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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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 / 마태복음 1:23
내수동교회 박희천 목사
선지자 이사야는 주전 700년경 앞으로 태어나실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였다(사7:14).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마1:21) 예수님을 이사야는 왜 임마누엘이라고 하였을까. 성경 전체의 교훈을 종합해 볼 때,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함은 너무나 당연하다.
성경은 전체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있는 자에게는 구원이 멀다고 하였다. 잠15:29에 여호와께서는 악인을 멀리하신다고 하였고, 하나님과의 거리가 먼 악인은 구원이 멀다고 하였다(시119:155). 그 까닭은 사59:1~2이다. 따라서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한다고 하였고(시73:27), 그러기에 “내가 저희를 떠나는 때에는 저희에게 화가 미치리로다”(호9:12)라고 하였다. 왜? 하나님께서 저희를 떠나사 하나님께로부터의 거리가 멀어지는 자에게는 구원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주께서 멀리 있는 자에게는 구원이 없는고로 시인들은 자기네가 고난을 겪는 중 주께서 멀리 하사 돕지 않으시는 때에 안타까워 부르짖곤 했다(시10:1, 22:1, 11, 19, 35:22, 38:21, 71:12, 74:3), 그리고 주님의 구원이 있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자기네들에게 가까이 오셔야 되겠기에 귀를 기울여 즉 가까이 오사 귀를 기울여 응답해 달라고 호소하였다(시17:6, 31:2, 39:12, 71:2, 86:1, 88:2, 102:2).
그리고 구원 자체는 아니더라도 구원과 4촌 되는 구원과 비슷한 은혜를 위해서도 주님께서 가까이 오셔야 가능하다는 사실들을 보여준다.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 위해서도(시25:16, 86:16, 90:13, 119:132), 위로하기 위하여서도(시71:21), 권고하기 위하여서도(시80:14), 소성을 위하여서도(사57:15), 우리의 생각 밖에 두려운 일을 행하시기 위해서도(사64:1~3) 하나님께서는 자기네들에게 가까이 오셔야 한다고 하였다.
하물며 구원 그 자체이랴, 구원의 4촌 은혜를 위해서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까이 오셔야 가능하다고 했는데, 구원 자체를 위해서라면 더욱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가까이 오셔야 가능하지 않겠는가. 성경은 하나님께서 누구를 구원하신다고 하실 때에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까이 하시는 것을 조건으로 삼으시는 사실을 보여준다(출3:8, 신23:14, 대하20:17, 시18:9→3, 16~19, 34:18, 109:31, 사63:8~9, 렘1:8, 19, 15:20, 30:11, 42:11, 46:27~28, 습3:17, 행7:9~10, 34). 그래서 시인들은 자기네들을 구원해 달라고 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자기네들에게 가까이 와 달라고 호소하였다(시6:4, 69:16, 18, 80:2, 86:16, 144:5~7).
인간들을 육신의 고난에서 구원하시는 일에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까이 와 주셔야 되셨거든, 하물며 인생들을, 그것도 전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안 하시고 그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그래서 임마누엘로 오신 것이다. 그러기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1:14) 우리에게 오신 것이다.
더구나 오시되 고후8:9이 되셔서 빌2:6~8로 오신 것이다. 죄와 사망에서 망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늘 보좌를 내어 놓으시고, 고후8:9, 빌2:6~8의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님께 영광과 존귀와 찬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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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수동교회 박희천 목사
선지자 이사야는 주전 700년경 앞으로 태어나실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였다(사7:14).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마1:21) 예수님을 이사야는 왜 임마누엘이라고 하였을까. 성경 전체의 교훈을 종합해 볼 때,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함은 너무나 당연하다.
성경은 전체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있는 자에게는 구원이 멀다고 하였다. 잠15:29에 여호와께서는 악인을 멀리하신다고 하였고, 하나님과의 거리가 먼 악인은 구원이 멀다고 하였다(시119:155). 그 까닭은 사59:1~2이다. 따라서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한다고 하였고(시73:27), 그러기에 “내가 저희를 떠나는 때에는 저희에게 화가 미치리로다”(호9:12)라고 하였다. 왜? 하나님께서 저희를 떠나사 하나님께로부터의 거리가 멀어지는 자에게는 구원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주께서 멀리 있는 자에게는 구원이 없는고로 시인들은 자기네가 고난을 겪는 중 주께서 멀리 하사 돕지 않으시는 때에 안타까워 부르짖곤 했다(시10:1, 22:1, 11, 19, 35:22, 38:21, 71:12, 74:3), 그리고 주님의 구원이 있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자기네들에게 가까이 오셔야 되겠기에 귀를 기울여 즉 가까이 오사 귀를 기울여 응답해 달라고 호소하였다(시17:6, 31:2, 39:12, 71:2, 86:1, 88:2, 102:2).
그리고 구원 자체는 아니더라도 구원과 4촌 되는 구원과 비슷한 은혜를 위해서도 주님께서 가까이 오셔야 가능하다는 사실들을 보여준다.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 위해서도(시25:16, 86:16, 90:13, 119:132), 위로하기 위하여서도(시71:21), 권고하기 위하여서도(시80:14), 소성을 위하여서도(사57:15), 우리의 생각 밖에 두려운 일을 행하시기 위해서도(사64:1~3) 하나님께서는 자기네들에게 가까이 오셔야 한다고 하였다.
하물며 구원 그 자체이랴, 구원의 4촌 은혜를 위해서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까이 오셔야 가능하다고 했는데, 구원 자체를 위해서라면 더욱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가까이 오셔야 가능하지 않겠는가. 성경은 하나님께서 누구를 구원하신다고 하실 때에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까이 하시는 것을 조건으로 삼으시는 사실을 보여준다(출3:8, 신23:14, 대하20:17, 시18:9→3, 16~19, 34:18, 109:31, 사63:8~9, 렘1:8, 19, 15:20, 30:11, 42:11, 46:27~28, 습3:17, 행7:9~10, 34). 그래서 시인들은 자기네들을 구원해 달라고 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자기네들에게 가까이 와 달라고 호소하였다(시6:4, 69:16, 18, 80:2, 86:16, 144:5~7).
인간들을 육신의 고난에서 구원하시는 일에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까이 와 주셔야 되셨거든, 하물며 인생들을, 그것도 전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안 하시고 그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그래서 임마누엘로 오신 것이다. 그러기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1:14) 우리에게 오신 것이다.
더구나 오시되 고후8:9이 되셔서 빌2:6~8로 오신 것이다. 죄와 사망에서 망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늘 보좌를 내어 놓으시고, 고후8:9, 빌2:6~8의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님께 영광과 존귀와 찬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