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정교분리 원리

 

오늘날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있어 다양한 주장들이 있다. 첫째는 에라스티안파의 제도(국가 지상주의)이다. 이것은 교회를 국가 내에 있는 하나의 기관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가 교회를 직접 통치하는 것을 강조하고 교회 자체의 내부정치를 부인했다.

 

둘째는 교회 지상주의의 제도이다. 이것은 국가를 교회의 일부분으로 본다. 그래서 교회가 국가 위에 군림한다고 주장한다. 셋째는 국가에 대한 배타주의이다. 이것은 국가 정치에 대해 교회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국가는 국가이고 교회는 교회이기 때문에 서로 간섭하지 말고 관심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의 정치적 무질서와 혼란에 있어 교회는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과거 재세례파의 주장이기도 했다.

 

넷째는 정교 분리 및 보완주의이다. 교회와 국가는 다같이 신적 기원을 가지고 있으나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독립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편이 다른 편에 대해 어떤 권한도 가질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교회는 국가라는 테두리 안에 있기 때문에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하고, 국가는 교회를 보호하고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

 

우리 장로교회는 마지막 네 번째 견해를 받아들인다. 칼빈을 비롯해서 개혁주의는 정교분리 및 보완주의를 국가와 교회관계의 바른 이해로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칼빈이 말한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기독교강요」 제4권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영적 통치와 국가 통치의 차이점

 

칼빈은 종교개혁자이며 장로교회의 정치체계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신학의 체계를 완성한 인물이다. 그는 철저하게 성경에 기초하여 신학 사상과 교회의 정치체계를 세워나갔다. 그는 그의 저서인 「기독교강요」 제4권 20장에서 “국가 통치”라는 주제를 가지고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설명해 나간다. 그가 그의 저서에서 이 문제를 다루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한쪽에서는 미친 야만인들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이 제도를 전복하려고 날뛰고 있는 동시에 또 한 편에서는 군주들에게 아첨하는 자들이 군주의 권력을 과장해서는 하나님 자신의 지배에 대립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해독을 다 억제하지 않으면 순수한 믿음도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인류의 유익을 위해서 이 일을 마련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 마음에 있는 경건에 대한 열성이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입증하게 되기 위해서 이 지식은 매우 중요하다.”(J. Calvin, Inst, IV. 20. 1)

 

칼빈이 살고 있던 당시에 야만인들과 군주들에게 아첨하는 자들에 의해 국가와 교회관은 엉망이었던 것을 볼 수 있다. 국가와 교회의 관계성이 엉망으로 치닫게 되면 결국 피해는 교회에서 순수한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몰려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른 국가와 교회관을 가질 때 두 기관은 서로의 임무와 책임에 충실할 수 있고 신자들은 순수한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국가와 교회는 성질이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 둘을 혼동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를 혼동하는 일은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것이다. 이 둘의 바른 이해를 가로막는 것이 바로 이 둘을 혼동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세상의 왕이나 집권자를 인정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 바라본다. 이런 사람들은 법원, 법률, 집권자, 자유를 속박한다고 여기는 모든 것을 개조하여 안심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몸과 영혼을 구별하며 덧없는 현세와 영원한 내세를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적 왕국과 세속적 지배권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안다(J. Calvin, Inst, IV. 20. 1).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나라는 우리의 사회적 지위가 무엇이든 또는 우리가 어느 나라의 법률 하에 살든지 이런 일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어떤 상태에 있어도 아무런 구별이 없다(J. Calvin, Inst, IV. 20. 1). 따라서 교회는 국가를 적으로 이해하지 말고, 국가는 교회를 적으로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진 기관이기 때문이다.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지배하려 하거나 성질을 바꾸려 한다면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오는 결과는 대혼란이 되고 마는 것이다.

 

2. 두 가지 통치

 

국가와 교회는 이렇게 구별된다. 그러나 국가의 통치는 부패한 것이고 그리스도인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라 생각해서는 안된다. 칼빈은 이런 생각은 함부로 날뛰는 광신자들이 하는 것이라고 여겼다(J. Calvin, Inst, IV. 20. 2). 그들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세상의 초등학문에 대해 죽었고(골 2:20), 우리의 신분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옮겨졌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과는 상관이 없는 일에 비열하고 세속적인 근심이나 걱정에 매인다는 것은 아주 하찮은 일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인들과 재판이나 재판소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칼빈은 “그러나 이런 통치는 그리스도의 영적이고 내적인 나라와는 다르다고 우리가 지적한 것과 같이 우리는 이 둘이 서로 반대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고 했다(J. Calvin, Inst, IV. 20. 2). 즉 국가와 교회는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서로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말이다. 영적인 통치는 시상에 사는 우리 안에 이미 하늘나라가 시작하게 만들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 속에서 영원불멸의 복락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 통치의 목적은 “우리가 사람들과 함께 사는 동안 하나님께 대한 외적 예배를 존중하고 보호하고 건전한 교리와 교회의 지위를 수호하며 우리를 사회생활에 적응시키고 우리의 행위를 사회정의와 일치하도록 인도하며 우리가 서로 화해하게 하고 전반적인 평화와 평온을 증진하는 것이다.”(J. Calvin, Inst, IV. 20. 2)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국가와 교회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고, 그 안에서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은혜를 전파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으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신령한 생활을 하며 천국을 소망하며 사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는 이 세상의 영역으로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존중하고 보호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가 가지는 교리와 교회의 지위를 수호한다. 그리스도인으로 사회생활에 적응하게 하고 사회정의를 이루도록 인도한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화해하고 평화롭게 살도록 삶을 보장해 주는 것이다. 이것이 국가의 역할이고 책임이다.

 

국가가 없다면 악인들은 어떤 악을 저질러도 처벌을 받지 않는다. 그렇다면 악인들은 더욱도 악을 저지를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질문한다. “악행을 억제하는 권력이 전혀 없을 경우 그런 악인들은 어떤 일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J. Calvin, Inst, IV. 20. 2) 국가라는 것이 없다면 악은 더욱더 창궐할 것이다. 세상은 죄악으로 가득찰 것이다. 하나님은 국가라는 기관을 통해 악을 억제하시는 것이다. 공의를 실천하고 악을 억제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국가라는 기관을 세우셨다. 이것이 국가가 가지는 또 하나의 기능이다. 여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 정의가 토대가 되어야 한다.

 

3. 국가 통치의 필요성

 

칼빈은 정부가 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인간 사회에서 정부가 하는 일은 빵과 물과 태양과 공기가 하는 일 못지않게 중요하다. 참으로 그 위치는 훨씬 더 귀중하다. 이런 것들이 하는 일 즉 사람들이 호흡하고 먹고 마시고 따뜻하도록 하는 이런 모든 활동을 포함한 생활 방도를 마련할 뿐 아니라 그 이상의 일을 한다.

 

우상숭배,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모독,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훼방 그리고 그 밖에 종교에 대한 공공연한 방해가 사회에 발생하거나 만연하지 않도록 하고 치안을 유지하고 시민의 재산을 보호하고 인간 상호간의 선한 교제를 가능하게 하고 정직과 겸양의 덕을 보존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공개적으로 종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여 사회에 인간성이 보존되도록 한다.”(J. Calvin, Inst, IV. 20. 3)

 

칼빈은 국가가 특히 정부가 일반은총의 영역 즉 사람들이 호흡하고 먹고 마시는 일, 먹고 사는 문제, 생활의 모든 문제의 방도를 마련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강조한다. 국가의 책임은 바로 이것이다. 국민들이 먹고 살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주고,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방안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치안을 유지해야 한다.

 

그 치안을 유지하는 내용에는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이 포함된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이 아닌 것을 신으로 섬기는 것이다. 우상숭배는 거짓종교, 이단 사이비등도 포함이 된다. 그래서 가정이 파탄되고, 사회와 기관이 파괴되고 부패하게 된다. 이런 것들로 인해 사기를 당하여 자살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게 된다. 따라서 이런 것들을 막아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는 것도 국가가 해야 하는 일이다.

 

그리고 국가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모독을 하거나 하나님의 진리에 대하여 훼방하는 자들을 벌해야 한다. 이것은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위정자들도 하나님을 모독한다. 하나님의 진리를 훼손하고 훼방한다. 이러한 행위는 국가가 국가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이에 따른 책임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이것은 역사 속에서 증명이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국가는 시민의 재산을 보호해야 한다. 국가가 시민의 재산을 몰수하고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이 가진 재산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 개인의 재산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도 국가의 책임이고 의무이다. 그리고 인간 상호간에 선한 교제를 가능하게 해 주어야 한다. 교제를 강제화하라는 말이 아니다. 사람들이 서로 선하게 살며 교제할 수 있도록 자유를 제공하고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국가가 할 일이다. 서로를 감시하게 하고 서로를 견제하게 하는 것은 정상적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국가는 정직과 겸양의 덕을 보존해야 한다. 국민들 사이에 정직과 덕은 대단히 중요하고 나라를 유지하는데 있어 필요한 것들이다. 정직이 사라지고 거짓이 난무하며 덕이 사라지면 국가는 대혼란에 빠지게 된다. 힘있는 자가 큰 소리를 치는 나라, 돈이 있는 사람, 권력 있는 사람이 큰 소리를 치는 나라가 된다. 사법도, 헌법도 다 무시하는 사회가 된다. 즉 법치주의가 무너지는 나라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는 이를 보존하여 국민이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고 유지하는 책임이 있다.

 

국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공개적으로 종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종교생활은 사회의 인간성을 보존하는데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국가는 이를 보장해 주고, 인간성을 보존하는데 있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특정인이나 기득권의 권력과 부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안녕과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국가를 세워 교회를 보호하시고 안영과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가 이를 무시하고 제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국가의 직무유기이다.

 

칼빈은 정부에 세 부분이 있다고 했다. “법의 수호자인 집권자와 집권자가 통치할 때의 표준이 되는 법과 법에 의한 통치를 받으며 집권자에게 복종하는 국민이 있다”고 했다(J. Calvin, Inst, IV. 20. 3). 즉 정부는 세 가지로 구성이 되는데 하나는 법을 수호하는 집권자이다. 집권자는 자기 마음대로 정치를 하고 정책을 세우는 자가 아니다. 법을 수호하는 것이 집권자의 임무이다. 집권자라고 해서 법을 자기에게 이로운 쪽으로 바꾸거나 편법을 쓰면 안된다.

 

또 법을 무시해도 안된다. 집권자는 법을 수호하는 임무를 가진 자이다. 그리고 법이 있다. 법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며,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실현하는 테두리 안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그리고 국민은 법에 통치를 받으며 집권자에게 복종한다. 왜냐하면 집권자와 법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계속해서 집권자의 지위에 대해 말한다. 그는 “집권자의 지위는 하나님께서 정하신다”고 했다(J. Calvin, Inst, IV. 20. 4). 칼빈은 “주님께서는 집권자의 지위를 시인하시며 기뻐하신다는 것을 확인하셨을 뿐만 아니라 가장 영예로운 칭호로 장식하시며 우리에게 극구 천거하신다”고 했다(J. Calvin, Inst, IV. 20. 4). 즉 집권자의 지위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물론 국민들이 투표를 통해 선출한다고 해도 그 결과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선한 집권자를 세우시기도 하시고, 악한 집권자를 세우기도 하신다. 모두 하나님의 뜻대로 주어지는 것이다. 때로는 선한 집권자를 주시므로 나라에 복을 주시기도 하고, 악한 집권자를 세워 심판하기도 하신다.

 

집권자는 하나님의 일을 대리하여 처리하는 자이다. 하나님의 위임과 권위를 받아 전적으로 하나님의 대표 다시 말해 대리자로서 행동하는 것이다(J. Calvin, Inst, IV. 20. 4).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맡기셨다는 의미이다. 지상의 모든 일에 대한 권위가 왕들과 다른 권력자들의 수중에 있다는 것은 인간성의 패악성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거룩한 명령에서 유래한 것이다. 하나님은 집권자들을 통해 인간사를 처리하기를 기뻐하시고 사람들과 함께 계심으로써 그들이 법을 제정하고 재판소에서 공의를 실시하는 것을 주관하시기 때문이다(J. Calvin, Inst, IV. 20. 4).

 

칼빈은 또 그리스도인들과 집권자에 대한 관계를 언급한다. 칼빈은 “그리스도인들이 집권자들을 부인 또는 배척함은 불가하다”라고 했다(J. Calvin, Inst, IV. 20. 5). 그러면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공중 집회에서 왕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충고한 것을 언급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딤전 2:2에서 이렇게 말한다.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바울은 이런 말로 교회의 지위를 왕들의 보호에 맡겼다고 한다(J. Calvin, Inst, IV. 20. 5).

 

다음으로 칼빈은 집권자들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그 직무에 충실해야 한다고 했다(J. Calvin, Inst, IV. 20. 6). 집권자들은 하나님의 대리자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우시고 그들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집권자들은 자신이 맡은 직무에 최선을 다해야 하고 충실해야 한다. 이것은 집권자들의 의무이다. 만약 집권자들이 이 사실을 인지한다면 어떤 고난이나 어려움이 닥쳐도 위로를 받고 인내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이 사실을 인지한다면 뻔뻔스럽게 불공정한 재판을 하지 않을 것이다.

 

불공정한 재판을 진행하지도 불공정한 판결을 내리지도 않을 것이다. 만약 이를 그들이 인지한다면 그들은 모든 주의와 정성과 열성을 다해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섭리와 보호와 선과 공의를 나타내도록 노력해야 한다(J. Calvin, Inst, IV. 20. 6). 칼빈은 집권자의 강제력은 그의 지위를 인정받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J. Calvin, Inst, IV. 20. 7). 집권자들이 가진 강제력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자신의 권력을 쥐고, 자신의 권세를 위해 사용한다면 이것은 불법을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집권자에게 강제력을 주신 이유는 그 지위를 수행하는데 있어 방해를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 강제력을 동원해 자기 이익을 챙기려 한다면 그것은 집권자가 강제력을 바르게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그 지위와 강제력을 주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처사이고 하나님께 범죄하는 행위이다.

 

4. 정부의 형태들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은 원죄 하에서 출생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타락한 상태로 살아간다.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것 모두가 죄악이다. 그러므로 그들에 의한 정치는 모두 타락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칼빈은 귀족 정치가 또는 귀족 정치와 민주 정치를 결합한 제도가 다른 형태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J. Calvin, Inst, IV. 20. 8).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칼빈이 귀족 정치 자체가 좋다고 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가 이렇게 주장한 것은 항상 공정하며 바른 생각만을 하는 자제력이 강한 왕은 드물기 때문이며, 뛰어난 총명과 지혜로서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를 아는 왕도 드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여러 사람결함이나 실패 때문에 여러 사람이 정권을 운영하는 편이 더욱 안전하고 보다 견딜 만하다고 했다.

 

칼빈은 “주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민주 정치에 가까운 귀족 정치를 제정하셔서 그의 권위로 이 점을 확인하셨다. 주님께서는 다윗을 세워 그리스도의 형상을 나타내실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가장 좋은 형태 아래 두려 하셨다(출 18:13-26; 신 1:9-17). 또 나는 자유를 적절한 절제로써 조절하고 견고한 기초 위에 바르게 확립하는 정치 제도가 가장 좋다고 인정하며 이런 형태를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J. Calvin, Inst, IV. 20. 8).

 

칼빈이 집권자들의 직책을 설명하는 목적은 그들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집권자들은 무엇을 하며 어떤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임명하셨는가를 알리려는 것이다. 집권자들은 공중의 무죄와 겸손과 예절과 평온의 보호자와 옹호자로 임명되었으며 사회 전체의 안전과 평화를 확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집권자들이 악인들의 침해를 받는 선한 사람들을 지켜 주지 않고 압박받는 사람들을 보호하지도 원조하지도 않는다면 이 직책을 다할 수 없기 때문에 사회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거나 깨뜨리는 노골적인 악인들과 범죄자들을 엄격하게 억제할 수 있는 권한을 무기로서 받았다(롬 13:3).

 

5. 집권자들의 강제력

 

칼빈은 “집권자들의 강제력 행사는 경건과 양립한다”고 했다(J. Calvin, Inst, IV. 20. 10). 하나님의 법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살인하지 말라고 금지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는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으리라고 예언했다면 어떻게 집권자들은 경건하면서도 동시에 피를 흘리는 자가 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집권자가 벌을 주는 것은 자기의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평을 실시하는 것임을 깨닫는다면 이 문제에 구애되지 않을 것이다. 주의 율법은 살인을 금지한다. 그러나 살인자는 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입법자이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일군들에게 칼을 주어서 모든 살인자를 벌하게 하신다. 경건한 자들을 해하거나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경건한 자들에게 가한 고통이 주의 명령에 따라 처벌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해하거나 상하게 하는 일이 아니다.

 

칼빈은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부분에 대해 말한다.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여기서 사람의 경솔한 생각으로 행동하지 않고 모든 일을 명령자이신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서 하며 하나님의 권위를 따르는 동안은 우리는 바른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악행을 처벌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정의를 억제한다면 문제는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어떤 법을 강요하는 것이 옳지 않다면 우리는 왜 하나님의 일군들을 비난하려고 하는가? 바울은 그들이 공연히 칼을 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로서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위해 보응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롬 13:4). 그러므로 군주들과 집권자들이 그들의 순종을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가납하실 만한 경건과 의와 정직을 실천하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그들이 이 임무를 전력하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J. Calvin, Inst, IV. 20. 10).

 

관용은 군주들에게 가장 중요한 선물이다. 그러나 집권자는 관용에도 주의해야 하고, 과도한 엄격함에도 주의해야 한다(J. Calvin, Inst, IV. 20. 10). 그러므로 집권자는 양편 모두를 공정하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때로는 관용으로 때로는 엄격한 공의로 행해야만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의 공의를 바르게 세울 수 있다.

 

6. 국가의 전쟁수행권

 

칼빈은 정부의 전쟁 수행권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왕과 국민은 공적 보복을 위해 무기를 들어야 한다고 했다(J. Calvin, Inst, IV. 20. 11).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목적으로 수행하는 전쟁을 합법적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칼빈은 “그들에게 영토 내의 평온을 유지하고 불온한 사람들의 선동을 억제하고 압제를 받는 사람들을 돕고 악행을 처벌하는 권한이 부여되었다면 개인의 평안과 모든 사람의 평화를 방해하는 자나 선동적 소란을 일으키는 자나 남을 폭압하며 학대하는 자들이 있을 때 그들의 광증을 억제하는 것보다 더 그 권력을 적합하게 사용할 기회가 있겠는가?”라고 했다(J. Calvin, Inst, IV. 20. 11).

 

칼빈은 “집권자들은 공정한 처벌로 개인들의 비행을 무력으로 억제해야 하고 뿐만 아니라 그들이 맡아 지키는 영토가 적의 공격을 받을 때는 전쟁으로 방어해야 한다. 성령께서도 성경의 많은 증거를 통해 이런 전쟁을 합법적이라고 선언하신다”고 했다(J. Calvin, Inst, IV. 20. 11). 적들이 들어와 나라를 황폐하게 하고 국민들의 목숨을 앗아간다면 집권자들은 그들을 향하여 전쟁을 행할 수 있다. 이것은 적을 침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적으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방어적 차원에서 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에서도 합법적인 전쟁으로 인정한다.

 

칼빈은 신약에 그리스도인들이 전쟁을 해도 좋다는 증거나 전례가 없다고 반대하는 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첫째, 전쟁을 해야 될 이유는 옛날과 같이 지금도 있으며 집권자들이 그 지배 하에 있는 주민을 방위하지 말라는 이유도 없다. 둘째, 이 문제에 대한 명백한 말을 사도들의 글에서 찾아서는 안된다. 그들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영적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었지 정부를 조직하려는 것이 아니다. 끝으로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이 점에서는 아무 변화도 일으키지 않으셨다는 것이 성경의 언외에 나타나 있다”라고 했다(J. Calvin, Inst, IV. 20. 12).

 

여기서 조금이라도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도록 특별히 조심하는 것이 모든 집권자들의 의무이다. 법을 주어야 할 때라도 격분에 휩쓸리거나 증오심에 사로잡히거나 무자비한 가혹으로 해서는 안된다. 또 그들은 벌을 받을 사람의 특별한 과실만을 보지 말고 그에게 있는 공통된 본성에 동정해야 한다. 또 적에 대해서 즉 무장 강도에 대해 무장해야 할 때에도 그렇게 할 기회를 찾아서는 안되고 절대 필요하지 않다면 주어진 기회도 피해야 한다. 칼빈은 여기서 “두 가지 경우의 어느 쪽에서도 집권자들은 사적인 감정에 지배되어서는 안되고 국민을 위한 고려만으로 행동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받은 권력을 남용하게 되고 이것은 심히 악한 일이다”라고 했다(J. Calvin, Inst, IV. 20. 12). 

 

7. 정부의 과세권

 

칼빈은 “군주들 편에서도 그들의 수입은 개인 재산이 아니라 국민 전체의 재산이라는 것과 그것을 낭비하거나 약탈하면 반드시 분명한 불의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기를 요망했다. 참으로 이런 것들은 거의가 국민의 고혈이므로 아끼지 않는 것은 극도의 잔혹 행위가 될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들이 부과하는 각종 조세는 필요한 공공의 재원에 불과하며 이유 없는 과세는 전제적 착취라는 것을 그들은 숙고해야 한다”고 했다((J. Calvin, Inst, IV. 20. 13).

 

집권자들이 국민에게 세금을 걷는 이유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을 거두어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집권자들은 국민들의 돈을 가지고 자신들의 배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되고 만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에도 어긋날 뿐 아니라 국가를 위해서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집권자들은 이것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집권자들이 이를 분명하게 알고 낭비와 사치를 조심한다면 그것은 국가에도 유익이 된다. 칼빈은 “그들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양심으로 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 그러므로 불경건한 자신감으로 인해 하나님의 불쾌감을 사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에서든지 합당한 한도를 알아야 한다”고 했다(J. Calvin, Inst, IV. 20. 13).

 

8. 그리스도인의 법정 이용에 대하여

 

칼빈은 “그리스도인은 법정을 이용해도 좋으나 증오심과 복수심은 품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J. Calvin, Inst, IV. 20. 17).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법정을 자유롭게 누구나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서도 이용하라는 말은 아니다. 교회 안에도 내규가 있고 교회법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므로 교회법으로 재판하고 정의를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칼빈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교회법을 무시하고 무조건 모든 사안이든지 세상 법정을 이용하라는 말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고 넘어가야 한다.

 

그리스도인들 중에 집권자가 무용지물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들을 염두하고 이런 내용을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바이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은 일을 하신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그들도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칼빈은 바울의 말을 인용한다. “바울은 분명히 여기에 반대하여 관원들은 우리의 유익을 위한 하나님의 사자라고 단언한다(롬 13:4). 사도의 뜻은 하나님께서 집권자를 임명하셨다는 것이며 또 우리가 집권자의 도움과 지지를 받아 악인들의 악행과 불의의 희생이 되지 않고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할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이다”라고 했다(J. Calvin, Inst, IV. 20. 17).

 

그러므로 칼빈은 집권자에게 도움을 요청해도 경건에 위반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J. Calvin, Inst, IV. 20. 17). 그러나 칼빈은 여기서 두 가지 사람들을 언급한다. “소송광이라 할 만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싸우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소송을 해도 무서운 증오심과 맹렬한 복수님으로 날뛰며 고집과 앙심으로 상대들을 파멸에 몰아넣기까지 한다. 그리고 부정을 행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법적 절차를 밟는다는 구실로 하여 그런 악행을 변호한다. 그러나 형제를 상대로 법에 호소하는 것이 허락된다고 해서 그 형제를 미워하거나 또는 해하겠다는 무모한 욕망에 사로잡히거나 또는 무자비하게 괴롭혀도 좋다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J. Calvin, Inst, IV. 20. 17).

 

즉 칼빈은 그리스도인도 얼마든지 세상 법정을 이용할 수 있고 억울함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기관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기관이고, 하나님은 이 기관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나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기관을 통해서 자기 이익과 권력을 누리기 위한 방편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자기의 이익을 챙기고 상대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악행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이 소송하는 동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은 소송을 바르게 이용하는 때에 한해서 그것이 허용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원고의 시고와 피고의 변호를 위해 소송을 바르게 사용할 수 있다. 즉 피고가 지정된 날에 출정해 될 수 있으면 이의를 제출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변명하며 자기의 당연한 권리에 속하는 것만 옹호하려고 할 때 그는 소상을 바르게 이용하는 것이 된다. 또 반대편의 원고도 신체와 재산에 부당한 압박을 받았을 때 법관의 보호를 청하고 고소 이유를 말하고 공정하고 선한 결과를 구한다면 그도 소송을 바르게 이용하는 것이 된다”고 했다(J. Calvin, Inst, IV. 20. 18). 남을 해하려는 생각, 복수하려는 욕심, 가혹한 증오, 투쟁욕으로 소송하는 것은 절대 금해야 하는 부분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명심해야 하는 부분이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에게 법적 절차를 배척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한다(J. Calvin, Inst, IV. 20. 19). 바울은 자기를 고발하는 자들의 중상을 논박하며 동시에 그들의 간계와 악의를 폭로했을 뿐만 아니라 법정에서 자기의 로마 시민으로서의 특권을 주장했으며 필요한 때는 불의한 재판장을 기피하고 가이사의 법정에 호소했다(행 25:10-11).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복수심을 품지 말라고 한 명령과 모순되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법정에서 복수심을 멀리 축출한다. 사건이 민사일 경우 사건을 공안 수호자인 재판장에게 순진하고 단순하게 맡기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바른 길을 취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또 악을 악으로 갚겠다는 생각을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롬 12:17). 이런 생각은 복수심이다. 사형에 해당하거나 그 밖의 중대한 범죄의 경우라도 고발자에게 불타는 듯 한 복수심이나 사적 피해에 대한 원한을 품고 법정에 나가지 말아야 한다. 복수심을 버린다면 그리스도인은 복수하지 말라는 명령은 파괴되지 않는다((J. Calvin, Inst, IV. 20. 19).

 

칼빈은 “그리스도인은 모욕을 참으나 친절과 공평한 마음으로 공공이익을 수호한다”고 했다(J. Calvin, Inst, IV. 20. 20). 더 나아가 칼빈은 “바울은 소송을 좋아하는 성품은 배척하지만 소송은 배척하지 않는다”라고 했다(J. Calvin, Inst, IV. 20. 21). 기독교 신자는 법정에 호소하기보다는 언제든지 자기의 권리를 양보하겠다는 생각으로 행동해야 한다. 법정에 가면 돌아올 때는 형제에 대한 미움으로 마음이 어지럽게 된다. 손해가 너무 클 때 사랑을 잃지 않고 재산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할 때는 법에 호소하더라도 바울의 말에 배치되지 않는다(J. Calvin, Inst, IV. 20. 21). 

 

9. 불의한 통치자에게도 공경하라

 

칼빈은 “집권자들에 대해 국민이 해야 할 첫째 의무는 그들의 지위를 가장 존귀하게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한다(J. Calvin, Inst, IV. 20. 22). 집권자들의 지위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보내신 하나님 때문에라도 그들을 인정해 주고 그들을 하나님의 사자와 대표자로서 존경해야 한다”고 했다(J. Calvin, Inst, IV. 20. 22). 세상은 집권자에게 경의를 표하고 순종할 만한 집권자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은 사회복지를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집권자들을 일종의 필요악으로만 인정한다.

 

국민이 집권자에게 복종할 대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복종을 나타내는 것이다. 통치자들의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물론 악행이 가득하고 악한 행실을 위선적인 위엄으로 덮거나 악을 덕이라고 칭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집권자의 지위 자체는 영예와 존경을 받을만한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집권자들을 높이며 그들의 지위를 존경하기 때문에 그들도 공경해야 한다고 했다(J. Calvin, Inst, IV. 20. 22).

 

칼빈은 “통치자들을 충심으로 존경하는 사람은 그들에 대하여 복종을 증명해야 한다. 그것은 그들에게 순종하거나 세금을 내거나 공직과 방위 임무를 맡거나 그 밖의 명령을 이행함으로 복종심을 실제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고 했다(J. Calvin, Inst, IV. 20. 23). 따라서 집권자에게 항거하는 것은 동시에 하나님께 항거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무장하지 않은 집권자를 모욕하고도 벌을 받지 않을 수 있을 듯 보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때에도 자신에 대한 이 모욕을 벌하실 준비를 갖추고 계신다(J. Calvin, Inst, IV. 20. 23).

 

그뿐 아니라 사사로운 시민이 공중 앞에서 지켜야 하는 자제심도 일종의 복종으로 인정한다. 개인으로서의 시민은 자기를 억제하여 공적인 일에 일부러 간섭하거나 공연히 집권자의 직무를 범하거나 정치적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 정부의 규정을 개정할 필요가 있을 때는 소동을 일으키거나 자기가 손을 댈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는 집권자에게 맡겨야 한다.

 

칼빈은 더 나아가 불의한 집권자에게도 복종하라고 한다(J. Calvin, Inst, IV. 20. 24). 칼빈은 집권자를 국부, 국민의 목자, 평화의 수호자, 의의 보호자, 무죄한 사람을 위한 복수자로 부른다(J. Calvin, Inst, IV. 20. 24). 그래서 이런 정부를 시인하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라고 인정한다. 칼빈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일부 군주들은 유의해야 할 일을 등한히 하고 자기의 쾌락만 추구했다고 한다. 또 일부 군주들은 자기 일에 열중하여 법과 특권, 재판과 청탁편지를 경배에 부치기도 했다. 또 어떤 이들은 일반 국민의 돈을 빼내서 낭비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순전히 강도질을 하고 집을 털고 부녀자를 강간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이런 집권자들에게 복종하라는 것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성경은 지배자의 존귀와 권위를 가르치지만 그들은 이런 사람을 지배자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국민은 타고난 감정에 의해 합법적이고 정의를 행하는 왕은 공경한 것 같이 반대로 폭군들을 미워하고 저주했다(J. Calvin, Inst, IV. 20. 24).

 

10. 악한 지배자

 

칼빈은 더 나아가 “악한 지배자는 하나님의 심판의 대행자”라고 했다(J. Calvin, Inst, IV. 20. 25). 그러면서 칼빈은 공정하고 충실하게 임무를 다하는 집권자에게 복종할 뿐 아니라 어떤 수단으로든지 권력을 잡은 자들이 비록 군주로서 조금도 그 직책을 수행하지 않더라도 그들의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즉 집권자가 선하든 악하든 모두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 그 지위를 부여받은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께서는 공공의 유익을 위해서 통치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애의 진정한 표본의 증거가 되고 불의하고 무능한 지배자들은 국민의 사악을 벌하기 위해 세우셨고 지배자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하나님께서 합법적인 권력에 주신 거룩한 위엄을 부여받았다고 말씀하신다”고 했다(J. Calvin, Inst, IV. 20. 25). 즉 하나님께서 선하고 정의로운 집권자를 세우시는 것은 그 나라 백성을 복주시기 위함이다. 그러나 집권자가 불의하고 무능한 것은 그 백성을 벌하기 위해 세우신 것이다.

 

그러면서 칼빈은 악한 왕은 하나님께서 땅 위에 내리시는 진노라는 것을 증명하는 구절들을 열거한다. 욥 34:30; 호 13:11; 사 3:4; 10:5; 신 28:29가 그것이다(J. Calvin, Inst, IV. 20. 25). 그래서 아무 영예도 받을 가치가 없는 심히 악한 인간이라도 만약 공적 권력을 잡고 있다면 그에게도 하나님께서 그 말씀으로 그의 공의와 심판의 사자에게 주신 고귀하고 거룩한 권능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공적 복종에 대하여 가장 훌륭한 왕이 있다고 가정할 때 그에게 드릴 그 공경과 존경을 악한 지배자에게도 마찬가지로 드려야 한다.

 

또 칼빈은 “하나님은 뜻밖의 사람들을 통해 개입하시는 때가 있다”고 했다(J. Calvin, Inst, IV. 20. 30). 하나님은 공공연한 복수자를 일으켜 악한 정부를 처벌하고 부당한 압박을 받는 그의 백성을 참혹한 불행에서 구출하라는 명령을 내리신다. 칼빈은 예를 들어 제시한다. “모세를 시켜 이스라엘 백성을 바로의 압제에서 구출하셨고(출 3:7-10), 옷니엘을 통해 수리아 왕 구산의 폭력에서 구출하셨고(삿 3:9), 다른 왕들이나 사사를 통해 그 밖의 압제에서 구출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두로의 교만을 애굽 사람을 통해 누르시고 애굽 사람들의 거만을 앗수르 사람을 시켜 꺾으셨다. 앗수르 사람들의 흉포는 갈대아 사람들로, 바벨론의 오만은 메대 사람과 바사 사람들로 꺾으셨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들의 배은망덕과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에 대한 그들의 불경하고 완고한 태도는 앗수르 사람들과 혹 바벨론 사람들을 시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분쇄하고 처벌하셨다.”(J. Calvin, Inst, IV. 20. 30)

 

집권자들은 국민의 자유를 보호할 헌법상의 의무를 가지고 있다(J. Calvin, Inst, IV. 20. 31). 그래서 집권자들은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거나 압제해서는 안된다. 폭력이나 법으로 국민을 억압하고 자유를 박탈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집권자의 직무를 주신 것에 대해 합당한 태도가 아니다. 언제나 집권자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그 자리에 서 있음을 기억해야 하고 정의와 공의를 수행해야 한다. 내 편에 서면 공의이고 정의가 아니다. 반대편에 서면 불의이고 불법이 아니다. 하나님 편에 서면 공의이고 정의가 되는 것이다. 집권자들은 이를 망각한다. 그래서 자기가 신이 되고 자기가 법, 기준 자체가 되려 한다. 집권자들은 언제나 국민의 자유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국민의 자유를 수호하고 보호해 주는 것이 집권자의 책임 중 하나이다. 그러므로 집권자는 이 일에 힘써야 한다.

 

결론

 

칼빈은 「기독교강요」 4권을 통해서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설명해주었다. 국가는 교회를 억압하고 핍박하고 협박하여 자기의 말을 잘 듣게 해서는 안된다. 이는 국가의 책임과 의무를 저버리는 행위이다. 국가는 교회의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주어야 하고, 이단과 사이비로부터 교회를 보호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외세와 핍박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고 신앙의 자유를 유지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한 국가에 속한 국민으로서의 책무를 다해야 한다. 국방의 의무, 납세의 의무 등등과 같은 것을 잘 이행하고 국가와 집권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협력해야 한다. 그러나 국가가 하나님을 저버리고 교회를 말살하고자 할 때는 철저하게 항거해야 한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않고, 자유를 억압하고, 박해한다면 교회는 잘못을 지적해야 한다. 바른 목소리를 내야 한다. 이것이 칼빈주의 개혁신학의 국가관이다. 오늘날 우리가 정교분리를 말할 때 이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