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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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준 목사(열린교회 담임)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행6:2-4)
들어가는 말
우리가 교회의 영적인 각성을 위해 섬기면 섬길수록 한 교회가 새로워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닫게 됩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교회가 직면하는 이러한 영적 위기는 결코 우리들만의 문제가 아니고, 교회가 이 땅에 서는 순간부터 부단히 계속되어 온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도행전 속에서 초대교회가 당면해야 했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영적으로 다가오는 위기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속에서 교회의 거룩한 영성과 순결에 도전해 오는 악한 영들의 세력을 만나게 됩니다.
이러한 영적 도전과 그에 대한 교회의 응전을 통해서 점철되어지는 영적인 싸움은 너무나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것들에 대한 바른 인식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세워 갈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가 만난 몇 차례의 중대한 영적인 위기 상황이 사도행전 앞부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교회를 근본적으로 위협해 왔던 것은 외부로부터의 핍박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 자체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영적인 위기는 오늘날에도 거의 동일한 유형으로 조국교회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역사로부터 배운다
이러한 영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안을 마련하고, 궁리하게 되면 될수록 우리는 점점 더 이러한 상황 앞에서 얼마나 무기력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위기를 만날 때 우리가 허둥댈 필요가 없는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교회가 맞이하는 영적인 어려움을 언제나 새로운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꼭 같은 영적 위기를 맞이하였던 초대교회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이러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위기 상황이 사도행전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교회의 위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조국교회는 이 본문을 통해서 교회의 생명에 관한 결정적인 가르침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이 본문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까닭은 첫째, 본문에서 경험된 초대교회의 위기와 다른 경우와는 달리 겉으로는 위기로 드러나지 않은 채 다가 온 심각한 도전이었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오늘날의 조국교회가 이와 유사한 영적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성령 강림 이후로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을 경험한 교회는 그 후 엄청난 능력과 담대함으로 핍박의 칼날이 번득거리는 예루살렘 거리에 그리스도인들을 쏟아 놓았습니다. 커다란 이적과 표적들과 함께 수많은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교회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가슴 벅차는 구원의 감격이 거리마다 교회마다 이루어졌습니다. 몇 차례의 중대한 위협과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도행전 네 번째 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제사장과 장로들로부터 소환을 받아 문초를 당하기도 했고, 다음 장에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성령을 속이는 범죄를 저지르므로 시체가 되어 들 것에 실려 나가기도 하였습니다. 또 같은 장에서는 사도들이 모두 사로 잡혀서 옥에 갇히는 위기를 맞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보살핌은 환경을 능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본문은 사도행전 다섯 번째 장과 연결되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모두 투옥되었으나 천사의 기적적인 구출로 다시 성전에 서서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보다 못한 대제사장과 사두개파의 사람들은 다시 사도들을 잡아서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을 전파하지 말라고 협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자신들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게 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서 기쁨으로 쉬지 않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5:42). 이같은 고난받는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의 노력은 많은 결실을 가져 왔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 졌는데....”(6:1)
나뉘는 마음
여기서 “제자”라는 표현이 처음 나타났는데 이것은 사도들 이외의 신앙을 고백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사회를 구제하는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는 과부와 고아를 돌보는 일이었습니다(약1:27).
아마도 이 과부들은 그들의 일용할 양식들을 교회에서 직접 공급해 주었던 것 같습니다. 교인들이 늘자 자연히 교회가 돌보아야 하는 과부들의 수도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대개 두 부류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한 부류는 헬라파 유대인들이었고, 또 한 부류는 히브리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것은 인종에 의한 구분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유대인이지만 그들 중에는 이미 본토를 떠나 당시 통용어였던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본토에 살면서도 이미 헬라어에만 익숙해져 버린 사람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한 부류의 사람들은 같은 유대인으로서 아람어(Aramaic)화한 히브리어를 말하는 히브리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사도들이 고의적으로 그랬을리는 없겠지만, 어쨌든 이 일용한 양식을 공급받음에 있어서 헬라파 과부들은 뭔가 불만스러운 소외 의식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히브리파 과부들을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2장에서 서로 물건을 통용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는 모습과는 대조가 되는 현실이었습니다. 이렇게 과부들을 위해 물질로 도와 주는 일에는 아마 열 두 사도들이 직접 나서서 일들을 주관했던 것 같습니다.
초대교회에 있어서 구제는 이와 같은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의 정신과도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서 여러 곳에서 예수님은 과부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보여 주셨습니다.
구제는 이와 같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초대교회에 중대한 영적인 위기를 가져왔습니다. 사랑과 이해가 가득 차있던 교회에 원망과 불평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좋은 일도 잘못하면...
여기서 우리는 때로는 가장 기독교적인 일도 바르게 행해지지 아니하고, 분명한 영적인 원리 속에서 이루어지지 아니하면, 그 일이 가장 종교적인 일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영성에 중대한 위기를 가져 오게 할 수도 있다는 엄숙한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표면상으로는 큰 부흥을 이루게 되었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세력있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영적인 면에서 은밀하게 커다란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은 성령에 붙잡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예리한 영적인 시각은 곧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점들을 분명하게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교회가 어떠한 위기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 위기에서 구출되는 것은 이러한 예리한 영적인 통찰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리한 영적인 통찰로써 영적인 위기를 꿰뚫어 보고, 간절한 열망으로 기도함으로써 교회는 다시 한번 말씀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열 두 사도들이 모였습니다. 열심히 구제함에도 원망과 불평의 소리가 그치지 않는 교회를 바라보면서 그들이 택한 것은 보다 공정하고 효과적인 구제방안에 대한 토의를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불평하는 헬라파 과부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을 설득할 책임자를 지명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영적인 상태를 점검했습니다. 그래서 모인 가운데 영적인 반성을 한 후에 다시 여러 교인들 앞에 나타납니다.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들을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6:2).
그러나 사도들의 이같은 진술은 몇 가지 점에서 상당한 의문을 갖게 합니다. 첫째는 이 과부들을 공궤하는 일의 중요성을 외면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과부들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베푸셨고, 그들의 비참함은 항상 예수님의 목회적인 관심의 주된 대상이었습니다.
더욱이 초대 교회에서는 과부를 돌아보는 그 자체가 경건임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에게 간곡히 권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란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제자들은 초대교회에서 이토록 강조되어 왔던 이 과부구제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이 사도들은 마치 말씀을 전하는 것과 과부를 구제하는 일이 서로 모순과 충돌을 일으키는 것처럼 흑백 논리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사도들이 “말씀을 제쳐놓고...”라고 한 진술에서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점들을 발견하게 합니다.
정말, 말씀을 젖혀 두었나
우리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주의해야 될 것은 생생한 성경 본문을 대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너무나 고정된 선입 관념에 마음이 더럽혀진 상태에서 본문을 대하게 됩니다. 그 결과로 우리는 너무나 귀중한 본문의 진리는 놓쳐 버리고 사소한 것에 매달리거나 진부한 결론을 붙듦으로서 성경의 진리가 가슴에 와 닿는 기쁨을 경험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의 이 같은 오류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도 그대로 반복됩니다.
우리는 흔히 이 본분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에 접하게 됩니다. 사도들이 성경 말씀을 전하지 않고,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칠 겨를도 없이 과부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이리 저리 바쁘게 뛰어 다니는 모습을 상상합니다 본문에서 “공궤를 일삼다”라는 말은 희랍원어로 “디아코네인 트라페자이스”(διακονείν τραπεξαις)입니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 “식탁을 차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상상은 더 나아가서 앞치마를 두르고 음식을 나르는 사도들의 모습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초대교회와 제자들의 사역의 정황에 대해서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한다면, 이런 상상은 곧 엉뚱한 비약임을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사도들은 오순절 성령 세례 이후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매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불붙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가장 중요한 일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문제를 일으킬 정도로 많아진 이 교회의 교세의 성장도 그들이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한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않더라”(5:42)라고 전합니다.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열정, 복음을 위한 열망에 사로잡혔던 제자들이 신자의 수가 늘어나자 그들의 식탁을 공궤하기 위하여 말씀을 제쳐놓았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는 발언입니다.
합당한 반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아주 부끄러운 고백을 성도들 앞에서 스스럼없이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제쳐놓고..” 매일 복음을 전하러 나갔을 것입니다. 정규적인 예배도 그대로 드려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때가 되면 제자들은 전과 다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고, 말씀으로 성도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사역과 교회의 영적인 상태에 대한 그들의 평가는 “우리는 말씀을 제쳐놓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이것은 크게 두 가지로 이해되었습니다. 밖으로 불신자를 향하여 전파되는 복음과 안으로 성도들의 교화를 위하여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구제를 하면서도 여전히 예수의 이름은 선포되고 있었고, 과부들을 공궤하는 데 사도들이 관여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가르쳐 지고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거의 못 느낄 정도로 교회는 예전과 거의 같았습니다. 외면적으로는 여전히 말씀 중심의 교회였습니다. 집회의 회수가 줄어든 것도 아니고, 전도 계획이 중대한 차질을 맞게 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들은 교회와 자신들의 사역에 대해 뼈아픈 반성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제쳐놓고...”
외면적으로 이 초대 공동체는 여전히 말씀 중심의 집단이었고, 사도들의 사역은 여전히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적인 상태는 이미 갈리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교인들은 말씀을 듣기는 해도 마음은 불평등한 구제로 말미암아 원망과 불평이 깃들게 되었습니다. 처음 사랑과 이해는 간 곳이 없고 예리한 이해관계에 대한 의식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이미 말씀을 떠나고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사도들대로 힘을 다해서 말씀을 전하고, 예와 다름없이 그분의 교훈을 가르치지만 그들의 마음은 과부들을 구제하는 복잡한 일로 마음이 온통 빼앗겨 있습니다. 마음이 빼앗겨 버린 교인들, 직업적으로 흐르는 말씀의 봉사 이 모든 것은 이 예루살렘 교회를 점점 심각한 영적인 위기로 몰고 갔습니다.
우리는 어떠한가?
혹시 이 예루살렘 교회의 위기를 이 시대의 교회들이 그대로 경험하고 있는 것을 여러분들은 아십니까? 저는 조국교회 속에서 이같은 위기의 반복을 봅니다. 매주일 설교는 행해지지만 신자들의 마음은 더 이상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는 데 있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은 그 예배와 말씀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종교적인 위안을 얻거나 부도덕한 삶을 교회 생활로 보상해 보려는 태도로교회에 나아 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비록 그 시작이 티끌처럼 작은 겨자씨와 같아도 새들이 깃들게 할 수 있으리만치 아름드리 나무로 자랄 수 있지만 그것은 오직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마음을 기울이는 심령들에게만 해당되는 능력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그 분을 향해 기울여지지 않는 한 말씀은 비록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말씀의 능력은 여러분과는 관계없습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은 향상될지 모르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는 여전히 가난함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씨뿌리는 비유를 기억해 보십시오. 돌밭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을 상기해 보십시오. 가시떨기에 뿌려졌던 말씀의 씨앗을 회상해 보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의 씨앗 그것은 작은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들에게 먹혀 버렸습니다. 아무런 힘도 없이 나온 싹이 말라 버렸습니다.
설교는 있으나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는 현장을 좀처럼 경험하지 못합니다. 성경공부는 있으나 모임 속에서 말씀은 제쳐져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있고 그 분의 말씀에 심령을 기울이는 겸손하고 가난한 마음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전무하여야 할 일...
이 시대의 가난하고 힘이 없는 교회를 위해서 사람들은 많은 문제들을 지적하고 여러 이야기들을 논의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조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을 제쳐놓은 삶을 회개하고 주님 앞에서 정직하게 돌아서지 않는다면 우리들의 교회도 역사도 소망이 없습니다.
형식적으로 선포되는 설교가 아니라, 가슴 저미는 열망과 하나님의 바른 시각 속에서 말씀이 선포되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반복되는 설교를 듣는 것과 말씀에 대한 안일하고 사무적인 태도가 교정되어야 합니다.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로움이 자신과 멀게 느껴지면 멀게 느껴질수록 여러분은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을 떠나 있으며 자신의 심령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살아 온 심령인지를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이 같은 영적인 위기에 대한 사도들의 처방은 분명히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본문은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은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6:3,4)
사도들은 교회의 이 같은 영적인 위기는 결코 외형적으로 말씀을 전파하지 않거나, 또는 그분의 교훈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먼저 자신들의 위협받는 영성을 재건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이 같은 노력에 의해서 교인들의 영적인 어려움들의 실체를 보여주고 그들로 하여금 다시 한번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게 하기를 결단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기도를 앞 세우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주목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사도들이 교회의 봉사를 위해서 일곱 집사를 선택한 것은 “말씀을 제쳐”두지 않고 말씀으로 온전히 봉사하기 위함이었는데, 막상 일곱 집사를 선택하고 난 다음에는 사도들의 말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말씀을 전하는 것 외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됩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영향을 받는 것이 기도와 얼마나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도의 교제를 상실한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 올 리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울이지 않는 기도의 세계가 하나님 중심일 리가 없습니다.
사도들이 이 능력에 찬 예루살렘교회가 갑자기 영적인 위기에 처한 것을 보면서 그들이 택한 대처 방안을 보십시오. “기도하는 것과 말씀을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이 얼마나 진부한 결론입니까? 그러나 여러분은 기억하십시오. 시대는 흐르고 역사는 바뀌어도 하나님께서 교회를 다루시는 방법은 항상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성령을 통해서 교회를 능력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교회가 수없이 많은 영적인 위기를 맞으면서 사람의 지혜로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은 모두 동원해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앞에서 한없이 초라한 교회의 모습을 봅니다. 도도히 흘러가는 시대의 조류를 거스릴 복음의 능력을 상실하고 현실적응과 타협의 수완만 늘어가는 교회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답게 세우고자 하는 우리의 수많은 노력들이 무엇을 가져다주었습니까? 조국교회가 이 시대 속에서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영광스러운 부흥을 누리던 시대의 교회가 일구었던 장엄한 선교적 성과와 사회변혁의 영향력들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낼 수 있는 많은 기회들을 무책임하고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에 몰두하느라고 놓쳐 버리고 있습니다. 가치 있는 고난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가는 도구로 살아가기보다는 무가치한 안일을 택하느라고 용맹스러운 복음의 공통체로서의 특성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교회로 하여금 현실에 잘 적응하게 하려는 인간적인 요령이나, 세속의 풍조와 쉽게 타협하는 능숙한 양보의 정신만으로는 교회 앞에 다가오는 거대한 영적 싸움에서 이런 것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붙들어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천년 전 우리와 꼭같은 영적인 위기의 파도를 넘어서 흑암에 사로잡힌 세상을 향해 다시금 항해해 나아가는 예루살렘의 교회의 승리의 함성 속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십니까? 시대는 바뀌고 역사는 갈리어도 교회가 직면하는 영적인 위기의 유형은 항상 동일합니다. 인간 풍조는 바뀌고 기독교에 대한 세상의 인식은 변천해도 하나님께서 영적인 위기에 직면한 교회를 건지시는 방법은 항상 동일한 것입니다.
교회를 건지시는 방법
우리는 이 본문 속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했으면서도 영적인 위기에 직면해야 했던 교회의 모습을 봅니다. 그 속에서 말씀을 제쳐놓은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실패를 봅니다. 그와 더불어서 하나님께서 이 엄청난 위기에서 교회를 건지시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건지시는 방법에 교회가 눈떴던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가 말씀으로 돌아가는 삶을 통해서 영적인 위기 속에서 아무 힘도 발휘할 수 없었던 자들을 새롭게 무장시키셨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교회가 말씀을 통하여 세상에 거룩한 영향을 끼치는 공동체가 되기 위하여 지도자들과 온교회가 기도에 헌신된 삶을 살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당신의 거룩한 영을 교회에 부으시게 합니다.
냉담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가운데 사랑과 은혜를 회복시키시고 기이한 능력으로 세상을 정복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교회의 본질적인 회복을 위하여 이 같은 기도의 회복이 절박함을 인식하게 되었고, 이러한 기도의 회복을 위하여는 자신들의 마음이 나뉘어지지 말아야 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영적인 위기 속에서 신음하는 이 거대한 예루살렘 교회의 신음소리 속에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그리고 이 영적인 위기를 극복하고 환호성 치며 어두운 세상을 향해 복음 들고 달려가는 회복의 함성소리 속에서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성숙한 결단과 반응
가장 중대한 영적인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것은 교회가 위기를 극복하는 올바른 하나님의 방법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도들이 간파한 것이었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 결정이 단순히 사도들이 택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영적인 위기에 빠진 교회를 살리시기 위해 예비한 방법을 그들이 바르게 택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서 사도들을 이 같은 올바른 선택을 성도들이 따라 주지 않았더라면 교회의 위기는 한층 더 심각한 양상으로 오래 머물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도들이 말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에 전무하리라”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의 반응에 대해 성경은 말합니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더라...”(6:5)
교회가 영적인 위기를 극복하는 데 있어서 성도들의 분별력 있는 반응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교회에 몸담은 그리스도인들의 성숙한 반응은 교회로 하여금 영적인 위기를 넘어가게 하는 중요한 요소인 것입니다.
오늘 어두운 영적인 위기 속에서 흔들리던 예루살렘 교회가 승리의 함성으로 다시 한번 흑암 세력을 향해 다가가는 모습을 보십시오. 영적인 위기를 극복한 이 교회의 형편에 대해서 성경은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흥왕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회복된 복음의 능력
교회는 자신의 영적인 도전 앞에 바르게 반응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택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에 말씀의 흥왕함을 주셨고, 급기야 사도들을 핍박하던 허다한 제사장들까지도 그리스도인들로 만들어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이 영적인 위기를 극복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이 친히 하신 일이었습니다 사도들의 예리한 영적 통찰력을 사용하셨습니다. 성도들의 성숙하고 신앙적인 반응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위대한 일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이 시대의 역사는 우리들의 교회의 분깃이고 우리를 조국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데 유용한 공동체로 거듭나도록 기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교회로 하여금 영적인 위기를 극복하게 하셨던 방법은 곧 오늘날의 힘 잃은 교회들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바로 교회로 하여금 기도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개인에게 있어서나 교회에 있어서나 동일한 원리입니다.
맺는 말
여러분들은 자신의 영적 삶에 만족하십니까? 무기력해 가는 신앙생활에 위기를 느끼지 않습니까? 먼저 교회가 기도하는 집이 되고 있는지 점검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심령의 지성소에 여전히 기도에 향불은 피어오르고 있습니까? 그 지성소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교제가 있습니까?
역사는 바뀌어도 위기에 빠진 교회를 건지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동일합니다. 세월은 변해도 위기에 빠진 여러분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동일합니다. 쉽게 넘어설 수 없는 영적인 위기 상황 앞에서 예루살렘교회는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을 전하는 것에 전무하리라”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이 고백 속에서 교회와 우리는 무엇을 결단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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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행6:2-4)
들어가는 말
우리가 교회의 영적인 각성을 위해 섬기면 섬길수록 한 교회가 새로워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닫게 됩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교회가 직면하는 이러한 영적 위기는 결코 우리들만의 문제가 아니고, 교회가 이 땅에 서는 순간부터 부단히 계속되어 온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도행전 속에서 초대교회가 당면해야 했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영적으로 다가오는 위기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속에서 교회의 거룩한 영성과 순결에 도전해 오는 악한 영들의 세력을 만나게 됩니다.
이러한 영적 도전과 그에 대한 교회의 응전을 통해서 점철되어지는 영적인 싸움은 너무나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것들에 대한 바른 인식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세워 갈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가 만난 몇 차례의 중대한 영적인 위기 상황이 사도행전 앞부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교회를 근본적으로 위협해 왔던 것은 외부로부터의 핍박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 자체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영적인 위기는 오늘날에도 거의 동일한 유형으로 조국교회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역사로부터 배운다
이러한 영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안을 마련하고, 궁리하게 되면 될수록 우리는 점점 더 이러한 상황 앞에서 얼마나 무기력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위기를 만날 때 우리가 허둥댈 필요가 없는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교회가 맞이하는 영적인 어려움을 언제나 새로운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꼭 같은 영적 위기를 맞이하였던 초대교회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이러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위기 상황이 사도행전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교회의 위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조국교회는 이 본문을 통해서 교회의 생명에 관한 결정적인 가르침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이 본문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까닭은 첫째, 본문에서 경험된 초대교회의 위기와 다른 경우와는 달리 겉으로는 위기로 드러나지 않은 채 다가 온 심각한 도전이었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오늘날의 조국교회가 이와 유사한 영적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성령 강림 이후로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을 경험한 교회는 그 후 엄청난 능력과 담대함으로 핍박의 칼날이 번득거리는 예루살렘 거리에 그리스도인들을 쏟아 놓았습니다. 커다란 이적과 표적들과 함께 수많은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교회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가슴 벅차는 구원의 감격이 거리마다 교회마다 이루어졌습니다. 몇 차례의 중대한 위협과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도행전 네 번째 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제사장과 장로들로부터 소환을 받아 문초를 당하기도 했고, 다음 장에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성령을 속이는 범죄를 저지르므로 시체가 되어 들 것에 실려 나가기도 하였습니다. 또 같은 장에서는 사도들이 모두 사로 잡혀서 옥에 갇히는 위기를 맞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보살핌은 환경을 능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본문은 사도행전 다섯 번째 장과 연결되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모두 투옥되었으나 천사의 기적적인 구출로 다시 성전에 서서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보다 못한 대제사장과 사두개파의 사람들은 다시 사도들을 잡아서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을 전파하지 말라고 협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자신들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게 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서 기쁨으로 쉬지 않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5:42). 이같은 고난받는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의 노력은 많은 결실을 가져 왔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 졌는데....”(6:1)
나뉘는 마음
여기서 “제자”라는 표현이 처음 나타났는데 이것은 사도들 이외의 신앙을 고백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사회를 구제하는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는 과부와 고아를 돌보는 일이었습니다(약1:27).
아마도 이 과부들은 그들의 일용할 양식들을 교회에서 직접 공급해 주었던 것 같습니다. 교인들이 늘자 자연히 교회가 돌보아야 하는 과부들의 수도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대개 두 부류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한 부류는 헬라파 유대인들이었고, 또 한 부류는 히브리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것은 인종에 의한 구분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유대인이지만 그들 중에는 이미 본토를 떠나 당시 통용어였던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본토에 살면서도 이미 헬라어에만 익숙해져 버린 사람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한 부류의 사람들은 같은 유대인으로서 아람어(Aramaic)화한 히브리어를 말하는 히브리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사도들이 고의적으로 그랬을리는 없겠지만, 어쨌든 이 일용한 양식을 공급받음에 있어서 헬라파 과부들은 뭔가 불만스러운 소외 의식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히브리파 과부들을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2장에서 서로 물건을 통용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는 모습과는 대조가 되는 현실이었습니다. 이렇게 과부들을 위해 물질로 도와 주는 일에는 아마 열 두 사도들이 직접 나서서 일들을 주관했던 것 같습니다.
초대교회에 있어서 구제는 이와 같은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의 정신과도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서 여러 곳에서 예수님은 과부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보여 주셨습니다.
구제는 이와 같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초대교회에 중대한 영적인 위기를 가져왔습니다. 사랑과 이해가 가득 차있던 교회에 원망과 불평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좋은 일도 잘못하면...
여기서 우리는 때로는 가장 기독교적인 일도 바르게 행해지지 아니하고, 분명한 영적인 원리 속에서 이루어지지 아니하면, 그 일이 가장 종교적인 일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영성에 중대한 위기를 가져 오게 할 수도 있다는 엄숙한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표면상으로는 큰 부흥을 이루게 되었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세력있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영적인 면에서 은밀하게 커다란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은 성령에 붙잡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예리한 영적인 시각은 곧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점들을 분명하게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교회가 어떠한 위기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 위기에서 구출되는 것은 이러한 예리한 영적인 통찰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리한 영적인 통찰로써 영적인 위기를 꿰뚫어 보고, 간절한 열망으로 기도함으로써 교회는 다시 한번 말씀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열 두 사도들이 모였습니다. 열심히 구제함에도 원망과 불평의 소리가 그치지 않는 교회를 바라보면서 그들이 택한 것은 보다 공정하고 효과적인 구제방안에 대한 토의를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불평하는 헬라파 과부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을 설득할 책임자를 지명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영적인 상태를 점검했습니다. 그래서 모인 가운데 영적인 반성을 한 후에 다시 여러 교인들 앞에 나타납니다.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들을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6:2).
그러나 사도들의 이같은 진술은 몇 가지 점에서 상당한 의문을 갖게 합니다. 첫째는 이 과부들을 공궤하는 일의 중요성을 외면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과부들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베푸셨고, 그들의 비참함은 항상 예수님의 목회적인 관심의 주된 대상이었습니다.
더욱이 초대 교회에서는 과부를 돌아보는 그 자체가 경건임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에게 간곡히 권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란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제자들은 초대교회에서 이토록 강조되어 왔던 이 과부구제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이 사도들은 마치 말씀을 전하는 것과 과부를 구제하는 일이 서로 모순과 충돌을 일으키는 것처럼 흑백 논리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사도들이 “말씀을 제쳐놓고...”라고 한 진술에서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점들을 발견하게 합니다.
정말, 말씀을 젖혀 두었나
우리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주의해야 될 것은 생생한 성경 본문을 대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너무나 고정된 선입 관념에 마음이 더럽혀진 상태에서 본문을 대하게 됩니다. 그 결과로 우리는 너무나 귀중한 본문의 진리는 놓쳐 버리고 사소한 것에 매달리거나 진부한 결론을 붙듦으로서 성경의 진리가 가슴에 와 닿는 기쁨을 경험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의 이 같은 오류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도 그대로 반복됩니다.
우리는 흔히 이 본분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에 접하게 됩니다. 사도들이 성경 말씀을 전하지 않고,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칠 겨를도 없이 과부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이리 저리 바쁘게 뛰어 다니는 모습을 상상합니다 본문에서 “공궤를 일삼다”라는 말은 희랍원어로 “디아코네인 트라페자이스”(διακονείν τραπεξαις)입니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 “식탁을 차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상상은 더 나아가서 앞치마를 두르고 음식을 나르는 사도들의 모습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초대교회와 제자들의 사역의 정황에 대해서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한다면, 이런 상상은 곧 엉뚱한 비약임을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사도들은 오순절 성령 세례 이후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매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불붙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가장 중요한 일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문제를 일으킬 정도로 많아진 이 교회의 교세의 성장도 그들이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한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않더라”(5:42)라고 전합니다.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열정, 복음을 위한 열망에 사로잡혔던 제자들이 신자의 수가 늘어나자 그들의 식탁을 공궤하기 위하여 말씀을 제쳐놓았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는 발언입니다.
합당한 반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아주 부끄러운 고백을 성도들 앞에서 스스럼없이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제쳐놓고..” 매일 복음을 전하러 나갔을 것입니다. 정규적인 예배도 그대로 드려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때가 되면 제자들은 전과 다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고, 말씀으로 성도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사역과 교회의 영적인 상태에 대한 그들의 평가는 “우리는 말씀을 제쳐놓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이것은 크게 두 가지로 이해되었습니다. 밖으로 불신자를 향하여 전파되는 복음과 안으로 성도들의 교화를 위하여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구제를 하면서도 여전히 예수의 이름은 선포되고 있었고, 과부들을 공궤하는 데 사도들이 관여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가르쳐 지고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거의 못 느낄 정도로 교회는 예전과 거의 같았습니다. 외면적으로는 여전히 말씀 중심의 교회였습니다. 집회의 회수가 줄어든 것도 아니고, 전도 계획이 중대한 차질을 맞게 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들은 교회와 자신들의 사역에 대해 뼈아픈 반성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제쳐놓고...”
외면적으로 이 초대 공동체는 여전히 말씀 중심의 집단이었고, 사도들의 사역은 여전히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적인 상태는 이미 갈리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교인들은 말씀을 듣기는 해도 마음은 불평등한 구제로 말미암아 원망과 불평이 깃들게 되었습니다. 처음 사랑과 이해는 간 곳이 없고 예리한 이해관계에 대한 의식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이미 말씀을 떠나고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사도들대로 힘을 다해서 말씀을 전하고, 예와 다름없이 그분의 교훈을 가르치지만 그들의 마음은 과부들을 구제하는 복잡한 일로 마음이 온통 빼앗겨 있습니다. 마음이 빼앗겨 버린 교인들, 직업적으로 흐르는 말씀의 봉사 이 모든 것은 이 예루살렘 교회를 점점 심각한 영적인 위기로 몰고 갔습니다.
우리는 어떠한가?
혹시 이 예루살렘 교회의 위기를 이 시대의 교회들이 그대로 경험하고 있는 것을 여러분들은 아십니까? 저는 조국교회 속에서 이같은 위기의 반복을 봅니다. 매주일 설교는 행해지지만 신자들의 마음은 더 이상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는 데 있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은 그 예배와 말씀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종교적인 위안을 얻거나 부도덕한 삶을 교회 생활로 보상해 보려는 태도로교회에 나아 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비록 그 시작이 티끌처럼 작은 겨자씨와 같아도 새들이 깃들게 할 수 있으리만치 아름드리 나무로 자랄 수 있지만 그것은 오직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마음을 기울이는 심령들에게만 해당되는 능력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그 분을 향해 기울여지지 않는 한 말씀은 비록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말씀의 능력은 여러분과는 관계없습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은 향상될지 모르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는 여전히 가난함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씨뿌리는 비유를 기억해 보십시오. 돌밭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을 상기해 보십시오. 가시떨기에 뿌려졌던 말씀의 씨앗을 회상해 보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의 씨앗 그것은 작은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들에게 먹혀 버렸습니다. 아무런 힘도 없이 나온 싹이 말라 버렸습니다.
설교는 있으나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는 현장을 좀처럼 경험하지 못합니다. 성경공부는 있으나 모임 속에서 말씀은 제쳐져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있고 그 분의 말씀에 심령을 기울이는 겸손하고 가난한 마음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전무하여야 할 일...
이 시대의 가난하고 힘이 없는 교회를 위해서 사람들은 많은 문제들을 지적하고 여러 이야기들을 논의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조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을 제쳐놓은 삶을 회개하고 주님 앞에서 정직하게 돌아서지 않는다면 우리들의 교회도 역사도 소망이 없습니다.
형식적으로 선포되는 설교가 아니라, 가슴 저미는 열망과 하나님의 바른 시각 속에서 말씀이 선포되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반복되는 설교를 듣는 것과 말씀에 대한 안일하고 사무적인 태도가 교정되어야 합니다.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로움이 자신과 멀게 느껴지면 멀게 느껴질수록 여러분은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을 떠나 있으며 자신의 심령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살아 온 심령인지를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이 같은 영적인 위기에 대한 사도들의 처방은 분명히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본문은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은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6:3,4)
사도들은 교회의 이 같은 영적인 위기는 결코 외형적으로 말씀을 전파하지 않거나, 또는 그분의 교훈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먼저 자신들의 위협받는 영성을 재건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이 같은 노력에 의해서 교인들의 영적인 어려움들의 실체를 보여주고 그들로 하여금 다시 한번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게 하기를 결단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기도를 앞 세우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주목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사도들이 교회의 봉사를 위해서 일곱 집사를 선택한 것은 “말씀을 제쳐”두지 않고 말씀으로 온전히 봉사하기 위함이었는데, 막상 일곱 집사를 선택하고 난 다음에는 사도들의 말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말씀을 전하는 것 외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됩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영향을 받는 것이 기도와 얼마나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도의 교제를 상실한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 올 리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울이지 않는 기도의 세계가 하나님 중심일 리가 없습니다.
사도들이 이 능력에 찬 예루살렘교회가 갑자기 영적인 위기에 처한 것을 보면서 그들이 택한 대처 방안을 보십시오. “기도하는 것과 말씀을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이 얼마나 진부한 결론입니까? 그러나 여러분은 기억하십시오. 시대는 흐르고 역사는 바뀌어도 하나님께서 교회를 다루시는 방법은 항상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성령을 통해서 교회를 능력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교회가 수없이 많은 영적인 위기를 맞으면서 사람의 지혜로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은 모두 동원해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앞에서 한없이 초라한 교회의 모습을 봅니다. 도도히 흘러가는 시대의 조류를 거스릴 복음의 능력을 상실하고 현실적응과 타협의 수완만 늘어가는 교회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답게 세우고자 하는 우리의 수많은 노력들이 무엇을 가져다주었습니까? 조국교회가 이 시대 속에서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영광스러운 부흥을 누리던 시대의 교회가 일구었던 장엄한 선교적 성과와 사회변혁의 영향력들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낼 수 있는 많은 기회들을 무책임하고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에 몰두하느라고 놓쳐 버리고 있습니다. 가치 있는 고난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가는 도구로 살아가기보다는 무가치한 안일을 택하느라고 용맹스러운 복음의 공통체로서의 특성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교회로 하여금 현실에 잘 적응하게 하려는 인간적인 요령이나, 세속의 풍조와 쉽게 타협하는 능숙한 양보의 정신만으로는 교회 앞에 다가오는 거대한 영적 싸움에서 이런 것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붙들어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천년 전 우리와 꼭같은 영적인 위기의 파도를 넘어서 흑암에 사로잡힌 세상을 향해 다시금 항해해 나아가는 예루살렘의 교회의 승리의 함성 속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십니까? 시대는 바뀌고 역사는 갈리어도 교회가 직면하는 영적인 위기의 유형은 항상 동일합니다. 인간 풍조는 바뀌고 기독교에 대한 세상의 인식은 변천해도 하나님께서 영적인 위기에 직면한 교회를 건지시는 방법은 항상 동일한 것입니다.
교회를 건지시는 방법
우리는 이 본문 속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했으면서도 영적인 위기에 직면해야 했던 교회의 모습을 봅니다. 그 속에서 말씀을 제쳐놓은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실패를 봅니다. 그와 더불어서 하나님께서 이 엄청난 위기에서 교회를 건지시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건지시는 방법에 교회가 눈떴던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가 말씀으로 돌아가는 삶을 통해서 영적인 위기 속에서 아무 힘도 발휘할 수 없었던 자들을 새롭게 무장시키셨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교회가 말씀을 통하여 세상에 거룩한 영향을 끼치는 공동체가 되기 위하여 지도자들과 온교회가 기도에 헌신된 삶을 살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당신의 거룩한 영을 교회에 부으시게 합니다.
냉담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가운데 사랑과 은혜를 회복시키시고 기이한 능력으로 세상을 정복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교회의 본질적인 회복을 위하여 이 같은 기도의 회복이 절박함을 인식하게 되었고, 이러한 기도의 회복을 위하여는 자신들의 마음이 나뉘어지지 말아야 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영적인 위기 속에서 신음하는 이 거대한 예루살렘 교회의 신음소리 속에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그리고 이 영적인 위기를 극복하고 환호성 치며 어두운 세상을 향해 복음 들고 달려가는 회복의 함성소리 속에서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성숙한 결단과 반응
가장 중대한 영적인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것은 교회가 위기를 극복하는 올바른 하나님의 방법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도들이 간파한 것이었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 결정이 단순히 사도들이 택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영적인 위기에 빠진 교회를 살리시기 위해 예비한 방법을 그들이 바르게 택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서 사도들을 이 같은 올바른 선택을 성도들이 따라 주지 않았더라면 교회의 위기는 한층 더 심각한 양상으로 오래 머물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도들이 말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에 전무하리라”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의 반응에 대해 성경은 말합니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더라...”(6:5)
교회가 영적인 위기를 극복하는 데 있어서 성도들의 분별력 있는 반응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교회에 몸담은 그리스도인들의 성숙한 반응은 교회로 하여금 영적인 위기를 넘어가게 하는 중요한 요소인 것입니다.
오늘 어두운 영적인 위기 속에서 흔들리던 예루살렘 교회가 승리의 함성으로 다시 한번 흑암 세력을 향해 다가가는 모습을 보십시오. 영적인 위기를 극복한 이 교회의 형편에 대해서 성경은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흥왕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회복된 복음의 능력
교회는 자신의 영적인 도전 앞에 바르게 반응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택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에 말씀의 흥왕함을 주셨고, 급기야 사도들을 핍박하던 허다한 제사장들까지도 그리스도인들로 만들어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이 영적인 위기를 극복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이 친히 하신 일이었습니다 사도들의 예리한 영적 통찰력을 사용하셨습니다. 성도들의 성숙하고 신앙적인 반응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위대한 일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이 시대의 역사는 우리들의 교회의 분깃이고 우리를 조국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데 유용한 공동체로 거듭나도록 기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교회로 하여금 영적인 위기를 극복하게 하셨던 방법은 곧 오늘날의 힘 잃은 교회들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바로 교회로 하여금 기도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개인에게 있어서나 교회에 있어서나 동일한 원리입니다.
맺는 말
여러분들은 자신의 영적 삶에 만족하십니까? 무기력해 가는 신앙생활에 위기를 느끼지 않습니까? 먼저 교회가 기도하는 집이 되고 있는지 점검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심령의 지성소에 여전히 기도에 향불은 피어오르고 있습니까? 그 지성소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교제가 있습니까?
역사는 바뀌어도 위기에 빠진 교회를 건지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동일합니다. 세월은 변해도 위기에 빠진 여러분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동일합니다. 쉽게 넘어설 수 없는 영적인 위기 상황 앞에서 예루살렘교회는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을 전하는 것에 전무하리라”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이 고백 속에서 교회와 우리는 무엇을 결단해야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