까? 그리고 일을 하셔야지요.
그렇습니다. 기도는 언제나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그 기도에 합당한 책임 있는 행동을 요구합니다. 같은 주기도문 가운데 우리는 어떤 기도를 하도록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까? “나라에 임하옵시고 또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나라에 임하옵소서”라는 것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도 임하여 달라고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뜻이 이 나라에도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기도를 했다면 이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우리가 행동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어떤 행동이 요구됩니까?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일들을 최선을 다하여 감당합니다. 그리고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독교 역사의식을 갖고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기를 소원하면서 생업에 최선을 다해서 종사해야 합니다. 기도한 만큼 나라와 민족에 유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 우리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할 이유는 우리가 경건하고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입니다.(2절 하)
여기의 "고요하다, 평안하다"라는 것은 모두 형용사로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이 "고요하다, 평안하다"라는 이 표현들은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행복의 일반적 삶의 정황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고요하다"라는 말은 [소요스러움]이 없는 외적인 삶의 정황을 나타내 주고있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평안하다"라는 말은 불안이 없는 내적인 삶의 정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안으로 불안하지 않고 또 밖으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삶의 정황 우리는 모두 이런 삶의 환경 속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환경을 우리가 요구하고 이런 환경 속에서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것은 "그저 편안히 먹고 살자"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바울은 더 중요한 이유를 제시합니다.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그런데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앞에 또 앞서서 강조하고 있는 두개의 단어가 있습니다. 무슨 단어가 강조되었습니까? "경건과 단정한 중에서"라는 말씀입니다. 이 두가지 단어는 매우 유사하면서도 강조점에 차이가 있는 단어입니다,
우선적으로 "경건"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관계에서 쓰여 지는 단어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삶의 태도, 하나님을 향한 닮아가는 삶의 덕목을 강조할 때 경건이라는 단어가 쓰여 집니다. 영어로 "경건(敬虔)"이라는 말은 "하나님 같은 혹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닮아가는 인격"을 말합니다. 그 다음에 "단정"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 우리가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질서있는 삶의 모습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고요. 또 이웃들과 사람들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건강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에 고요하고도 그리고 평안한 삶의 정황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얘기를 지금 나라의 지도자를 위한 기도 속에서 하고 있습니까?
이 지도자의 역할, 정치인의 역할 다시 말하면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의 그 결정은 바로 우리의 삶의 질을 결정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살아가는 삶의 상황이 어떻게 되느냐에 가장 중요헌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이 바로 정치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치인들의 이 정치적인 액션에 무관심 할 수가 없습니다. 또 누가 정치를 하느냐 여기에 무관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합당한 사람들이 세워지도록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 이웃들과 바른 관계 속에서 한 평생의 삶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 이런 정치의 영역 속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 우리의 미래, 우리의 평안의 미래 또 우리의 고요함의 미래, 우리의 복된 삶의 미래를 결정하는 일에 있어서 그들의 영향력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치의 영역에 무관심 할 수 없다고 성경을 가르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고, 위정자들을 위해서 기도할 이유는 이 세상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폭풍들이나, 전쟁과 반란의 회오리바람 등으로 국토의 평화를 깨뜨려 버리는 일로 인하여, 세상 가운데 자리잡은 교회가 영적 평화에 손해를 입지 말기를 위함입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의 난폭 때문에 교회가 영적인 평화를 파괴 당하지 않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3. 우리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3절)
그래서 3절에서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만한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받으실만한 것이니”라는 말씀은 신약성경에서 이곳과 딤전 5:4에서만 나오는 단어로서 “기쁘게 받아들이다”(아포테코마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중보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며 또한 기뻐받으시는 기도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단지 이기적이고 정욕을 좇아 간구하는 기도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응답하지 않으시지만(약 43) 교회가 나라와 위정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선히 여기고 기뻐하는 일입니다.
교회가 위정자들을 위하여 기도함은 하나님 자신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제사가 되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통치자들을 임명하시고, 또 그들을 합당하게 통치하고, 주장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 역사에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한국교회는 애국적인 전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선교 10년이 막 지났을 때 민비(1897년 명성황후)가 일본인 자객에 의해서 암살당한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났습니다. 선교사들은 국왕을 위해서 각국 공사관들과의 통역을 비롯한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이 지난 뒤 민중들 사이에 '선교사가 국왕을 구했다' 는 소문이 돌았고 교인들의 숫자도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일본이 한반도 지배를 강화하려들자 교회는 국가와 국왕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1896년 국왕 탄신일에는 이를 기념하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서대문 밖의 정부청사를 빌어서 개최된 이날의 예배는 최초의 공개적인 대규모 집회였습니다. 교인들도 주일마다 대문에 국기를 게양하여 애국정신을 널리 알렸습니다. 그 결과 일반 국민들의 개신교에 대한 거리감을 해소하게 되었습니다. 이후로도 교회는 국가가 어려울 때마다 나라를 위한 기도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이러한 애국정신은 YMCA, YWCA, 면려청년회의 조직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승리하고, 영국과 동맹을 맺는 한편 미국과 비밀협약을 맺어서 한반도에 대한 지배를 강화해 나아갔습니다. 1905년에는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여 본격적인 식민화 로 나아갔습니다. 1907년에는 군대를 해산하고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습니다. 1910년에는 한일합방을 이 루고 식민지 지배를 완성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나라의 운명이 어려워질 때에도 교회는 계속 성장하였습니다. 1901년에 평양에 장로회신학교가 설립되어서 한국인 목회자 양성이 시작되었습니다. 1907년에는 장로교회는 전 한반도를 묶어 하나의 독립노회인 '독노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이 노회에서 최초로 한국인 목사 7명이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 중 한명인 이기풍 목사 는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되었습니다. 이 때 장로교인의 수는 7만 명으로 증가되어 있었습니다. 1912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창립되었습니다. 총회는 창립 기념으로 중국 산동성에 3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1907년 1월에 전국적인 대 회개 및 부흥운동이 시작되었다. 평양에서 시작된 이 부흥의 불길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선교사 하디(R.A.Hardie, 한국명:간하베), 져다인(J.L.Gerdine)와 한국인 목사 길선주 등이 전국을 누비면서 사경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이 부흥운동은 수년에 걸쳐서 전국의 교회로 퍼졌으며, 국경을 넘어서 중국으로까지 전파되었습니다. 이 운동은 한국교회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였습니다. 많은 한국인들이 이 운동으로 인해서 기독교 진리를 새롭게 터득하게 하였고, 교회도 급격하게 성장하였습니다.
새벽기도회와 통성기도, 사경회라는 토착적이고 독특한 한국교회의 특징이 확립되었습니다.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선교사가 함께 협력하고,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교파를 초월해서 운동을 전개하는 동안에 연합(에큐메니칼) 정신이 구현되었습니다. 이 운동을 통해서 한국교회는 비로소 민족교회 로서의 틀을 잡아나가게 되었습니다. 이 운동은 1910년에 100만 명 구령운동으로 이어져 나아갔습니다.
바로 이러한 정신이 1919년 3월 1일에 정오에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에 대해 항거한 3·1 독립만세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3·1 만세운동은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웠으며 응축된 독립운동의 에너지를 한반도 전역으로 퍼뜨려 독립을 이뤄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삼일절을 맞이하여 기독정신의 계승과 나라와 민족을 위해 적극 나서야 합니다. 3·1 정신이 기독정신에 입각한 애국애족의 정신이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굳게 서서 조국의 번영과 민족복음화 운동에 힘써야 합니다. 또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혼란스러운 시기에 각계각층의 지도자들이 3·1정신을 이어받아 국가의 안녕을 위해 최선의 다해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어려운 시기에 먼저 교회 갱신을 통해 교회의 위상을 정립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4. 우리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평화로운 선교활동을 위해서입니다.
본문 4절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교회가 외적으로 내적으로 영적 평화를 누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 궁극적 목적은 결국 사람을 구원하는 선교적 목적을 이루기 위함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는” 이것이 교회가 영적 평안을 가져야 될 이유요 목적입니다. 물론 여기 '모든 사람의 구원'은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모든 세대, 모든 인종, 모든 나라를 가리킵니다(행 13:48). 말하자면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모든 자손들을 총칭하는 말입니다(눅19:9,10).
그렇습니다. 교회가 위정자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될 이유가 명백해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기 위함입니다. 나라가 불안하고 동요하면, 교회가 평화로운 선교 활동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교회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면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성경을 보면 구약시대 이스라엘이 국난을 당할 때마다 전 국민이 한 자리에 모여 금식하고 회개하며 기도했습니다. 남녀노소(男女老少) 모든 백성이 몰수로 모이라 했습니다. 미스바성회(삼상 7:5,6)와 여호사밧왕 시대(대하20:3,4), 요엘 선지시대(욜1:14 2:15,16), 그리고 여호야김왕 때(렘 36:9) 그러했습니다.
이처럼 모이고 힘을 합쳐 국가와 민족과 이웃을 위하여 기도하면 이것이 곧 교회 부흥으로 이어집니다. 1970년대 초 기독교 인구가 270만 명이었을 때 엑스플로 ’74 대회에 등록신자가 323,419명이었습니다. 연인원 250만 명이 여의도광장에 모여 4박 5일 간 철야기도를 드렸습니다. ’77성회,’80세계복음화성회,’84세계기도성회,엑스플로 ’85성회,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성회 등 일련의 초교파적 민족단위의 대성회를 통해 연합함으로써 한국교회가 급성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다시금 구국 기도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물론 한국교회처럼 모이기에 힘쓰는 나라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차츰 모이는 일이 식어가고 있으며 교회 안팎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일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라"(히 10:25)고 하십니다. 초비상 시기에 절대 필요한 것은 구국기도운동입니다.
우리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면 전도의 문이 열릴 것입니다.(골 4:3 계 3:7, 8, 20 마 7:7).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었더니 문이 열렸습니다. 사도행전의 부흥의 비결은 기도, 특히 마음을 같이하여 함께 모여서 기도한 것이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래서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부흥의 비결은 첫째도 기도, 둘째도 기도, 셋째도 기도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기적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5.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애국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애스더와 모르드개가 이스라엘 백성을 말살하려고 하만의 계획 앞에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자세를 가지고 구국 기도를 위한 금식에 들어갔고, 하나님께서 이를 응답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기에서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부림절의 기원입니다.(에스더 4:4-17)
여러분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다면 애스더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애국하는 길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우리 사회가 이기주의에 빠지고 나라나 동족보다는 개인의 영리만을 추구하고 모든 것을 돈으로 할 수 있다는 황금만능주의(黃金萬能主義)의 사상이 팽배한 때에 에스더와 같이 모르드개와 같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기 위해 자신들의 모든 것을 버리는 그런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민족을 위해 간구하고자 한 에스더의 선포의 때와 같이 우리는 지금 금식하며 주님 앞에 부르짖으며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느헤미야처럼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2500년 전에 바사나라에 살았던 유대사람 느헤미야은 바사나라에 포로로 잡혀왔던 유대인 자손중의 한 사람으로서 왕에게 인정을 받았던 술관원이었습니다. 느헤미는 비록 식민지 출신이었지만 비교적 출세를 한 사람으로서 얼마든지 자기 자신과 가정을 위해서 ‘누리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냥 편하게만 지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자기의 조국이며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에 대해 늘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느헤미야는 국가와 민족의 형편에 대해서 매우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슬퍼했습니다.(느 1:4) 뿐만 아니라 느헤미야는 국가 민족을 위해 기도했습니다.((느 1:4`-`5) 느헤미야는 조국의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한 느헤미야는 먼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는 조국의 문제를 자신의 마음속의 안타까움으로만 남겨두지 않고 하나님께 드릴 기도의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 염려를 기도로 바꾼 예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모세와 초대교회의 사도인 바울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출 32:32,롬 9:3) 그렇습니다. 바로 지금이 모두가 한 마음으로 겸허히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며 애통하며 금식할 때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애국하는 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은 어느 때보다 나라와 위정자를 위하여 기도할 때입니다. 우리는 위정자들을 향한 실망과 비판에 하기에 앞서서 기도해야 합니다. 감사하게도 우리 한국 교회는 이런 축복을 받았습니다. 과거 이승만 정부, 장면 정부, 박정희 정부, 전두환 정부, 노태우 정부, 김영삼 정부, 김대중 정부 아래서도 한국교회는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고, 위정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남북통일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나라는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더욱이 군사적으로 위태로운 위기 속에서도 여전히 건재하고 있습니다.
정말 어느 때에는 망하는 나라 같았으나 흥했습니다. 무명한 나라 같았으나 유명했습니다. 없는 나라 같았으나 부유했습니다. 안되는 나라 같았으나 결과적으로는 되었습니다. 정말 오뚝이 같은 나라라는 기분을 느낍니다. 그 분명하고 확실한 이유는 한국과 한국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한국이 받은 기독교적 축복 때문에 이 나라는 살아 왔고, 지금도 살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신앙과 예배! 한국 교회의 하나님을 향해 올리는 불타는 구령과 구국의 기도! 그리고 한국교회가 세계영혼을 향하여 하나님께 받은 선교 비전(vision)을 위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셨기에 이렇게 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새롭게 출범한 참여 정부인 노무현 정부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지금 우리는 매우 심각한 위기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민족의 범죄를 회개하고 우리 자신이 주님 앞에서 모든 잘못된 삶을 다시 고치고 기도로 하나님 앞에 엎드린다면 하나님께서 이 땅을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시도록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이 땅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이 스코틀랜드를 구원하였던 존 낙스처럼 쓰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