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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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616
예배의 중심은 무엇인가?”(롬 6: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예배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께 나를 드리는 것 ’입니다. 하나님께 나를 드린다면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진정한 헌신은 하나님께 아주 큰 기쁨입니다. 그러나 ‘나를 드린다 ’라는 개념은 우리에게 쉽게 마음에 다가오진 않습니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거부감이 생겨납니다. 나를 드린다는 것은 어찌 보면 항복이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까?
오늘날의 경쟁(競爭)적인 문화 속에서 우리는 노력을 멈추지 말고, 절대 포기하지 말고, 절대 항복하지 말라고 배웠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항복하고 나를 바치라니.. 결코 쉽게 용납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는 정복을 더 좋아한다. 승리와 성공을 더 좋아합니다.
▶ 그렇지만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내가 하나님께 대하여 항복(降伏)하는 것,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우리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헌신(獻身)’이라는 문제는 우리의 삶에서 내가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우리안의 거부감을 누르고 나를 ‘헌신(獻身)’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나의 삶을 드리기 위해선 우리 안에 방해적인 요소를 잡아야 합니다. 그것은 ‘두려움’ 이며, ‘교만(驕慢)’이고, ‘혼란(混亂)’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할 수 있습니까?
1. 우리는 ‘헌신(獻身)’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항복’ 이란 좋지 못한 것으로 듣고 자랐습니다. 우리 안에는 나 자신을 드린다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내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고, 실제로 내 맘대로의 삶에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어떤 것 속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에 대해서 두려워합니다. 그렇지만 이 두려움은 정복될 수 있습니다. ‘알아감’을 통해서 말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으면 나를 맡길 수 없습니다. 불확실함 속에 자신을 던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상대방을 믿으면 나를 던질 수 있습니다. 더욱이 상대방을 알아감으로 더욱 우리의 신뢰는 커져갑니다. 헌신이 되기 위해선 우선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가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를 하나님께 내어 드린다는 것은 쉬워집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①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시 145:9 ) ② 우리에게 눈을 떼지 않으십니다.(시 139:3) ③ 우리의 작은 부분까지 돌보십니다.(마 10:30) ④ 기쁨을 느끼도록 능력을 주십니다.(딤전 6:17) ⑤ 우리의 삶을 위한 좋은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렘 2911) ⑥ 우리를 용서하십니다.(시86:5) ⑦ 노하기를 더디 하십니다.(시 145:8) 가장 극적인 사랑의 표현은 역시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내가 나를 하나님께 드렸을 때에 하나님은 나의 폭군이 아니라 구세주라는 것을, 상사가 아니라 형제라는 것을, 독재자가 아니라 친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2. 교만(驕慢)을 잡아야 합니다.
사람은 사람 자체를 굉장한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스리는 존재지 다스림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자신을 피라미드의 꼭짓점에 놓기를 좋아합니다. 이것은 참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유혹입니다.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창 3:5)
삶은 싸움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내가 야곱처럼 하나님과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妄覺)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주도권의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데, 하나님의 노릇을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만입니다. 이 교만은 반드시 꺾어져야 합니다. 소크라테스의 말을 기억하는가? “너 자신을 알라!!! ”교만이 꺾여지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객관적(客觀的)으로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주관적(主觀的)으로 상상한 나와 만나지 말고, 객관적인 나와 만나야 합니다. 내가 그렇게 대단한 존재입니까? 하나님 없는 나 자신이 어떻게 대단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까? 나를 바르게 볼 수 있다면 나의 교만은 꺾어질 것입니다.
3. 헌신의 의미(意味)를 찾아야 합니다.
헌신이라는 것은 수동적으로 단념하는 행동이나 게으름을 내포하고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헌신이란 반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희생하기 위해서, 또는 변화 되어야 할 것을 변화시키기 위한 투쟁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은 로봇을 원하신 것이 아니라. 내 의지로서 고백되어지는 헌신의 고백을 원하셨습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① 헌신은 나와 싸워야 합니다. ② 헌신은 나를 나답게 하며, 나를 더욱 강하게 합니다. ③ 헌신의 현장은 삶입니다. 우리에게 베드로와 같은 헌신이 필요합니다.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며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는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눅 5:5) 내 현장이 살아야 합니다. 사람에 대해서, 물질에 대해서, 일에 대해서 나의 삶에 헌신의 증표가 있어야 합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24) ④ 헌신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를 참된 헌신이 무엇임을 배워야 합니다. 참된 헌신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헌신은 내 삶을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헌신을 통하여 어떤 복을 주십니까?
① 헌신을 통하여 평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욥 22:21)
② 우리는 헌신을 통하여 자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었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롬 6:17-18)
③ 우리는 헌신을 통하여 삶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집요한 유혹과 어려운 문제들을 그리스도께 온전히 맡길 때 그분의 능력으로 해결 받을 수 있게 됩니다. 두려움이나 교만은 어느새 사라집니다. 바울은 말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하나님은 헌신하는 사람들을 책임져 주십니다.
(結論)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야 하겠습니까? 예배의 중심은 항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항복하는 사람은 헌신합니다. 그런데 헌신은 계속 고백되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항복을 고백하는 것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31) 항복의 삶은 매 순간 이루어져야 하고 평생 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산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항복은 매일의 습관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눅 9:23에서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을 따르려면 한다면 우리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매일매일 자신들의 삶을 기꺼이 포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삶을 드리는 것이 가장 좋은 삶의 방법일 뿐만 아니라 유일한 삶의 방법입니다. 이제 모두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과거의 후회, 현재의 문제들, 미래의 야망, 두려움, 꿈, 약점, 습관, 상처 그리고 우리가 가진 열등감까지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리함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통하여 위대하신 일을 행하시는 그런 은혜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아멘)
☞ 삶으로 떠나는 질문 :
1. 여러분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원인들은 무엇인가 목록을 작성해보십시오.
2. 그 목록들 중에 하나님께 맡길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까?
3. 여러분은 삶의 어떤 부분을 하나님께 숨기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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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예배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께 나를 드리는 것 ’입니다. 하나님께 나를 드린다면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진정한 헌신은 하나님께 아주 큰 기쁨입니다. 그러나 ‘나를 드린다 ’라는 개념은 우리에게 쉽게 마음에 다가오진 않습니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거부감이 생겨납니다. 나를 드린다는 것은 어찌 보면 항복이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까?
오늘날의 경쟁(競爭)적인 문화 속에서 우리는 노력을 멈추지 말고, 절대 포기하지 말고, 절대 항복하지 말라고 배웠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항복하고 나를 바치라니.. 결코 쉽게 용납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는 정복을 더 좋아한다. 승리와 성공을 더 좋아합니다.
▶ 그렇지만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내가 하나님께 대하여 항복(降伏)하는 것,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우리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헌신(獻身)’이라는 문제는 우리의 삶에서 내가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우리안의 거부감을 누르고 나를 ‘헌신(獻身)’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나의 삶을 드리기 위해선 우리 안에 방해적인 요소를 잡아야 합니다. 그것은 ‘두려움’ 이며, ‘교만(驕慢)’이고, ‘혼란(混亂)’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할 수 있습니까?
1. 우리는 ‘헌신(獻身)’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항복’ 이란 좋지 못한 것으로 듣고 자랐습니다. 우리 안에는 나 자신을 드린다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내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고, 실제로 내 맘대로의 삶에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어떤 것 속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에 대해서 두려워합니다. 그렇지만 이 두려움은 정복될 수 있습니다. ‘알아감’을 통해서 말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으면 나를 맡길 수 없습니다. 불확실함 속에 자신을 던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상대방을 믿으면 나를 던질 수 있습니다. 더욱이 상대방을 알아감으로 더욱 우리의 신뢰는 커져갑니다. 헌신이 되기 위해선 우선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가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를 하나님께 내어 드린다는 것은 쉬워집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①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시 145:9 ) ② 우리에게 눈을 떼지 않으십니다.(시 139:3) ③ 우리의 작은 부분까지 돌보십니다.(마 10:30) ④ 기쁨을 느끼도록 능력을 주십니다.(딤전 6:17) ⑤ 우리의 삶을 위한 좋은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렘 2911) ⑥ 우리를 용서하십니다.(시86:5) ⑦ 노하기를 더디 하십니다.(시 145:8) 가장 극적인 사랑의 표현은 역시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내가 나를 하나님께 드렸을 때에 하나님은 나의 폭군이 아니라 구세주라는 것을, 상사가 아니라 형제라는 것을, 독재자가 아니라 친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2. 교만(驕慢)을 잡아야 합니다.
사람은 사람 자체를 굉장한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스리는 존재지 다스림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자신을 피라미드의 꼭짓점에 놓기를 좋아합니다. 이것은 참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유혹입니다.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창 3:5)
삶은 싸움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내가 야곱처럼 하나님과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妄覺)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주도권의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데, 하나님의 노릇을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만입니다. 이 교만은 반드시 꺾어져야 합니다. 소크라테스의 말을 기억하는가? “너 자신을 알라!!! ”교만이 꺾여지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객관적(客觀的)으로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주관적(主觀的)으로 상상한 나와 만나지 말고, 객관적인 나와 만나야 합니다. 내가 그렇게 대단한 존재입니까? 하나님 없는 나 자신이 어떻게 대단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까? 나를 바르게 볼 수 있다면 나의 교만은 꺾어질 것입니다.
3. 헌신의 의미(意味)를 찾아야 합니다.
헌신이라는 것은 수동적으로 단념하는 행동이나 게으름을 내포하고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헌신이란 반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희생하기 위해서, 또는 변화 되어야 할 것을 변화시키기 위한 투쟁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은 로봇을 원하신 것이 아니라. 내 의지로서 고백되어지는 헌신의 고백을 원하셨습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① 헌신은 나와 싸워야 합니다. ② 헌신은 나를 나답게 하며, 나를 더욱 강하게 합니다. ③ 헌신의 현장은 삶입니다. 우리에게 베드로와 같은 헌신이 필요합니다.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며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는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눅 5:5) 내 현장이 살아야 합니다. 사람에 대해서, 물질에 대해서, 일에 대해서 나의 삶에 헌신의 증표가 있어야 합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24) ④ 헌신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를 참된 헌신이 무엇임을 배워야 합니다. 참된 헌신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헌신은 내 삶을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헌신을 통하여 어떤 복을 주십니까?
① 헌신을 통하여 평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욥 22:21)
② 우리는 헌신을 통하여 자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었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롬 6:17-18)
③ 우리는 헌신을 통하여 삶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집요한 유혹과 어려운 문제들을 그리스도께 온전히 맡길 때 그분의 능력으로 해결 받을 수 있게 됩니다. 두려움이나 교만은 어느새 사라집니다. 바울은 말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하나님은 헌신하는 사람들을 책임져 주십니다.
(結論)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야 하겠습니까? 예배의 중심은 항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항복하는 사람은 헌신합니다. 그런데 헌신은 계속 고백되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항복을 고백하는 것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31) 항복의 삶은 매 순간 이루어져야 하고 평생 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산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항복은 매일의 습관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눅 9:23에서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을 따르려면 한다면 우리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매일매일 자신들의 삶을 기꺼이 포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삶을 드리는 것이 가장 좋은 삶의 방법일 뿐만 아니라 유일한 삶의 방법입니다. 이제 모두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과거의 후회, 현재의 문제들, 미래의 야망, 두려움, 꿈, 약점, 습관, 상처 그리고 우리가 가진 열등감까지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리함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통하여 위대하신 일을 행하시는 그런 은혜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아멘)
☞ 삶으로 떠나는 질문 :
1. 여러분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원인들은 무엇인가 목록을 작성해보십시오.
2. 그 목록들 중에 하나님께 맡길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까?
3. 여러분은 삶의 어떤 부분을 하나님께 숨기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