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한 능력 
성경본문  벧후 1:1-7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베드로후서 1:1-7) 

베드로 사도는 본문 속에서 네가지 주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보배로운 믿음(1절), 신기한 능력(3절), 지극히 큰 약속(4절), 신의 성품(4절)이라는 주제들입니다. 

베드로는 누구보다 예수님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모셨던 사람입니다. 그런 탓으로 칭찬도 받었고, 호된 책망도 받었습니다. 주를 위해 목숨을 내놓겠다며 장담도 했고 세 번씩이나 맹세하고 저주하며 부인도 했습니다. 

최측근이었던 베드로가 본 예수님의 품성과 능력은 생각하고 유추해 낸 사고의 결과가 아닙니다. 보고 듣고 경험했던 체험의 결과이며 고백이며 간증인 것입니다. 
네 가지를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1. 보배로운 믿음입니다. 
보석은 비싸다는 것, 귀하다는 것, 변치 않는다는 특징을 갖습니다. 금은 천년이 지나도 금입니다. 불 속에 넣어도 물 속에 넣어도 그대로 금입니다. 지금은 달러보유고로 국가 경제를 평가하지만 옛날에는 금보유고로 경제력을 평가했습니다. 

베드로전서1:7을 보면 “믿음의 시련은 금보다 더 귀하다”고 했고 후서1:1에서는 “보배로운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보석이 그러하듯 변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어렵다고 변하고 힘들다고 변하고 잘 산다고 변하고 못산다고 변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천년이 가고 만년이 가도 변치 않는 믿음이 보배로운 믿음인 것입니다. 

왜 믿음이 보배로운 것입니까? 
저에게 어떤 분이 볼펜을 선물하면서 “이 볼펜은 목사님을 위해 준비한 것입니다. 설교 준비하실 때 사용하시기 바랍니다”라며 주셨습니다. 저는 값 없이 받은 것입니다만 그 분은 비싼 값을 지불하고 이 선물을 샀습니다. 

에베소2:8을 보면 믿음은 은혜로 주신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이 선물을 나에게 주시기 위해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셨고 고귀한 피를 값으로 지불하셨습니다. 피보다 귀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성경은 피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생명을 주고 우리를 구원하셨고 그 사실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진리야말로 가장 값진 보배중의 보배가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보배 관리법입니다. 
구리반지를 은행금고에 보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1캐럿 다이아몬드 반지를 아무데나 벗어 놓는 사람은 없습니다. 
마태복음7:6을 보면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고 했습니다. 

돼지는 보석의 가치를 모릅니다. 그래서 밟고 뭉개 버린다는 것입니다. 잠언11:22을 보면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코에 금고리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제아무리 고급 장신구로 치장하고 최고급 의상을 걸치고 외제 화장품으로 메이크업을 했더라도 자신의 말과 행동을 삼갈 줄 모르는 여자라면 돼지코에 금고리 거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돼지와 보석은 인연이 없습니다. 개나 돼지에겐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천 날 만 날 데리고 다녀도 개나 돼지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일본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주일도 빠지지 않고 교회를 잘 나오던 부부가 연락도 없이 교회를 나오지 않었습니다. 궁금한 사모님이 오후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이게고상 오늘 교회 못 나오셨던데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아 네 사모님 집안에 상이 나서 못나갔어요” 
“상이라니요 누가 세상을 떠났습니까? 
“아리꼬상이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아리꼬상이라니요?” 
“저희 집 개 말이예요 14년 된 개가 세상을 떠났어요”…… 
그러면서 엉엉 울더랍니다. 

“사모님 아리꼬상 너무 불쌍해요 천당은 갈 수 있겠지요?” 
개를 많이 키워 본 사람 얘기에 의하면 개도 늙으니까 당뇨, 심장병, 골다공증 다 걸리더라는 것입니다. 
개나 돼지에겐 진주가 필요 없습니다. 보배로운 믿음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믿음으로 죄 사함 받고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 되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된 것을 기뻐합시다. 감사합시다. 

2. 신기한 능력 
3절을 보면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초능력이라는 게 있습니다. 영화에 자주 등장했습니다만 6백만 불의 사나이의 초능력― 자동차나 기차보다 빨리 달리고 자동차를 뒤집어엎고, 여자 초능력 소머즈도 비슷한 능력을 행사했습니다. 마술사들도 초능력을 행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그러나 그것은 모두가 눈속임이거나 사단의 힘을 빌려 행하는 능력인 것입니다. 

모세가 애굽에 들어가 열 가지 재앙을 내릴 때 애굽의 마술사들도 똑같은 능력으로 따라 했습니다. 
그러나 따라하지 못하는 게 더 많었습니다. 그러니까 병을 고친다든지 능력을 행한다든지 하는 것들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귀신들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로 죽을 나를 십자가의 대속으로 구원하는 일은 예수님만 하셨습니다.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고 흉내 낼 수 없습니다. 말짱하게 살아있는 사람도 죽은 사람을 살리지 못하는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죽을 죄인을 살리셨습니다. 

예수 한 분이 죽으심으로 모든 인간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베드로는 “신기한 능력”이라고 한 것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주님의 신기한 능력은 수를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셨고, 듣지 못하는 자를 듣게 하셨고 말하지 못하는 자 걷게 하셨고 중풍병자 고치셨고 귀신을 내쫓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1:1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했고 1:14를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했습니다. 주경가들은 이 사건을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 가운데 절정을 이룬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잉태도 신기한 능력으로 되셨습니다. 33년 사신 것도 그가 행하신 일들도 신기한 능력 자체였습니다. 우리는 신기한 능력을 행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마가복음16:17을 보면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1:49를 보면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라고 했습니다. 
이사야43:19를 보면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신비하고 신기한 종교입니다. 다른 종교도 신비가 있다고 합니다만 그것은 사단이 제공하는 신비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신비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주시는 신비이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신기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신비주의에 빠지는 것도 신비를 배격하는 것도 바른 자세는 아닙니다. 

주님의 신기한 능력은 오늘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홍해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내 가정 속에서 시내광야가 아니라 오늘 여기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능력으로 나를 살리셨습니다. 만나로 이스라엘을 먹이신 그 능력이 나를 먹여 주십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던 그 능력으로 나를 인도해 주십니다. 주님의 신기한 능력을 찬양합시다. 

3. 지극히 큰 약속 
4절을 보면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약속의 종교입니다. 수많은 약속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약속을 기록한 책들입니다. 구약은 옛 약속(old Testament)이고 신약은 새 약속(New Testament)입니다. Testament(약속)는 신과 인간의 약속을 의미합니다. 사람과 사람의 약속은 믿을 수 있는 것이 있고 믿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1백프로 믿을 수 있고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오늘 주시는 약속으로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약속입니다. 
요한복음3:16을 보면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지금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약속보다 더 큰 약속은 없습니다. 의약 분업되기 전 지방도시에 소문난 약방이 있었습니다. 그 집 약만 먹으면 무슨 병이든 다 낫는다는 소문이 퍼져 매일 수백명 씩 몰려든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소문난 병원은 수백 명씩 기다려 진료를 받습니다. 

병 낫는다. 구원받는다… 이 약속보다 더 큰 약속이 있습니까? 
둘째는 장차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다시 말하면 장래를 보장해 주신 것입니다. 정년퇴직을 앞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어둔 그늘이 얼굴에 드리워있고 먼 산 바라보고 한숨만 쉬고 있었습니다. 퇴직 후 살아갈 길이 막막했기 때문입니다. 
모아 둔 돈도 없고 그렇다고 퇴직금도 몇 푼 안되고… 

그런데 다른 한사람은 아무런 걱정이 없습니다. 이유는 퇴직하자 
마자 다른 회사의 CEO로 내정이 됐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장래를 약속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14:2를 보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셨고 14:3을 보면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원천국을 소망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낙천적입니다. 바울은 살면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니 좋고 죽으면 영원천국에 가는 것이니 좋다고 했습니다. 이 위대하고 확실한 약속을 감사합시다. 

4. 하나님의 성품 
4절 하반절을 보면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죄 짓고 난 후부터 하나 둘 신의 성품이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사랑, 자비, 온유, 인내, 용서, 희생, 이런 것들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품이 어떤 것인지 조차도 잃어버리고 마귀가 준 성품들이 본래의 성품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성품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이 어떤 것이며 그 성품이 얼마나 좋고 위대한 것인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품이 어떤 것입니까? 

자기가 희생하고 남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죽이고 남을 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큰소리 한번 치지 않으시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사셨습니다. 베드로는 그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 본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 닮은 자,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권면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보배로운 믿음을 주셨습니다. 
신기한 능력을 주셨습니다. 
지극히 큰 약속을 주셨습니다.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해 주셨습니다. 
감사하고 찬양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