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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와 개혁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

----저작자 : 미상(저작자 연락요망)

21세기에도 오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은 계속 우리 주변에 있을 것이다. 즉, 21세기에도 전통적 기독교와 그 가르침을 포기하고 버리라는 입장에서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을 것이며, 전통적 입장을 새롭게 수정하려고 하면서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을 것이고, 후-현대주의적 상황(post-modern context)이라는 이 새로운 맥락 가운데서도 계속해서 특별 계시의 내용에 충실하려는 입장에서 신학의 패러다임을 주장하는 입장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야기하는 것은 마치 이전의 신학적 입장과 방향을 수정하고 전혀 새로운 입장에서 신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들리기 쉽다. 그리고 사실 그런 입장에서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야기하는 일들이 많이 있어 왔고 이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주장은 반드시 이전 신학을 부인하고 극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님을 보이고자 한다. 오히려 기독교 신학이 참으로 기독교 신학이고 그 기독교 신학적 성격에 충실하려면, 특별 계시를 강조하는 기본적 입장에 더 충실할 것을 주장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주장이 진정한 의미에서 기독교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주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나는 기존의 패러다임 변화를 요구하는 신학적 목소리를 (1) 기독교와 기독교 신학의 근본적 수정을 요구하는 패러다임 변혁의 주장, (2) 기존 입장의 내용상의 수정을 요구하는 패러다임 변혁의 주장, 그리고 (3) 개혁신학 내에서의 패러다임 변혁의 주장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 앞의 두 가지 주장들이 왜 참된 신학의 패러다임이 될 수 없는 지를 밝히고, 개혁신학 내에서 변혁을 요구하는 입장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서 앞으로 우리가 우리의 상황 속에서 드러내 보여야 할 신학의 패러다임은 과연 어떤 성격의 것이어야 하는지를 보이고자 한다.

I. 기독교와 기독교 신학의 근본적 수정을 요구하는 패러다임 변혁의 주장

20세기말에 나타난 신학의 근본적 변화를 요청하는 소리로서 21세기에도 그 요구가 계속될만한 것은 (1) 기독교의 유일성과 독특성을 버리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종교적 다원주의의 요구, (2) 신학과 성경이 늘 보유해 가부장적 전제를 버리고 여성주의적 입장을 기독교와 연관시키면서 기독교 신학을 새롭게 하거나, “이제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기독교”를 버리고 이제는 여성주의적 입장에서 신학을 하려고 해야 한다는 주장, (3) 전통적 현대주의의 자유주의 신학에 좀더 충실한 입장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 (4) 해방신학적 입장에서 다양한 신학적 관심에로 확대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입장, (5) 리요타르(Jean-Fran?ois Lyotard), 데리다(Jacques Derrida), 라캉(Jacques Lacan) 등의 포스트모던주의에 근거하여 비실재론적 유신론과 비실재론적 종교를 발전시켜 주장하거나 해체 신학을 주장하는 입장, 그리고 이런 포스트모던주의를 수용하여 객관적 해석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버리고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해석학적 다원주의의 요청들일 것이다. 이와 같이 다양한 생각들의 배후에는 전통적 기독교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을 수 없다는 입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21세기에도 전통적 기독교의 가르침을 버리려는 입장에서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계속 우리 주변에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다양한 입장들이 모두 한 점에서는 일치하니 그것은 전통적 의미의 기독교와 신학은 오늘날의 상황 가운데서 있을 수 있는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작업하는 신학의 예들 중의 하나로 우리는 David L. Edwards의 최근 작품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한다. 그는 사후 상태에 대해 쓴 근자의 책인 ??죽음 이후: 과거의 믿음들과 실재적 가능성들??(After Death? Past Beliefs and Real Possibilities)에서 “종교적 기관들에서 권위를 가지고 가르쳤던 많은 것들이 분명히 잘못된 것 같으며, 많은 사람들이 믿어 오던 것이 단지 감상적인 것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DNA를 알고 두뇌 구조를 아는 현대에 와서는 기독교 종말론의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이제까지의 상당한 논의들을 검토하면서 사후의 삶에 대한 믿음은 과학의 범주 밖에 있고 오히려 ‘전체적 인생관’(a total view of life)에 속한다고 한다. 그래서는 실재(reality)와 더 깊은 관련을 지닌 죽음에 대한 해석을 시도하려고 한다.

에드워즈는 이 문제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심각하게 생각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고, 행하시고, 계시고, 계신 것”(what Jesus Christ taught, did, was and is)에서 최고의 하나님 계시(the best revelation of God)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이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왜 최고의 권위를 두는 지는 의문시된다). 그리하여 그가 예수에게서 발견한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지옥은 결국 개인이 자기의 멸절을 선택한 것이라고 본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부모 같은 사랑이 사후의 삶에 대한 유일하게 가능한 원천이므로, 자유로운 사람이 자기 멸절(self-destruction)을 선택한 것에 대해 사후의 삶을 거부하는 것은 전통적인 지옥 표상들이 표상하던 바의 항존적이고, 깊고, 두려운 의미인 듯하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사후의 삶은 무엇일까? 그는 사후의 삶이 몸없는 영혼이 불변하게 계속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고 보고, 전통적인 기독교의 가르침과 같이 부활한 몸을 가지고 사는 것도 아니라고 보며, 하나님이나 자연에 합일하는 것도(absorption)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우리가 죽으면 시간이 영원에 의해 대체되고, 공간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대체될 때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것(be embraced by God), 하나님께 가는 것(go to God)이 전통적인 하늘관(view of heaven)의 의미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는 결국 시공간이 없는 영원을 생각하고, 시공간이 없는 그 하나님의 영역에 우리가 속하게 되는 것이 사후의 삶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신학하는 일의 서론을 제시한 것으로 우리는 가레트 죠운즈의 ??기독교 신학??을 들 수 있다. 늘 철저한 자유주의자로 자처하고 있는 가레트 죠운즈는 기독교 신학의 맥락으로 사회와 문화를 강조하면서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 기원에 대한 역사적 사실들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고 말한다(p. 145). 이런 입장의 신학적 입장을 좀더 폭넓게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으로 영국의 리버플 선언(the Liverpool Statement)을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약 30여명의 영국 신학자들이 신학의 새로운 비젼을 제시한다고 하면서 1998년에 9월 26일과 27일에 리버플 호프 대학교 컬리쥐(Liverpool Hope University College)에서 모여 의논하고 발표한 것이다. 이 선언문에서 이들 신학자들은 우리의 장래를 형성할 신학과 종교학의 성격을 유럽적 사유 방식에서 문화적으로 주도적이며 해방 운동이 더 주도적인 상황 가운데서 적극적으로 말할 수 있는 전통적 자유주의 신학(traditional liberal theology)와 관여하는 신학(p. 11), 과거의 자유주의 신학적 접근과 보수주의 신학의 접근의 실패 모두에서 교훈을 얻는 신학(p. 11), 그리하여 공공 영역(public sphere)에서 다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신학으로 보면서(p. 12), 이런 신학의 적극적이고 개방된 이상과 ‘종교와 신학 포럼’(Forum for Religion and Theology)의 형성을 제안한다.

이런 선언은 한편으로는 마땅히 신학계에 있어야 할 공통적 포럼의 형성과 상호 관용을 잘 주장하는 것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영국 신학계가 어느 정도 보수적 성향을 가져가는 것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 결국 기독교와 신학의 근본적 변혁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는 이런 선언이 나온 동기와 상황을 설명하는 가레트 죠운즈의 글에서 더 잘 살펴 볼 수 있다. 그는 현 영국 신학계의 복음주의적 성향에 대해 매우 우려하는 글을 싣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위의 첫째 제안과 관련해서도 현대 영국 신학 가운데서 신학자들이 이 사회와 다른 학문 분과와 더 관련 깊다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말하는 유일한 것이 이 리버풀 선언이라고 하면서(pp. 88f.) 이 제안이 그저 문화와 깊이 관여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말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좀더 잘 이해하는 이들은 이것이 바르트주의적 보수주의에 대한 이 일단의 자유주의자들의 비판임을 잘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결국 자신이 실재와 현상에 대한 칸트의 구별을 현재와 미래의 모든 신학에 대해 절대적으로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니는 것으로 받아들이자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p. 89). 칸트 이후에는 이 구별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there is no excuse after Kant for failing to appreciate this argument, p. 89).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들이 요청하는 것은 온갖 종류의 사람들, 자유주의자들, 급진적 정통주의자들, 복음주의적 보수주의자들, 교의적 신학자들, 포스트모던주의자들, 포스트자유주의자들, 그리고 다른 목소리의 대변자들이 다 함께 문자적으로 대면해서 서로의 말을 진지하게 듣고 대화를 공유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말한다(pp. 90f.). 그러나 그들의 선언은 가빈 드코스타(Gavin D'Costa)가 잘 지적한대로 “신자유주의적 개신교”(the neo-liberal protestantism)의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이클 굴더는 이런 철저한 자유주의 입장에서 자신의 신학을 전개하면서 40년간 봉직해 온 영국 교회의 사제직을 사임하기도 했다. 이는 자신이 이제 포스트-크리스쳔임을 주장하는 다프네 햄프슨의 입장과 함께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에 대해 아주 솔직하고 정직한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의 독특성을, 더 나아가 기독교를 포기하는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주장은 결국 이런 결론에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보다 좀 덜한 입장이 있을 수 있을까? 이를 생각하면서 두 번째 유형의 새로운 패러다임 주장에로 우리의 관심을 돌려보기로 하자.

II. 수정주의적 패러다임 변혁의 주장

우리의 첫 번째 논의가 기독교의 근본적 포기나 변화를 요구하는 패러다임 변화 요구에 대한 것이었다면, 두 번째 유형의 패러다임 변화의 요구는 기독교 내에서 그 내용을 변화해 가는 상황에 맞도록 적절히 수정하면서 새롭게 신학을 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패러다임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입장에서 신학을 하는 사람들의 예로 먼저 Marcus J. Borg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는 작년에 N. T. Wright와 함께 낸 ??예수의 의미??(The Meaning of Jesus: Two Visions)에서 그가 부활 이전의 예수님과 부활 이후의 예수님을 크게 구별하면서 자신이 예수님에 대해 생각하는 바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예수님을 유대적 신비가(a Jewish Mystic)요, 동시에 기독교적 메시아(the Christian Messiah)로 본다. 유대적 신비가로 예수는 “영적인 사람, 치료자, 지혜의 교사, 사회적 선지자, 그리고 운동의 주도자”(spirit person, healer, wisdom teacher, social prophet, and movement initiator)였다고 한다. 그리고 예수 자신은 자신이 메시아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나, 그가 그렇게 생각했든지 안든지 간에 부활 후에 제자들이 메시아라는 은유(metaphor)를 예수께 돌렸는데 이는 참된 은유이라고 Borg는 생각한다.

이 은유라는 말에서 시사되듯이 Borg는 복음서 기록의 상당 부분은 역사적인 것이 아니라고 본다. 동정녀 탄생은 마태와 누가 사이의 조화될 수 없는 불일치 때문에 비역사적이며, 따라서 ‘역사화 된 은유’(history metaphorized)라고 한다. 또한 Borg는 제자들이 수난의 장면에 있지 않았다는 근거에서 수난 기사도 대부분 역사적으로 믿을 수 없다고 본다. 그는 이 수난 기사들은 구약의 예언들을 역사화하고 로마 세력의 그늘에서 살던 후기 기독교의 삶의 빛에서 발전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에 대한 구원적 이해(salvific understanding)을 갖지 않으셨다고 본다. (후에 그는 예수의 죽으심이 죄에 대한 희생(a sacrifice for sin)이라는 말을 하지만 이는 예수께서 이런 이해를 가지셨다는 말이 아니고, ‘희생’이라는 말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은유로 보는 것이다). 이런 입장을 가진 그는 예수의 시체가 계속해서 무덤 안에 있었느냐의 문제를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그는 부활을 “새로운 종류의 존재에로 들어가는 것”(entry into a new kind of existence)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과거와 현재의 예수의 추종자들이 예수를 그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해서 살아 있는 실재로 경험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Borg는 신약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는 예수의 임박한 재림에 대한 기대는 예수 자신에게서 기원한 것이 아닌 공동체의 산물이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가시적 재림이 있을 수는 없지만, 재림이라는 은유도 예수께서 주님이심에 대한 또 하나의 확언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처럼 Borg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입장을 새롭게 이해해 보려고 한다. 이는 예수에 대한 그의 이해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예수께서 자신이 신적이라고 생각했다고 믿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가졌다고도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부활-이후의 예수(post-Easter Jesus)는 ‘신적인 실재’(a divine reality)요, 하나님의 구현 또는 하나님의 성육신(the embodiment or incarnation of God)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그는 니케아 신조를 고백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도 느끼지 않는 것이다. 왜냐 하면 그는 니케아 신조가 발전하는 전통을 특별한 시간 가운데서 결정화한 것(crystalizing the developing tradition)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물론 수정주의자들 중의 다수는 이런 식으로 니케아 신조와 긍정적으로 관여하는 것에 찬동하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이는 이 수정주의적 입장의 폭이 크다는 것을 말해줄 뿐이다.

이런 입장에 속하나 Borg의 신조들과 연관하려는 시도에는 반대할만한 신학자의 한 예로 그리스도의 부활과 부활 없이 기독교를 설명해 보려고 하는 덜햄의 신약학 교수 웨더번(A. J. M. Wedderburn)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부활을 넘어서??라는 책에서 예수의 부활에 대한 역사적 증거는 거의 없어서 불가지론적인 결론밖에 내릴 수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예수의 죽음 후 안식후 첫날 무엇인가가 일어나긴 했을 텐데, 그것은 여인들이 예수의 시체를 찾지 못한 일 정도라는 것이다. 또한 다른 제자들이나 바울에게 예수께서 부활하셨다고 믿게끔 할만한 어떤 일이 있어 났는데, 그 어떤 일도 “아주 모호한 것으로 증명된다”(proves highly elusive)고 한다(p. 95). 그래서 웨더번은 부활에 대한 불가지론적 입장을 받아들이면서(p. 134) 기독교 신앙을 재구성해 보려고 한다. 그는 바울의 어떤 개념과 요한복음서의 일부 아이디어를 받아들이면서, 그러나 그것이 다른 식의 논의에 대해 개방적이고, 다른 논의를 시사할 수 있다고 보면서(p. 105) 부활 이야기를 새롭게 이해해 보려고 한다. 이는 결국 모든 종류의 사후의 삶 개념에 대한 거부를 포함한다. 인간 몸의 재구성 또는 살아남을 포함하지 않고서는 사후의 삶 개념은 유지될 수 없는데,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웨더번은 생각한다. 그는 “영적인 몸‘에 대한 바울의 개념이 정합성이 없으며 사후의 삶에 대한 만족스러운 이론이 되기에 충분한 요소를 지니고 있지 않다고 한다(pp. 145-47). 또한 다른 모든 사후의 삶에 대한 견해들을 열거하고 거부한 후에 웨더번은 우리는 “부활에 대한 모든 말들을 잠재적으로 오도하는 것이라고 여기면서 버려버려야”만 한다고 주장한다(pp. 151f.).

더 나아가서 웨더번은 부활이 없으면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처럼 바울처럼(고전 15:14) 말하는 것은 예수의 존재와 사역, 그리고 그가 지상에서 성취하신 것을 전혀 평가 절하하는 것이며, 다른 인간들의 삶에서 가치 있는 것을 평가 절하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웨더번이 강조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현재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가능성을 강조하면서 그것이 바울이 강조하는 것이며, 영생이 지금 여기서 가능하다고 하는 요한복음의 실현된 종말론의 의미라고 주장한다(pp. 155-58). 그는 요한복음 20:29에서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하신 말씀도 예수를 그의 생전에 본 것으로 믿기에 족한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한다(p. 161). 그래서 그는 자신이 말한 바 “이 세상의 삶만을 위한 신앙”(faith for this life alone)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는 이런 신앙이 쾌락주의로 인도할 필요가 없으며, 이는 윤리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더 도전적인 신앙이 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지혜 문학 스타일의 가르침을 강조하면서 그런 입장이 예수님 자신의 신앙과 전적으로 어긋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런 결론에 근거해서 웨더번은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는 전통적 개념을 수정할 것을 제안한다. 예수님께서 그의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그들의 하나님 개념과 하나님이 행하시는 방식에 대한 개념을 수정하도록 하신 것을 본받아(p. 171) 우리도 예수님 이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그 장의 제목이 "The God of Jesus and Beyond"임에 유의하라). 그래서 웨더번은 예수님의 하나님 이해에로 우리의 이해를 수정하고, 또 예수님 자신의 신(神)이해를 수정하도록 제안한다. 그래서 우리는 고대의 통치자의 권력 개념에로 거슬러 올라가는 전능성 개념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p. 192). 토마스 헉슬리(Thomas Huxley), 고오든 카우프만(Gordon Kauffmann), 도로티 죌레(Dorothee Solle)의 신비주의 등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웨더번은 진화에 상응하는 하나님, 그리고 예수께서 계시하신 사랑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 알려진 하나님은 “힘을 사용하기를 거부하시는 하나님, 그 대신에 고난받고 위협받으실 준비가 되어 있는 분인 듯하다”고 한다(p. 208). 전능하지 않고, 피조계와 함께 고난받으시는 하나님 - 이것이 웨더번이 발견한 하나님이다. 그는 자신의 이런 신 이해가 성경의 상당 부분과 조화되지 않으며, 서구의 철학적 전통과도 다르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자신이 말하는 하나님 개념은 “성경적 메시지의 몇 가지 중요한 주장들을 아주 신중하게 취하는 것이며, 하나님과 세상의 관계를 정의하려는 다른 철학적 시도들이 나타내 보이는 단점들을 피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p. 217).

이 세상의 진화의 과정 배후에 있는 비인격적인 존재가 예수께서 그에게 기도하는 인격적인 하나님일 수 있느냐에 대해서 웨더번은 이는 풀 수 없는 긴장의 문제라고 시인한다. 우리의 자유 의지와 결정론의 신비와 비슷한 유비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칼하게도 그는 우리의 하나님 형상 됨을 여기서 발견하려고 한다(p. 200). 그래서 그는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차원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 차원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우주의 질서 있는 기능 배후에 있는, 그 질서 있는 기능에 대해 책임 있는 분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또 다른 차원에서 우리가 이 하나님을 인격적인 존재로, 아니면 인격보다 더 높은 그러나 역시 인격성을 포괄하신 분으로 생각할 수는 없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세상으로 지금의 상태에 있게 하는 (그래서 그것을 과학적으로 탐구할 수 있게 하는, 왜냐하면 완전히 제멋대로 된 세상(completely random world)에서는 예측과 가설에 대한 실험이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제일성들(regularities) 안에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어떤 사람보다 자유로우시다(pp. 204-205)

웨더번의 이런 하나님 개념은 비인격적이며 또 인격적인, 그 두 측면이 상호 보충적인 측면인 그런 하나님 개념이다(p. 211). 이는 다소 과정신학의 신 개념과 유사하게 보인다. 이런 신개념은 결국 기도의 개념도 바꾸도록 한다. 그래서 웨더번은 기도는 다른 존재에게 하는 말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사고의 스타일에 좀더 가까울 것”이라고 한다(p. 205).

웨더번은 자신의 이런 신앙이 잘못될 수 있는 “연약한 신앙”(a vernerable faith)이라고 마지막 장에서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예수의 하나님, “예수께서 고뇌에 차서 비참하게 죽을 실 정도로 죽기까지 섬겼던 그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라고 주장한다(p. 220). 그러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셨다고는 할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웨더번은 객관적이고 역사적 부활에 대한 확신을 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사후의 삶에 대해서 “증명될 수 없다”고 해야 한다면 그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 근거 위에서 기독교 신학을과 실천을 수립해야할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pp. 224-25).

이렇게 전통적 신학을 수정해 보려는 시도는 많이 있다. 그것은 결국 성경의 독특성을 부인하는 입장을 이끌어 낸다. 웨더번 교수와 함께 덜햄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신학 교수(Van Mildert Professor of Divinity)인 데이비드 브라운은 계시에 대해 근자에 낸 책인 ??전통과 상상력??에서 계시는 “정경의 한계를 너머서도” 계속된다고 주장한다. 이를 옹호하기 위해 그는 다음과 같은 논의를 편다: (1) 성경 시기 동안에도 계시의 발전이 있었다(이것을 강조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계속되는 필름을 어떤 특정한 한 점에서 끊는 것은 사실상 실제로 발생하는 것을 왜곡하는 것이 될 것이다”, p. 114); (2) 정경을 결정한 후에 일어난 변화를 단지 해석의 변화로만 여기는 것은 부적절한 것이다; 그리고 (3) 인격적이고 상호 관계적 계시관은(a personalist, interactionist view of revelation) 새로운 역사적 사회적 정황이 새로운 인간적 반응들을 생산하면서 정경 너머서 계속되는 계시를 함의하게 된다(p. 136). 이런 계시관으로부터 그는 결국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시가 기독교 외의 다른 종교에서도 작용하고 있고, 사실 더 폭넓게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다루도록 한다”고 하는 결론에로 나아간다(p. 366). 그러므로 이런 이장에서 작업하는 이들과 전적인 새로움을 지향하는 이들의 거리는 사실상 그리 멀지 않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실질적으로 첫째 입장을 잘 이해하면서도 후-자유주의자(post-liberal)로 자처하면서 수정주의자들을 비판하는 죠오지 린드벡의 입장이 신학에서 포스트모던주의를 옹호하는 대변인의 한 사람임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그는 성경이 일차적인 의미의 진리-주장을 하지는 않지만, 기독교 공동체에 정체성을 부여하고 정의하는 사회언어학적 틀(socio-linguistic framework)을 제공한다고 본다. 그는 이런 자신의 입장을 문화-언어학적인 종교관(a cultural-linguistic view of religion)과 규범적 교리론(a regulative theory of doctrine)이라고 부른다. 이런 입장에서는 서로 다른 신학들은 그저 다른 언어와 다른 문법의 기능을 할뿐이라고 여겨진다.

이와 비슷한 작업을 좀더 과격화시키면서 90년대의 영국 사회에서 앵글로 가톨릭적 성향을 가지고 하고 있는 이로 죤 밀뱅크(John Milbank)를 생각할 수 있다. 그는 1990년에 낸 ??신학과 사회 이론??에서 어떤 입장도 전통 없는 근거는 없다고 하면서 현대주의의 숨은 가정들을 드러내고, 자연과학과 사회학의 세속화하는 반신학적(a seculararizing atheology) 신앙의 성격을 강조한다. 20세기의 지성사의 대부분은 상호 경쟁하는 환원주의의 싸움이므로 신학은 이들을 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한다. 이런 식으로 세속주의를 해체시킨 후에 밀뱅크는 니체적 허무주의에 적적히 반응할 수 있는 대안으로 “참으로 기독교적인 커다란 기사 실재론”(a true Christian metanarrative realism)을 제시한다. 밀뱅크에 의하면 기독교는 폭력의 존재론 위에 세워진 세속과는 달리 평화의 존재론에 헌신한 공동체 안에 위치한다. 그는 이렇게 결론 내리는 것이다: “존재론적 평화의 절대적 기독교적 이상은 허무주의적 전망에 대한 유일의 대안을 제공해 준다(p. 434). 처음 책에서는 이런 '급진적 정통주의'(radical orthodoxy)를 주장했던 밀뱅크는 신학과 신학적 언어의 성격에 관한 근자의 책에서 좀더 과격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는 입장의 변화라기 보다는 1990년의 책에 내재해 있던 가정이 좀더 분명하게 드러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 그는 신학을 일종의 “메타-기호학”(metasemiotics)인 “신적 언어의 운문”(a poesis of divine language)이라고 여긴다(p. 112). 그는 로고스(logos)를 운문(poesis)으로 이해하면서 이는 ‘모방’(mimesis)이며 동시에 (정조[ethos]를 도입시키는) 미또스(mythos)로 의미의 원천과 규범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운문(poesis)라는 맥락이 바로 신학을 하는 바른 맥락이라는 것이라. 따라서 그는 신학과 사회 과학과 관여함으로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배울 수 있는 가능성도 부인하며, 우리의 운문(poesis)이 진리와 정의의 시금석에 종속될 수도 없다고 한다. 그래서 예를 들면, 기독교 신학의 어떤 운문(poesis)이 참되고 바른가를 묻는 것은 신학 자체의 부인이라고 한다.

밀뱅크는 그가 캠브리쥐에서 같이 있었던 그래이엄 워드(Graham Ward)와 캐떠린 픽스톡(Catherine Pickstock)과 함께 “급진적 정통파”(Radical Orthodoxy)라는 앵글로 카톨릭/가톨릭 그룹의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정통파란 “신조적 기독교(creedal Christianity)”와 초기 중세까지의 “교부적 틀로 표현된 것들(the exemplarity of its patristic matrix)”에 헌신하는 것을 뜻한다(p. 2). 이들의 선구자는 그들이 근거하고 있는 앙리 루박(Henri de Lubac)과 발타잘(Hans Urs von Balthasar) 같은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고전적 기독교 전통을 포스트모던적으로 (비근거주의적으로) 다시 발굴하여 참으로 포스트모던적 형태의 기독교 교회 신학을 발전시켜 보려고 하는 것이다. 현대 이전(pre-modern)의 전통을 포스트모던적 기술(postmodern narration) 속에서 비평적으로 재충용(reappropriation)하여 보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시도가 포스트모던적 상황 가운데서 모든 신학하는 이들에게 주어진 과제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입장을 지닌 이들의 근본적 전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위의 밀뱅크의 작품을 보면서 잘 볼 수 있듯이, 이런 입장의 신학에서는 절대적 진리 주장은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 된고 만다. 또한 이“급진적 정통주의”의 주장자들은 교회의 신학을 하려고 한다고 하면서도, 가빈 드코스타가 잘 지적하듯이, 그들이 말하는 교회는 어떤 구체적 형태를 지닌 것이 아니다(is not locatable). 이런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의 절대적 진리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신학의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예들을 향하도록 한다.

III. 복음주의적 패러다임 변혁의 주장

다른 유형의 패러다임 변화의 요구가 1990년대에 요구한 내용의 연장이듯이 복음주의적 성격을 유지하면서 신학을 하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요구하는 1990년대의 목소리들은 21세기에도 계속될 것이다. 1990년대에는 복음주의 신학의 변혁을 요구하는 다음 세 가지 주장이 가장 현저한 목소리들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III-1. 스파이크맨의 기독교 세계관에 근거한 개혁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 요구

개혁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명확히 요구한 최초의 목소리로 우리는 고오든 스파이크맨의 주장을 들 수 있다. 그는 1992년에 낸 그의 저서 ??종교개혁적 신학: 교의학을 함에 있어서의 하나의 새로운 범례??에서 아주 의도적으로 개혁파 교의학의 새로운 범례를 제시하고자 하였다. 그는 옛날의 이원론들과 오늘날 나타나고 있는 새로운 단일론들에 대한 대답과 대안 제시를 위해, 그리고 개혁된 신학은 항상 개혁되어야 하기 때문에 개혁파 교의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p. 4). 그는 전통적 교의학의 분과들(loci)을 성경적 세계관의 창조, 타락, 구속, 극치의 주제에 근거하여 선하신 창조, 죄와 악, 구원의 길, 그리고 극치의 범주들로 대체하기를 제안하고, “그 정신과 제시에 있어서 일관성 있는 따라 나온”(p. 135) 제 2 부에서는 이런 틀에 따라 자기 나름의 교의학을 제시한다.

스파이크맨의 이런 시도는 매우 신선하고 우리의 동감적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는 “개혁파 교의학에 대해 가장 적절한 서론은 기독교 철학이다”(p. 101)는 입장을 너무 강조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가 말하는 기독교 철학은 개혁파 세계관과 신카이퍼주의의 전통에서 발전된 철학이므로 성경에서 그리 크게 벗어났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철학에 근거하여 신학하는 일을 시도하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 논의가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좀 다른 방식으로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예들을 찾고 싶어진다.

III-2. 리쳐드 린츠의 구속사에 근거한 신학의 새로운 틀 구성에의 요구

이런 우리의 추구에 적절한 대상이 될만한 시사를 한 사람이 있으니, 그는 미국 매샤츄세츠주 싸우뜨 해밀턴에 있는 고오든-콘웰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의 한 사람인 리쳐드 린츠이다. 린츠는 종교개혁의 후예들을 중심으로 한 신학적 과거와 포스트 모던 신학을 중심으로 한 신학적 현재를 살핀 후에 구속사적 신학의 틀을 복음주의 신학이 앞으로 취해야 할 신학이라고 복음주의 신학의 서론을 제시한 바 있다. 이 책에서 린츠는 복음주의적 전통은 신학하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별로 훈련되지 않아 왔음을 지적하며(p. 259), 또한 80년대에 나타난 새롭게 신학을 써 보려는 노력들을 언급하면서, 이제 신학적 내용뿐만이 아니라 신학적인 틀(theological framework)의 형태(shape)에 있어서도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있다(p. 261). 린츠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신학은 성경의 구조를 좀더 가깝게 반영하는 신학이다. 이는 이전 시대에 요나단 에드워드와 게할더스 보스가 제시한 바를 다시 강조하는 것이다. 린츠는 이런 신학적 전략이 신학의 내용과 구조에 있어서 개신교 종교개혁의 내용적 규범인 성경 자체에 신실하도록 해 줄 것이라고 한다(p. 262). 그러므로 린츠는 소위 성경신학, 즉 “특별 계시의 역사에 대한 연구”에 근거한 신학의 틀을 구성할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조직신학의 구조가 몇 가지 중요한 방식으로 성경 신학의 구조를 반영해야만 한다고 시사하고 싶다. 구속적 계시의 중요한 주제들이 조직신학의 중요한 주제들이어야만 한다”(pp. 270f.). 린츠는 자신의 이런 시도가 메레디뜨 클라인이나 리쳐드 개핀의 시사와 방향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 한다.

린츠는 신학의 본질을 구속사의 해석으로 본다(p. 268). 구속의 성취가 하나님의 근본적 과제라고 보기 때문이다(p. 275). 그런데 구속사는 유기적으로 진전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구속사적 과거와 구속사적 미래의 빛에서 현재의 상황을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린츠는 구약의 역사가 신학적으로 쓰여졌다고 말한다(p. 269). 즉, 이 역사 기술 배후에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어떻게 행하셨는지를 다시 언급하는 습관이 있고, 따라서 구약 선지자들에 의하면 역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선지자들은 역사의 해석자요, 역사가 과거와 미래에 대해 어떤 적합성을 지니고 잇는 지를 설명해 주시는 이들이라고 한다. 오늘날의 복음주의자들도 이런 유목적적인 역사 읽기(purposeful reading of history)에 관여해야 한다고 린츠는 주장한다(p. 269). 즉, 성경에 나타난 사건들의 역사성을 밝히는 일에만 노력할 뿐 아니라, 성경이 과거, 현재, 미래의 사건들을 해석하는데 사용하고 있는 해석적인 틀을 이끌어 냄으로써 과거와 미래에 대한 우리 나름의 해석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작업은 현대 독자들을 그 모든 풍성함을 지닌 성경의 플롯 속으로 돌아가게 하여 독자들이 현대 세계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도전하게 되는 이점이 있다고 한다(p. 276). 이런 종류의 해석을 하는 신학적인 틀은 세속적으로만 보일 사건들의 의미를 드러내는 기여를 할 것이라고 한다(p. 269). 그러므로 린츠는 성경이 인류의 역사를 폭넓게 설명하는 해석적 틀(interpretive matrix)을 제공해 주며, 그 역사 안에서 우리의 역할을 보고들을 수 있는 눈과 귀를 제공해 준다고 본다(p. 269). 그러므로 우리의 해석적 틀(interpretive matrix)도 성경의 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의 해석적인 틀은 성경 전체이다. 그러므로 정경 중의 일부를 성경적 계시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지 않는 시금석은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p. 274). 또한 그 모든 유기적 관계를 지닌 정경 전체에 바르게 주목하지 않고서는 신학적 체계가 바르게 세워질 수 없는 것이다(p. 279).

이런 이해를 가진 린츠는 신학의 구조와 성경의 구조를 연관시켜야 할 것을 주장한다. 그럴 때에라야만 성경의 규범적 기능을 참으로 인정하는 것이라는 것이다(p. 270). 그 구조와 내용에 있어서 성경을 반영할 때에만 그런 신학의 구조가 성경에 참으로 신실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성경의 구조에 충실한 신학의 틀을 구성하는 일은 어떤 것인가? 린츠는 그것이 성경 본문을 그저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 틀의 개념적 구조들이 성경의 현상을 적절히 반영하도록 큰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라고 한다(p. 270). 이런 작업을 하는 구체적인 방식으로 그가 제안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성경 본문이 묻고 있는 질문이 신학적인 틀의 기본적 질문이어야만 한다(pp. 271, 269). (2) 성경 본문의 중요한 주제들이 신학적 틀의 중요한 주제들이게끔 해야만 한다(p. 271). (3) 성경 본문에서 중심적인 움직임이 신학적 틀의 중요한 부분이어야 한다(p. 271). (4) 성경의 다른 시기들 간의 유기적 관계가 현대까지 확장되어 전역사가 성경의 해석적 우산 아래 있도록 해야 한다(p. 271). 우리는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구속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파루시아 사이의 시간, 바울이 그의 서신서들을 쓰던 그 시기에 살고 있으므로(p. 278) 이 작업을 잘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점을 유의하는 신학적 해석의 틀의 구조를 린츠는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전체적인 주제: 당신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하시고 재창조하시는 하나님

I. 창조하시는 하나님

A. 창조의 계시

B. 창조의 언약

1. 언약적 왕이신 하나님 (God as Covenant-King)

a. 선택의 원리(The Principle of Election)

b. 심판의 원리(The Principle of Judgment)

2.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a. 창조주/피조물의 구조

b. 형상일 뿐이며 유일한 형상인 피조물

C. 창조와 피조계에서의 하나님의 영광(The Glory of God in Creation)

II. 재창조(구속)하시는 하나님

A. 구속의 계시

1. 구속사

2. 해석된 구속사-구약과 신약

a. 성경의 권위와 영감

b. 문학적 다양성→신학적 구조

c. 해석학

기사(narrative)-역사성

(1) 교훈적 - 신학적 주해

(2) 모형론 - 종말론

3. 살아계신 말씀 -성육신 (기독론)

B. 구속의 언약

1. 약속된 언약(the Covenant Promised) - 아브라함

2. 중간 언약(The Interim Covenant) - 모세

3. 도입된 성취(The Fulfillment Inaugurated) - 그리스도

a. 그리스도와의 연합(구원론)

b. 그리스도의 사역의 적용(성령론)

c. 새언약적 공동체(교회론)

4. 극치에 이른 구속

a. 최후의 심판

b. 새 하늘과 새 땅

C. 구속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The Glory of God in Redemption)

이런 입장을 발전시키고 있는 린츠는 전통적인 조직신학의 방법을 모두 다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조직신학의 전통적인 방법은 성경 자료에 대한 주제별 다룸인데 그것은 주해적이며 구속사적 관심을 계속해서 염두에 두고 있을 때에만 바른 것이 된다고 하기 때문이다(p. 272).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제시하는 구속사적 신학만이 유일하게 바른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III-3. 종말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 요구

린츠의 구속사 신학의 요청과 비슷하게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구속사의 진전 가운데서 구약이 말하는 종말이 신약에 이르러서 원칙적으로 실현되었고 그 극치를 기다리고 있다는 상황과 이에 대한 신약 성경 신학의 통찰을 반영하면서 신학을 전반적으로 새롭게 조망해 보아야 한다는 시사가 80년대부터 나와 1993년에 좀더 구체적인 방식으로 제안된 바 있다. 예를 들어서, 죠오지 래드의 ??마지막에 될 일들??의 한역 판의 ‘역자 후기’에 다음과 같은 주장이 나온 바 있다:

우리는 오히려 ...... 예수 그리스도 사건과 오순절 사건으로부터 ‘종말’이 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종말론’도 그런 이해의 터에서 생각되어야 할 것이다. 단지 교의학을 마무리하기 위한 것으로 다루어져서는 안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신학 활동은 그 시기적 성격으로 보아 (그리스도 사건 이후에 있다는 성격) 모두 종말론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주장을 확대하면서 1993년에 출판된 한 논문에서 필자는 “신약 성경적 의미의 종말 개념은 우리의 신학이 전체적으로 ‘종말론적인 신학’(eschatological theology)이 되게" 하고, “그 내용을 가지고 이야기하면, 우리의 신학이 전체적으로 ‘하나님 나라 신학’(Kingdom Theology)이 된다”고 하면서 장차 나타날 종말 신학 또는 하나님 나라 신학의 프롤레고메나를 제시한 바 있다. 이 논문에서는 앞으로 나타날 종말 신학의 특성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제시하고 있다: (1) “우리의 신학함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종말론적 사역 이후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분명히 의식하는 신학이” 되어야 한다. 즉, “이 종말 신학은 그리스도 사건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님의 경륜(oikonomia)의 ‘이미’ 이루어진 것과 ‘아직 아니’ 이루어진 것을 분명히 의식하고, 그 긴장을 드러내면서, 그리스도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에 이 성취를 바라면서 있는 ‘이미’와 ‘아직 아니’의 숨은 구조를 드러내며 구약 계시의 그리스도론적 의미를 드러낼 수 있는 신학”이며,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사역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신학”이라고 한다(pp. 218f.). (2) 이 종말 신학은 “상당히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보이나, 이 때의 그리스도 중심성은 루터파적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도 아니고, 바르트 류의 그리스도 일원론(Christo monism)도 아니고, 그런 문제를 극복한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 즉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사역을 전체적으로 드러내는” 삼위일체적 신학일 것이라고 한다(p. 219).

이런 종말신학이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날 때 과연 어떤 틀을 갖추고 나타날 것인가? 이 논문의 필자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제시하고 있다(p. 224):

1. 왕이신 하나님 (God as the King of the Kingdom of God)

여기서는 종래의 신론, 기독론, 성령론에 해당하는 내용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잘 드러내 주는 내용을 진술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자가져다 주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논의하여 나가되, 이와 비슷한 접근이 가진 문제를 극복하는 식으로 진술됨으로써, 그리스도 사건으로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하되, 삼위일체 하나님을 십자가 사건에 가두어 버리는 문제를 제기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2. 백성인 인간(Human Beings as the People of God)

이는 전통적 인간론과 구원론을 통합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려고 하셨는지 그 계획과 이에 대한 인간의 반역,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구원하셔서 그 나라 백성을 삼으시는 과정 전체를 살피게 될 것이다.

3. 왕의 공동체(The Community of the King)

이는 제2권이 아무래도 개인을 중심으로 한 것임에 비해서 그 개개인들이 어떻게 구속된 공동체를 이루어 그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를 증시하며, 그 나라가 그 극치에 이르기까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다룬다.

이런 종말 신학에 근거한 신학 이해와 기술의 노력을 아주 강하게 나타내 보인 이로 남아공의 남아프리카 대학교의 조직신학 교수인 아드리오 쾨니히(Adrio Konig)를 들 수 있다. 그는 1980년에 남아프리카어로 내고 1989년에 영역한 ??종말론에서의 그리스도의 가리워짐: 그리스도 중심적 접근을 지향하여??에서 과거의 종말론이 그저 마지막에 될 일들(the last things) 중심이 아니라, 신약성경이 말하는 종말(the last)로서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바라보지 않는 경향을 비판하면서 어떻게 종말론이 그리스도 중심이 되어야 하는지를 잘 드러내고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이 책은 종말론 자체가 신약 성경이 말하는 종말(Eschaton)이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해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책이면서, 그 함의상 그리스도 이후에 있는 우리의 존재와 삶 전체를 마지막이신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해해야 할 것을 촉구하는 책이기도 하다. 그의 이 책은 종말, 끝이라는 단어를 너무 그리스도와만 연관시키고 있는 문제점도 가진다. 따라서 재림과 그 이후 상황에 대한 관심이 좀 모호하게 나타나는 문제가 있다. 이런 점을 극복하면 상당히 유용한 종말신학 주장의 책으로 언급될만하다.

이와 같이 신학 전반에 대한 프로그램으로 제시하지는 않지만 이와 비슷한 방향에서 시사를 하거나 작은 시도를 보여 주는 예들은 상당히 산발적으로 많이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서, 기독론 분야, 특히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한 저술에서 데이비드 웰즈는 그의 결론의 첫 부분에서 “그 안에서 그리스도가 이해되어야만 하는 개념적인 틀은 종말론적 ‘오는 세대’의 개념 틀이다”고 단언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오는 세대’(the age to come)는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그 오는 세대, 즉 하나님 나라(즉 천국)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임하여 와서 그 극치를 향해 진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미 임하여 와서 진전해 가는 ‘오는 세대’는 “현세대와 연대기적으로는 겹쳐도, 그 성질에 있어서는 현 세대와 본질적으로 불연속적인 세대이다”(p. 353). 웰즈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와 연관해서 다음과 같이 보아야만 한다고 결론 내린다:

예수는 그 안에서 ‘오는 세대’가 실현되며, 그를 통해서 그 세대가 교회 안에서 구속적으로 현존하며, 그에 의해서 그 극치에 이르는 날에 그 세대가 우주적으로 실현될 그런 분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영원하며 구원하시는 통치의 수행자요, 수단이요, 그를 그의 인격 안에서 실현하신 분(the personifier)이시다. 그런 분으로서 그는 그 스스로 하나의 범부라고 할 수 있다(p. 353).

이런 이해에 근거해서 웰즈는 “우리의 이해의 범주도 우리가 설명하려고 하는 아들(the Son)과 함께 신적으로 주어진 것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면서(p. 357), 현대에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 소위 “밑으로부터”(from below)의 기독론들을 비판한다.

웰즈는 다른 논문에서 이런 천국 중심, 종말론 중심의 입장을 신학 전반에 적용하며 말하기도 한다.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이 오는 세대는 그리스도의 성육신, 구속, 부활과 성령에 의한 그의 사역의 확대에 의해서 이미 현 ‘세대’ 안에 들어 와서 수립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적인 모든 신학은 필연적으로 종말론적인 것이다.” 이는 하나님 나라를 신약 성경 개념에 근거해서 생각하던 과거의 신학자들이 시사한 것이지만 이렇게 명확히 문장화 된 일은 드물기 때문에 매우 귀한 진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근자에 옥스포드 대학교의 레이디 마가렛 신학 교수(the Lady Margaret Professor of Divinity)로 취임하여 자못 복음주의적 신학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는 죤 웹스터가 기독교 인간론과 관련해서 이런 주장을 하며, 그것이 신학 전반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시사를 주고 있어서 흥미롭다. 그는 “종말론, 인간론 그리고 후-현대성”이라는 논문에서 기독교 인간론은 두 가지 의미에서 종말론적이라고 한다. 그 하나의 의미는 우리가 위에서 말한 의미와 비슷하다. 즉,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기독교 인간론의 설명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서 유효하게 되고 성령의 사역을 통해 실현되었으며, 기독교적 세례에서 인쳐진 하나님의 중생시키시는 사역이기라는 의미에서이다. 이런 의미를 웹스터는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한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되어 가는 그 존재이다.” 기독교 인간론이 종말론적이라고 하는 둘째 의미는 기독교 인간론은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기독교 인간론의 설명이 명백한 목적론(teleology)에 붙잡혀 있기 때문이다(p. 14). 이 둘째 측면을 잘 생각하지 않으면 상당히 실존적인 종류의 인간론이 제시되며 인간의 성질(nature) 개념을 사용하지 않으려는 결과를 내기 쉽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와 같은 “자아의 심리적이고 윤리적 드라마”(the psychological or ethical dramas of selfhood)로 전락하지 않도록 하려면 변개된 인간 정체성에 대한 교의적 설명은 창조의 긍극적 목적에 대한 설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p. 15). 이 논문에서 웹스터는 둘째 의미에 치중하면서 그의 논의를 전개시킨다. 그러나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바 있는 “종말론적”이라는 의미는 웹스터의 두 번째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될 것이다.

IV. 결론: 우리가 추구할 신학의 패러다임은?

이상에서 우리는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말하는 세 가지 유형의 주장을 살펴보았다. 첫째 유형은 전통적 신학의 해체와 혁명적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고, 둘째 유형은 신학의 전통적 형식은 유지하되 그 내용에 있어서의 근본적 변화를 요청하는 것이고, 세 번째 유형은 계시에 근거해야 한다는 신학의 본래적 요구에 더 충실하게 신학의 틀을 바꾸자는 요구이다.

우리는 세상이 변화해 가는 것에 맞추어서 신학의 틀 전체를 바꾸고 그 내용도 방기하며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추구해 갈 것인가? 이 유형의 패러다임 변화를 주장하는 분들은 그 나아가는 궁극적 방향에 대해서 한편으로는 불가지론적이면서 그래도 상당히 낙관적이다. 그러나 이런 입장이이 우리를 이끌어 가는 방향은 과연 바른 것일까? 이 입장에 충실한 이들은 이렇게 질문하는 것 자체가 옳지 않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서 그렇게 질문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기존적 틀은 어떻게 유지하면서 그 내용을 바꾸어 가자는 주장은 한편으로는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민감하고 책임성 있어 보이기는 하나 결국 시대 정신의 변화 속에서 시대 시대에 맞게 그 내용을 변화시켜서 결국은 자신을 방기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더 신학과 교회의 본질을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교회와 기독교 신학이 “하나님을 위하고, 그의 진리를 위하고, 삶 가운데서 소외되고 짓밟힌 자들을 위한다면, 포스트모던 세계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을 포기해야만 한다”고 하며, 교회와 신학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그 본성에 충실할 때, 그것이 문화에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이 참된 덕이 될 것”이라는 데이비드 웰즈의 강조를 다시 한번 더 심각하게 생각해 보자. 그러므로 우리는 결국 신학 자체의 근본적 요구에 따라서 하나님의 특별 계시에 좀더 충실한 신학을 위해 신학의 내용과 틀조차도 바꾸자는 형태의 패러다임 변화에 대해 동감해야 할 것이다. 그 중 창조, 타락, 구속, 극치의 기독교 세계관적인 틀에 따라 신학을 다시 쓰자는 스파이크맨의 주장이 기독교 철학에 의존하여 신학을 하려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반발이 강할 것을 생각하고, 린츠의 구속사적 신학의 틀 구성의 요구는 매우 흥미로우나 신정통주의의 융성기에 유행한 구속사 신학과의 혼동과 이로 인한 모호함을 줄 것임을 생각한다면, 여러 사람의 주장에 따라서 종말 신학 또는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신학을 새롭게 구성하되 스파이크맨의 통찰이나 린츠의 통찰을 반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개혁신학이 21 세기에 개혁신학을 진전시켜 나가는 길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아마도 소위 신학계는 21세기에도 이 논문에서 유형화한 세 가지 종류의 신학하는 패러다임이 상호 경쟁하는 전장(戰場, warfield)이 될 것이다. 이 속에서 우리가 제시한 패러다임이 옳음을 드러내는 길은 과학 이론에서 어떤 패러다임이 주도하게 되는가에 고려하는 점들(즉, 어떤 패러다임을 취하여 설명할 때 보다 많은 것이 정합성 있게 설명되느냐 등) 외의 다음 몇 가지 요소들을 잘 고려하는 것이다. 이 신학적 패러다임 선택의 고유한 요소들은 (1) 인격 변수(person variable)의 요소, 즉 우리가 어떠한 사람으로서 이 신학적 작업을 하느냐의 요소, 따라서 (2) 얼마나 성령에 의존하느냐 하는 요소, 그리고 (3) 얼마나 다른 이들과 특별히 연약한 이들을 포용하며 위하느냐의 요소들이 될 것이다. 이런 요소들에 유의하지 않음으로 참으로 바른 종말 신학, 또는 하나님 나라 신학의 패러다임 변화의 주장이 그 설자리를 잃지 않도록 하는 일이 우리네 신학하는 이들에게 달려 있음을 겸허하게 인정하면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우리의 신학적 작업에 임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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