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설교
글 수 616
고난 받은 그리스도
성경본문 벧전 2:19-25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베드로전서 2:19-25)
어느 병원 입원실 곁에 있는 휴게실에서 몇 사람이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습니다. 신장 결석(담석증)을 수술한 사람이 “말도 마시오 그 아픔을 어디다 비기겠습니까?” 애 낳는 것보다 더 아팠을 것입니다. 디스크 수술 환자가 말했습니다. “무슨 소리요 뼈를 깎는 아픔이란 말도 몰라요?” 뼈를 자르고 깎는 아픔은 표현을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아프다는 얘기를 조용히 들으며 한숨을 쉬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레게 물었습니다. “어디가 아파서 입원 하셨습니까?” “예 저는 수술 환자는 아닙니다” “제일 편한 환자시군요” “저는 몸은 아픔이 덜한 사람입니다만 가슴이 아픕니다. 열흘 전에 제 아들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애비가 먼저 가야 하는데 자식이 먼저 갔습니다. 내 가슴에 죽은 자식 묻느라 가슴이 다 찢어졌습니다. 너무 많이 아픕니다”
갑자기 장내가 숙연해 졌고 더 이상 아프다는 얘기들을 계속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모두 각각 아픔이 있고, 고통이 있고 견디기 어려운 통증들을 갖고 있습니다.
내 아픔이 제일 크고 내 고통이 제일 깊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나보다 훨씬 더 큰 아픔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겪으신 고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출생부터가 고난의 시작이었습니다. 빌립보서 2:6을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라고 했고, 7절을 보면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8절을 보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
본래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종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고 낮추신 것만도 고통이었는데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높아지는 것도 어렵지만 낮아지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얻는 것도 힘들지만 포기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하루아침에 하야를 선언한 대통령이 시골 면 서기로 내려간다면 전 세계 매스컴이 떠들어 댈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이 인간이 되시고 인간이 되신 그 하나님이 천대멸시 다 견디시고 결국은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이 바울의 증거인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성장도 순탄치 못했습니다. 아기 예수를 죽이겠다는 헤롯왕의 마수를 피해 애굽으로 피난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출생지를 따라 타국으로 가야했습니다. 그 후 유대땅으로 돌아온 후에도 베들레헴이나 예루살렘에서 자라지 못하고 120km나 떨어진 갈릴리 나사렛에서 성장했습니다. 부모가 가난했던 탓으로 소년시절부터 아버지를 도와 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은 30세가 지나면서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기득권층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목숨 걸고 반대했고 죽이려 들었습니다. 이유는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사칭한다. 자신들과 코드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게 무슨 잘못입니까? 아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왜 죽을 죄입니까?
한마디로 예수 반대파들은 억지를 부린 것입니다. 지금도 억지를 부리는 사람들은 신앙생활이나 교회생활이 순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통증 제공자는 밖에 있는 것입니다. 안에 가까이 있는 것이 더 컸습니다.
어떤 날은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 넘겼습니다. 그 당시 관례는 내가 돈을 지불하고 노예를 사면 그날부터 그 노예는 내 소유가 됩니다. 주인 맘대로 부리고 때리고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인신매매범이 예수를 팔아 넘겼다든지 노예상이 그 짓을 했다면 넘길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가 스승을 팔아넘긴 것입니다. 그야말로 천륜과 인륜을 다 깬 것입니다.
늘 함께 먹고 마시고 다니던 사람이 예수를 팔아 넘겼습니다. 바로 그 점이 상처가 되는 것입니다. 불교도나 회교도는 예수를 반대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팔아 장사를 하고 돈을 벌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 주를 위해 일한다는 사람들, 자신을 제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예수 팔아 돈벌고, 부자 되고, 유명해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매주 월요일마다 국민일보에 칼럼을 쓰고 있습니다. 지난 3월 14일자 칼럼 제목은 “별이 되고 싶은 사람들” 이었습니다.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헐리우드에 가면 명성을 날리다 세상 떠난 스타들의 이름을 동판에 새겨 인도에 깔아 놓은 것을 보게 된다. 본래 별이란 구만리 창공에 떠 밤하늘을 밝힐 때 존재 가치가 드러난다. 그런데 땅바닥에 떨어져 밟고 다니는 별이라면 의미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하늘에 둥둥 떠 있는 별보다 땅에 떨어진 별이 더 높은 가치를 지닌다는 숨은 뜻을 전한다. 동방박사를 인도하던 별이 베들레헴에 이르자 하늘에 멎었다. 이유는 진짜 별이 땅에 있는데 가짜 별이 설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날 갑자기 별이 나타나 설쳐대면 진짜 별빛은 가리운다. 내가 크려면 예수를 작에 해야 하고 내가 스타가 되려면 예수 조명을 어둡게 해야 한다. 내가 박수갈채를 받으려면 대중의 시선이 내게로 꽂히게 해야 하고 내가 부자가 되려면 예수를 팔아야 한다. 해가 떠오르면 소리도 없이 사라지는 별들의 행진을 바라보자. 오직 예수만 스타일뿐...”
베드로가 준 상처도 컸습니다.
평소 예수님의 수행측근이었고 맨 먼저 제자가 된 사람이 베드로였습니다. 그는 늘 예수님 곁을 지키며 기회 있을 때마다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곤 했습니다. “저는 절대로 어떤 경우에도 주님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옥에도 함께 가고 죽는데도 함께 갈 겁니다. 다른 사람이 다 주를 버려도 저는 결코 버리지 않을 겁니다. 저는 주를 위해 목숨을 내놓겠습니다.”라고.
대단한 호기였고 장담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체포되시던 날 밤 그의 모든 호기와 장담은 썩은 나무토막처럼 무너졌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시던 날 밤은 유난히 추웠습니다. 법정 뜰에 모인 사람들은 여기저기 모닥불을 펴놓고 예수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그 틈새에 낀 것입니다.
베드로도 모닥불에 추위를 녹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알아보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남의 집에서 일하는 여종이었습니다.
“나는 당신을 잘 안다. 당신은 저 예수와 함께 있었다. 당신은 예수당이다. 당신의 사투리가 증명한다.” 그러자 베드로는 “나는 예수를 모른다. 참말로 말한다. 나는 예수를 알지도 함께 할일도 없다. 무슨 헛소리냐 나는 저런 사람을 본적도 없다”라며 부인했습니다.
장소는 빌라도 법정뜰,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는 곳, 거기서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했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얘기에 의하면 베드로는 새벽, 닭 우는 소리, 모닥불, 셋이라는 숫자를 보고 들을 때마다 통곡하고 회개했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을 만나신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닥불을 펴놓고 고기 잡으러 갔다 돌아오는 대화를 시작하시며 세 번 물으셨습니다.
베드로에게 모닥불, 새벽, 세 번이라는 콤플렉스, 아픈 추억이 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세 번 물음에 베드로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세 번 대답했습니다.
새로운 출발을 위한 결단식이었던 것입니다.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배신 모두 큰 상처였습니다. 아픔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머리에 가시관, 손과 발에 못, 옆구리 창... 역적모의에 실패했다든지 살인강도 짓을 했다든지 파렴치한 죄를 짓고 십자가에 매달렸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런 잘못도 죄도 없으셨습니다. 히브리서 7:26을 보면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지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9:14을 보면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렸다”고 했고, 9:28을 보면 “죄와 상관이 없다”고 했습니다.
흠도 티도 죄도 없는 그리스도, 십자가에 달려 겪으신 그 고통과 아픔을 어떤 고통에 비길 수가 있겠습니까?
누가복음 23:44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운명하시던 2시간, 해가 빛을 잃고 세시간 동안 온땅이 어두워졌습니다.
성소휘장이 찢어졌고, 바라보던 사람들은 가슴을 치며 슬퍼했고,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도 통곡했습니다. 베드로전서 2:19-24을 보면 예수님의 고난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했던 베드로가 예수님의 고난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너희를 위한 고난이다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다(21-)”
“죄도 궤사도 없으셨는데 고난을 받으셨다(22-)”
“욕을 받으시되 욕하지 않으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않으셨다(23-)”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24-)”는 것이 베드로의 증언인 것입니다.
왜 고난당하셨습니까? 나를 위해 고난 당하셨습니다. 왜 죽으셨습니까? 내 죄를 대신해 죽으셨습니다.
“그때 그 무리들이 예수님 못밖았네 녹슨 세개의 그 못으로
망치소리 내맘을 울리면서 들렸네 그 피로 내죄 씻었네
비웃는 그 무리들 주의 옷 벗긴 후에 주님 몸깊이 찔렀네
귀중한 그 보배피 나를 위해 흘렸네 그 피로 내죄 씻었네
주여 너의 영혼을 받아 주시옵소서 그때 구원을 이루셨네
마지막 피 한방울 나를 위해 흘렸네 그 피로 내죄 씻었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 은혜와 사랑을 보답하며 살아야 합니다. 배신하면 안됩니다.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고난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고난도 마다하면 안됩니다. 주를 위해서라면 손해도, 고난도, 굴욕도 견딥시다. 그래야 영광과 축복이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고난 넘어 영광의 새 아침을 바라보며 고난 넘어 승리의 날을 바라보며 고난의 주님을 따라 갑시다. 아멘.
Tweet
성경본문 벧전 2:19-25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베드로전서 2:19-25)
어느 병원 입원실 곁에 있는 휴게실에서 몇 사람이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습니다. 신장 결석(담석증)을 수술한 사람이 “말도 마시오 그 아픔을 어디다 비기겠습니까?” 애 낳는 것보다 더 아팠을 것입니다. 디스크 수술 환자가 말했습니다. “무슨 소리요 뼈를 깎는 아픔이란 말도 몰라요?” 뼈를 자르고 깎는 아픔은 표현을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아프다는 얘기를 조용히 들으며 한숨을 쉬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레게 물었습니다. “어디가 아파서 입원 하셨습니까?” “예 저는 수술 환자는 아닙니다” “제일 편한 환자시군요” “저는 몸은 아픔이 덜한 사람입니다만 가슴이 아픕니다. 열흘 전에 제 아들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애비가 먼저 가야 하는데 자식이 먼저 갔습니다. 내 가슴에 죽은 자식 묻느라 가슴이 다 찢어졌습니다. 너무 많이 아픕니다”
갑자기 장내가 숙연해 졌고 더 이상 아프다는 얘기들을 계속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모두 각각 아픔이 있고, 고통이 있고 견디기 어려운 통증들을 갖고 있습니다.
내 아픔이 제일 크고 내 고통이 제일 깊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나보다 훨씬 더 큰 아픔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겪으신 고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출생부터가 고난의 시작이었습니다. 빌립보서 2:6을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라고 했고, 7절을 보면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8절을 보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
본래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종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고 낮추신 것만도 고통이었는데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높아지는 것도 어렵지만 낮아지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얻는 것도 힘들지만 포기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하루아침에 하야를 선언한 대통령이 시골 면 서기로 내려간다면 전 세계 매스컴이 떠들어 댈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이 인간이 되시고 인간이 되신 그 하나님이 천대멸시 다 견디시고 결국은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이 바울의 증거인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성장도 순탄치 못했습니다. 아기 예수를 죽이겠다는 헤롯왕의 마수를 피해 애굽으로 피난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출생지를 따라 타국으로 가야했습니다. 그 후 유대땅으로 돌아온 후에도 베들레헴이나 예루살렘에서 자라지 못하고 120km나 떨어진 갈릴리 나사렛에서 성장했습니다. 부모가 가난했던 탓으로 소년시절부터 아버지를 도와 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은 30세가 지나면서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기득권층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목숨 걸고 반대했고 죽이려 들었습니다. 이유는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사칭한다. 자신들과 코드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게 무슨 잘못입니까? 아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왜 죽을 죄입니까?
한마디로 예수 반대파들은 억지를 부린 것입니다. 지금도 억지를 부리는 사람들은 신앙생활이나 교회생활이 순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통증 제공자는 밖에 있는 것입니다. 안에 가까이 있는 것이 더 컸습니다.
어떤 날은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 넘겼습니다. 그 당시 관례는 내가 돈을 지불하고 노예를 사면 그날부터 그 노예는 내 소유가 됩니다. 주인 맘대로 부리고 때리고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인신매매범이 예수를 팔아 넘겼다든지 노예상이 그 짓을 했다면 넘길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가 스승을 팔아넘긴 것입니다. 그야말로 천륜과 인륜을 다 깬 것입니다.
늘 함께 먹고 마시고 다니던 사람이 예수를 팔아 넘겼습니다. 바로 그 점이 상처가 되는 것입니다. 불교도나 회교도는 예수를 반대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팔아 장사를 하고 돈을 벌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 주를 위해 일한다는 사람들, 자신을 제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예수 팔아 돈벌고, 부자 되고, 유명해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매주 월요일마다 국민일보에 칼럼을 쓰고 있습니다. 지난 3월 14일자 칼럼 제목은 “별이 되고 싶은 사람들” 이었습니다.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헐리우드에 가면 명성을 날리다 세상 떠난 스타들의 이름을 동판에 새겨 인도에 깔아 놓은 것을 보게 된다. 본래 별이란 구만리 창공에 떠 밤하늘을 밝힐 때 존재 가치가 드러난다. 그런데 땅바닥에 떨어져 밟고 다니는 별이라면 의미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하늘에 둥둥 떠 있는 별보다 땅에 떨어진 별이 더 높은 가치를 지닌다는 숨은 뜻을 전한다. 동방박사를 인도하던 별이 베들레헴에 이르자 하늘에 멎었다. 이유는 진짜 별이 땅에 있는데 가짜 별이 설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날 갑자기 별이 나타나 설쳐대면 진짜 별빛은 가리운다. 내가 크려면 예수를 작에 해야 하고 내가 스타가 되려면 예수 조명을 어둡게 해야 한다. 내가 박수갈채를 받으려면 대중의 시선이 내게로 꽂히게 해야 하고 내가 부자가 되려면 예수를 팔아야 한다. 해가 떠오르면 소리도 없이 사라지는 별들의 행진을 바라보자. 오직 예수만 스타일뿐...”
베드로가 준 상처도 컸습니다.
평소 예수님의 수행측근이었고 맨 먼저 제자가 된 사람이 베드로였습니다. 그는 늘 예수님 곁을 지키며 기회 있을 때마다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곤 했습니다. “저는 절대로 어떤 경우에도 주님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옥에도 함께 가고 죽는데도 함께 갈 겁니다. 다른 사람이 다 주를 버려도 저는 결코 버리지 않을 겁니다. 저는 주를 위해 목숨을 내놓겠습니다.”라고.
대단한 호기였고 장담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체포되시던 날 밤 그의 모든 호기와 장담은 썩은 나무토막처럼 무너졌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시던 날 밤은 유난히 추웠습니다. 법정 뜰에 모인 사람들은 여기저기 모닥불을 펴놓고 예수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그 틈새에 낀 것입니다.
베드로도 모닥불에 추위를 녹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알아보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남의 집에서 일하는 여종이었습니다.
“나는 당신을 잘 안다. 당신은 저 예수와 함께 있었다. 당신은 예수당이다. 당신의 사투리가 증명한다.” 그러자 베드로는 “나는 예수를 모른다. 참말로 말한다. 나는 예수를 알지도 함께 할일도 없다. 무슨 헛소리냐 나는 저런 사람을 본적도 없다”라며 부인했습니다.
장소는 빌라도 법정뜰,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는 곳, 거기서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했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얘기에 의하면 베드로는 새벽, 닭 우는 소리, 모닥불, 셋이라는 숫자를 보고 들을 때마다 통곡하고 회개했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을 만나신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닥불을 펴놓고 고기 잡으러 갔다 돌아오는 대화를 시작하시며 세 번 물으셨습니다.
베드로에게 모닥불, 새벽, 세 번이라는 콤플렉스, 아픈 추억이 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세 번 물음에 베드로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세 번 대답했습니다.
새로운 출발을 위한 결단식이었던 것입니다.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배신 모두 큰 상처였습니다. 아픔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머리에 가시관, 손과 발에 못, 옆구리 창... 역적모의에 실패했다든지 살인강도 짓을 했다든지 파렴치한 죄를 짓고 십자가에 매달렸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런 잘못도 죄도 없으셨습니다. 히브리서 7:26을 보면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지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9:14을 보면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렸다”고 했고, 9:28을 보면 “죄와 상관이 없다”고 했습니다.
흠도 티도 죄도 없는 그리스도, 십자가에 달려 겪으신 그 고통과 아픔을 어떤 고통에 비길 수가 있겠습니까?
누가복음 23:44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운명하시던 2시간, 해가 빛을 잃고 세시간 동안 온땅이 어두워졌습니다.
성소휘장이 찢어졌고, 바라보던 사람들은 가슴을 치며 슬퍼했고,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도 통곡했습니다. 베드로전서 2:19-24을 보면 예수님의 고난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했던 베드로가 예수님의 고난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너희를 위한 고난이다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다(21-)”
“죄도 궤사도 없으셨는데 고난을 받으셨다(22-)”
“욕을 받으시되 욕하지 않으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않으셨다(23-)”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24-)”는 것이 베드로의 증언인 것입니다.
왜 고난당하셨습니까? 나를 위해 고난 당하셨습니다. 왜 죽으셨습니까? 내 죄를 대신해 죽으셨습니다.
“그때 그 무리들이 예수님 못밖았네 녹슨 세개의 그 못으로
망치소리 내맘을 울리면서 들렸네 그 피로 내죄 씻었네
비웃는 그 무리들 주의 옷 벗긴 후에 주님 몸깊이 찔렀네
귀중한 그 보배피 나를 위해 흘렸네 그 피로 내죄 씻었네
주여 너의 영혼을 받아 주시옵소서 그때 구원을 이루셨네
마지막 피 한방울 나를 위해 흘렸네 그 피로 내죄 씻었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 은혜와 사랑을 보답하며 살아야 합니다. 배신하면 안됩니다.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고난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고난도 마다하면 안됩니다. 주를 위해서라면 손해도, 고난도, 굴욕도 견딥시다. 그래야 영광과 축복이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고난 넘어 영광의 새 아침을 바라보며 고난 넘어 승리의 날을 바라보며 고난의 주님을 따라 갑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