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과 소망
-이성희목사/연동교회

이사야 26 : 16~19, 베드로전서 1 : 3~7



“생명이 있는 곳에 소망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소망을 가지고 삽니다. 왜냐하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살아 있는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온 천하를 다 얻어도 목숨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희망이 없어지면 죽은 것입니다. 희망은 사람으로 하여금 살게 합니다. 그러나 절망은 죽음입니다. 인간의 희망은 욕구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희망이 없는 사람이다”는 말은 최대의 욕입니다. 

세상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희망대로 된다고 하더라도 참 만족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희망은 가시적이며, 현실적이며, 임시적이며, 영원한 만족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업가가 돈을 얼마나 벌어야 만족하겠습니까? 공부하는 사람이 얼마나 알면 이제 됐다고 하겠습니까? 정치가의 최고의 희망은 대통령인데 이 나라에 대통령은 한 사람밖에 없으니 다른 정치가들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세상의 것을 가지고는 희망을 줄 수 없기 때문에 세상의 것은 얻는 그 날부터 또 다른 불만을 제공합니다. 

솔로몬은 지혜가 풍성했습니다. 변방의 왕들은 지혜를 배우기 위하여 솔로몬에게 왔습니다. 그는 후비가 700명이었고, 빈장이 300명이었습니다. 솔로몬 시절에 예루살렘 거리는 은덩이가 돌덩이같이 널려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고 토로하였습니다. 인간에게 만족은 재물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재물이 인간의 소망은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기에 하나님의 것으로 다시 지어질 때에 참만족과 소망이 있습니다. 참소망이 무엇인지 성경을 통하여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다시 태어남의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베드로전서 1:3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 거듭남의 조건인 것을 말씀합니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거듭남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죽어서 끝나는 삶이라면 거듭남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우리가 부활의 소망이 있다면 거듭나야 합니다. 우리가 다시 살려면 거듭남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영원히 사는 삶을 알고 있기에 쉽게 죽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쉽게 죽어야 좋은 죽음입니다. 이 세상에 지나친 미련을 가지고 죽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좋은 백성은 아닙니다. 세상에 미련을 잔뜩 두고 사는 사람들은 너무 죽는 것이 힘듭니다. 죽지 않으려고 버둥댑니다. 웬 미련이 그렇게 많은지 돈으로 목숨을 연장하려 합니다. 반면에 영원한 삶에 대한 소망이 있는 사람은 죽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살지만 삶에 대한 지나친 미련을 두지 않습니다. 

본회퍼는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무섭다”고 하였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생명의 종교입니다. 이 세상에서 생명이 있는 것이 가장 무섭습니다. 맹수도 죽으면 새들이 와서 고기를 뜯어먹습니다. 아무리 큰 물고기라도 죽으면 물에 떠내려갑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먹히지 않고 물에 떠내려가지 않습니다. 생명이 있는 물고기는 짠 바다에 살지만 몸이 짜지 않습니다. 생명이 있는 물고기는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우리 영혼이 다시 사는 중생은 육적으로 영원히 사는 부활에 근거합니다. 이 부활의 확신이 우리의 중생의 조건이며 중생한 사람은 부활의 신앙 속에 살 수 있습니다. 



둘째, 중생의 증거는 소망입니다. 

베드로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합니다. 거듭난 중생의 삶을 사는 사람은 소망이 있습니다. 중생은 그 자체가 소망입니다. 중생하여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삶인지 모릅니다. 

얼마 전 우리 나라에서는 환생과 전생에 관한 관심을 많이 가졌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전생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알고 싶어 합니다. 다시 환생하여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사람들이 왜 환생이나 전생에 관심을 가지는지 아십니까? 중생의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거듭나 산 소망이 있다면 환생이나 전생 따위는 관심거리도 안 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by) 구원받았고 소망 안에서(in)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소망이 무엇이지요? 최근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의 폐단으로 완전히 오염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지향하는 소망마저 물질적인 것으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돈을 많이 소유하는 것이 소망으로 전락되었습니다. 재물은 삶의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삶의 목적으로 전도되었습니다. 로또 복권에 전 국민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검찰이 들추는 데마다 부정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이제는 들추기도 어렵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세상은 돈 세상이 되었습니다. 세상이 돌아버렸습니다. 

막스 웨버는 자본주의 윤리의 최고의 선은 돈을 많이 벌고 더 버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자본주의적 경제 질서는 화폐증식의 소명에 대한 몰두를 필요로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돈이 우리 삶에 굉장한 것을 줄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돈은 우리에게 소망을 줄 수 없으며 우리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13에서 소망은 항상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소망은 있어야 하고 소망은 확실해야 합니다. 중생은 소망을 제공합니다. 중생은 참소망을 알게 합니다. 그리고 중생은 하늘의 소망이며 산 소망입니다. 



셋째, 중생의 결과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입니다. 

베드로전서 1:5에는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라고 합니다.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보호하심을 입는 것은 하나님의 보너스입니다. 영혼만 잘 되는 것이 아니라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게 되는 내생과 금생의 복입니다. 

중생은 내생에서의 복일뿐만 아니라 금생에서의 복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는 것은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삶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잘 되는 것뿐만 아니라 이 나라에서도 잘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도우심인데 그 근거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거듭난 자녀는 하나님이 책임지고 지켜 주십니다. 

동물의 세계에 보면 포유동물과 난생동물 가운데 포유동물이 난생동물보다 모성애가 강합니다. 오리새끼들이 어미를 따라 차가 쌩쌩 지나가는 길을 지나가는데 어미는 뒤에 새끼들이 따라오건 말건 그냥 갑니다. 그러나 포유동물들은 그렇게 새끼를 인도하지 않습니다. 극진하게 보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낳으셨기 때문에 얼마나 극진하게 보호하시는지 모릅니다. 물이 침몰치 못하게 하고 불이 사르지 못하게 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은 지금도 우리에게 똑같이 임하십니다. 물 같은 환난이 있습니까? 두려워하지 마세요. 불 같은 시험이 있습니까? 겁내지 마세요.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이 친히 사랑하시는 자녀이기에 보호하십니다. 물과 불을 겁내지 마시고 우리가 거듭나지 않았음을 겁내야 합니다. 우리가 거듭남의 산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십시오. 세상에 많은 소망이 있지만 산 소망이 있는 사람은 죽어도 사는 사람입니다. 이 거듭남을 통한 소망이 우리에게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