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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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를 맺게 하소서/누가복음 13:6-9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 무화과 나무에 열매 맺기를 기대하고 무화과 나무를 심었는데 3년이 되어도 그 무화과 나무에 아무런 열매가 맺혀지지 않을 때 주인은 몹시 실망하고 과원지기를 불러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3년동안 이 나무의 열매를 기다렸으나 열매가 없으므로 이 나무를 찍어버리리라" 그때 과원지기는 "주인님이시여, 1년만 참아주소서. 내가 이 나무 주위를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그때도 열매를 맺지 아니하면 그때 찍으리이다." 이렇게 간청을 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적 경고를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을 두루 파고 친히 땀과 눈물과 피를 흘리셔서 거름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3년동안 열매 맺기를 기다리는 포도원 주인과 같이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 열매 맺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내가 더 이상 참고 인내할 수 없노라 나는 이 백성을 버려야 되겠다"라고 할 때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 조금 더 참아주소서. 이 백성을 버리지 마소서." 하고 간청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경고이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 기도 합니다. 우리를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수년이 되었는데도 전혀 아무런 열매가 없을 우리 주님께서 '내가 너에 대하여 실망하노라. 더 이상 내가 너를 향하여 기대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내가 너를 찍어버리리라'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화과 나무를 심는 목적은 분명합니다. 열매를 보기 위해서 심는 것입니다. 무화과는 꽃이 없는 나무입니다. 모든 과일들은 다 꽃이 있어서 아름다움이 있고 열매가 있지만 이 무화과는 꽃은 없고 열매만 있는 특별한 나무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의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국토가 넓고 인구가 많아서 하나님이 선택한 나라가 아니요, 다른 민족보다 특별한 재능이 있어서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증인으로 하나님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 택한 무화과 같은 민족입니다.
주님께서 무화과 나무에 대한 열매를 기대한 것처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열매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구원하시고, 또 자녀를 삼으신 것은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계획이 바로 열매라는 것입니다.
첫째, 주님은 우리에게서 열매를 찾고 계십니다.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6절)
'열매를 구하였다'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그리스도인다운 열매를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직분에 있어서 집사가 될 때는 집사다운 열매가 있어야 되고, 권사가 될 때는 권사다운 열매가 있어야 됩니다. 또 사회적인 활동에서 어떤 직책을 가졌을 때는 그 직책에 대한 열매가 있어야 됩니다. 회사에 가서는 자기가 맡은 분야에서 어떤 책임을 맡았으면 그 책임에 대한 열매를 맺어야 됩니다. 가정에서 어머니는 어머니다운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또 아버지는 아버지다운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6).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대하여 열매를 기대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16-18)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 그 나무의 가치는 열매로 결정되기 때문에 열매없는 나무는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열매없는 나무는 그 나무의 가치를 상실했으므로 주님으로부터 버림당한다는 것입니다.
가을이 오면 모든 나무가 열매를 맺습니다. 주인은 이른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이 오면 열매를 찾습니다. 그래서 농사짓는 사람은 열매를 보면서 그 마음에 기쁨을 얻습니다. 그런데 가을이 왔는데 나무에 열매가 없다면 주인이 얼마나 허탈감에 빠지겠습니까?
이와같이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때가 되매 예수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나에게 능력을 주셨는데 거기에 대한 아무런 보답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 하나님께서 얼마나 실망하시겠습니까?
인생을 살면서 봄같은 사춘기가 있고 가을같은 사추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춘기는 봄을 생각한다는 의미에서 사춘기이고, 사추기는 가을을 생각한다는 의미에서 사추기인데 인생이 청소년 때에는 봄과 같습니다. 그래서 봄의 화사함처럼 사춘기는 아름다움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봄바람은 불어도 좋습니다. 그런데 가을이 오면 낙엽이 지기 때문에 이때는 열매가 있을 때 가을의 가치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이가 중년기가 되었는데도 자기 인생에 아무런 열매가 없다면 이것은 비극입니다.
열매는 맛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의미는 맛을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청소년 때는 맛이 없습니다. 그것은 성장하는 것으로 자랑일 뿐이지 청소년 때는 인격이 없습니다. 공부 잘한다고 인격이 아닙니다. 재능있다고 인격이 아닙니다. 인물이 좋다고 인격이 아닙니다. 열매가 있었느냐? 그것이 인격입니다. 좋은 공부를 했느냐? 그 공부를 가지고 한 일이 있어야 인격입니다. 재능이 있느냐? 재능 가지고 한 일이 있을 때 그 열매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격입니다.
가을이 오면 우리는 자기에게 열매가 있나 없나를 생각해야 합니다. 가을이 왔는데 바람이 났다 그러면 보통 문제는 아닙니다. 봄바람이 불면 꽃이 피고 향기가 납니다. 그러나 가을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지면서 모두 다 스산합니다. 나이가 들어서 바람난 사람을 보면 집안에 찬바람이 부는데 아내는 우수수 기미가 끼고, 자식들은 다 뿔뿔이 흩어져서 가정이 흔들립니다. 이것이 비극입니다. 가을 인생은 분명히 열매를 찾아야 합니다.
인생은 짧고 허무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공했다고 해서 그것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성공했으면 성공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출세했다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출세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공부 많이 했다고 좋은 것 아닙니다.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열매가 없으면 우리 주님께서 '땅만 버린다.' 그러십니다.
교인들이 교회에 나오면 분류가 됩니다. 처음에 교회에 나오면 등록을 합니다. 그래서 등록 교인이라고 합니다. 등록 교인에 대하여 목사님은 지극한 관심을 갖는데 그 관심이 예배입니다. 그래서 예배에 참석하게 하고, 심방하고, 전화합니다. 이것이 예배 교인입니다. 그런데 예배 교인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그 다음에는 교제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다락방으로 형성됩니다. 다락방에서 교제하면서 한 단계 높아가는데 그 단계가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공부하고 훈련해서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단계가 있습니다. 배웠으면 헌신하고, 봉사하고, 전도해야 합니다. 그 단계보다 더 높은 단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리더가 되는 것입니다. 리더는 다른 사람을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헌신 교인까지는 지시를 받습니다. "예배 참석하시지요, 다락방에 참석하시지요, 훈련 받으시지요, 전도 하시지요" 이렇게 지도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단계가 된 사람은 지도를 받는 것이 아니고 사도가 되어서 다른 사람을 가르칩니다.
예수님이 열두 사람을 택하여 제자 삼아서 3년동안 가르치고 훈련합니다. 예수님이 3년동안 가르친 다음에는 손을 떼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그들로 하여금 땅끝까지 증인되게 하는데 사도로 나가서 그들이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웁니다. 교회를 세운다는 말은 다른 사람들을 전도하고 훈련해서 헌신하게 만들어서 가는 곳마다 새 역사를 창조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비전이며 열매에 대한 기대인 것입니다.
열매는 맛만 내는 것이 아니고 그 속에 반드시 씨가 있습니다. 맛을 내는 데까지는 헌신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씨가 있어서 거기에서 또 생산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가치요, 의미인 것입니다.
외국에 가면 교회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보고 "아이고 목사님 외국에는 교회가 없어서 믿음이 자꾸 떨어져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헌신 교인까지는 된 사람이나 사도가 안된 것입니다. 사도는 가는 곳마다 믿음이 떨어진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씨를 가지고 생산해내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주 앞으로 인도하면서 그들을 일으켜 세우는 자가 사도입니다.
저는 사랑하는 성도들에 대한 비전이 있습니다. 그 비전이 바로 사도까지 가는 비전인데 하늘나라에 갈 때 스데반과 같이 되어 우리 주님이 너무 반가워서 자리에서 일어서서 "아, 그대 오시나 천군 천사여 환영하라 카페트 깔고 나팔 불어 기뻐 맞이하라"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열매도 없이 들어오면 우리 주님이 "아이구 찍어 내버리려다가 두었더니 겨우 찾아오는구만! 내가 너에게 직분을 안주어야 할 것이거늘 직분 준 것이 부끄럽다" 이렇게 하실 것입니다.
둘째,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악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7절)
여기 '땅만 버린다'는 말은 열매 맺지 못하면 열매 맺지 못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해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나무가 뿌리를 박고 나무의 자양분을 다 흡수해버리기 때문에 땅이 황폐해진다는 것입니다. 다른데도 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땅만 버린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나 때문에 오히려 내 주위 사람들이 황폐케 되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 보십시오. 사업가가 혼자만 착취하려고 할 때 노동자를 황폐케 만듭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이나 교수가 자기 이권만을 위해서 가르치고 있다고 할 때 학생들의 심령을 황폐케 만드는 것입니다. 권력을 잡은 정치가가 자기의 권력만을 생각하고 독재할 때 국민의 심령을 황폐케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두려운 것입니까?
죄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적극적인 죄가 있고 소극적인 죄가 있습니다. 적극적인 죄는 악한 마음을 가지고 남을 해치고, 살인하고, 온갖 악을 행하는 죄입니다. 소극적인 죄는 선을 알고도 행치 않는 죄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일반적으로 소극적인 죄를 짓습니다.
기독교 전도학에서 '전도하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 누구냐?'라는 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불신자들 때문에 전도가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불교 신자 때문에 전도가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전도학에서 전도의 장애물은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우리 자신이 장해자입니다. 그것은 열매를 맺지 않기 때문입니다. 열매 없는 신자가 이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오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보면서 '왜 땅만 버리느냐?' 하는 주님의 책망이 내게 어떻게 임하는지 스스로 성찰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한번은 이른 아침에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데 몹시 시장했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이 없나' 하고 성밖에서 눈을 들고 보니까 잎이 무성한 무화과 나무가 있었습니다. 가까이 가서 보니까 열매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나무를 저주하십니다.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이 나무에 열매가 없을지어다" 하니까 나무가 말라버렸습니다. 나무에 있어야 할 열매가 없었기에 필요의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시장하신 주님께서 열매를 구했으나 열매가 없으므로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그를 저주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시장하셔서 무화과 나무같은 우리들을 가까이 오셔서 내게 열매가 있나 없나 찾으십니다.
무화과 나무는 잎이 무성했기 때문에 눈에 얼른 띄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나무가 많습니다. 사업이 잘 되면 눈에 잘 띕니다. 인물이 좋으면 눈에 잘 띕니다. 학력이 높으면 눈에 잘 보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눈에 잘 띄려고 출세합니다. 성공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눈에 잘 보여서 주님께서 가까이 가셔서 봤을 때 아무런 열매가 없을 때 주님이 그를 향해서 책망하십니다.
열매는 그 자체가 곧 자기에 대한 인격의 평가이면서 심판이 됩니다.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알지니" 열매없는 나무는 이미 살아있을 가치가 없습니다. 살았다 하는 외모는 있으나 죽은 나무입니다. 모든 존재는 가치를 상실할 때 이미 죽은 것입니다.
혹시 '나는 인물이 못생겼다.'고 낙심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낙심하지 마십시오. 열매가 있으면 됩니다. '나는 배운 것이 없다.'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그것으로 실망하지 마십시오. 열매가 있으면 됩니다. 삶의 열매가 있으면 됩니다. 에브라함 링컨은 천하에 못생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모두 우러러 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어느 곳에 가든지 꽃밭이 있으면 꽃을 심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향기를 주는 인생으로 살고 싶었노라." 자기 삶에 있어서 무슨 열매든지 맺도록 기도하십시오.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어느 부자 농가의 막내딸이 결혼하게 되었는데 주인의 사랑을 받는 가축들이 주인을 위해서 보답을 하고자 회의를 소집해가지고 모였습니다. 모인 자리에서 소가 나타나서 "내가 이 집에 오래 있었으니 회장이 되겠소" 하고 점잖은 목소리로 개회를 선언합니다. "며칠이 지나면 집 주인의 사랑받는 따님이 결혼하는데 누가 잔치 때 잔치상의 제물이 될 것인지 결정을 하려고 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주인을 위해서 할 일 없는 동물이 죽는 것이 좋겠는데 여러분 의향은 어떻습니까?" "좋소" 해서 만장일치로 결의되었기에 하나 하나 얘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소가 "나는 주인님의 농사 일을 해야 되니까 지금 죽을 수 없소. 짐도 날라야 되고 밭도 갈아야 되니까 어쩔 수 없소."라고 말했습니다. 다음에 나귀가 "나는 주인님을 태우고 다녀야 되고 이번에 결혼할 막내 따님도 모시고 가야 되니까 나는 어쩔 수 없이 살아야 되겠소."하고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개가 나와서 "나는 주인님의 도둑을 지켜야 되니까 죽을 수 없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고양이가 성큼 올라서서 "나는 주인님 창고의 곡식을 훔쳐먹는 쥐들을 지켜야 하니까 죽을 수 없소." 하고 말했습니다. 그때 닭이 일어서서 "꼬끼오" 하면서 "나는 이렇게 새벽마다 울어서 주인 깨워서 일 시켜야 되니까 나는 죽을 수가 없소." 하니까 옆에서 다른 동물들이 하는 말을 잠잠히 듣고 있던 돼지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서 이 몸 바칩니다. 나는 주인의 것을 먹고 한 일 없이 지금까지 살았으니 그저 주인 따님 잔치에 내가 죽겠소." 하고 말했습니다. "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다 자기 가치를 지니고 삽니다. 모든 짐승들은 자기 하는 일로 열매를 드렸지만 돼지는 하는 일이 없어서 죽어서라도 자기 할 일을 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어떤 모양으로든지 자기 존재가 마지막 죽으면서까지라도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임받는다면 이것이 바로 가치있는 것입니다.
셋째, 열매를 맺으려고 하는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8-9절)
여기 말씀이 주는 교훈이 큽니다. 주인이 과원지기에게 "무화과 나무를 찍어버리라"고 말하는데 과원지기는 "주인님 1년만 참으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그때 가서도 열매를 맺지 아니하면 주인님이 찍으소서."라고 주인에게 간청합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 과원지기는 희생적 투자를 합니다.
우리가 열매맺는 인생이 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두루 파야 합니다. '두루 판다'는 말은 나무의 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나무 뿌리가 잘 뻗을 수 있도록 주위의 쓴뿌리를 깊이 파서 뽑아내고, 돌을 파내고, 단단한 흙을 부드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 내게 과거의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 쓴 뿌리가 있습니다. 이것을 뽑아내야 됩니다. 주변에 나쁜 친구들이 있습니까? 정리해야 됩니다. 부정한 환경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거름을 준다'는 말은 하늘로부터 영양을 흡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이것이 뭡니까? 악인의 꾀를 끊고, 죄인의 길을 정리하고, 오만한 자리를 털고 일어나고,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기뻐하면서 받는 은혜, 거름을 받는 나무와 같이 내 심령속에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이때 열매를 맺게 됩니다.
열매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내적인 열매와 외적인 열매가 있습니다. 내적인 열매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회개의 열매입니다. 빛의 열매입니다. 외적인 열매는 전도의 열매입니다. 우리 스스로 예수를 믿으므로 말미암아 기도해서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기를 바랍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 5:9)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로마를 향해 가면서 "내가 너희들에게 열매 맺기를 원하여 가기를 원했다"라고 했습니다. 전도의 사건이 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내게 전도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이웃 교회 권사님의 간증입니다. 이 권사님이 40대까지만 해도 인물 내고 어떻게 하면 잘 사느냐, 좋은 집에 사느냐, 누가 알아주느냐, '사모님은 복도 많지' 이런 소리 듣는 것을 자랑으로 알고 살았답니다. 그런데 50이 넘으니까 잠자리에 들 때 쇼펜 하우어가 했던 말이 생각나더랍니다. "50이 넘으면 무덤의 소리가 들린다" 이 소리가 들리면서 '내가 죽으면 어떻게 하지' 그 생각이 떠오르는데 순간 이런 생각이 들더랍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무엇인가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집에서 사는 것을 자랑하며 살아온 것이 내가 산 것인가 이래서는 안되겠다. 나는 하나님 앞에 가야 할 사람인데 내가 하나님 앞에 갈 때 무슨 열매를 가지고 갈까 무엇을 드릴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인생이 조급해지더랍니다.
그래서 주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내가 50-70까지 일한다면 20년인데 20년동안 100명만 주께 영혼의 예물로 들고 가게 하소서." 기도하면서 소원을 갖고 길거리에 나가서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소원을 가지고 기도한 때부터 일년에 다섯명 이상씩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게 되더랍니다. 물론 많은 전도를 했지만 순수하게 결실 맺는 열매가 다섯명씩 되더랍니다. 일년에 다섯명씩 전도하면 20년동안 100명을 전도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소원을 하나 가지면 운명을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 소원을 가지십시다. 열매 맺는 소원을 가지십시다. 하려고 하면 됩니다. 내게 물질이 있는 것은 물질을 가지라고 열매를 맺으라고 있는 것입니다. 내게 건강을 주신 것은 건강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주신 것입니다. 내게 재능을 주신 것은 재능을 가지고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주신 것입니다. 내가 인물이 좋은 것은 인물 좋은 것을 자랑하라고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인물로 전도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오늘 내 입을 열고 복음을 전합시다. 가을이 되면 열매를 거두어 창고에 모아들이는 주인처럼 수많은 사람들을 하늘 창고인 교회로 인도해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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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 무화과 나무에 열매 맺기를 기대하고 무화과 나무를 심었는데 3년이 되어도 그 무화과 나무에 아무런 열매가 맺혀지지 않을 때 주인은 몹시 실망하고 과원지기를 불러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3년동안 이 나무의 열매를 기다렸으나 열매가 없으므로 이 나무를 찍어버리리라" 그때 과원지기는 "주인님이시여, 1년만 참아주소서. 내가 이 나무 주위를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그때도 열매를 맺지 아니하면 그때 찍으리이다." 이렇게 간청을 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적 경고를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을 두루 파고 친히 땀과 눈물과 피를 흘리셔서 거름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3년동안 열매 맺기를 기다리는 포도원 주인과 같이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 열매 맺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내가 더 이상 참고 인내할 수 없노라 나는 이 백성을 버려야 되겠다"라고 할 때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 조금 더 참아주소서. 이 백성을 버리지 마소서." 하고 간청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경고이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 기도 합니다. 우리를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수년이 되었는데도 전혀 아무런 열매가 없을 우리 주님께서 '내가 너에 대하여 실망하노라. 더 이상 내가 너를 향하여 기대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내가 너를 찍어버리리라'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화과 나무를 심는 목적은 분명합니다. 열매를 보기 위해서 심는 것입니다. 무화과는 꽃이 없는 나무입니다. 모든 과일들은 다 꽃이 있어서 아름다움이 있고 열매가 있지만 이 무화과는 꽃은 없고 열매만 있는 특별한 나무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의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국토가 넓고 인구가 많아서 하나님이 선택한 나라가 아니요, 다른 민족보다 특별한 재능이 있어서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증인으로 하나님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 택한 무화과 같은 민족입니다.
주님께서 무화과 나무에 대한 열매를 기대한 것처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열매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구원하시고, 또 자녀를 삼으신 것은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계획이 바로 열매라는 것입니다.
첫째, 주님은 우리에게서 열매를 찾고 계십니다.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6절)
'열매를 구하였다'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그리스도인다운 열매를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직분에 있어서 집사가 될 때는 집사다운 열매가 있어야 되고, 권사가 될 때는 권사다운 열매가 있어야 됩니다. 또 사회적인 활동에서 어떤 직책을 가졌을 때는 그 직책에 대한 열매가 있어야 됩니다. 회사에 가서는 자기가 맡은 분야에서 어떤 책임을 맡았으면 그 책임에 대한 열매를 맺어야 됩니다. 가정에서 어머니는 어머니다운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또 아버지는 아버지다운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6).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대하여 열매를 기대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16-18)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 그 나무의 가치는 열매로 결정되기 때문에 열매없는 나무는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열매없는 나무는 그 나무의 가치를 상실했으므로 주님으로부터 버림당한다는 것입니다.
가을이 오면 모든 나무가 열매를 맺습니다. 주인은 이른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이 오면 열매를 찾습니다. 그래서 농사짓는 사람은 열매를 보면서 그 마음에 기쁨을 얻습니다. 그런데 가을이 왔는데 나무에 열매가 없다면 주인이 얼마나 허탈감에 빠지겠습니까?
이와같이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때가 되매 예수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나에게 능력을 주셨는데 거기에 대한 아무런 보답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 하나님께서 얼마나 실망하시겠습니까?
인생을 살면서 봄같은 사춘기가 있고 가을같은 사추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춘기는 봄을 생각한다는 의미에서 사춘기이고, 사추기는 가을을 생각한다는 의미에서 사추기인데 인생이 청소년 때에는 봄과 같습니다. 그래서 봄의 화사함처럼 사춘기는 아름다움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봄바람은 불어도 좋습니다. 그런데 가을이 오면 낙엽이 지기 때문에 이때는 열매가 있을 때 가을의 가치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이가 중년기가 되었는데도 자기 인생에 아무런 열매가 없다면 이것은 비극입니다.
열매는 맛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의미는 맛을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청소년 때는 맛이 없습니다. 그것은 성장하는 것으로 자랑일 뿐이지 청소년 때는 인격이 없습니다. 공부 잘한다고 인격이 아닙니다. 재능있다고 인격이 아닙니다. 인물이 좋다고 인격이 아닙니다. 열매가 있었느냐? 그것이 인격입니다. 좋은 공부를 했느냐? 그 공부를 가지고 한 일이 있어야 인격입니다. 재능이 있느냐? 재능 가지고 한 일이 있을 때 그 열매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격입니다.
가을이 오면 우리는 자기에게 열매가 있나 없나를 생각해야 합니다. 가을이 왔는데 바람이 났다 그러면 보통 문제는 아닙니다. 봄바람이 불면 꽃이 피고 향기가 납니다. 그러나 가을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지면서 모두 다 스산합니다. 나이가 들어서 바람난 사람을 보면 집안에 찬바람이 부는데 아내는 우수수 기미가 끼고, 자식들은 다 뿔뿔이 흩어져서 가정이 흔들립니다. 이것이 비극입니다. 가을 인생은 분명히 열매를 찾아야 합니다.
인생은 짧고 허무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공했다고 해서 그것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성공했으면 성공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출세했다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출세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공부 많이 했다고 좋은 것 아닙니다.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열매가 없으면 우리 주님께서 '땅만 버린다.' 그러십니다.
교인들이 교회에 나오면 분류가 됩니다. 처음에 교회에 나오면 등록을 합니다. 그래서 등록 교인이라고 합니다. 등록 교인에 대하여 목사님은 지극한 관심을 갖는데 그 관심이 예배입니다. 그래서 예배에 참석하게 하고, 심방하고, 전화합니다. 이것이 예배 교인입니다. 그런데 예배 교인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그 다음에는 교제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다락방으로 형성됩니다. 다락방에서 교제하면서 한 단계 높아가는데 그 단계가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공부하고 훈련해서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단계가 있습니다. 배웠으면 헌신하고, 봉사하고, 전도해야 합니다. 그 단계보다 더 높은 단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리더가 되는 것입니다. 리더는 다른 사람을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헌신 교인까지는 지시를 받습니다. "예배 참석하시지요, 다락방에 참석하시지요, 훈련 받으시지요, 전도 하시지요" 이렇게 지도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단계가 된 사람은 지도를 받는 것이 아니고 사도가 되어서 다른 사람을 가르칩니다.
예수님이 열두 사람을 택하여 제자 삼아서 3년동안 가르치고 훈련합니다. 예수님이 3년동안 가르친 다음에는 손을 떼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그들로 하여금 땅끝까지 증인되게 하는데 사도로 나가서 그들이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웁니다. 교회를 세운다는 말은 다른 사람들을 전도하고 훈련해서 헌신하게 만들어서 가는 곳마다 새 역사를 창조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비전이며 열매에 대한 기대인 것입니다.
열매는 맛만 내는 것이 아니고 그 속에 반드시 씨가 있습니다. 맛을 내는 데까지는 헌신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씨가 있어서 거기에서 또 생산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가치요, 의미인 것입니다.
외국에 가면 교회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보고 "아이고 목사님 외국에는 교회가 없어서 믿음이 자꾸 떨어져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헌신 교인까지는 된 사람이나 사도가 안된 것입니다. 사도는 가는 곳마다 믿음이 떨어진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씨를 가지고 생산해내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주 앞으로 인도하면서 그들을 일으켜 세우는 자가 사도입니다.
저는 사랑하는 성도들에 대한 비전이 있습니다. 그 비전이 바로 사도까지 가는 비전인데 하늘나라에 갈 때 스데반과 같이 되어 우리 주님이 너무 반가워서 자리에서 일어서서 "아, 그대 오시나 천군 천사여 환영하라 카페트 깔고 나팔 불어 기뻐 맞이하라"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열매도 없이 들어오면 우리 주님이 "아이구 찍어 내버리려다가 두었더니 겨우 찾아오는구만! 내가 너에게 직분을 안주어야 할 것이거늘 직분 준 것이 부끄럽다" 이렇게 하실 것입니다.
둘째,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악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7절)
여기 '땅만 버린다'는 말은 열매 맺지 못하면 열매 맺지 못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해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나무가 뿌리를 박고 나무의 자양분을 다 흡수해버리기 때문에 땅이 황폐해진다는 것입니다. 다른데도 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땅만 버린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나 때문에 오히려 내 주위 사람들이 황폐케 되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 보십시오. 사업가가 혼자만 착취하려고 할 때 노동자를 황폐케 만듭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이나 교수가 자기 이권만을 위해서 가르치고 있다고 할 때 학생들의 심령을 황폐케 만드는 것입니다. 권력을 잡은 정치가가 자기의 권력만을 생각하고 독재할 때 국민의 심령을 황폐케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두려운 것입니까?
죄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적극적인 죄가 있고 소극적인 죄가 있습니다. 적극적인 죄는 악한 마음을 가지고 남을 해치고, 살인하고, 온갖 악을 행하는 죄입니다. 소극적인 죄는 선을 알고도 행치 않는 죄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일반적으로 소극적인 죄를 짓습니다.
기독교 전도학에서 '전도하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 누구냐?'라는 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불신자들 때문에 전도가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불교 신자 때문에 전도가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전도학에서 전도의 장애물은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우리 자신이 장해자입니다. 그것은 열매를 맺지 않기 때문입니다. 열매 없는 신자가 이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오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보면서 '왜 땅만 버리느냐?' 하는 주님의 책망이 내게 어떻게 임하는지 스스로 성찰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한번은 이른 아침에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데 몹시 시장했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이 없나' 하고 성밖에서 눈을 들고 보니까 잎이 무성한 무화과 나무가 있었습니다. 가까이 가서 보니까 열매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나무를 저주하십니다.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이 나무에 열매가 없을지어다" 하니까 나무가 말라버렸습니다. 나무에 있어야 할 열매가 없었기에 필요의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시장하신 주님께서 열매를 구했으나 열매가 없으므로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그를 저주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시장하셔서 무화과 나무같은 우리들을 가까이 오셔서 내게 열매가 있나 없나 찾으십니다.
무화과 나무는 잎이 무성했기 때문에 눈에 얼른 띄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나무가 많습니다. 사업이 잘 되면 눈에 잘 띕니다. 인물이 좋으면 눈에 잘 띕니다. 학력이 높으면 눈에 잘 보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눈에 잘 띄려고 출세합니다. 성공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눈에 잘 보여서 주님께서 가까이 가셔서 봤을 때 아무런 열매가 없을 때 주님이 그를 향해서 책망하십니다.
열매는 그 자체가 곧 자기에 대한 인격의 평가이면서 심판이 됩니다.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알지니" 열매없는 나무는 이미 살아있을 가치가 없습니다. 살았다 하는 외모는 있으나 죽은 나무입니다. 모든 존재는 가치를 상실할 때 이미 죽은 것입니다.
혹시 '나는 인물이 못생겼다.'고 낙심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낙심하지 마십시오. 열매가 있으면 됩니다. '나는 배운 것이 없다.'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그것으로 실망하지 마십시오. 열매가 있으면 됩니다. 삶의 열매가 있으면 됩니다. 에브라함 링컨은 천하에 못생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모두 우러러 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어느 곳에 가든지 꽃밭이 있으면 꽃을 심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향기를 주는 인생으로 살고 싶었노라." 자기 삶에 있어서 무슨 열매든지 맺도록 기도하십시오.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어느 부자 농가의 막내딸이 결혼하게 되었는데 주인의 사랑을 받는 가축들이 주인을 위해서 보답을 하고자 회의를 소집해가지고 모였습니다. 모인 자리에서 소가 나타나서 "내가 이 집에 오래 있었으니 회장이 되겠소" 하고 점잖은 목소리로 개회를 선언합니다. "며칠이 지나면 집 주인의 사랑받는 따님이 결혼하는데 누가 잔치 때 잔치상의 제물이 될 것인지 결정을 하려고 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주인을 위해서 할 일 없는 동물이 죽는 것이 좋겠는데 여러분 의향은 어떻습니까?" "좋소" 해서 만장일치로 결의되었기에 하나 하나 얘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소가 "나는 주인님의 농사 일을 해야 되니까 지금 죽을 수 없소. 짐도 날라야 되고 밭도 갈아야 되니까 어쩔 수 없소."라고 말했습니다. 다음에 나귀가 "나는 주인님을 태우고 다녀야 되고 이번에 결혼할 막내 따님도 모시고 가야 되니까 나는 어쩔 수 없이 살아야 되겠소."하고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개가 나와서 "나는 주인님의 도둑을 지켜야 되니까 죽을 수 없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고양이가 성큼 올라서서 "나는 주인님 창고의 곡식을 훔쳐먹는 쥐들을 지켜야 하니까 죽을 수 없소." 하고 말했습니다. 그때 닭이 일어서서 "꼬끼오" 하면서 "나는 이렇게 새벽마다 울어서 주인 깨워서 일 시켜야 되니까 나는 죽을 수가 없소." 하니까 옆에서 다른 동물들이 하는 말을 잠잠히 듣고 있던 돼지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서 이 몸 바칩니다. 나는 주인의 것을 먹고 한 일 없이 지금까지 살았으니 그저 주인 따님 잔치에 내가 죽겠소." 하고 말했습니다. "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다 자기 가치를 지니고 삽니다. 모든 짐승들은 자기 하는 일로 열매를 드렸지만 돼지는 하는 일이 없어서 죽어서라도 자기 할 일을 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어떤 모양으로든지 자기 존재가 마지막 죽으면서까지라도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임받는다면 이것이 바로 가치있는 것입니다.
셋째, 열매를 맺으려고 하는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8-9절)
여기 말씀이 주는 교훈이 큽니다. 주인이 과원지기에게 "무화과 나무를 찍어버리라"고 말하는데 과원지기는 "주인님 1년만 참으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그때 가서도 열매를 맺지 아니하면 주인님이 찍으소서."라고 주인에게 간청합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 과원지기는 희생적 투자를 합니다.
우리가 열매맺는 인생이 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두루 파야 합니다. '두루 판다'는 말은 나무의 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나무 뿌리가 잘 뻗을 수 있도록 주위의 쓴뿌리를 깊이 파서 뽑아내고, 돌을 파내고, 단단한 흙을 부드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 내게 과거의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 쓴 뿌리가 있습니다. 이것을 뽑아내야 됩니다. 주변에 나쁜 친구들이 있습니까? 정리해야 됩니다. 부정한 환경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거름을 준다'는 말은 하늘로부터 영양을 흡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이것이 뭡니까? 악인의 꾀를 끊고, 죄인의 길을 정리하고, 오만한 자리를 털고 일어나고,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기뻐하면서 받는 은혜, 거름을 받는 나무와 같이 내 심령속에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이때 열매를 맺게 됩니다.
열매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내적인 열매와 외적인 열매가 있습니다. 내적인 열매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회개의 열매입니다. 빛의 열매입니다. 외적인 열매는 전도의 열매입니다. 우리 스스로 예수를 믿으므로 말미암아 기도해서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기를 바랍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 5:9)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로마를 향해 가면서 "내가 너희들에게 열매 맺기를 원하여 가기를 원했다"라고 했습니다. 전도의 사건이 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내게 전도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이웃 교회 권사님의 간증입니다. 이 권사님이 40대까지만 해도 인물 내고 어떻게 하면 잘 사느냐, 좋은 집에 사느냐, 누가 알아주느냐, '사모님은 복도 많지' 이런 소리 듣는 것을 자랑으로 알고 살았답니다. 그런데 50이 넘으니까 잠자리에 들 때 쇼펜 하우어가 했던 말이 생각나더랍니다. "50이 넘으면 무덤의 소리가 들린다" 이 소리가 들리면서 '내가 죽으면 어떻게 하지' 그 생각이 떠오르는데 순간 이런 생각이 들더랍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무엇인가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집에서 사는 것을 자랑하며 살아온 것이 내가 산 것인가 이래서는 안되겠다. 나는 하나님 앞에 가야 할 사람인데 내가 하나님 앞에 갈 때 무슨 열매를 가지고 갈까 무엇을 드릴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인생이 조급해지더랍니다.
그래서 주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내가 50-70까지 일한다면 20년인데 20년동안 100명만 주께 영혼의 예물로 들고 가게 하소서." 기도하면서 소원을 갖고 길거리에 나가서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소원을 가지고 기도한 때부터 일년에 다섯명 이상씩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게 되더랍니다. 물론 많은 전도를 했지만 순수하게 결실 맺는 열매가 다섯명씩 되더랍니다. 일년에 다섯명씩 전도하면 20년동안 100명을 전도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소원을 하나 가지면 운명을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 소원을 가지십시다. 열매 맺는 소원을 가지십시다. 하려고 하면 됩니다. 내게 물질이 있는 것은 물질을 가지라고 열매를 맺으라고 있는 것입니다. 내게 건강을 주신 것은 건강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주신 것입니다. 내게 재능을 주신 것은 재능을 가지고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주신 것입니다. 내가 인물이 좋은 것은 인물 좋은 것을 자랑하라고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인물로 전도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오늘 내 입을 열고 복음을 전합시다. 가을이 되면 열매를 거두어 창고에 모아들이는 주인처럼 수많은 사람들을 하늘 창고인 교회로 인도해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