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님의 종교개혁(마 15:1-20) 

1-2 절 

예루살렘으로부터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당시의 신학자들인 서기관들이 예수께로 찾아 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따져 물었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그들의 질문을 다시 쉽게 번역하면, 
"당신의 제자들이 왜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습니까? 그들은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아니합니다." 
식사 전에 손을 씻는 전통이 무엇이길래 바리새인들에게 그렇게 중요했을까요. 
우선 이 규례에 대해 간단히 설명 드리겠습니다. 

손씻는 규례 

일반인들이 일반식사 전에 손을 씻는 규례는 율법이 명하는 바가 아닙니다 (레 15:5-27 16:26, 28 17:7-9 22:1-16). 
이러한 규례는 힐렐과 샴마이로부터 기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규례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2세기가 되어서 이며, 
그전에는 바리새인들을 위한 특별 규정에 불과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제사장들만이 지킬 의무가 있는 특별규례(레 22:6)를 
지키려는 노력을 통해 자신들을 제사장으로 간주하는 자기이해를 드려내 보입니다. 
이러한 자기이해는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출 19:6)란 
율법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한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규례를 통해 이스라엘의 거룩함을 회복하고, 
이스라엘을 제사장들의 나라로 만들어서 율법에 불복종하여 망한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그들의 가르침과 주장을 무시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유대민족주의에 대항하는 자들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 
래서 그들은 기를 쓰고 예수님을 찾아와 따져 물었을 것입니다. 

3 절 

예수님의 첫 번째 대답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느뇨?"였습니다. 
쉽게 다시 번역하면, "너희는 왜 너희들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폐하느냐?" 
예수님은 그들의 손씻는 규례가 일반화된 규례가 아닌 
그저 '너희들의 전통' 즉 바리새인들 집단 내부의 규례에 불과함을 지적하시면서, 
이 규례가 하나님의 율법에 어긋남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율법이 명하는 정결이란 
도덕적 정결이며, 식사 전에 손을 씻는 행위가 아님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레위기 20:7을 보면, "너희는 스스로 깨끗케 하여 거룩할찌어다"라는 말씀이 있는데, 
레위기 20장은 이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상숭배를 하지 말고 부모를 공경하며 
간음하지 말 것 명합니다. 예수님은 바 리새인들이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 
제사장들의 정결규례를 지켜야 한다고 율법을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적용: 하나님의 계명과 인간의 전통을 대조시킨 예수님의 정신은 
교회의 전통들을 성경말씀과 대조시키고 오직 성경을 외치며 교회를 개혁한 칼빈, 루터 등의 
종교개혁자들이 물려받았으며, 오늘 우리도 이 정신을 물려받아야 할 것입니다. 
수많은 종교개혁자들이 이 정신 때문에 고난을 당했고, 예수님도 이러한 주장으로 바리새인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12절). 
우리는 구약에서 비슷한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치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 
희가 여호와를 버린고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고 
성령에 감동되어 백성들 앞에 높이 서서 외쳤습니다 (대하 24:20). 그리고 결국 스가랴는 
왕과 백성들의 미움을 사서 돌에 맞아 죽었던 것입니다 (대하 24:21). 
하나님의 계명을 싫어하는 인간의 본성은 
구약시대나 예수님 시대나, 종교개혁시대나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전통을 개혁하려는 개혁자들은 언제나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가랴 선지자를 감동시키고 종교개혁자들을 감동시킨 동일한 예수의 영이 
우리를 감동케 하실 때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으로 인간의 전통을 타파하는 개혁의 깃발을 높이 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4 - 6 절 

예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시며 인간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부수는 예로서 바리새인들의 고르반 전통을 지적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4-6절). 
도대체 예수께서 지적하는 이 고르반 서원의 전통,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라는 표현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잠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고르반 전통 

유대인들의 경전 미쉬나 네다림 8:7에서 우리는 마 15:5에 소개된 고르반 서원과 거의 동일한 표현을 발견합니다: 
"네가 나로부터 이득을 얻을 것은 코남이로다." 차이점은 오직 고르반 대신 코남을 사용한 것인데, 
랍비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남용하지 않기 위해서 '여호와께 고르반'(레 1:2) 라는 용어대신 '코남'이라는 말을 지어낸 듯합니다. 

예루살렘 근처의 어느 무덤에서 발견된, 주후 1 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납골당 항아리 뚜껑에는 
"이 항아리에서 발견되는 유익한 것은 그 속에 들어 있는 사람이 하나님께 드린 고르반(제물)이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글 귀는 '고르반'이라는 말의 뜻을 추측하게 해 줍니다. 
문자적으로 고르반이란 성전에 드려진 제물인데, 
이것은 마치 성전에 드려진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사물을 가리키기도 한다고 보입니다. 
시체로 인해 부정해진 것은 성전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민 19:13, 16). 
이처럼 성전에 드려진 것으로 간주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이 사용하지 못하게 금지하려는 듯합니다. 
그런데, 고르반 서원을 통해 자신의 소유를 남이 사용하지 못하게 한 사람은 
성전에 바친 것으로 간주되어지는 그 사물들을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사용할 수 있었다고 보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성전에 드린 것이 아니고 드린 것으로 간주될 뿐인 사물을 
원 소유주가 사용할 수 있다고 얼마든지 가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고르반 전통은 순전히 남이 자신의 물건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에 불과한 것이며, 
이를 위하여 하나님이나 성전을 들먹이는 말장난이었던 것입니다. 

고르반 서약은 맹세와 구별되었습니다. 서약이란 율법을 어기는 경우에도 유효하지만, 맹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네다림 2.2).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져야 하지만, 서약은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율법을 어기는데 율법의 수여자 여호와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은 곤란했을 것입니다. 
고르반이 서약에 속한다는 것은 이 서약이 율법을 어기면서 시행될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입니다. 

고르반 전통에 대한 설명을 이상으로 마치고, 이 전통이 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이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공경하라는 용어는 구약정경의 맥락에서 물적인 지원을 포함합니다. 
잠언 3:9은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고 명합니다. 
부모공경도 재물과 완전히 무관하게 이루어질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신의 재물을 사용하지 못하게 금하는 고르반 서원을 정당화하는 전통은 부모공경의 계명을 폐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레 20:9)고 명하는데 
고르반 전통은 바로 부모를 훼방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전통을 실행하며 가르치는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따라 처벌을 받아야 할 터인데 그들이 오히려 제자들의 정당한 행위를 문제삼으니 
이야말로 도둑이 주인에게 큰소리치는 격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13절은 바로 이러한 함축을 분명하게 하고 있습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바리새인들이 "반드시 죽으리라"는 
예수님의 구약인용의 숨은 의미를 이해했다면 12절에서 보듯이 바리새인들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났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도리어 예수님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고르반 전통을 비판하신 것도 율법을 폐지하는 것이라고 이해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신명기 23:23에 따라 서원한 대로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은 고르반 서원을 한 후에 행하지 말라고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서원을 하는 것 자체를 문제 삼으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고르반 서원을 비롯한 율법을 어기는 것을 정당화하려고 고안된 
많은 서원들을 모두 금하셨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모두지 맹세하지 말찌니"라는 
예수님의 가르침도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7 - 8 절 

이사야 29:13절 말씀을 인용하신 예수님은 입술로 말하는 고르반 서원이 하나님을 존경하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난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임을 지적하십니다. 
이러한 고르반 서원을 가르치는 바리새인들을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라 부르십니다. 

외식이란 하나님을 공경하는 듯한 고르반 서원의 외적 표현과 
실제로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김으로써 하나님을 모독하는 
내적 의도간의 차이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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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외식은 오늘날의 교회에도 없지 않다고 봅니다.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을 경건한 신앙의 표현 같으나, 실은 예배당을 효과적으로 
건축하기 위한 건물 우상화이며, 
목회자를 제사장이라고 부르는 것도 경건한 신앙의 표현 같으나, 
실은 모든 성도가 제사장임을 믿으며 교회를 개혁한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의 성과를 헛되이 하고 
다시 중세 카톨릭으로 돌아가는 행위인 것입니다. 
이러한 언어표현들은 교회의 성장을 위해 효과가 있다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장이데올로기가 낳은 외식적인 표현들인 것입니다. 
외식하는 자들이라는 지적은 또한 율법을 알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율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의 소경됨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14절).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이 그러하였듯이 
오늘날의 교권을 장악한 교권주의자들에게도 이러한 착각이 있다고 봅니다. 
이들은 성경을 알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아무것도 모르는 교인들의 인도자라고 착각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들은 성경의 내용을 전혀 말하지 않고 그저 성경의 무오만을 목청이 터지라고 외치고, 
성경의 내용대로 살지도 않으면서 성경의 영감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성경의 권위를 믿는 경건한 보수신앙을 부르짖는 듯하나 
속으로는 그들의 교권을 사수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하늘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나무로써 뿌리뽑히고야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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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14 절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이 말씀은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는 제자들과 고르반 서원을 실행하는 바리새인들을 대조시키는 것입니다. 
손을 씻지 않아서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에 때가 묻어 있어서 사람이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고르반 서원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더러운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심지 않은 나무로서 뽑힘을 당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은 소경이므로 구덩이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라"고 명하십니다 (14절). 
문맥상 "그냥 두어라"는 번역보다 "그들을 떠나라"는 번역이 더 적합합니다. 
맹인된 인도자를 믿고 따라가다가는 함께 구덩이에 빠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용: 이 본문의 말씀을 오늘날 적용할 때 우리는 문자적으로 유대인들에게 적용하기보다 
그 의미를 오늘의 영적인 바리새인들에게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교회가 바리새인들처럼 인간을 더럽히는 많은 위선적인 전통을 만들어낸 지금 이 말씀은 
그러한 전통을 개혁하기 위해 적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 "그들을 떠나라"는 말씀대로 우리는 맹인된 종교지도자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특히 맹인된 종교지도자들이 선교에 방해가 되는 규례를 만들어 
우리가 이방인들과 교제하지 못하게 하는 이상한 규례들을 만들어 낼 때에는 그들의 가르침으로부터 떠날 필요가 있습니다. 
식사 전에 손을 씻는 바리새인들의 규례도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인들과 식사교제를 갖지 못하게 막는 장애물이었습니다. 
초대교회 때 이러한 규례를 주장하는 바리새유대인들은 기독교유대인들의 이방선교를 방해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러한 상황에서 바리새유대인들을 떠나 이방인을 선교하는 데로 유대기독교를 인도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전도를 방해하는 비성경적 문화관습이나 교리가 있다면 과감히 개혁해야 할 것입니다. 

15 - 20 절 

하나님의 뜻을 분간하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의 소경됨은 어디서 옵니까? 그것은 마음에서 옵니다 (18절). 
그들의 마음이 불결하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태 5:8 말씀대로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마음은 부모보다도 재물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불결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고르반 서원 같은 것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돈을 사랑함은 일만악의 뿌리임이 이 경우에도 해당합니다. 

결론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참된 경건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참된 경건은 열심히 목욕을 하는 것입니까? 불결한 음식을 먹지 않는 것입니까? 
술을 마시지 않는 것입니까? 8자 걸음을 걸으면 되는 것입니까? 
상스러운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까?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는 것입니까? 
목소리를 저음으로 깔고 느릿느릿 거룩하게 말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참된 경건은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하는 전통을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잘못을 언제든지 시인하고 고치려는 열린 마음자세입니다. 
인간의 전통보다 하나님의 법도를 높이는 겸손한 마음자세입니다. 
내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나단 선지자의 경고를 듣고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다윗의 마음입니다. 
이것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하고 
고난의 잔을 마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간의 전통을 과감히 개혁한 칼빈과 루터의 용기입니다. 

참된 경건은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그것은 구습을 타파하는 용기입니다. 
그것은 돈을 사랑하지 않는 능력입니다. 
그것은 성장이데올로기나 출세욕에 물들지 않는 순수함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참으로 사모하는 열정입니다. 
그것은 무시당하는 천민들과 운명을 같이하기 위해 왕궁을 떠난 모세의 용기입니다. 
그것은 죄인들과 과감히 식탁교제를 시도한 예수님과 제자들의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러한 용기와 사랑이 없는 경건은 거짓 경건이요, 
그것은 경건의 모양에 불과합니다. 
혹시 우리가 지금 바리새적인 외식가운데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경건을 위장하고 무언가 이기적인 일을 하고 있지는 않는가요? 
주께서 우리에게 참된 경건의 영과 회개하고 애통하는 마음을 부어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신현우 교수는 사본학, 공관복음문제, 역사적 예수 연구, 공관복음 주해 등을 연구하고 있으며, 신학적으로는 성경내용의 급진성에 입각한 급진복음주의를 경제적으로는 레위기 희년법을 적용한 지대조세론을 교회적으로는 세상을 위한 성도에 의한 예수의 교회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약력 
서울대학교 철학과 졸업 (1988년 2월) 
총신신학대학원 졸업 (1991년 2월) 
대한민국 공군학사장교 전역 (1994년 7월) 
암스테르담 자유대학 석사(doctorandus)과정 졸업 (1997년 12월) 
암스테드담 자유대학 박사 과정 입학 (1998년) 
- 지도교수: Prof. dr. M. C. de Boer (Amsterdam 자유대학) 
- 공동지도교수: Prof. dr. C. M. Tuckett (영국 Oxford 대학) 
암스테드담 자유대학 박사 Dr. Theol. (2003년 6월 24일) 

네덜란드 틴델신학대학원 방문학생 (2001. 7. 1. - 2003. 8.) 
유럽기독학술원 운영위원 (2002. 3. 1. - )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서울) 전임강사 (2003. 3. 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