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와 경건생활


▲ 서창원 목사
경건의 삶이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나타낸 ‘성경 밖에서 만나지는 성경적인 사람들’인 청교도들은 성도들의 거룩한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오늘도 우리 모두에게 증거하고 있다. 적어도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을 받은 성도들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은 자이기 때문에 새 부대에 담은 새술처럼 자신을 깨끗이 보존하는 영적 생활을 추구해야 한다. 이 일을 위하여 칼빈은 성찬예식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성화를 점검하는 교회의 책임을 크게 강조하였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만 강조하고 이에 수반되는 성결된 삶을 나타내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영의 내적 임재를 증명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다. 필자는 본 논고에서 청교도들이 이해한 경건이란 무엇이며 지속적인 경건의 능력을 위하여 무엇을 사용했는지를 살펴보면서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주는 경건 생활의 활력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려고 한다.

1. 경건 생활을 위한 기본적인 전제들

청교도들은 사람이 경건한 생활을 하게 되는데 있어서 먼저 그리스도인이 어떤 존재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였다. 특히 오웬은 그리스도인도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바른 이해만이 왜 우리가 경건하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된다고 했다. 지.정.의.를 지닌 인간은 무엇보다도 타락한 인간으로서의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 길만이 범죄한 인간에게 복음이 구원의 복된 소식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타락이 인간에게 가져다 준 것은 단순히 하나님과의 분리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원수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자이며 무감각한 죽은 자의 모습이었다. 타락한 인간은 선을 추종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오로지 육체의 원하는 것을 따라 행하며 진리를 비진리로 바꾸는데 선수가 된 것이다.

죄성으로 인한 인간의 타락한 상태에 대하여 존 오웬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죄의 본성과 의도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며 죄의 대적자는 입법자이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의 길인 복음의 시발자이신 하나님이다. 따라서 불경과 불의와 불신과 배교 행위는 타락한 인간에게 내주하고 있는 죄성이 죄의 실체를 표현하는 자연스러운 형태인 것이다’(오웬의 전작품집, 6권 p.178). 청교도들이 이와 같은 죄의 실체를 폭로하고 나선 것은 그리스도인의 경건생활이 이 문제를 확실히 다지기 전에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죄성을 지닌 인간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하고 인간의 지.정.의. 등 모든 분야에 걸쳐서 선하신 하나님의 모든 것에 대항하고 혐오하며 도저히 하나님에게 굴복할 수 없는 존재라는 인식이 깊이 자리를 잡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복음이 엄청난 능력으로 역사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와 같은 자기 신뢰와 자기 만족의 모든 것을 다 무용한 것으로 인정하는 자들이다. 경건이란 바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것인데, 자기 비하나 자기 정죄 또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경건의 능력은 나타날 수가 없는 것이다.

자신의 처지가 어떠한지를 알게되면 바로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인간임을 알게된다.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시고 모든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벗어나 영생의 축복을 누리게 되는 인간의 참 행복을 발견한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스럽게 경건한 영적 생활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인간이 이제는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은 새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와 감격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은혜로 말미암아 쏟아놓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경건의 시작인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죄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 때부터 자신의 영역을 잃어버린 사단의 공격이 거세게 다가온다. 그래서 성경에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전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죄와 싸우는 일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계속되는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하여 오웬은 기독교인들이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하면서 ‘죄는 가장 잠잠해 보일 때 가장 잠잠하지 않은 것이며 죄의 호수는 잠잠할 때 가장 깊다’는 경각심을 일깨워 주었다. 이것이 지속적인 경건의 필요성이다. 이 경건 생활의 필요성을 청교도들은 신학적으로 ‘성화’(Sanctification)라고 불렀다.

2. 성화 또는 경건 생활이란 무엇인가?

칼빈은 성화를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로 온전히 전환’하는 것으로 ‘우리의 육체와 옛 사람을 죽이며 성령의 지배를 받는 활력 있는 삶’을 함축하는 것으로 정의하였다(기독교 강요,3권 3장5항). 칼빈 이후 모든 개신교 지도자들 특히 청교도들도 모든 성도의 심령 속에서 역사 하시는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 하심에 의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신자의 거룩한 생활이라고 믿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을 중생한 즉시 주의 나라로 데려가시지 않으시고 이 땅에 여전히 살게 하시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무엇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는 거룩한 생활인 것이다. 이것이 성화교리의 주된 목적이 되는 것이다. 우리를 영원 전부터 예정하여 주신 목적이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함’이라면(롬 8:29)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 4:3) 또는 사도들의 권면처럼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는 것이 명백한 것이다. 아버지의 거룩한 나라에 들어가 살기에 합당한 자가 되도록 성결된 삶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존 오웬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성화란 신자들의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영의 직접적인 역사로서 그들의 본성을 죄의 오염과 부정함으로부터 정결케 씻어내고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새롭게 심어줌으로서 성도들이 은혜의 신령하고 습관적인 원리를 따라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이끄는 것이다’(전집 3권 p.386).

한 마디로 말해서 거룩한 생활은 성도 스스로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심령 속에서 역사 하시는 성령의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나타나는 열매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성령의 역사 하심과 말씀과의 관계가 아주 중요한 것임을 엿보게 해준다. 대부분의 청교도들은 성령의 첫 번째 사역은 중생케하는 역사를 제외하고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를 실행하도록 도우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장인데 성장 그 자체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르는 영적 증진을 말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생활은 주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삶을 말하는 것이며 이것은 우리의 생명이 다 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해야 할 의무인 것이다. 에드윈 산디스(Edwin Sandys)는 ‘우리가 하나님께 빚지고 있는 의무는 우리가 하나님을 계속적으로 섬기는 생활의 거룩함과 의로움이다’ 라고 말하였다( Edward Hinds,Puritan Theology, 박영호 역,기독교 문서선교회,p.21).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이 의무사항을 실천할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기 때문에 실제적인 실천사항을 제시해 주는 자상함도 그들은 잊지 않았다.

3. 경건 생활의 기초

1) 성경에 반해버린 청교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거룩케 하기 때문에 거룩하고자 하는 성도는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성도의 태도여부가 경건 생활의 근본을 이룬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매일 성경 읽기와 선포되는 말씀 듣는 훈련을 강조하였다. 청교도들의 마음 중심에는 성경이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규범으로서 절대적인 권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마치 하늘로부터 불어오는 바람과 같이 타락하고 부패하여 개혁되지 못한 온갖 요소들을 말끔히 몰아내 버리는 강력한 무기였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경건생활을 하지 못하게 막는 첫번째 장애물이 바로 성경에 대한 잘못된 해석과 태도 때문임을 루이스 베일리(Lewis Bayly,17세기 초기 청교도로서 그가 쓴 책,The Practice of Piety는 방탕한 존 번연에게 감동을 주어 기독교 진리에 눈을 뜨게 한 것이었다. p.76)목사는 지적하였다.

청교도들이 성경제일주의 원칙으로 살았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 밖에서 찾아지는 유일한 성경적인 사람들’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이다. 청교도들은 하루에 3번 성경을 읽었는데 읽을 때마다 한 장씩 읽도록 권유하였다. 이들은 삶 전체가 성경을 달성하는 것과 같았다. 성화는 앞에서도 밝혔듯이 신자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즉각적이고도 점진적인 역사이지만 그 완성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우리도 온전한 성도가 되어야 하는데 그 임무를 충실히 감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훈련과정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점에 대하여 John Jewel목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그리스도의 형제들이며, 영원한 나라의 상속자들이다. 우리는 기독교인이며 하나님의 복음을 믿는다. 따라서...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복음의 선생들과 같이 살아야 한다’.

성경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처럼 거룩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하나님과 나누는 교제의 기쁨을 만끽하게 된다. 이들이야말로 다윗이 말한 복 있는 사람들로서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한’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거룩함이 없이는 하나님을 볼 수 없는데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거룩하신 주님을 뵈옵는 첩경이었던 것이다. 늘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던 청교도들의 경건 열정이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이다.

2) 기도의 사람들인 청교도

인간 스스로는 거룩하고 순결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이 역부족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준행하는 일을 위하여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하여 간구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무능력을 인정하는 겸손이며 오직 주님의 도우심만이 거룩한 순종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모든 일을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을 사모하였고 매일 매일의 기도훈련을 통하여 지신의 뜻을 죽이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추구하였다. 이것이 거룩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이다.

청교도의 기도생활은 공적 기도시간 외에도 개인 기도시간이 주를 이루었는데 대부분이 하루에 최소한 3번 기도시간을 가졌다. 특히 가정에서도 가정예배를 통하여 가지는 기도 외에도 개인적 경건 훈련은 경건의 능력이 어떠함을 보여주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날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기도생활은 개혁을 반대하고 진리를 무력케 하려는 원수들의 공격을 막아내는 청교도들의 강력한 영적 무기였다. 기도를 통하여 얻어진 은혜로 인하여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승리의 개선가를 부르며 날마다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이야말로 경건 생활의 참 맛이었다. 특히 성화자체가 가진 특성측면에서 말씀과 기도로 무장된 경건의 능력은 옛사람을 약화시키고 벗어버리게 하며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더 더욱 빛나게 하는데 있어서 그리스도인에게 필수적인 것이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새겨지기까지 해산의 수고’를 하는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의 말씀을 듣고 읽으며 묵상하고 기도하며 예배하는 은혜의 모든 수단을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더우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혼란과 불확실성, 무지와 어두움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영적인 일에 몰두한다는 것이 참으로 힘든 작업인 것이다. 이 때 그리스도인의 진가가 발휘되는 것이다. 청교도들은 평탄한 시기에 산 자들이 아니었다. 가난과 고통, 질병과 핍박이 늘 뒤따라 다니는 상황가운데서도 그들은 빛을 잃지 않았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 쉽게 발각되어 더 많은 고통을 겪었던 것이다. 그들의 빛은 어두운 시대에 참으로 찬란하게 빛났던 것이다. 그들은 죽어가는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살아있는 진리였다. 오직 진리 안에서 기동하고 존재한 자들이었다.

그리스도인이 죄와 더불어 싸워 계속적으로 승리하는 길은 십자가를 지시고 승리하신 그리스도안에 있는 것이며 기도하는 일이다. 기도를 통해서 ‘신자의 영혼은 사랑과 기쁨과 거룩을 추구하는 영혼의 가장 고귀한 목적을 증진시키며 그 목적에 대하여 가장 확신케 되고 그 목적에 가장 잘 부합하게 되어진다’. 기도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며 그의 십자가만이 우리를 모든 죄의 유혹에서 지켜줄 은총임을 붙들게 한다. 갈보리 십자가에서처럼 그토록 죄가 가증스러운 곳은 없기 때문에 신자들이 갈보리 십자가에서 눈을 떼지 않는 한 모든 죄의 유혹은 사라질 것이다.

청교도들의 기도의 특성은 국교도들과는 달리 즉흥적인 기도를 강조하였다.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의 역사 하심을 기대하였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주기도문조차도 성령의 도움이나 분명한 이해함이 없이 무의식적인 암송이 되면 신성 모독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존 번연은 ‘효과적인 기도란 성령에 의하여 우리의 죄악을 들어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의 보좌 앞에,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가도록 격려 받는 것’이라고 했다. 특별히 성령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상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보게 함으로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고 그를 사랑하게 하시기 때문에 생명과 평안의 열매를 맺도록 우리 속에서 우리를 매진시키신다. 청교도들은 이것을 굳게 붙들었다.

무엇을 기도하며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의 문제는 언제나 진리의 말씀으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자신을 맡겼기 때문에 크게 염려하지 않았다. 청교도들은 성경말씀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개인기도의 모형과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의존하는 법을 습득한 것이다. 이들은 개인 경건 시간으로 시작하여 개인 경건의 시간으로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였다. 직장에서 집안에서 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고,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추구하며 실천되었다. 일하지 않는 시간은 기꺼히 그리고 아주 열심히 성경 읽기와 연구 및 기도에 몰입하였다. 이들은 개인 경건 시간을 통하여 신앙의 성장을 꾀하였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를 확인하였으며, 마음의 평화와 기쁨 및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나누는 유익을 갖게 된 것이다. 이들은 존 오웬의 고백과 같이 ‘기도가 응답된다는 믿음보다도 기도하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받아주신다는 믿음만큼 더 나은 믿음은 가질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그들의 기도는 죄 회개와 중보 기도, 감사와 찬양의 기도였다. 특히 중보 기도는 하나님과 가까히 동행하는 성도들, 그리고 목회자들과 위정자들, 친구들 및 가족의 순서로 기도하였고 나그네들과 원수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였다. 이들은 다른 이를 위하여 중보 기도할 때 마치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처럼 간구한다고 하였다. 또한 회심치 않은 자들을 위하여는 회개, 죄용서, 병고침, 원수의 손에서 벗어남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특히 하나님의 버리시기로 한 자들을 위한 기도에 대하여 누가 하나님의 택한 자인지 모르지만 기도하는 그 자체는 매우 유익한 것이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이 구원하시지 않는 자는 우리의 기도 속에서 하나님이 제외시켜버린다고 생각하였다.

반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위해서 기도할 자가 누구인지 항상 새로운 친구들을 생각나게 하신다고 믿었다. 또 청교도들은 교회를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하였는데 특히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교회에 분명히 전달되기를 위하여 설교자들과 성도들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였다. 철저한 말씀중심의 생활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굳게 붙든 청교도들의 경건 생활은 분명한 지식을 근거로 한 것이며 아는 일과 믿는 일에 하나된 실천적인 모델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거룩해야 한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다. 적어도 그리스도의 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신자들은 마땅히 성결된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의 거룩은 하나님의 뜻일 뿐 아니라 질그릇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영광 그 자체이다. 거룩한 삶은 우리가 버리운 자식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보여주는 성령의 내적 역사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경건을 고리타분하고 딱딱한 시대 착오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경건은 하나님의 명령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편리 또는 합리화가 우선되어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는 자기 부인은 무시해 버리는 자칭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것이다.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고통이 수반됨이 없이 어떻게 성경적이고 영적인 유익을 얻을 수 있는가? 단순히 경건이 거룩한 말을 한다거나 기독교에 대해서 말한다고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기독교적인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경건하다는 것이 아니다. 정기적인 예배에 참석하고 성경공부에 간여하며 기도회를 인도한다고 해서 이것이 경건생활의 전부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단지 흡연을 금하고 술을 끊었다고 해서 경건 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가끔 선한 일을 하거나 의로운 일에 종사한다고 해서 그것을 거룩한 생활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경건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고 그 말씀에 전폭적인 순종을 기울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지속적인 열망에 사로잡히며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몸부림 있는 생활이다. 우리의 몸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의 피가 흐르게 하는 것이 경건이다. 이 세상에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온전한 연합을 추구하는 것이요 주님이 가신 길을 즐거이 따라가는 것이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일터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하는 것이 경건 생활이다.

순결하고 정직하며 의로운 삶을 보이지 않는 한 하나님의 자녀임을 이 세상에서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는가? 주님이 우리를 보혈의 피로 구속하여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 받을 것이 없는 사람으로 세움을 입게 하시기’(골 1:22)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거룩함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구원함을 받은 자녀임을 증명하는 것이 된다. 또한 우리의 경건 생활은 주님의 뜻을 사랑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매일의 삶에서 주님의 기록된 말씀을 ‘읽고 듣고 그 가운데 기록된 것을 지켜’(계1:3) 행하고 간절히 주님의 권능의 임재를 위하여 기도함으로써 이 땅에서도 그리스도의 나라를 날마다 확장해 가는 기독교인이 되어야 한다. 경건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이어야 한다. 필자는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교회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부흥의 역사를 사모한다. 어두운 밤에 하늘의 별빛이 더욱 더 총총히 빛나듯이 악하고 음란한 이 세대에 그리스도인의 경건의 능력이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될 것이다. 필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기록된 제13장 “성화”를 인용함으로 본 논고를 맺고자 한다:

‘효과적인 부르심을 받고 중생된 자들은 새로 지어주시는 마음과 영을 소유하게 된다. 더 나아가서는 그들이 실제로, 개인 인격적으로 성화되어 간다. 그들이 받는 이 성화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공덕으로 인하여 이루어가게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과 및 그들 안에 계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실현된다.

성화의 내용은, 그들에 대한 죄악의 지배관계가 전체적으로 멸절되고 그들의 여러 가지 정욕이 점점 약화되어 죽어 가는 동시에, 그들이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모든 은혜로 말미암아 점점 더 생명과 힘을 얻게 되어, 점차 그들의 실생활에 성결이 이루어진다. 이런 성결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한다.

이 성화는 신자의 인격에 전면적으로 작업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아직 금생에는 불완전하여 그의 모든 지체에 부패의 어떤 잔재들이 남아있다. 거기서 화해 없는 전쟁이 계속 일고 있으니, 육체는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은 육체를 제어하시는 전쟁이다. 그 남아있는 부패성이 이 전쟁에서 대단한 승세를 일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거듭난 생명은 성화시켜 주시는 성령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그것을 극복한다. 그렇게 되어 성도들이 은혜로 자라나며,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으로 점점 성결을 완성해 가는 것이다’.

서창원 목사/ 삼양교회 담임, 한국개혁주의설교연구원
한국개혁주의설교연구원 홈페이지 http://www.kirp.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