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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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생명, 빛이신 예수님
-주연도목사/ 동성교회
요한복음 1:1~14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바로 알고 믿어야 한다. 덮어놓고 믿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우리 인간으로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전부 그리고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성령이 계시해 준 한도 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요한복음에 예수님이 “나는 ~이다”(I am)라는 문구가 많이 나온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명시적으로 보여 주신 것으로서 요한은 예수의 진면목을 은유적으로 보여 준 것이다. 예를 들면, 나는 곧 생명의 떡이다(요 6:35, 48),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 8:12, 9: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 14:1) 등등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영적 이해력이 부족한 인간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보여 주시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은유법적 표현을 사용하셨으며 그 중에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 생명, 빛으로 표현하였으니 이제 우리는 그것들이 무엇을 나타낸 것인가를 확실히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믿어야 한다.
1. 말씀이신 예수님요한이 예수님을 말씀으로 표현한 것은 그의 선재성과 영원성을 가진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선명하게 드러낸 것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헬라어 ‘로고스’의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 좋다. ‘로고스’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말’, ‘말씀’, ‘말하기’ 등이다. 당시 ‘로고스’라는 개념이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 생소한 것이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말씀이란 실제로 어떤 일을 행하는 능력으로 이해했다. 구약성경에서 두드러진 내용 가운데 하나가 강력하고도 능력이 충만하고 창조적인 말씀의 개념이다. 천지창조의 과정에서부터 말씀의 위력이 나타나는데(창 1:2, 6, 9, 11), 그 말씀은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온전히 성취하는 능력이었다. 즉,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모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한 것은 창조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 주님의 신성을 강조한 것이다. 헬라인들은 ‘로고스’를 이 세상에 의미를 넣어 주는 이성이요, 세계를 혼돈 대신에 질서로 만드는 원리이며, 세계를 완전한 질서 가운데 진행하게 하고 그 진행을 지속시키는 힘으로 여기었다. 철학자 필로(Philo)는 ‘로고스’를 가리켜 “세계와 하나님, 그리고 출생한 자와 출생하지 않은 자 사이의 매개자이며 하나님 앞에 인간의 영혼을 놓는 사제”라고! 하였다.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였다. 말씀이신 예수님은 창세 이전부터 계신 하나님이시며(빌 2:6) 아버지와 언제나 함께 계셨고, 인격적인 교제를 가지셨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는 독립된 존재이나 하나님과 동질성임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그 안에는 세 위(位)가 계신다. 세 위는 동일 본질에 속하고 예수님은 성자의 위를 갖고 계신 하나님이시다. 제2위의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거하셨다. 이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2. 생명이신 예수님4절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하였다.
여기 ‘생명’으로 번역된 ‘조에’는 육체적 생명에 대해서 뿐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속한 초자연적 생명 곧 ‘영생’을 가리키는 말로서 요한복음에서 36회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는 헬라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추상적인 성격을 지닌 정신이 아니라 구체적 실체를 나타내는 생명이다. 이 생명이 만물을 살게 하였고 이 생명이 죄로 인해 죽은 우리를 살게 한다(요 11:2526). 이것은 죽거나 소멸됨이 없는 영원한 생명을 가리키며 역설적으로는 예수님을 모르거나 배척하고 산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는데 이 생명이 그 아들이신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는 것이다(요일 5:11, 13).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하셨다. 그런고로 예수가 계시지 않는 종교는 생명의 종교가 아니다. 예수가 계시지 않은 사람은 영생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죽은 영혼을 구원하여 영생하도록 이 세상에 오셨다. 오셔서 죄 값을 십자가에 피를 흘! 려 당신의 몸을 주심으로 저를 믿는 자로 영생을 얻게 하셨다.
3. 빛이신 예수님 ‘빛’으로 번역된 ‘포스’는 일반적으로 광명을 뜻하나 구원, 복음 등의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마 4:16, 행 26:18, 엡 5:13).
요한은 로고스 안에 내재한 생명은 예수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생명이며, 또한 죄로 어두워진 세상을 비추는 빛이라고 하였다. ‘어두움’으로 번역한 ‘스코티아’는 이 세상을 나타낸다. 당시에는 선의 세력을 빛으로, 악의 세력을 어두움으로 표현하였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어두움으로 묘사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고 하셨다. 실로 예수님은 빛이시다. 죄악의 어두움을 밝히는 구원의 빛이요, 무지의 어두움을 밝히는 진리의 빛이며, 절망의 어두움을 밝히는 희망의 빛이다. 죄인들이 계속해서 죄를 범하는 것은 어두워서 그것의 실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자신의 어두움을 극복하고 모든 것을 바로 보려면 빛이신 예수를 만나야 한다. 예수님을 믿게 될 때에 비로소 구원의 길이 보이고, 진리의 지식을 가지게 되며 소망이 견고해지게 된다.
바울은 예수 믿기 이전 자신의 하는 일이 의로우며 정당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였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빛 되신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에는 자신이 행한 일들이 얼마나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그 자신이 누구인가를, 그의 심령이 어떤 상태인가를 알게 되었으며, 진리와 생명의 길을 볼 수 있는 눈이 밝아졌다. 세상 사람들이 빛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아니하는 것은 어두움에 있기 때문이다. 태양이 빛나되 눈을 감은 자는 태양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성도인 우리는 빛이신 예수를 알고 또 믿게 된 것이 복중의 복임을 알고 감사해야 한다. 예수를 알지 못했더라면 이 어두움의 죄악 세상에서 이 세상 임금인 마귀가 이끄는 대로 멸망의 길로 갔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주님은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요 12:46)”고 하셨다.
사도 요한이 복음서의 서두에서 예수의 신성을 특별히 강조한 것은 중요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훌륭한 인물이며 위대한 성자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복음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또한 구원을 받을 수도 없다. 예수님은 창조 전부터 계신 하나님이시며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하신 제2위 성자 하나님이시며, 그 안에 영생이 있는 생명의 주시며,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유일하신 구주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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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도목사/ 동성교회
요한복음 1:1~14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바로 알고 믿어야 한다. 덮어놓고 믿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우리 인간으로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전부 그리고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성령이 계시해 준 한도 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요한복음에 예수님이 “나는 ~이다”(I am)라는 문구가 많이 나온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명시적으로 보여 주신 것으로서 요한은 예수의 진면목을 은유적으로 보여 준 것이다. 예를 들면, 나는 곧 생명의 떡이다(요 6:35, 48),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 8:12, 9: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 14:1) 등등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영적 이해력이 부족한 인간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보여 주시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은유법적 표현을 사용하셨으며 그 중에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 생명, 빛으로 표현하였으니 이제 우리는 그것들이 무엇을 나타낸 것인가를 확실히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믿어야 한다.
1. 말씀이신 예수님요한이 예수님을 말씀으로 표현한 것은 그의 선재성과 영원성을 가진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선명하게 드러낸 것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헬라어 ‘로고스’의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 좋다. ‘로고스’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말’, ‘말씀’, ‘말하기’ 등이다. 당시 ‘로고스’라는 개념이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 생소한 것이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말씀이란 실제로 어떤 일을 행하는 능력으로 이해했다. 구약성경에서 두드러진 내용 가운데 하나가 강력하고도 능력이 충만하고 창조적인 말씀의 개념이다. 천지창조의 과정에서부터 말씀의 위력이 나타나는데(창 1:2, 6, 9, 11), 그 말씀은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온전히 성취하는 능력이었다. 즉,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모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한 것은 창조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 주님의 신성을 강조한 것이다. 헬라인들은 ‘로고스’를 이 세상에 의미를 넣어 주는 이성이요, 세계를 혼돈 대신에 질서로 만드는 원리이며, 세계를 완전한 질서 가운데 진행하게 하고 그 진행을 지속시키는 힘으로 여기었다. 철학자 필로(Philo)는 ‘로고스’를 가리켜 “세계와 하나님, 그리고 출생한 자와 출생하지 않은 자 사이의 매개자이며 하나님 앞에 인간의 영혼을 놓는 사제”라고! 하였다.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였다. 말씀이신 예수님은 창세 이전부터 계신 하나님이시며(빌 2:6) 아버지와 언제나 함께 계셨고, 인격적인 교제를 가지셨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는 독립된 존재이나 하나님과 동질성임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그 안에는 세 위(位)가 계신다. 세 위는 동일 본질에 속하고 예수님은 성자의 위를 갖고 계신 하나님이시다. 제2위의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거하셨다. 이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2. 생명이신 예수님4절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하였다.
여기 ‘생명’으로 번역된 ‘조에’는 육체적 생명에 대해서 뿐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속한 초자연적 생명 곧 ‘영생’을 가리키는 말로서 요한복음에서 36회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는 헬라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추상적인 성격을 지닌 정신이 아니라 구체적 실체를 나타내는 생명이다. 이 생명이 만물을 살게 하였고 이 생명이 죄로 인해 죽은 우리를 살게 한다(요 11:2526). 이것은 죽거나 소멸됨이 없는 영원한 생명을 가리키며 역설적으로는 예수님을 모르거나 배척하고 산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는데 이 생명이 그 아들이신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는 것이다(요일 5:11, 13).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하셨다. 그런고로 예수가 계시지 않는 종교는 생명의 종교가 아니다. 예수가 계시지 않은 사람은 영생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죽은 영혼을 구원하여 영생하도록 이 세상에 오셨다. 오셔서 죄 값을 십자가에 피를 흘! 려 당신의 몸을 주심으로 저를 믿는 자로 영생을 얻게 하셨다.
3. 빛이신 예수님 ‘빛’으로 번역된 ‘포스’는 일반적으로 광명을 뜻하나 구원, 복음 등의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마 4:16, 행 26:18, 엡 5:13).
요한은 로고스 안에 내재한 생명은 예수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생명이며, 또한 죄로 어두워진 세상을 비추는 빛이라고 하였다. ‘어두움’으로 번역한 ‘스코티아’는 이 세상을 나타낸다. 당시에는 선의 세력을 빛으로, 악의 세력을 어두움으로 표현하였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어두움으로 묘사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고 하셨다. 실로 예수님은 빛이시다. 죄악의 어두움을 밝히는 구원의 빛이요, 무지의 어두움을 밝히는 진리의 빛이며, 절망의 어두움을 밝히는 희망의 빛이다. 죄인들이 계속해서 죄를 범하는 것은 어두워서 그것의 실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자신의 어두움을 극복하고 모든 것을 바로 보려면 빛이신 예수를 만나야 한다. 예수님을 믿게 될 때에 비로소 구원의 길이 보이고, 진리의 지식을 가지게 되며 소망이 견고해지게 된다.
바울은 예수 믿기 이전 자신의 하는 일이 의로우며 정당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였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빛 되신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에는 자신이 행한 일들이 얼마나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그 자신이 누구인가를, 그의 심령이 어떤 상태인가를 알게 되었으며, 진리와 생명의 길을 볼 수 있는 눈이 밝아졌다. 세상 사람들이 빛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아니하는 것은 어두움에 있기 때문이다. 태양이 빛나되 눈을 감은 자는 태양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성도인 우리는 빛이신 예수를 알고 또 믿게 된 것이 복중의 복임을 알고 감사해야 한다. 예수를 알지 못했더라면 이 어두움의 죄악 세상에서 이 세상 임금인 마귀가 이끄는 대로 멸망의 길로 갔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주님은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요 12:46)”고 하셨다.
사도 요한이 복음서의 서두에서 예수의 신성을 특별히 강조한 것은 중요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훌륭한 인물이며 위대한 성자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복음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또한 구원을 받을 수도 없다. 예수님은 창조 전부터 계신 하나님이시며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하신 제2위 성자 하나님이시며, 그 안에 영생이 있는 생명의 주시며,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유일하신 구주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