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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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의 절망과 회복”(왕상 19:1-8)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영적 침체에 빠져 절망하는 엘리야가 하나님의 위로와 도우심으로 회복되어 다시금 자기 의 자리로 돌아가는 엘리야의 모습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문을 통하여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 다. 그 첫 번째는 믿음이 좋은 사람도 얼마든지 영적 침체와 좌절의 늪에 빠지고, 영적 슬럼프인 권태감에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 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러한 영적 침체와 좌절감, 영적 슬럼프인 권태감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의 위로와 도우심을 통하여 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문의 말씀은 급격한 생활의 변화 속에서 적용하지 못한 영적 침체에 빠진 성도님에게 도전 이 되는 말씀입니다.
전문의에 의하면 만병의 근원이 [스트레스]라고 합니다. 건강을 지키려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말처 럼 쉽지 않습니다. 아마도 여러분 중에서도 일주일 내내 스트레스를 받다가 교회에 올라오신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 한 모습은 여러분의 모습만은 아닙니다. 요즘 종합병원에 가면 “화병 클리닉”이라는 과가 있는데, 여기에 참으로 사람들이 몰려들 고 있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고 주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삶의 환경이나 정황이 어려워질 때 침체 를 경험하기도 하며, 우울증(憂鬱症)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집안에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사업이 어려워질 때, 직장생 활이 불안할 때, 자신의 삶의 길이 불투명하고 불안해 보일 때,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또는 영적으로 침체의 늪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 고 방황하며, 좌절해 버리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런데 참으로 견딜 수 없는 것은 소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산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즐 겁게 하지 못하고 무엇인가 얽매이는 가운데 생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감사와 기쁨으로 드려져야 할 예배가 그렇지 못할 때가 많 이 있습니다. 더욱이 심각한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감당하다가 실족할 때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이미 말 씀드린 바와 같이 엘리야 선지자와 같은 믿음의 거인들도 종종 영적 침체와 좌절의 늪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권태에 빠지면 참 으로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권태(倦怠)보다는 차라리 죽음 을 달라”고 말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독백은 오늘날 우리의 심정을 잘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권태(倦怠)가 무엇입니까? 권태(倦怠)란 삶에 대해서 실증을 느껴 게을러지는 것 혹은 삶의 무력감을 느끼 는 것, 삶의 회의를 느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권태에 빠지면 만사(萬事)가 귀찮아지고 의욕을 상실하게 됩니다. 역사 이 래로 오늘날처럼 다양한 불상사가 이 사회의 전반에 걸쳐 일어나고 있는 시대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자살과 마약복용, 성의 문란은 이 제 이 사회의 양념이 된 느낌입니다. 사회를 흔들어 놓는 이런 모든 불상사들은 따지고 보면 삶에 대한 권태에 비롯되는 것들이 많습 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한번 권태에 빠지게 되면 부흥하는 사업이란 없으며 가정의 행복과 자신의 진로에 대한 승리 역시 기약 할 수 없습니다. 영적 침체에 빠지면 싶게 실증을 느껴 게을러지고, 삶의 무력감을 사로잡혀 회의적인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러기 에 사람이 영적 침체에 빠지면 만사가 귀찮아지고 의욕을 상실하게 됩니다. 사람이 한번 침에 빠지게 되면 위험합니다.
이것은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에 개동감이 없고 권태감을 느끼고, 만족함이 없이 그냥 습관적으로 신앙생활을 하 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면 그 사람은 물론이고 그 사람이 속한 교회 역시도 생산적인 활동을 할 수 없습니다. 영적 침체에 빠지 면 신앙생활에 생동감이나 만족함이 없이 그냥 습관적으로 예배를 드린다면 그 사람은 물론이고 그 사람이 속한 교회 역시도 생산적 인 활동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엘리야 선지자가 바로 이러한 영적 좌절감에 빠진 것입니다.
엘리야는 어떤 사람입니까? 엘리야는 구약의 모든 선지자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북이스라엘을 아합 왕이 치리 하던 때 (B.C 850년경) 활동했던 선지자인데 엘리아는 대단한 능력을 소유한 하나님의 사자였습니다. 마른하늘에서 불덩어리 가 떨어지게 하고 3년 반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게 하고 또한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한 실로 하늘 보좌를 움직이기까 지 한 그런 신비에 쌓인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본문을 보면 그런 능력을 소유했던 엘리아도 좌절하고 낙심했던 때가 있었다는 사실 입니다. 신앙 생활하다보면 늘 신나고 즐겁고 좋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좌절하고 낙심하고 지쳐 용기조차 없는 무기력 한 때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영혼이 낙심되고 좌절 된 때가 없었습니까? 낙심되고 좌절감을 느낀 때가 있 었다면 언제였었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엘리야가 바로 그런 좌절과 한계, 자신의 무기력함을 느끼고 완전히 넉다운 되는 것 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엘리야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엘리야도 믿음이 약해질 때가 있었 고, 용기를 잃어버릴 때도 있었으며, 절망과 불안에 빠져 헤어나지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그럴 수밖에 없었었던 것은 왕 후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기로 작정을 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2절을 보면 "내가 내일 이 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같게 하리 라. 아 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임이 마땅하니라"고 했습니다. 이세벨의 말은 한마디로 "내가 만일 하루 안에 너를 죽이지 아니 하면 나는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3년간을 두려움 을 모르고, 하나님의 크신 역사 를 이루었지만 이세벨로 인하여 생명의 위협을 느낀 엘리야는 광야로 도망가서 깊은 좌절과 절망에 빠진 채 로뎀나무 아래 앉아 죽기 를 기도했습니다. 본문 4절에 보니까?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 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엘리야가 맛 본 삶의 권태를 너무나 소상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선지자입니다. 능력자입니다. 위대 한 사역의 주인공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러한 엘리야가 권태(倦怠)에 빠졌다는 것은 사람은 신분과 성별과 지위 의 고하를 막론하고 권태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 야 어떻게 영적 절망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는지 그 원인과 어떻게 그 절망감을 회복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 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 엘리야가 왜 절망감에 빠졌습니까?(원인)
① 허탈감을 빠질 때에 절망합니다.
사람은 큰일을 한 후에는 반드시 허탈감에 빠지게 됩니다. 약 517에 보면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 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전능자가 아니었습니다. 홀로 있으면 외로움을 느끼고 굶주릴 때 배고픔을 느끼는 평범한 인간이었습니다. 그 는 갈멜산상의 큰 기적 이후,허탈감에 사로잡히게 되어 이렇게 외칩니다. “하나님, 나는 할 만큼 했고, 이제는 사는 것이 싫어졌습 니다. 죽고 싶습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라는 고백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허탈감에 사로잡힐 때가 가 장 약할 때입니다. 바로 이 때 사람들은 절망감에 빠지게 됩니다.
② 이율배반적인 상황에 빠질 때에 절망합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상의 역사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을 버리고 참 하나님을 찾게 해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의 비 를 내려 삼년 반 동안 가뭄에 시달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원한 생수를 공급해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죽이려 한 이 세벨의 행패는 적반하장(賊反荷杖)이었고, 배은망덕(背恩忘德)이었습니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상황에 부딪힌 엘리야는 삶의 의욕을 잃어 버리고 절망감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③ 생활 속에서 무엇인가에 쫓기며 산다고 느낄 때에 절망합니다.(3절)
본문 3절을 보면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엘리야는 이세벨에게 쫓겼습니다. 이 렇듯 엘리야는 이세벨의 군사에게 쫓기면서 심한 공포감을 느껴야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의 주변에는 쫓기듯 살아가 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니 우리 자신이 바로 그런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가난(家難)에 쫓기고, 질고(疾苦)에 쫓기고, 어려 운 현실과 바쁜 시간에 쫓기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이러한 사람들은 항상 마음속에 불안이 있습니다. 그런 불안감이 바로 영 적 좌절감에 바뀌게 됩니다.
예화 / 어떤 사람이 기차의 냉동 칸을 기웃거리다가 문이 닫히는 바람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렇게든 문을 열려고 했으 나 허사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은 것은 불가능 일이다. 나는 이제 죽었다”고 낙심한 후 털썩 주저앉아 벽에 자기의 생각 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나의 몸이 점점 차가워지기 시작한다. 나는 견디기 힘들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 이제는 죽음의 그림자 가 나를 덮기 시작했다. 이 글이 나의 마지막 글이 될 것이다.” 사람들이 그를 발견했을 때 그 사람은 이미 죽어있었습니다. 그런 데 놀라운 사실은 그 냉동차는 한달 가까이 작동해 본 적이 없었고 그 안에는 사람이 살아남기에 충분한 산소와 온도가 있었다는 것입 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죽은 것은 배가 고파서가 아니고, 질식해서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공포와 불안에서 오는 권태 와 싸우다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마귀에게 잠시 [슬립 다운]은 당하지라도 결코 [넉 다운]은 당하지 않는다 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전 15:57에서 사도 바울이 말 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사는 것처럼 보여 도 궁극적으로 사도 바울처럼 승리한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딤후 47,8에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 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 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 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이와 같 은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④ 현실(現實)상황이 역전될 때입니다.
본문 3절을 보면 “저가 이 형편을 보고”라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하늘의 불을 내리고 비를 오게 하므로서 나 라와 민족을 위해 일한 자신을 오히려 해하려는 현실상황에 부딪혔습니다. 칭찬과 사랑을 받아도 부족한데 도리어 자신을 죽이려 하 는 이 무서운 상황에 부딪힌 엘리야는 화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 좌절감과 권태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⑤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에 절망합니다.(4절)
우리는 본문 4절에서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나이다"라 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지금 자신을 자기 열조와 비교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자기 열조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한마디 로 말하면 자신은 못난 놈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보잘 것 없고 못난 놈이기에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가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사람들이 침체에 빠지며 절망합니까?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내 가 누구와 같으면 좋았을 것을, 내가 누구와 같으면 행복할 텐데. 나는 왜 다른 사람과 같지 않을까? 나는 왜 이렇게 못났을까?" 하는 자학에 빠지게 되고, 그것이 우리를 정신적, 영적 침체의 늪에 빠뜨리게 됩니다.
성경은 이러한 행동은 지혜롭지 못하고, 자기에게 해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 서 10:12절을 보면 "우리가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저희가 자기로 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에서 하 나님께서 인생을 평가하시는 기준이 상대평가에 아니고 절대 평가이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평가 하시지 않으시고,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은사를 가지고 얼마나 장사를 잘했는가를 보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살아가면 우리도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침체의 늪에 빠질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 하지 말고, 하나님이 나를 만들어 놓으신 그 모습 그대로 나를 사용하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이 믿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 니다. 우리는 비교의식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⑥ 일한만큼 결과가 없다는 생각들 때에 절망합니다(10절 상).
오늘 본문 10절 상반 절을 보면 "내가 만군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 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엘리야는 일한 것에 대한 결과가 없다 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엘리야 자신이 열심히 하나님을 위하여 일을 했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전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 지 않고 있으며, 내가 노력을 많이 했지만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과거와 같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즉 엘리야 는 자기가 수고한 만큼 결과가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과에 집착하는 것은 결국 바람직한 성도의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우 리는 모든 결과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 하는 일에 열매가 있을 때 사람들은 그 일에 대한 보람과 긍지와 자부 심을 갖게 됩니다. 일의 결과가 좋아야 그 일을 계속하고 싶은 욕망도 갖습니다. 그러나 일은 열심히 했는데 결과가 좋지 못 할 때, 또는 열심히 노력해서 일했는데도 열매가 없을 때 실망하고 좌절하고 침체에 빠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우리의 열심이 나 노력만으로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고 힘써 일하는 것이며, 일의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너의 행사 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했습니다.(잠 16:3) 엘리야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 을 위하여 열심과 특심이 되도록 일을 했는데도 열매가 없고, 결과가 없자 침체의 늪에 빠진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도 우리의 열심이나 노력으로 모든 것이 다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더 겸손히 기도하고 하나님 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 6:7-10에서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 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 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 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 는 것입니다.
⑦ 영적 고독을 느낄 때에 절망합니다.(10,14절)
왕상 18:10과 19:10,14절의 말씀을 보면 엘리야는 세 번씩이나 “나만 홀로 남았습니 다”라고 독백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참고 왕상 18:22). 엘리야는 언제나 혼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릿 시냇 가에서도, 갈멜 산상에서도, 광야의 로뎀나무 아래에서도, 호렙산 동굴 속에서도 혼자였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입니 다. 그러기에 자기 자신이 혼자라고 생각하거나 혼자일 때에 정말로 감당할 수 없는 깊은 좌절감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 한 엘리야의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 7천명을 남겨 두셨는데도 엘리야는 자신만 살아있는 것으로 생각하 고, "하나님 나 혼자 남아있는데 홀로 남은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으며 또 그나마도 저들이 내 생명을 찾고 있습니다"라 고 한 것입니다. 영적으로 무지하면 고독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침체에 빠지는 이유는 자기는 혼자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누구도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 고, 함께 해 주는 사람이 없고,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자기를 이해해주는 사람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살심리학 은 사람이 아무도 자기를 알아주고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을 때 자살을 하려 한다는 것이며, 자기를 이해해 주고, 알아주는 사람 한 사람만 있어도 자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왜 로뎀나무 아래 앉아 죽기를 자처하고 있습니까? 자기 혼자라는 생각 때문입니 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결코 혼자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마 28:28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심을 알아 야 합니다. 비록 살인죄를 범했던 가인이었지만 그의 가는 길에도 함께 하셨고, 야곱이 얍복강에서 혼자 있을 때에 하나님은 그와 함 께 하셨고 헤롯의 감옥에 갇힌 베드로와 옆에는 하나님께서 보낸 천사가 함께 있었습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남편이 없어 도 독감에 사로 잡혔습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임마누엘 의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사망의 음침 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 동행 하고 계신 분이심을 믿기 바랍니다.(시편 23편)
이러한 측면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 포로가 되어서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 니다. 사 41:10에서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 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 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한 사 43:1-3에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 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 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 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도 요 14:1,18,27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내가 너희를 고아 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 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 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 엘리야가 절망에 빠진 이후에 어떤 현상이 나타났습니까?
① 자살충동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본문 4절에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란 바로 엘리야가 자살 충동을 느끼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 다. 1961년 7월 2일은 “노인과 바다”를 쓴 미국의 유명한 문필가 「어네스트 헤밍 웨이」가 자살한 날입니다. 그는 자기를 위해 특별히 은도금하여 제조한 사냥총의 총구를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이런 그 의 자살에 대해 많은 이론들이 뒤따르고 있으나 그의 자살은 권태(倦怠)로부터 해방되려는 몸부림고도 볼 수 있습니다.
② 무력감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갈멜산 상에서 불을 내리고 450명의 바알의 선지자들을 기손 강가에서 죽였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 가 이세벨을 피하여 광야로 도망하게 된 것은 엘리야에게 큰 무력감을 주는 현실이었습니다. 무력감에 빠진 사람은 자포자기합니다. 성 경에는 잠의 사람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성격은 서로 다릅니다. 풍랑 중에 잠을 잔 요나의 잠이 피곤의 잠이었다면 헤롯의 감옥 에서 잔 베드로의 잠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잔 신뢰의 잠이었고, 로뎀나무 아래에서 잔 엘리야의 잠은 ‘될대로 되라’는 식 의 자포자기(自暴自棄)의 잠이었습니다.
③ 열등의식(劣等意識)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본문 4절을 보면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함이니다”라고 말씀은 엘리야가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 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위대한 선지가 엘리야의 열등의식이 보며 우리는 오늘날 인간은 누구나 이런 열등의식(劣等意 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증후군을 가리켜 “엘리야 컴플레스”라고 말합니다.
3. 그렇다면 엘리야가 절망감을 어떻게 회복하였습니까?
우리가 영적 좌절감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를 초청하시는 하나님을 앞에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움 과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끊임없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시 고 있습니다.(마 11:28)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밀물처럼 밀려오는 권태를 이겨보려고 쾌락(快 樂)을 탐닉합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러한 생활태도는 더욱 큰 권태를 가져올 뿐 권태를 해소하는 방법은 되지 못합니다. 엘 리야가 깊은 영적 좌절감에서 일어 설 수 있었던 것은 엘리야를 찾아오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때문입니다. 좌절감은 마귀가 주는 치명 적인 병입니다. 그래서 존 칼빈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귀의 입에 재갈 먹인 고삐를 붙잡고 계신다”라고 말씀하 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영적으로 좌절감에 빠질 때에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영적으로 지치면 그 무엇으로도 위안이 되지 않습니 다. 지금 엘리야가 그렇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 바알의 추종자들을 모조리 처리했건만 이스라엘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인생 문제는 그 누구의 위로로도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뵈옵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적 좌절감은 하나님만이 해결하시는 병입니다. 본문 말씀은 로뎀나무 아래 쓰러져 죽기를 구하던 엘리야를 찾아 온 천사를 여호와의 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천사는 누구입니까? 이는 구약시대에 역사하였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 다. 그러면 로뎀나무 아래의 엘리야를 찾아오신 하나님은 엘리야를 어떻게 고쳐 주셨습니까?
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쉼을 얻어야 합니다(5,7절).
본문 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로뎀나무 아래 앉아 죽기를 구하던 엘리야가 피곤에 지쳐 잠들자 그때에 천 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일어나서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엘리야가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더니 머리맡에 숱 불에 구운 떡과 한 병 의 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워 잤습니다. 또한 본문 7절에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천사 가 두 번째 와서 어루만지며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했습니다. 엘리야가 영적 좌절감에서 회복되는 첫 번 째 요소는 쉼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몇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첫째는 영적 쉼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문을 통하여 두 번씩이나 “이르되 일어나 서 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찾아오는 삶의 권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치유 받게 됨을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여기 에서 중요한 점은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는 말씀이 두 번씩이나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5,7절)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 좌절 감을 이기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해서 듣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어 나서 밥 먹듯이 먹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한두 번의 말씀으로 영적 좌절감을 치유 받으려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생명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적으로 반복해서 듣다보면 모든 권태는 사라지고 새로운 삶의 의욕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영적인 쉼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산 떡을 먹을 때에 얻을 수 있습니다.(6절)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먹고 마실 것을 주셨습니다. 엘리야가 먹었던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의 물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의 선물이었습니다. 이는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시며 생명수의 공급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접촉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 6:35, 41,4:14) 생명의 만나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그분은 영접해야 합 니다.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분과 동행해야 합니다.
셋째는 하나님께서 어루만져 주실 때에 영적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의 “어루만지지다”라는 말씀은 “함께 눕다, 결합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엘리야를 하나님의 품에 안으시고 도닥거리며 위로해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 좌걸감에게는 하나님의 위로가 최고의 약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육신적으로,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피곤할 때 영적 좌절감에 빠져들어가게 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안식 과 쉼을 주셔서 침체에 바진 사람들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 11:28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 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오늘도 영적 좌절감에 빠져 지쳐 있는 인생들을 부르시고 있습니 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 11:29-30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 다. 마 11:29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 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물론 주님에 나올 때에 영적 쉼을 얻 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께 나온다고 무조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 곧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질 때에 진정 한 쉼을 얻을 수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②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12절)
본문 1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영적 좌절감에 빠질 때에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본 문 11절에서 엘리야에게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서 있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 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가 운데 여호와가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가 계 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시더니 불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하셨습니 다. 이 소리를 듣고 엘리야가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웠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바람과 지진과 물을 보여 주셨지만 그 어느 것으로도 주님은 엘리야에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엘리야 는 주님의 세미한 음성 속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바람이 나 지진이나 불과 같은 크고 극적인 것들을 통하 여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세미한 음성으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오늘 우리를 침체의 늪과 좌절에서 회복시켜 주시는 것 은 하나님의 음성이며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마 4:4에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 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히 4:12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 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 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렘 23:29)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 다 (시 119:9)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 서 (시 119:10)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 다 (시 119:11)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딤후 3:16,17절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 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 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③ 우리의 좌절을 하나님께 내어놓아야 합니다.(14절)
본문 14절의 말씀처럼 엘리야는 자기가 왜 좌절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해서 하나님께 솔직하게 고백했습니 다. 엘리야는 하나님이 주신 음식을 먹고 힘을 얻어 40일을 걸어서 호렙산에 도착하여 굴로 들어가서 밤을 지내게 되 었습니다. 아침에 하나님이 그에게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엘리야는 "내가 3년동 안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고 노력을 다 기울였어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오지 않고 여전히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의 선지자 들 을 죽이고 나만 남았는데 나 마저 죽이려해서 내가 이러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자신의 모 습을 그대로 다 쏟아놓았습니다. 엘리야의 불평에 하나님은 전혀 놀라지 않으시고 새로운 사명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할 것은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이 겁쟁이야!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야단을 치지도 않으시 고 그를 정죄하고 무시하지고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영적 좌절에 빠져 있는 엘리야의 모습을 그대로 받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도 엘리야처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상처나 아픔이나 고통을 하나님께 내어놓아야 합니다. 또한 다른 중보 기도자들과 함께 나누 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로 하여금 내어버리도록 하셨습니다. "엘리야야! 너를 좌절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 너 를 근심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침체가운데 있을 때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우리의 침체를, 우 리의 문제를, 우리의 아픔과 성처를 하나님께 내어놓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주님께 나오는 것도 중요하지 만 그 짐을 주님께 내려놓는 것은 더욱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시 37:5-6에서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 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누구라도 엘리야처럼 영적 좌절감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엘리야처럼 영적으로 침체하고 절망에 빠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우리의 좌절이 하나님의 좌절이 아닙니다. 우리의 침체가 하나님의 침체가 아닙니다. 하나님 은 오늘도 우리의 침체의 자리에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쉼을 주시기를 원하시며 우리의 모든 좌절을 하나님께 내어놓으시기를 원하시 며, 세미한 음성으로 우리의 침체와 좌절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중에 삶의 권태에 빠진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하나님을 만난 엘리야 는 40주, 40야를 달려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영적 좌절의 자리에 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일을 향하여 전진할 수 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상징 동물인 캥거루와 타조는 전진만 아는 동물 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고 그리스도인에게 후퇴란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히 10:39에서 “우리는 뒤로 물러 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는 말씀처럼 그리스도인은 오직 전진만 아는 자입니 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로뎀 나무 아래의 엘리야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다시금 은혜를 회복한 것처럼 이 아침에 하나님을 만나 영 적 좌절감을 박차고 일어나 새롭게 다시금 전진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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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영적 침체에 빠져 절망하는 엘리야가 하나님의 위로와 도우심으로 회복되어 다시금 자기 의 자리로 돌아가는 엘리야의 모습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문을 통하여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 다. 그 첫 번째는 믿음이 좋은 사람도 얼마든지 영적 침체와 좌절의 늪에 빠지고, 영적 슬럼프인 권태감에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 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러한 영적 침체와 좌절감, 영적 슬럼프인 권태감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의 위로와 도우심을 통하여 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문의 말씀은 급격한 생활의 변화 속에서 적용하지 못한 영적 침체에 빠진 성도님에게 도전 이 되는 말씀입니다.
전문의에 의하면 만병의 근원이 [스트레스]라고 합니다. 건강을 지키려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말처 럼 쉽지 않습니다. 아마도 여러분 중에서도 일주일 내내 스트레스를 받다가 교회에 올라오신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 한 모습은 여러분의 모습만은 아닙니다. 요즘 종합병원에 가면 “화병 클리닉”이라는 과가 있는데, 여기에 참으로 사람들이 몰려들 고 있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고 주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삶의 환경이나 정황이 어려워질 때 침체 를 경험하기도 하며, 우울증(憂鬱症)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집안에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사업이 어려워질 때, 직장생 활이 불안할 때, 자신의 삶의 길이 불투명하고 불안해 보일 때,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또는 영적으로 침체의 늪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 고 방황하며, 좌절해 버리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런데 참으로 견딜 수 없는 것은 소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산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즐 겁게 하지 못하고 무엇인가 얽매이는 가운데 생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감사와 기쁨으로 드려져야 할 예배가 그렇지 못할 때가 많 이 있습니다. 더욱이 심각한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감당하다가 실족할 때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이미 말 씀드린 바와 같이 엘리야 선지자와 같은 믿음의 거인들도 종종 영적 침체와 좌절의 늪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권태에 빠지면 참 으로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권태(倦怠)보다는 차라리 죽음 을 달라”고 말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독백은 오늘날 우리의 심정을 잘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권태(倦怠)가 무엇입니까? 권태(倦怠)란 삶에 대해서 실증을 느껴 게을러지는 것 혹은 삶의 무력감을 느끼 는 것, 삶의 회의를 느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권태에 빠지면 만사(萬事)가 귀찮아지고 의욕을 상실하게 됩니다. 역사 이 래로 오늘날처럼 다양한 불상사가 이 사회의 전반에 걸쳐 일어나고 있는 시대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자살과 마약복용, 성의 문란은 이 제 이 사회의 양념이 된 느낌입니다. 사회를 흔들어 놓는 이런 모든 불상사들은 따지고 보면 삶에 대한 권태에 비롯되는 것들이 많습 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한번 권태에 빠지게 되면 부흥하는 사업이란 없으며 가정의 행복과 자신의 진로에 대한 승리 역시 기약 할 수 없습니다. 영적 침체에 빠지면 싶게 실증을 느껴 게을러지고, 삶의 무력감을 사로잡혀 회의적인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러기 에 사람이 영적 침체에 빠지면 만사가 귀찮아지고 의욕을 상실하게 됩니다. 사람이 한번 침에 빠지게 되면 위험합니다.
이것은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에 개동감이 없고 권태감을 느끼고, 만족함이 없이 그냥 습관적으로 신앙생활을 하 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면 그 사람은 물론이고 그 사람이 속한 교회 역시도 생산적인 활동을 할 수 없습니다. 영적 침체에 빠지 면 신앙생활에 생동감이나 만족함이 없이 그냥 습관적으로 예배를 드린다면 그 사람은 물론이고 그 사람이 속한 교회 역시도 생산적 인 활동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엘리야 선지자가 바로 이러한 영적 좌절감에 빠진 것입니다.
엘리야는 어떤 사람입니까? 엘리야는 구약의 모든 선지자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북이스라엘을 아합 왕이 치리 하던 때 (B.C 850년경) 활동했던 선지자인데 엘리아는 대단한 능력을 소유한 하나님의 사자였습니다. 마른하늘에서 불덩어리 가 떨어지게 하고 3년 반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게 하고 또한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한 실로 하늘 보좌를 움직이기까 지 한 그런 신비에 쌓인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본문을 보면 그런 능력을 소유했던 엘리아도 좌절하고 낙심했던 때가 있었다는 사실 입니다. 신앙 생활하다보면 늘 신나고 즐겁고 좋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좌절하고 낙심하고 지쳐 용기조차 없는 무기력 한 때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영혼이 낙심되고 좌절 된 때가 없었습니까? 낙심되고 좌절감을 느낀 때가 있 었다면 언제였었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엘리야가 바로 그런 좌절과 한계, 자신의 무기력함을 느끼고 완전히 넉다운 되는 것 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엘리야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엘리야도 믿음이 약해질 때가 있었 고, 용기를 잃어버릴 때도 있었으며, 절망과 불안에 빠져 헤어나지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그럴 수밖에 없었었던 것은 왕 후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기로 작정을 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2절을 보면 "내가 내일 이 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같게 하리 라. 아 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임이 마땅하니라"고 했습니다. 이세벨의 말은 한마디로 "내가 만일 하루 안에 너를 죽이지 아니 하면 나는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3년간을 두려움 을 모르고, 하나님의 크신 역사 를 이루었지만 이세벨로 인하여 생명의 위협을 느낀 엘리야는 광야로 도망가서 깊은 좌절과 절망에 빠진 채 로뎀나무 아래 앉아 죽기 를 기도했습니다. 본문 4절에 보니까?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 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엘리야가 맛 본 삶의 권태를 너무나 소상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선지자입니다. 능력자입니다. 위대 한 사역의 주인공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러한 엘리야가 권태(倦怠)에 빠졌다는 것은 사람은 신분과 성별과 지위 의 고하를 막론하고 권태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 야 어떻게 영적 절망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는지 그 원인과 어떻게 그 절망감을 회복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 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 엘리야가 왜 절망감에 빠졌습니까?(원인)
① 허탈감을 빠질 때에 절망합니다.
사람은 큰일을 한 후에는 반드시 허탈감에 빠지게 됩니다. 약 517에 보면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 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전능자가 아니었습니다. 홀로 있으면 외로움을 느끼고 굶주릴 때 배고픔을 느끼는 평범한 인간이었습니다. 그 는 갈멜산상의 큰 기적 이후,허탈감에 사로잡히게 되어 이렇게 외칩니다. “하나님, 나는 할 만큼 했고, 이제는 사는 것이 싫어졌습 니다. 죽고 싶습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라는 고백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허탈감에 사로잡힐 때가 가 장 약할 때입니다. 바로 이 때 사람들은 절망감에 빠지게 됩니다.
② 이율배반적인 상황에 빠질 때에 절망합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상의 역사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을 버리고 참 하나님을 찾게 해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의 비 를 내려 삼년 반 동안 가뭄에 시달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원한 생수를 공급해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죽이려 한 이 세벨의 행패는 적반하장(賊反荷杖)이었고, 배은망덕(背恩忘德)이었습니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상황에 부딪힌 엘리야는 삶의 의욕을 잃어 버리고 절망감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③ 생활 속에서 무엇인가에 쫓기며 산다고 느낄 때에 절망합니다.(3절)
본문 3절을 보면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엘리야는 이세벨에게 쫓겼습니다. 이 렇듯 엘리야는 이세벨의 군사에게 쫓기면서 심한 공포감을 느껴야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의 주변에는 쫓기듯 살아가 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니 우리 자신이 바로 그런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가난(家難)에 쫓기고, 질고(疾苦)에 쫓기고, 어려 운 현실과 바쁜 시간에 쫓기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이러한 사람들은 항상 마음속에 불안이 있습니다. 그런 불안감이 바로 영 적 좌절감에 바뀌게 됩니다.
예화 / 어떤 사람이 기차의 냉동 칸을 기웃거리다가 문이 닫히는 바람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렇게든 문을 열려고 했으 나 허사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은 것은 불가능 일이다. 나는 이제 죽었다”고 낙심한 후 털썩 주저앉아 벽에 자기의 생각 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나의 몸이 점점 차가워지기 시작한다. 나는 견디기 힘들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 이제는 죽음의 그림자 가 나를 덮기 시작했다. 이 글이 나의 마지막 글이 될 것이다.” 사람들이 그를 발견했을 때 그 사람은 이미 죽어있었습니다. 그런 데 놀라운 사실은 그 냉동차는 한달 가까이 작동해 본 적이 없었고 그 안에는 사람이 살아남기에 충분한 산소와 온도가 있었다는 것입 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죽은 것은 배가 고파서가 아니고, 질식해서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공포와 불안에서 오는 권태 와 싸우다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마귀에게 잠시 [슬립 다운]은 당하지라도 결코 [넉 다운]은 당하지 않는다 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전 15:57에서 사도 바울이 말 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사는 것처럼 보여 도 궁극적으로 사도 바울처럼 승리한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딤후 47,8에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 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 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 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이와 같 은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④ 현실(現實)상황이 역전될 때입니다.
본문 3절을 보면 “저가 이 형편을 보고”라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하늘의 불을 내리고 비를 오게 하므로서 나 라와 민족을 위해 일한 자신을 오히려 해하려는 현실상황에 부딪혔습니다. 칭찬과 사랑을 받아도 부족한데 도리어 자신을 죽이려 하 는 이 무서운 상황에 부딪힌 엘리야는 화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 좌절감과 권태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⑤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에 절망합니다.(4절)
우리는 본문 4절에서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나이다"라 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지금 자신을 자기 열조와 비교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자기 열조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한마디 로 말하면 자신은 못난 놈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보잘 것 없고 못난 놈이기에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가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사람들이 침체에 빠지며 절망합니까?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내 가 누구와 같으면 좋았을 것을, 내가 누구와 같으면 행복할 텐데. 나는 왜 다른 사람과 같지 않을까? 나는 왜 이렇게 못났을까?" 하는 자학에 빠지게 되고, 그것이 우리를 정신적, 영적 침체의 늪에 빠뜨리게 됩니다.
성경은 이러한 행동은 지혜롭지 못하고, 자기에게 해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 서 10:12절을 보면 "우리가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저희가 자기로 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에서 하 나님께서 인생을 평가하시는 기준이 상대평가에 아니고 절대 평가이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평가 하시지 않으시고,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은사를 가지고 얼마나 장사를 잘했는가를 보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살아가면 우리도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침체의 늪에 빠질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 하지 말고, 하나님이 나를 만들어 놓으신 그 모습 그대로 나를 사용하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이 믿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 니다. 우리는 비교의식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⑥ 일한만큼 결과가 없다는 생각들 때에 절망합니다(10절 상).
오늘 본문 10절 상반 절을 보면 "내가 만군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 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엘리야는 일한 것에 대한 결과가 없다 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엘리야 자신이 열심히 하나님을 위하여 일을 했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전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 지 않고 있으며, 내가 노력을 많이 했지만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과거와 같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즉 엘리야 는 자기가 수고한 만큼 결과가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과에 집착하는 것은 결국 바람직한 성도의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우 리는 모든 결과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 하는 일에 열매가 있을 때 사람들은 그 일에 대한 보람과 긍지와 자부 심을 갖게 됩니다. 일의 결과가 좋아야 그 일을 계속하고 싶은 욕망도 갖습니다. 그러나 일은 열심히 했는데 결과가 좋지 못 할 때, 또는 열심히 노력해서 일했는데도 열매가 없을 때 실망하고 좌절하고 침체에 빠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우리의 열심이 나 노력만으로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고 힘써 일하는 것이며, 일의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너의 행사 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했습니다.(잠 16:3) 엘리야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 을 위하여 열심과 특심이 되도록 일을 했는데도 열매가 없고, 결과가 없자 침체의 늪에 빠진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도 우리의 열심이나 노력으로 모든 것이 다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더 겸손히 기도하고 하나님 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 6:7-10에서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 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 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 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 는 것입니다.
⑦ 영적 고독을 느낄 때에 절망합니다.(10,14절)
왕상 18:10과 19:10,14절의 말씀을 보면 엘리야는 세 번씩이나 “나만 홀로 남았습니 다”라고 독백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참고 왕상 18:22). 엘리야는 언제나 혼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릿 시냇 가에서도, 갈멜 산상에서도, 광야의 로뎀나무 아래에서도, 호렙산 동굴 속에서도 혼자였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입니 다. 그러기에 자기 자신이 혼자라고 생각하거나 혼자일 때에 정말로 감당할 수 없는 깊은 좌절감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 한 엘리야의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 7천명을 남겨 두셨는데도 엘리야는 자신만 살아있는 것으로 생각하 고, "하나님 나 혼자 남아있는데 홀로 남은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으며 또 그나마도 저들이 내 생명을 찾고 있습니다"라 고 한 것입니다. 영적으로 무지하면 고독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침체에 빠지는 이유는 자기는 혼자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누구도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 고, 함께 해 주는 사람이 없고,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자기를 이해해주는 사람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살심리학 은 사람이 아무도 자기를 알아주고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을 때 자살을 하려 한다는 것이며, 자기를 이해해 주고, 알아주는 사람 한 사람만 있어도 자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왜 로뎀나무 아래 앉아 죽기를 자처하고 있습니까? 자기 혼자라는 생각 때문입니 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결코 혼자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마 28:28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심을 알아 야 합니다. 비록 살인죄를 범했던 가인이었지만 그의 가는 길에도 함께 하셨고, 야곱이 얍복강에서 혼자 있을 때에 하나님은 그와 함 께 하셨고 헤롯의 감옥에 갇힌 베드로와 옆에는 하나님께서 보낸 천사가 함께 있었습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남편이 없어 도 독감에 사로 잡혔습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임마누엘 의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사망의 음침 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 동행 하고 계신 분이심을 믿기 바랍니다.(시편 23편)
이러한 측면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 포로가 되어서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 니다. 사 41:10에서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 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 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한 사 43:1-3에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 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 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 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도 요 14:1,18,27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내가 너희를 고아 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 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 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 엘리야가 절망에 빠진 이후에 어떤 현상이 나타났습니까?
① 자살충동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본문 4절에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란 바로 엘리야가 자살 충동을 느끼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 다. 1961년 7월 2일은 “노인과 바다”를 쓴 미국의 유명한 문필가 「어네스트 헤밍 웨이」가 자살한 날입니다. 그는 자기를 위해 특별히 은도금하여 제조한 사냥총의 총구를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이런 그 의 자살에 대해 많은 이론들이 뒤따르고 있으나 그의 자살은 권태(倦怠)로부터 해방되려는 몸부림고도 볼 수 있습니다.
② 무력감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갈멜산 상에서 불을 내리고 450명의 바알의 선지자들을 기손 강가에서 죽였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 가 이세벨을 피하여 광야로 도망하게 된 것은 엘리야에게 큰 무력감을 주는 현실이었습니다. 무력감에 빠진 사람은 자포자기합니다. 성 경에는 잠의 사람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성격은 서로 다릅니다. 풍랑 중에 잠을 잔 요나의 잠이 피곤의 잠이었다면 헤롯의 감옥 에서 잔 베드로의 잠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잔 신뢰의 잠이었고, 로뎀나무 아래에서 잔 엘리야의 잠은 ‘될대로 되라’는 식 의 자포자기(自暴自棄)의 잠이었습니다.
③ 열등의식(劣等意識)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본문 4절을 보면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함이니다”라고 말씀은 엘리야가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 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위대한 선지가 엘리야의 열등의식이 보며 우리는 오늘날 인간은 누구나 이런 열등의식(劣等意 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증후군을 가리켜 “엘리야 컴플레스”라고 말합니다.
3. 그렇다면 엘리야가 절망감을 어떻게 회복하였습니까?
우리가 영적 좌절감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를 초청하시는 하나님을 앞에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움 과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끊임없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시 고 있습니다.(마 11:28)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밀물처럼 밀려오는 권태를 이겨보려고 쾌락(快 樂)을 탐닉합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러한 생활태도는 더욱 큰 권태를 가져올 뿐 권태를 해소하는 방법은 되지 못합니다. 엘 리야가 깊은 영적 좌절감에서 일어 설 수 있었던 것은 엘리야를 찾아오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때문입니다. 좌절감은 마귀가 주는 치명 적인 병입니다. 그래서 존 칼빈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귀의 입에 재갈 먹인 고삐를 붙잡고 계신다”라고 말씀하 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영적으로 좌절감에 빠질 때에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영적으로 지치면 그 무엇으로도 위안이 되지 않습니 다. 지금 엘리야가 그렇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 바알의 추종자들을 모조리 처리했건만 이스라엘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인생 문제는 그 누구의 위로로도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뵈옵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적 좌절감은 하나님만이 해결하시는 병입니다. 본문 말씀은 로뎀나무 아래 쓰러져 죽기를 구하던 엘리야를 찾아 온 천사를 여호와의 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천사는 누구입니까? 이는 구약시대에 역사하였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 다. 그러면 로뎀나무 아래의 엘리야를 찾아오신 하나님은 엘리야를 어떻게 고쳐 주셨습니까?
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쉼을 얻어야 합니다(5,7절).
본문 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로뎀나무 아래 앉아 죽기를 구하던 엘리야가 피곤에 지쳐 잠들자 그때에 천 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일어나서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엘리야가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더니 머리맡에 숱 불에 구운 떡과 한 병 의 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워 잤습니다. 또한 본문 7절에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천사 가 두 번째 와서 어루만지며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했습니다. 엘리야가 영적 좌절감에서 회복되는 첫 번 째 요소는 쉼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몇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첫째는 영적 쉼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문을 통하여 두 번씩이나 “이르되 일어나 서 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찾아오는 삶의 권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치유 받게 됨을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여기 에서 중요한 점은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는 말씀이 두 번씩이나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5,7절)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 좌절 감을 이기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해서 듣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어 나서 밥 먹듯이 먹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한두 번의 말씀으로 영적 좌절감을 치유 받으려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생명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적으로 반복해서 듣다보면 모든 권태는 사라지고 새로운 삶의 의욕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영적인 쉼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산 떡을 먹을 때에 얻을 수 있습니다.(6절)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먹고 마실 것을 주셨습니다. 엘리야가 먹었던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의 물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의 선물이었습니다. 이는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시며 생명수의 공급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접촉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 6:35, 41,4:14) 생명의 만나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그분은 영접해야 합 니다.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분과 동행해야 합니다.
셋째는 하나님께서 어루만져 주실 때에 영적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의 “어루만지지다”라는 말씀은 “함께 눕다, 결합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엘리야를 하나님의 품에 안으시고 도닥거리며 위로해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 좌걸감에게는 하나님의 위로가 최고의 약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육신적으로,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피곤할 때 영적 좌절감에 빠져들어가게 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안식 과 쉼을 주셔서 침체에 바진 사람들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 11:28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 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오늘도 영적 좌절감에 빠져 지쳐 있는 인생들을 부르시고 있습니 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 11:29-30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 다. 마 11:29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 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물론 주님에 나올 때에 영적 쉼을 얻 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께 나온다고 무조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 곧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질 때에 진정 한 쉼을 얻을 수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②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12절)
본문 1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영적 좌절감에 빠질 때에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본 문 11절에서 엘리야에게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서 있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 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가 운데 여호와가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가 계 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시더니 불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하셨습니 다. 이 소리를 듣고 엘리야가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웠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바람과 지진과 물을 보여 주셨지만 그 어느 것으로도 주님은 엘리야에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엘리야 는 주님의 세미한 음성 속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바람이 나 지진이나 불과 같은 크고 극적인 것들을 통하 여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세미한 음성으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오늘 우리를 침체의 늪과 좌절에서 회복시켜 주시는 것 은 하나님의 음성이며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마 4:4에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 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히 4:12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 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 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렘 23:29)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 다 (시 119:9)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 서 (시 119:10)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 다 (시 119:11)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딤후 3:16,17절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 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 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③ 우리의 좌절을 하나님께 내어놓아야 합니다.(14절)
본문 14절의 말씀처럼 엘리야는 자기가 왜 좌절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해서 하나님께 솔직하게 고백했습니 다. 엘리야는 하나님이 주신 음식을 먹고 힘을 얻어 40일을 걸어서 호렙산에 도착하여 굴로 들어가서 밤을 지내게 되 었습니다. 아침에 하나님이 그에게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엘리야는 "내가 3년동 안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고 노력을 다 기울였어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오지 않고 여전히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의 선지자 들 을 죽이고 나만 남았는데 나 마저 죽이려해서 내가 이러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자신의 모 습을 그대로 다 쏟아놓았습니다. 엘리야의 불평에 하나님은 전혀 놀라지 않으시고 새로운 사명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할 것은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이 겁쟁이야!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야단을 치지도 않으시 고 그를 정죄하고 무시하지고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영적 좌절에 빠져 있는 엘리야의 모습을 그대로 받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도 엘리야처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상처나 아픔이나 고통을 하나님께 내어놓아야 합니다. 또한 다른 중보 기도자들과 함께 나누 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로 하여금 내어버리도록 하셨습니다. "엘리야야! 너를 좌절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 너 를 근심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침체가운데 있을 때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우리의 침체를, 우 리의 문제를, 우리의 아픔과 성처를 하나님께 내어놓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주님께 나오는 것도 중요하지 만 그 짐을 주님께 내려놓는 것은 더욱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시 37:5-6에서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 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누구라도 엘리야처럼 영적 좌절감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엘리야처럼 영적으로 침체하고 절망에 빠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우리의 좌절이 하나님의 좌절이 아닙니다. 우리의 침체가 하나님의 침체가 아닙니다. 하나님 은 오늘도 우리의 침체의 자리에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쉼을 주시기를 원하시며 우리의 모든 좌절을 하나님께 내어놓으시기를 원하시 며, 세미한 음성으로 우리의 침체와 좌절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중에 삶의 권태에 빠진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하나님을 만난 엘리야 는 40주, 40야를 달려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영적 좌절의 자리에 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일을 향하여 전진할 수 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상징 동물인 캥거루와 타조는 전진만 아는 동물 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고 그리스도인에게 후퇴란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히 10:39에서 “우리는 뒤로 물러 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는 말씀처럼 그리스도인은 오직 전진만 아는 자입니 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로뎀 나무 아래의 엘리야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다시금 은혜를 회복한 것처럼 이 아침에 하나님을 만나 영 적 좌절감을 박차고 일어나 새롭게 다시금 전진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