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교회사
본 훼퍼의 사상1
본훼퍼는 1906년 구 동독의 브레슬로에서 태어났다. 독일에서 처음으로 정신의학회의 의장을 역임한 내과의사인 아버지가 일하는 베를린에서 7형제인 행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운동과 음악을 좋아했고, 그의 이웃 친구들은 하르낙과 역사가인 델부룩의 자녀들이었다.
16세 때 본훼퍼는 신학을 공부하기 원했으며, 1924년에 베를린에서 대학에 입학하였고, 하르낙 교수와 함
께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의 선생들은 홀, 제베르그, 리츠만, 루트게르트같은 베를린의 위대한 학자들이었다. 본 훼퍼는 칼 바르트
의 강의를 듣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현대신학의 지지자가 되었다.
21세인 1927년 성도의 교제에 대한 교리적 연구인 [성도의 교제]박사논문를 제출하였고, 1929년에 [행위와 존재]에서 변증신학의 위치와 중요성을 정의한 교수자격논문을 썼다.
1930년 신학교수가 된 후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에 파견된다. 그는"미국이 비평의 요새 즉, 자유토론의 장소로 유명하
고 존경받게 된 것은 미국인들의 특유한 시민적 용기와 개인의 관계에서 약한 공식주의에 의해 가능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베
를린으로 돌아 간 그는 그의 첫 번째 저서 [창조와 타락]을 출간하였다.
1930년 베를린 라디오 방송을 통해 강의를 하게 되었다. 본훼퍼는 민중의 우상이 되는 것을 명백히 거절하지 않는 한 필연
적으로 '잘못된 지도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지도자"를 갈망하는 독일 대중을 비난하는 강의 방송을 내 보냈다.
방송은 강의가 끝나기도 전에 차단 되었다. 히틀러가 우상이 된 것이 명백하게 되었을 때, 그는 런던에 있는 두 개의 독일교
회의 목사가 되는 부름을 받아 들였다. "독일 기독교계"와 나치 정부와의 타협에 참여하는 것을 거절하였기 때문이다.
본훼퍼는 평화주의에 대한 관심을 추구하기 위하여 인도의 간디를 방문하는 것을 준비하는 동안 나치 독일 하에서 '불법'이
며 은밀히 운영되는 지하 신학교의 책임자로 부름을 받았다. 상황이 위급하였지만 25명의 교구목사들과 한 집에서 함
께 기거하였다.
이것으로 기독교 공동체의 삶을 성경적 통찰력으로 기술하고 기록한 Gemeinsames Leben(1938)책을 낸다.
이 기간동안 영국과 미국에서 [사도직의 댓가(나를 따르라]으로 출간된 Nachfolge를 저술하였
다. 그 후 그의 저술 활동과 출간은 금지되고, 지하 신학교 역시 비밀경찰에 의해 페쇄되었다. 그러나 본훼퍼는 이미 독재자가 지배
하는 조국의 여러가지 일에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그는 평화주의적 입장의 모든 영향력을 느끼고 "사도적 댓가"를 측정한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상의 시민으로서 그 책임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기본적인 윤리관에 따라 행동했다.
1939년 미국에 남아 하나님의 교회와 학자와 교사로서 재능을 사용하라는 권유를 거절하고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고국으로 돌아온다. 그 때부터 그의 삶은 고백교회에 할당된 직무와 저항운동에 전념하였다.
그때부터 베를린에서의 모든 것이 금지 된 탓에 전국을 돌아다니며 은둔한 성도들에게 설교하며 다양한 집단들 사이에 연락자의 역할을 하면서 [기독교 윤리]를 완성하였다.
1943년 4월5일 누이(Christel)와 그의 남편
(Hans von Dohnanyi)와 함께 체포되었고, 감옥에 감금되어 1944
년 10월8일까지 수용되었다.
본훼퍼가 감옥에 있는 동안 간수들은 그와 친하게 되었고, 절망적인 죄수들의 방으로 데리고 가서 그들을 섬기게 하였다. 간수들은 그의 연구논문, 수필, 시들을 보존하였고 가족과 연락도 취해 주기도 하였다.
1945년 4월9일 프로센버그의 강제수용소에서 히틀러의 특별명령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
는 삶과 괴리된 단순한 지식적 이론이나 교리가 아니라 오히려 항상 책임있고, 순종하는 행동이며 그리스도의 사도로서의 삶을 살아가
는 것이었다.
궁극적으로 그를 감옥과 죽음도 불사르게 한 것은 사도정신이었다. 나치 경찰에 의해 투옥되기 6년 전 그는 "그리스도가 사람을 부를 때 그로 하여금 와서 죽으라고 명령하신다"라고 기술하였다.
가장 고상한 언어의 의미에서 그는 교회에서 선생이었으며, 심오한 신학적.성경적 통찰력을 가지고 현재의 삶에 밀접하고 현실에 민감한 저술가였으며, 사도의 길을 보고 끝까지 그 길을 걸은 증인이었다.
그가 마지막 날에 인용한 말씀이 생각한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