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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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길의 레슨/출13:17-20
예수 믿는것이 제일 재미있는 때는 처음 은혜를 받았을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소위 첫사랑의 계절이라 할까요? 말씀배우는 것이 꿀맛같고 기도의 응답이 척척오고 예배의 시간 시간이 감격이었던 때가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런 때가 그리 오래 계속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갑자기 예배시간이 지루해지고 기도해도 응답이 없습니다. 신앙에 회의가 찾아오고 영혼이 사막처럼 메마르게 됩니다. 우리의 선배들은 이런 때를 가르쳐 광야길의 체험이라고 불렀습니다. 십자가의 성요한(John of the Cross,1542-1591)이라 불리우던 사람은 이런 경험을 일컬어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고 했고, 그리스도인 모두는 조만간 이 밤을 통과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광야길의 체험은 다양합니다. 당장 이루어 질것 같은 꿈이 이제는 실현 불가능한 꿈처럼 멀어지고 현실의 차가운 벽앞에서 절망을 느껴야 하는 때-이것도 일종의 광야 체험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 세상 누구도 그 사이에 끼어들수 없었던 하나됨으로 시작되었던 우리의 애정관계 혹은 우정관계가 어느날 삐꺽거리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그의 얼굴을 대하는 것조차 부담으로 변해 버릴 때-그때 우리는 광야길을 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급에서 해방되어 애급을 떠나던 날-그것은 얼마나 대단한 민족적인 감격의 체험이었을까요? 노예의 사슬을 벗어던지고 그들은 이제 자유의 새로운 세상으로 출발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앞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언약의 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애급땅을 벗어나자 마자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광야였습니다. 물론 처음에 광야를 대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크게 두려워 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애급에서 가나안까지 직선으로 광야를 가로질러 가면 불과 200마일에 불과한 길이었고 직선으로 쉼 없이 걸어가면 40일이면 갈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40일이 무려 40년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17,18절에 보면 가까운 길을 놓아두고 홍해쪽 먼길로 하나님이 그 백성을 돌려서 인도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좀 원색적인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뺑뺑이 쳐 돌리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광야길의 체험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셔야 했을까요? 광야길의 의미와 레슨-무엇인지요?
1. 광야길은 사랑으로 예비된 길입니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사고한다면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고생시키는 하나님이 잔인하신 분으로 이해 될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은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 때문임을 분명히 합니다. 다시17절을 보십시오. 여기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북동쪽으로 인도하신다면 거의 직선으로 쉽고 가깝게 갈수 있는 길이 있었지만 그 길을 피하여 먼길을 돌아가게 하신 이유가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장에 직면할수 있는 전쟁을 피하고 애급으로 돌아갈 유혹의 마음을 차단하기 위해서 였던 것입니다. 물론 남쪽으로 돌아가는 홍해길에도 후에 전쟁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출17장에 보면 첫번째 전쟁인 아말렉과의 전쟁기사가 기록됩니다. 그러나 처음 애급을 떠날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직은 전쟁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을 아셨습니다. 만일 처음부터 전쟁을 치르고 어려운 일을 경험한다면 틀림없이 애급을 떠난 것을 후회하고 아직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애급으로 돌아갈 유혹을 받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감당할 시험밖에는 주시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준비될때를 기다리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 그의 사랑의 배려이셨던 것입니다.
여기 우리가 배워야 할 레슨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생의 길을 걸어가며 때로 그 길이 지름길이 아닌 멀고 험난한 돌아가는 길로 느껴질 때 왜 내가 이길을 걸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우리가 믿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길로 들어서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이 길이 먼 길로, 험한 길로 느껴져도 이 길은 사랑으로 예비된 길임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이 길을 지나감이 너무 고통스럽거든 자신에게 말하십시오.—이 길은 그분이 예비하신 사랑의 길이라고.이 길을 지나감이 너무 아프거든 자신에게 말하십시오.-이 아픔은 사랑을 위한 것이라고. 마치 새생명을 출산하는 어미처럼 말하십시오. 이 고통은 사랑의 특권이라고, 사랑의 의무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잊지 마십시오.어떤 광야의 외롭고 힘든 길도 사랑으로 예비된 길인 것을!
2. 광야길은 훈련위해 준비된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돌아가는 광야길을 걷게 하신 가장 중요한 이유가 본문에는 17절에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급으로 돌아갈까 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뉘우친다’는 말은 ‘마음이 변할까 하여’(CHANGE MIND)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애급을 떠난 이상 하나님이 의도하신 하나님의 뜻하심을 따라 가나안으로 가게 하기 위해서 였던 것입니다. 이 계획이 확실하게 실현되도록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요셉의 유골을 메고 가나안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백성들이 요셉의 유골을 볼때마다 자신을 가나안땅에 묻어 달라는 마지막 유언을 기억하게 하신 것입니다.(19절)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확고하게 받아드리는 광야의 훈련이 필요했던 것입니다.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의 경험은 직접 간접으로 하나님의 뜻과 연관되어 있습니다.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궁극적으로 수용할줄 아는 훈련인 것입니다. 이 훈련을 위해 40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한 성경학자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백성이 애급을 빠져 나오는데는 하루가 필요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안에서 애급을 빼내는데는 40년이 필요했다”고 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주로 광야의 훈련과 관련되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도 40일간 집중적으로 계속되었고, 모세가 애급에서 살인하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서 보낸 세월이 40년이었고, 나중에 시내산에서 보낸 시간도 40일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아합왕과 이세벨을 피하여 호렙산으로 가는데 걸린 시간이 40일이었고, 물론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시간도 40일간 이었고, 그의 부활이후 승천까지 의심으로 연약해진 제자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심어 주시기 위한 시간도 40일 이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광야를 지납니다. 어떤 사람은 40일의 짧은 광야 체험을, 어떤 사람은 40년의 보다 긴 광야체험을 통과하기도 하지만 광야를 지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광야를 지내는 동안 우리에게는 구체적으로 어떤 훈련이 필요할까요? 광야를 지날 때 우리는 무엇보다 예배의 훈련을 받고 예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출3장에 보면 모세가 바로왕에게 나아가 애급땅에서 떠나갈 허락을 구할 때 “사흘길을 지나 광야에 나아가 희생의 제사를 드리려 한다”고 말하라고 하나님이 모세에게 지시하십니다.(출3:18)희생의 제사를 오늘날의 개념으로 바꾼다면 예배라고 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예배할수 있지만 광야는 예배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입니다.고독한 광야를 지날 때 인적의 방해없이 다만 하나님의 임재의 달빛 속에 사랑을 내리시는 그분을 만나는 예배를 배우십시오. 오해의 광야를 지날 때 당신을 완벽하게 이해하시는 하나님앞에 홀로 나아와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광야의 바람소리에 기도를 띄워 예배하는 것을 배우십시오. 고통의 광야를 지날 때 저녁의 서늘함속에 내 모든 피곤을 씻겨 주시는 산들바람의 치유를 맛보며 치유의 주님을 예배하는 것을 배우십시오. 광야길은 예배의 훈련을 위해 예비된 길입니다. 예배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마침내 그의 뜻을 위해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십시오.
3. 광야길은 성령으로 인도된 길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많은 경우 어떤 고난을 경험할 때 우리가 왜 이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할때가 훨씬 많습니다. 그러나 그럴때에라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확신할수 있는 한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이 고난의 이유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 고난속에 하나님이 결코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인도하실 것이라는 약속만은 분명하게 신뢰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애급땅을 떠나던 이스라엘 백성이 왜 쉽고 빠른 지름길을 제쳐놓고 홍해로 향하는 먼길을 가야 하는지를 이해할수 있었겠습니까? 아마 하나님이 설명하셨어도 이스라엘 백성이 그것을 납득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백성을 그가 친히 광야길에 인도하신다는 분명한 싸인만은 허락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름기둥, 불기둥 이었던 것입니다. 21절에 보면 “—인도하시고”했고, 22절 마지막 부분에 보면 이 구름기둥 불기둥은 백성앞에서 떠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 구름기둥 불기둥이 백성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여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중에 지리에 밝은 이들은 아마도 이 기둥이 북동쪽으로 움직여 갈 것을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기둥은 남쪽으로 움직여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가 분명했기에 그들은 싫어도 그길을 따라 갈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모든 자녀들의 길을 반드시 인도하십니다. 롬8:14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루 하루 날마다 걸음마다 성령의 인도를 순종하며 끝까지 걸어가시겠는가라는 질문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함이 있어도 이스라엘 백성은 먼 앞의 여정은 볼수 없었습니다. 그냥 조금 앞쪽만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걸음 한걸음 순종의 걸음을 걸었을 때 어느날 그들은 약속의 땅앞에 설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의 아이들이 여름방학이 되어 한국에 나와 있는데 함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특히 저의 둘째 아이 범이는 차만 타면 불과 30분이 지나지 않아 묻던 질문이 있었습니다. “얼마 남았어요? 몇분 더 가요?” 그런데 성장하자 이제 더 이상 이 질문을 하지 않게 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장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의 여정이 어떤 길을 통과 하는냐, 얼마나 빨리 목적지에 도달 하는냐 보다도 어떤 모습으로 성숙되어 주님앞에 마지막에 설 것인가에 더 큰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광야에서의 40년-생각보다 훨씬 더 길었던 광야길은 실상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다운 백성으로 성숙하기 위한 위한 충분한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광야길이 아직 끝나지 않은 이유-아직 우리에게 성숙의 과제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개척교회 목사님의 글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어느날 5살된 어린 아들이 이런 질문을 하더래요. 아빠, 아빠는 커서 뭐가 될래? 눈감고 대답해봐? 순간 아들이 상상의 게임속으로 자신을 초대하는 것을 느꼈지만 얼결에 대답하기를 “나 아빠기 될거야”하니까. “아니야, 아빠는 이미 아빠이니까 다른 것이 되어야 해”하더랍니다. 잠시 다시 생각하다가 “아빠는 목사님이 좋은데 목사가 될거야”하니까 “아이 아니라니까, 아빠는 벌써 목사님이잖아. 생각해봐, 아빠는 뭐든지 될수있어. 아직도 아빠는 될수있어”하더랍니다. 그 순간 “아직도 아빠는 될수 있어”라는 아들의 말이 이분의 마음 깊은 곳에 와 닿았다고 합니다. 개척교회가 실패하고 있다는 절망감으로 좌절하고 있던 이 목사님은 그때 비로소 자신의 사역과 인생이 끝나지 않았고 아직도 자신의 인생의 길에 성숙의 과제가 남아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광야길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성숙의 과제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될수 있습니다 그 성숙을 향해서 우리는 때로 아프고 힘들더라도 이 광야길을 다시 걸어야 합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을 좇아 밤에는 불기둥을 좇아 이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하시는 교우 여러분,이제 우리 다시 일어나 용기있게 광야 길로 나아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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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는것이 제일 재미있는 때는 처음 은혜를 받았을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소위 첫사랑의 계절이라 할까요? 말씀배우는 것이 꿀맛같고 기도의 응답이 척척오고 예배의 시간 시간이 감격이었던 때가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런 때가 그리 오래 계속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갑자기 예배시간이 지루해지고 기도해도 응답이 없습니다. 신앙에 회의가 찾아오고 영혼이 사막처럼 메마르게 됩니다. 우리의 선배들은 이런 때를 가르쳐 광야길의 체험이라고 불렀습니다. 십자가의 성요한(John of the Cross,1542-1591)이라 불리우던 사람은 이런 경험을 일컬어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고 했고, 그리스도인 모두는 조만간 이 밤을 통과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광야길의 체험은 다양합니다. 당장 이루어 질것 같은 꿈이 이제는 실현 불가능한 꿈처럼 멀어지고 현실의 차가운 벽앞에서 절망을 느껴야 하는 때-이것도 일종의 광야 체험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 세상 누구도 그 사이에 끼어들수 없었던 하나됨으로 시작되었던 우리의 애정관계 혹은 우정관계가 어느날 삐꺽거리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그의 얼굴을 대하는 것조차 부담으로 변해 버릴 때-그때 우리는 광야길을 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급에서 해방되어 애급을 떠나던 날-그것은 얼마나 대단한 민족적인 감격의 체험이었을까요? 노예의 사슬을 벗어던지고 그들은 이제 자유의 새로운 세상으로 출발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앞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언약의 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애급땅을 벗어나자 마자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광야였습니다. 물론 처음에 광야를 대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크게 두려워 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애급에서 가나안까지 직선으로 광야를 가로질러 가면 불과 200마일에 불과한 길이었고 직선으로 쉼 없이 걸어가면 40일이면 갈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40일이 무려 40년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17,18절에 보면 가까운 길을 놓아두고 홍해쪽 먼길로 하나님이 그 백성을 돌려서 인도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좀 원색적인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뺑뺑이 쳐 돌리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광야길의 체험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셔야 했을까요? 광야길의 의미와 레슨-무엇인지요?
1. 광야길은 사랑으로 예비된 길입니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사고한다면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고생시키는 하나님이 잔인하신 분으로 이해 될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은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 때문임을 분명히 합니다. 다시17절을 보십시오. 여기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북동쪽으로 인도하신다면 거의 직선으로 쉽고 가깝게 갈수 있는 길이 있었지만 그 길을 피하여 먼길을 돌아가게 하신 이유가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장에 직면할수 있는 전쟁을 피하고 애급으로 돌아갈 유혹의 마음을 차단하기 위해서 였던 것입니다. 물론 남쪽으로 돌아가는 홍해길에도 후에 전쟁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출17장에 보면 첫번째 전쟁인 아말렉과의 전쟁기사가 기록됩니다. 그러나 처음 애급을 떠날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직은 전쟁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을 아셨습니다. 만일 처음부터 전쟁을 치르고 어려운 일을 경험한다면 틀림없이 애급을 떠난 것을 후회하고 아직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애급으로 돌아갈 유혹을 받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감당할 시험밖에는 주시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준비될때를 기다리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 그의 사랑의 배려이셨던 것입니다.
여기 우리가 배워야 할 레슨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생의 길을 걸어가며 때로 그 길이 지름길이 아닌 멀고 험난한 돌아가는 길로 느껴질 때 왜 내가 이길을 걸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우리가 믿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길로 들어서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이 길이 먼 길로, 험한 길로 느껴져도 이 길은 사랑으로 예비된 길임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이 길을 지나감이 너무 고통스럽거든 자신에게 말하십시오.—이 길은 그분이 예비하신 사랑의 길이라고.이 길을 지나감이 너무 아프거든 자신에게 말하십시오.-이 아픔은 사랑을 위한 것이라고. 마치 새생명을 출산하는 어미처럼 말하십시오. 이 고통은 사랑의 특권이라고, 사랑의 의무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잊지 마십시오.어떤 광야의 외롭고 힘든 길도 사랑으로 예비된 길인 것을!
2. 광야길은 훈련위해 준비된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돌아가는 광야길을 걷게 하신 가장 중요한 이유가 본문에는 17절에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급으로 돌아갈까 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뉘우친다’는 말은 ‘마음이 변할까 하여’(CHANGE MIND)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애급을 떠난 이상 하나님이 의도하신 하나님의 뜻하심을 따라 가나안으로 가게 하기 위해서 였던 것입니다. 이 계획이 확실하게 실현되도록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요셉의 유골을 메고 가나안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백성들이 요셉의 유골을 볼때마다 자신을 가나안땅에 묻어 달라는 마지막 유언을 기억하게 하신 것입니다.(19절)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확고하게 받아드리는 광야의 훈련이 필요했던 것입니다.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의 경험은 직접 간접으로 하나님의 뜻과 연관되어 있습니다.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궁극적으로 수용할줄 아는 훈련인 것입니다. 이 훈련을 위해 40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한 성경학자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백성이 애급을 빠져 나오는데는 하루가 필요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안에서 애급을 빼내는데는 40년이 필요했다”고 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주로 광야의 훈련과 관련되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도 40일간 집중적으로 계속되었고, 모세가 애급에서 살인하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서 보낸 세월이 40년이었고, 나중에 시내산에서 보낸 시간도 40일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아합왕과 이세벨을 피하여 호렙산으로 가는데 걸린 시간이 40일이었고, 물론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시간도 40일간 이었고, 그의 부활이후 승천까지 의심으로 연약해진 제자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심어 주시기 위한 시간도 40일 이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광야를 지납니다. 어떤 사람은 40일의 짧은 광야 체험을, 어떤 사람은 40년의 보다 긴 광야체험을 통과하기도 하지만 광야를 지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광야를 지내는 동안 우리에게는 구체적으로 어떤 훈련이 필요할까요? 광야를 지날 때 우리는 무엇보다 예배의 훈련을 받고 예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출3장에 보면 모세가 바로왕에게 나아가 애급땅에서 떠나갈 허락을 구할 때 “사흘길을 지나 광야에 나아가 희생의 제사를 드리려 한다”고 말하라고 하나님이 모세에게 지시하십니다.(출3:18)희생의 제사를 오늘날의 개념으로 바꾼다면 예배라고 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예배할수 있지만 광야는 예배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입니다.고독한 광야를 지날 때 인적의 방해없이 다만 하나님의 임재의 달빛 속에 사랑을 내리시는 그분을 만나는 예배를 배우십시오. 오해의 광야를 지날 때 당신을 완벽하게 이해하시는 하나님앞에 홀로 나아와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광야의 바람소리에 기도를 띄워 예배하는 것을 배우십시오. 고통의 광야를 지날 때 저녁의 서늘함속에 내 모든 피곤을 씻겨 주시는 산들바람의 치유를 맛보며 치유의 주님을 예배하는 것을 배우십시오. 광야길은 예배의 훈련을 위해 예비된 길입니다. 예배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마침내 그의 뜻을 위해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십시오.
3. 광야길은 성령으로 인도된 길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많은 경우 어떤 고난을 경험할 때 우리가 왜 이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할때가 훨씬 많습니다. 그러나 그럴때에라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확신할수 있는 한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이 고난의 이유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 고난속에 하나님이 결코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인도하실 것이라는 약속만은 분명하게 신뢰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애급땅을 떠나던 이스라엘 백성이 왜 쉽고 빠른 지름길을 제쳐놓고 홍해로 향하는 먼길을 가야 하는지를 이해할수 있었겠습니까? 아마 하나님이 설명하셨어도 이스라엘 백성이 그것을 납득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백성을 그가 친히 광야길에 인도하신다는 분명한 싸인만은 허락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름기둥, 불기둥 이었던 것입니다. 21절에 보면 “—인도하시고”했고, 22절 마지막 부분에 보면 이 구름기둥 불기둥은 백성앞에서 떠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 구름기둥 불기둥이 백성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여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중에 지리에 밝은 이들은 아마도 이 기둥이 북동쪽으로 움직여 갈 것을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기둥은 남쪽으로 움직여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가 분명했기에 그들은 싫어도 그길을 따라 갈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모든 자녀들의 길을 반드시 인도하십니다. 롬8:14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루 하루 날마다 걸음마다 성령의 인도를 순종하며 끝까지 걸어가시겠는가라는 질문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함이 있어도 이스라엘 백성은 먼 앞의 여정은 볼수 없었습니다. 그냥 조금 앞쪽만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걸음 한걸음 순종의 걸음을 걸었을 때 어느날 그들은 약속의 땅앞에 설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의 아이들이 여름방학이 되어 한국에 나와 있는데 함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특히 저의 둘째 아이 범이는 차만 타면 불과 30분이 지나지 않아 묻던 질문이 있었습니다. “얼마 남았어요? 몇분 더 가요?” 그런데 성장하자 이제 더 이상 이 질문을 하지 않게 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장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의 여정이 어떤 길을 통과 하는냐, 얼마나 빨리 목적지에 도달 하는냐 보다도 어떤 모습으로 성숙되어 주님앞에 마지막에 설 것인가에 더 큰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광야에서의 40년-생각보다 훨씬 더 길었던 광야길은 실상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다운 백성으로 성숙하기 위한 위한 충분한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광야길이 아직 끝나지 않은 이유-아직 우리에게 성숙의 과제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개척교회 목사님의 글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어느날 5살된 어린 아들이 이런 질문을 하더래요. 아빠, 아빠는 커서 뭐가 될래? 눈감고 대답해봐? 순간 아들이 상상의 게임속으로 자신을 초대하는 것을 느꼈지만 얼결에 대답하기를 “나 아빠기 될거야”하니까. “아니야, 아빠는 이미 아빠이니까 다른 것이 되어야 해”하더랍니다. 잠시 다시 생각하다가 “아빠는 목사님이 좋은데 목사가 될거야”하니까 “아이 아니라니까, 아빠는 벌써 목사님이잖아. 생각해봐, 아빠는 뭐든지 될수있어. 아직도 아빠는 될수있어”하더랍니다. 그 순간 “아직도 아빠는 될수 있어”라는 아들의 말이 이분의 마음 깊은 곳에 와 닿았다고 합니다. 개척교회가 실패하고 있다는 절망감으로 좌절하고 있던 이 목사님은 그때 비로소 자신의 사역과 인생이 끝나지 않았고 아직도 자신의 인생의 길에 성숙의 과제가 남아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광야길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성숙의 과제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될수 있습니다 그 성숙을 향해서 우리는 때로 아프고 힘들더라도 이 광야길을 다시 걸어야 합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을 좇아 밤에는 불기둥을 좇아 이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하시는 교우 여러분,이제 우리 다시 일어나 용기있게 광야 길로 나아가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