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주연도목사/동성교회

누가복음 23 : 32~49

십자가는 중죄인을 처형하는 사형도구다. 지금까지 인간이 고안해 낸 사형 방법 중 가장 고통스럽고 치욕적인 사형방법이다. 원래 십자가형은 페르시아에서 시작되어 로마시대에 활용하였다. 그러나 로마인에게는 십자가형을 내리지 않고 타민족에게만 적용하였다. 십자가는 치욕과 고통의 대명사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십자가를 바라보거나 생각하기조차 꺼려했다. 유대인들은 십자가를 ‘나무’와 구분하지 않았는데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23)”는 율법과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은 다음 사람들은 십자가를 바라볼 뿐 아니라 십자가를 여러 가지 장식용으로 패용하거나 부착하고 심지어 자랑하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시어 만민의 죄 값을 지불하시고 구원해 주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친히 나무에 달려 저주받은 죄인이 당할 죽음을 대신 당하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벧전 2:24). 그래서 십자가는 더 이상 치욕의 십자가가 아니라 구원의 십자가요 승리의 십자가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를 십자가의 종교라고 말하며 복음은 곧 십자가의 도인 것이다. 로마 총독 빌라도의 사형 언도를 받으신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등에 지고 사형장인 골고다로 오르셨다. 골고다는 ‘해골’이란 뜻으로 사형수의 처형장소로 사용되었던 예루살렘 성문 밖 언덕 이름이다(26­31절). 행악자들만이 거기서 죽임을 당하였기 때문에 누구나 거기서 죽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오늘 본문은 마침내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장면을 소개하고 있다(마 27:33­44, 막 15:22­32). 

예수께서는 다른 두 행악자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셨는데(32, 33절), 이는 만왕의 왕이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오히려 불의한 자들의 손에 의해 행악자와 같이 취급받으신 것으로, 이사야 53:12에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를 성취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들의 죄악을 정죄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자신들이 저지르는 일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엄청난 죄악임을 알지 못하고 행하는 저들의 죄사함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셨다(34절). 그런데 저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저들은 예수님을 비웃었으며 희롱하였다. 즉, 백성들 뿐 아니라 군인들도 예수를 조롱했으며 심지어는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행악자까지 비웃었다. 



이러한 십자가상에서의 조롱은 이미 다윗을 통하여 예시된 것으로(시 22:7­8) 인류가 당할 죄악에 대한 보응을 대신 받으신 것이다. 그리고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후에 그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며 그에게 신 포도주를 마시게 했으나 주님은 거절하셨다. 이는 시편 69:21과 시편 22:18의 예언의 성취이다. 마가복음 15:23에서는 ‘몰약’이라고 했는데 이를 종합하면 몰약을 탄 신 포도주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마취의 효과가 있으므로 고통을 조금이라고 덜게 하려는 사형수에게 주는 관례로써 마지막 호의이다. 그러나 주님은 이것마저도 거절하심으로 죽음의 모든 고통 곧 인류의 죄의 고통을 덜지 않고 다 받아들이셨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구속 사역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 구원하심을 경멸의 의미로 인정하고 예수 십자가상에 유대인의 왕이란 패를 기록했는데, 이것은 불의한 자들의 손에 의해 예수께서 메시아라는 사실이 선포되어 지는 것으로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더 명백하게 말해 주고 있다(35, 38절).

한편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들은 매우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즉, 한 행악자는 다른 무리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조롱하고 비웃음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마지막 구원의 기회를 스스로 저버렸다. 이는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멸망 받을 심령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러나 다른 한 행악자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예수님의 구원을 구함으로써 마지막으로 주어진 구원의 기회를 붙잡고 영생을 얻게 되었다. 이 행악자의 고백은 누가만이 기록한 것으로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고 대속의 죽음을 당하셨다는 가장 명확한 사실을 나타낸다. 여기서 회개하는 행악자는 구원받는 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데 실로 회개와 겸손만이 주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임을 보여 준다.

십자가에 달려 고통과 조롱을 다 받으신 예수님은 구속사역을 성취하시고 운명하시었다. 예수님은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박혀 오후 3시경에 운명하셨다(막 15:25). 결국 예수님은 6시간 동안을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신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 매달려 있을 때 다음과 같은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는 그가 진정 메시아였음을 증거 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시기 직전에 많은 이적이 일어났다. 

첫째, 온 땅에 어두움이 깔렸다(44절). 이것은 공관복음서가 모두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죽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초자연적 표시이다. 실로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요 1:9) 죽으실 때에 온 세상이 어두워진 것은 당연한 것이다.

둘째,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45절).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구속이 완전히 성취되어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장벽이 제거되었음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으나(롬 3:23)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드디어 나아가게 되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하여 구원받게 되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많은 의인이 죽었다. 예컨대 예레미아나 세례 요한이나 바울이나 처형을 당했다. 그러나 그들이 죽었을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지 않았다. 이는 오직 구원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행 4:12, 딤전 2:5). 

셋째, 예수의 사형을 집행한 백부장이 예수를 의인으로 고백했다(47절). 이러한 이방인 백부장의 고백은 예수님의 죽음을 집행하고 목격했던 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무죄로 죽으심을 입증하고(마 27:54), 십자가의 사건이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 그 효능을 발휘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넷째, 모인 무리가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48절). 즉, 무리들은 예수님의 죽음에 동의하였지만 그의 죽음을 목격한 후 양심의 가책을 받은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애통했던 무리들의 모습과 연결할 수 있다(행 2:23­37). 한편 운명하시기 전에 외친 예수님의 고백은(46절) 모든 일생을 하나님께 맡기셨던 순종의 모습을 다시 보여 준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말씀은 모두 일곱마디이다. 그래서 이를 가리켜 소위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 부른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죄인이 받은 형벌이었으며 그것은 우리 인간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신 구속의 길이었다. 이는 죄로 말미암아 원수 된 하나님과 인간과의 화목제물이 되셨다. 그리고 길과 진리 생명이 되시었다. 십자가만이 구원의 길이요, 복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