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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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616
“우리는 영원히 존재하도록 지어졌습니다.”(전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아브라함 링컨이 “하나님이 사람과 같은 존재를 하루살이로 만들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사람은 영원히 존재하도록 지어졌다. ”라고 말하는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일회용 인생으로 만들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삶이 내 존재의 전부가 아니다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보내고 있는 시간보다 훨씬 긴 시간, 즉 영원한 시간을 이 땅을 떠난 뒤에 살게 될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영원토록 지으셨고,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우리의 심령에 새기셨습니다. 그래서 본문 11절에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에게만 주신 본능이다. 이것은 짐승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것이며,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진시황도, 이집트의 파라오도 영원히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라 영원을 위한 새로운 시작입니다.
물론 우리의 심장은 언젠가 멎을 것입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지구상에서의 시간과는 결별하겠지만, 그것이 우리의 존재의 마지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의 육체를 장막(帳幕)이라고 표현하며, 미래의 몸을 ‘집’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후 5:1에서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죽음 이후의 삶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그 삶은 결코 다양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딱 두 가지의 ‘죽음 이후의 삶 ’을 이야기 합니다. 그것이 바로 천국과 지옥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살았는가?”에 따라서 나눠집니다. 우리가 지구상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신뢰하는 법을 배운다면 우리는 영생을 그분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 용서 그리고 구원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과 떨어져 살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지옥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우리의 믿음의 여부에 따라서 존재하는 곳이 아니라 이미 천국과 지옥은 존재하는데(눅 16:22-23),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영원한 천국을 사모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바울이 고후 5:2에서“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살아야 합니다.
2.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하나님의 선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하나님의 선포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C.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님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고 말하는 사람과 ‘그럼 하나님의 마음대로 하세요.’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문제는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을 선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현명한 사람입니까? 그런데 우리가 지금 이곳에 사는 것이 존재의 끝이 아니고 그 후의 영원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믿고, 지금 우리의 삶이 영생을 위한 준비(準備)과정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지금과는 달라진 모습으로 서있을 것입니다.
① 우리 안에 하나님과의 사귐을 결심하는 바른 결심이 있을 것입니다. ② 영원의 존재를 믿는다면 오늘 여러분을 바른 선택으로 이끌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천국의 삶의 열쇠를 오늘 나의 삶에 숨겨놓으셨기 때문입니다. ③ 우리가 하나님과 점점 가까워지면 질수록 그 외 다른 모든 것은 더 작아 보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중요하게 여기던 문제들이 의미 없고, 사소하며,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원을 바라보는 눈은 우리의 삶의 가치관을 바꿉니다. 시간과 돈을 더 현명하게 쓰게 될 것이고, 명예나, 부, 일의 성취감, 쾌락보다는 인간관계(人間關係)와 인격에 더 큰 비중을 두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다 들고 가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손을 잡고 손을 벌리고 하나님 앞에 가기 때문입니다. 영원의 빛 가운데서 살고 있는 사람은 삶의 가치관이 다릅니다. 시간과 돈을 더 현명하게 쓰게 되고, 세상의 일보다 영원과 관계된 일에 헌신하게 됩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분명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되면 바울이 빌 3:7에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태어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스라엘민족 중에서도 베냐민 지파의 자손이며 히브리인 중에서도 히브리인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바울의 안내자 역할을 했습니다.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율법을 가장 엄격하게 지키는 바리새인이 되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에 너무나 열심이었으므로 교회를 핍박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이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 따르는 것에 있어서 어느 누구도 허점(虛點)을 찾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 때는 이 모든 것이 내게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 모든 것이 아무 쓸모없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 세상 어떤 것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쓰레기처럼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 그런데 지금 우리는 삶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우리가 만약 영원을 사모하고,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알고 살아간다면 지금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하찮은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바울과 같은 깊은 깨달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이 모든 것들을 보잘것없는 것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3. 영원을 바라보지 못하는 삶은 불쌍한 삶입니다.
영원을 바라보지 못하는 삶은 파괴적인 삶이다. 만약 영원이 없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에게 무엇을 가르치겠습니까?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지금 마음껏 즐겨라....’어차피 죽음으로 끝이라면, 남을 생각할 필요가 무엇입니까? 내 눈에 좋다면 하면 되는 것이고, 또한 그것에 대한 결과에 대해서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끝이기 때문입니다. 영원을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은 완벽한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러한 착각은 그에게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솔로몬이 전 6:9에서 "눈으로 보는 것이 심령의 공상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라고 말씀하고 있고, 전 11:9에서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마음에 원하는 대로, 눈이 보는 대로 행한다면 그 마지막에는 이 모든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죽음이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때에 엄청난 후회를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4.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만날 영원은 어떤 모습일까요?
죽음은 영생으로의 전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삶에서 영생에 대한 그림을 그려야 하고, 영생과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합니다. 영원토록 산다는 것을 인간의 언어로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솔직히 우리의 머리로는 천국의 위대함과 불가사의함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거문고를 들고 노래하는 삶, 천국은 몇 가지의 이야기로 한정할 수 없는 놀라운 곳입니다. 인간의 언어로 이것을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 2:9에서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마 25:34에서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말씀하고 천국은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천국의 신비를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영원의 모습을 아주 조금이나마 보여주십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이에 대해서 C.S. 루이스는 「나니아 연대기」 라는 책에서 영생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것이 이야기의 끝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그것은 진정한 이야기의 시작일 뿐이었다. 이 땅에서 그들의 삶은 모두 표지와 제목에 불과했다. 이제 드디어 그들은 위대한 이야기의 제 1장을 시작한다. 이 땅에서는 그 이야기를 읽은 자가 아무도 없다. 이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고 새로 쓰여지는 장이 그 전(前) 장보다 항상 나을 것이다. ”
사람들이 영생에 대해 생각하는 유일한 시간은 장례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가급적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죽음을 준비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가장 어리석은 자의 삶입니다. 그래서 전 7:2에서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어떤 번역서를 보면 “죽음을 부인하거나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사는 것은 건강하지 못한 삶의 모습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영원을 정말 사모합니까? 정말 영원에 대해서 기대하고 있습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내게 영원히 존재하도록 지어졌다는 사실을 믿고서 사는 인생이라면 우리가 누릴 영생 곧 영원에 대해서 기대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영원을 바라보며 살 것입니다. 영원을 바라보며 오늘의 고난과 역경들을 잘 인내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이는 마치 아기가 어머니의 자궁에서 보낸 10개월의 시간이 그 자체로 끝이 아니고, 또 다른 삶을 위한 준비였던 것처럼 현재의 삶은 영생을 위한 준비과정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집이 아닙니다.(히 1314) 우리는 하늘에 있는 집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을 영원과 비교한다면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눈 깜짝할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에 따른 결과들은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잘해야 합니다.
(적용(適用)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영원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과 같이 그저 지금 마음껏 즐기는 것이 최상의 삶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내 눈에 좋다고 즐기면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영원을 바라볼 때에 해야 그만두어야 할 일은 무엇이고, 새롭게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대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매튜 헨리(Matthew Henry)가 “우리의 마지막 날을 준비하는 것이 매일의 일이 되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오늘 하루를 살아야 합니다.
물론 여러분 가운데에는 인생이 피곤하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세상살이가 골치가 아프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할 일은 많고 시간은 없고, 항상 시간에 쫓기는 것 같고, 또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세상일로 인하여 지치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허무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영원이 존재하도록 지음을 받은 존재(存在)”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쓸 데 없는 일에 목숨 걸지 말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소한 일에 목숨 걸지 말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무엇이 삶의 우선순위인지 깨닫고 오늘 내가 정말 하지 말아야 할 것과 꼭 해야 할 것을 잘 정리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복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깨닫게 위해 우리는 먼저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벧전 1:23-25) 우리는 영원한 존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요일 2:17) 영원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히 1:10-12) 이런 마음 자세를 가지고 오늘도 삶의 우선순위를 정하여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가시되, 오늘의 하루가 마지막 날을 준비하고, 또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하루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아멘)
☞ 삶으로 떠나는 질문 :
1. 모든 것이 끝났다는 절망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무엇 때문 이었습니까?
2.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렇게 생각이드십니까?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3. 여러분은 영원을 위해 지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만두어야할 일은 무엇이고 오늘부터 새롭게 시작해야할 일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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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아브라함 링컨이 “하나님이 사람과 같은 존재를 하루살이로 만들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사람은 영원히 존재하도록 지어졌다. ”라고 말하는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일회용 인생으로 만들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삶이 내 존재의 전부가 아니다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보내고 있는 시간보다 훨씬 긴 시간, 즉 영원한 시간을 이 땅을 떠난 뒤에 살게 될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영원토록 지으셨고,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우리의 심령에 새기셨습니다. 그래서 본문 11절에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에게만 주신 본능이다. 이것은 짐승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것이며,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진시황도, 이집트의 파라오도 영원히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라 영원을 위한 새로운 시작입니다.
물론 우리의 심장은 언젠가 멎을 것입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지구상에서의 시간과는 결별하겠지만, 그것이 우리의 존재의 마지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의 육체를 장막(帳幕)이라고 표현하며, 미래의 몸을 ‘집’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후 5:1에서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죽음 이후의 삶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그 삶은 결코 다양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딱 두 가지의 ‘죽음 이후의 삶 ’을 이야기 합니다. 그것이 바로 천국과 지옥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살았는가?”에 따라서 나눠집니다. 우리가 지구상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신뢰하는 법을 배운다면 우리는 영생을 그분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 용서 그리고 구원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과 떨어져 살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지옥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우리의 믿음의 여부에 따라서 존재하는 곳이 아니라 이미 천국과 지옥은 존재하는데(눅 16:22-23),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영원한 천국을 사모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바울이 고후 5:2에서“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살아야 합니다.
2.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하나님의 선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하나님의 선포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C.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님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고 말하는 사람과 ‘그럼 하나님의 마음대로 하세요.’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문제는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을 선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현명한 사람입니까? 그런데 우리가 지금 이곳에 사는 것이 존재의 끝이 아니고 그 후의 영원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믿고, 지금 우리의 삶이 영생을 위한 준비(準備)과정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지금과는 달라진 모습으로 서있을 것입니다.
① 우리 안에 하나님과의 사귐을 결심하는 바른 결심이 있을 것입니다. ② 영원의 존재를 믿는다면 오늘 여러분을 바른 선택으로 이끌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천국의 삶의 열쇠를 오늘 나의 삶에 숨겨놓으셨기 때문입니다. ③ 우리가 하나님과 점점 가까워지면 질수록 그 외 다른 모든 것은 더 작아 보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중요하게 여기던 문제들이 의미 없고, 사소하며,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원을 바라보는 눈은 우리의 삶의 가치관을 바꿉니다. 시간과 돈을 더 현명하게 쓰게 될 것이고, 명예나, 부, 일의 성취감, 쾌락보다는 인간관계(人間關係)와 인격에 더 큰 비중을 두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다 들고 가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손을 잡고 손을 벌리고 하나님 앞에 가기 때문입니다. 영원의 빛 가운데서 살고 있는 사람은 삶의 가치관이 다릅니다. 시간과 돈을 더 현명하게 쓰게 되고, 세상의 일보다 영원과 관계된 일에 헌신하게 됩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분명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되면 바울이 빌 3:7에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태어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스라엘민족 중에서도 베냐민 지파의 자손이며 히브리인 중에서도 히브리인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바울의 안내자 역할을 했습니다.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율법을 가장 엄격하게 지키는 바리새인이 되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에 너무나 열심이었으므로 교회를 핍박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이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 따르는 것에 있어서 어느 누구도 허점(虛點)을 찾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 때는 이 모든 것이 내게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 모든 것이 아무 쓸모없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 세상 어떤 것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쓰레기처럼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 그런데 지금 우리는 삶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우리가 만약 영원을 사모하고,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알고 살아간다면 지금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하찮은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바울과 같은 깊은 깨달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이 모든 것들을 보잘것없는 것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3. 영원을 바라보지 못하는 삶은 불쌍한 삶입니다.
영원을 바라보지 못하는 삶은 파괴적인 삶이다. 만약 영원이 없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에게 무엇을 가르치겠습니까?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지금 마음껏 즐겨라....’어차피 죽음으로 끝이라면, 남을 생각할 필요가 무엇입니까? 내 눈에 좋다면 하면 되는 것이고, 또한 그것에 대한 결과에 대해서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끝이기 때문입니다. 영원을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은 완벽한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러한 착각은 그에게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솔로몬이 전 6:9에서 "눈으로 보는 것이 심령의 공상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라고 말씀하고 있고, 전 11:9에서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마음에 원하는 대로, 눈이 보는 대로 행한다면 그 마지막에는 이 모든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죽음이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때에 엄청난 후회를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4.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만날 영원은 어떤 모습일까요?
죽음은 영생으로의 전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삶에서 영생에 대한 그림을 그려야 하고, 영생과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합니다. 영원토록 산다는 것을 인간의 언어로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솔직히 우리의 머리로는 천국의 위대함과 불가사의함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거문고를 들고 노래하는 삶, 천국은 몇 가지의 이야기로 한정할 수 없는 놀라운 곳입니다. 인간의 언어로 이것을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 2:9에서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마 25:34에서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말씀하고 천국은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천국의 신비를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영원의 모습을 아주 조금이나마 보여주십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이에 대해서 C.S. 루이스는 「나니아 연대기」 라는 책에서 영생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것이 이야기의 끝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그것은 진정한 이야기의 시작일 뿐이었다. 이 땅에서 그들의 삶은 모두 표지와 제목에 불과했다. 이제 드디어 그들은 위대한 이야기의 제 1장을 시작한다. 이 땅에서는 그 이야기를 읽은 자가 아무도 없다. 이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고 새로 쓰여지는 장이 그 전(前) 장보다 항상 나을 것이다. ”
사람들이 영생에 대해 생각하는 유일한 시간은 장례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가급적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죽음을 준비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가장 어리석은 자의 삶입니다. 그래서 전 7:2에서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어떤 번역서를 보면 “죽음을 부인하거나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사는 것은 건강하지 못한 삶의 모습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영원을 정말 사모합니까? 정말 영원에 대해서 기대하고 있습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내게 영원히 존재하도록 지어졌다는 사실을 믿고서 사는 인생이라면 우리가 누릴 영생 곧 영원에 대해서 기대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영원을 바라보며 살 것입니다. 영원을 바라보며 오늘의 고난과 역경들을 잘 인내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이는 마치 아기가 어머니의 자궁에서 보낸 10개월의 시간이 그 자체로 끝이 아니고, 또 다른 삶을 위한 준비였던 것처럼 현재의 삶은 영생을 위한 준비과정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집이 아닙니다.(히 1314) 우리는 하늘에 있는 집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을 영원과 비교한다면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눈 깜짝할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에 따른 결과들은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잘해야 합니다.
(적용(適用)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영원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과 같이 그저 지금 마음껏 즐기는 것이 최상의 삶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내 눈에 좋다고 즐기면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영원을 바라볼 때에 해야 그만두어야 할 일은 무엇이고, 새롭게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대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매튜 헨리(Matthew Henry)가 “우리의 마지막 날을 준비하는 것이 매일의 일이 되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오늘 하루를 살아야 합니다.
물론 여러분 가운데에는 인생이 피곤하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세상살이가 골치가 아프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할 일은 많고 시간은 없고, 항상 시간에 쫓기는 것 같고, 또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세상일로 인하여 지치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허무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영원이 존재하도록 지음을 받은 존재(存在)”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쓸 데 없는 일에 목숨 걸지 말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소한 일에 목숨 걸지 말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무엇이 삶의 우선순위인지 깨닫고 오늘 내가 정말 하지 말아야 할 것과 꼭 해야 할 것을 잘 정리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복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깨닫게 위해 우리는 먼저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벧전 1:23-25) 우리는 영원한 존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요일 2:17) 영원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히 1:10-12) 이런 마음 자세를 가지고 오늘도 삶의 우선순위를 정하여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가시되, 오늘의 하루가 마지막 날을 준비하고, 또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하루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아멘)
☞ 삶으로 떠나는 질문 :
1. 모든 것이 끝났다는 절망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무엇 때문 이었습니까?
2.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렇게 생각이드십니까?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3. 여러분은 영원을 위해 지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만두어야할 일은 무엇이고 오늘부터 새롭게 시작해야할 일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