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받는 이유 (스가랴 7:8-14)

유다 백성들이 나라를 잃고 바벨론으로 끌려간 일은 고통이었습니다. 나라를 잃고, 외국의 포로로 끌려가는 것이 즐거움이라고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돈이 있어 외국에 관광을 가는 것은 즐거움 입니다. 관광을 통해 우리의 시야가 넓어집니다. 세상을 폭넓게 이해하게 됩니다. 실제로 가보면 생각이 바뀝니다. 엊그제 국민일보에서 농구선수 전주원씨가 북한을 다녀왔습니다. 4년 전에도 북한에 갔는데, 이번에도 갔다 왔습니다. 가서 보니 북한이 4년 전과는 상당히 달라졌더라고 말합니다. 표정이 여유가 있고, 한결 부드러워진 분위기였다고 말합니다. 북한하면 경직된 나라로 떠오르는데, 여행을 통해 생각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은 여행하러 간 것이 아닙니다. 나라가 망해 끌려간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들은 고달프고 고통스러웠습니다. 하나님은 스가랴 선지자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고통을 당하는 이유에 대해 말해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고통을 당한 이유는 포로로 끌려갔기 때문입니다. 끌려가지 않았다면 고통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왜 포로로 끌려가야 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해서 애굽에서 가나안 땅에 정착을 시켰습니다. 430년 동안 고통을 받고 있는 백성을 불쌍히 여기셔서 가나안 땅으로 출애굽시킨 것입니다. 집 떠나면 고생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떠나면 고통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큰 능력을 베푸셔서 가나안에 정착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로 끌려가 고통을 받게 합니까?

 

< 거듭된 충고를 무시함 >

 

하나님의 백성은 선택을 받은 백성답게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이라면 아무렇게 살아도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선택받은 자에 걸맞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육군 사관생도를 보십시오. 육군사관학교의 학교장 인사말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가슴에는 조국을, 그리고 두 눈으로는 세계를. 이 정신으로 조국을 책임지기 위해 오전 6:00에 기상해서 밤 8시 점호가 이루어질 때까지 흐트러짐이 없이 살아갑니다. 토요일에는 한주간의 삶을 점검하고, 다음 주에 해야 할 일을 점검하고 계획을 세웁니다. 국민의 군대를 이끌어갈 지도자로서 빈틈없이 살게 합니다. 그래서 재학기간 중에 술을 마시고 여성을 희롱한 어느 생도는 퇴교처분을 받았습니다. 

세상에서도 특별하게 선택을 받았다는 사람들은 이렇게 엄격하게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선지자를 통해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무시했습니다.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역사에 등장하는 선지자에게 다시 충고를 합니다. 그런데도 듣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거듭된 충고를 무시한 것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미 말하여 이르기를...

이미 말했습니다. 오늘 말한 것이 아니고, 갑자기 말한 것이 아닙니다. 전에 이미 말했습니다. 남녀노소할 것 없이 모두 알아들을 있게 말했습니다. 어떻게 말했습니까? 백성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알려주었습니다. 

재판장에게는 재판을 진실하게 하라고 충고했습니다. 재판장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가난하거나 부자이거나 권력을 소유한 자나, 권력이 없는 자 모두에게 평등한 재판을 하는 것입니다. 재판장이 한쪽 눈을 감는다면 진실을 볼 수 없습니다. 두 눈을 떠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이 시시비비를 가려야 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서로 자비와 온정을 베풀고 살라고 충고합니다. 

이 세상은 어떻게 사는가에 따라 지옥이 되기도 하고 천국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힘든 세상을 천국처럼 살아갑니다. 어떻게 천국을 만들어갑니까? 조금 실수한 일이 있으면 미안하다고 합니다. 미안하다고 말 한마디만 하면 자신도 편하고 상대방도 편하게 될 것을 그 말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 세상을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부부세미나에서 서로 서먹한 부부들이 부등켜 않고 울 때가 어느 때 인줄 압니까? 여보, 지난 일을 생각하니 참 미안하오. 남편의 이 말 한마디에 아내는 그만 어린아이처럼 펑펑 웁니다. 

또한 사랑해요라는 말은 서로에게 감동을 줍니다. 우리나라는 사랑해요라는 표현을 익숙하게 하지 못합니다. 어떤 남편은 평생 여보 사랑해요라는 말을 한마디도 못해 아내의 가슴에 못을 박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녀들이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에 수고했구나, 애야, 너희들을 사랑한다. 이렇게 말하면서 포옹을 하면 자녀들이 사춘기를 만나도 비틀어지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잘했어요라는 말은 상대방에게 용기를 줍니다. 우리는 늘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세상입니다. 비록 상대방이 잘하지 못했어도, 그 가운데서 잘한 점을 추켜 세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칭찬하면 상대방이 용기를 얻습니다. 힘이 생깁니다. 그래서 더 일을 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꾸짖기만 한다면 의기소침 해집니다. 하던 일도 잘 풀리지 않습니다. 결국 세상 사는 맛이 없어집니다. 우리는 살 맛이 나게 하는 자이어야 합니다. 죽을 맛이다는 말이 상대방에게 나오지 않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모임에서 사람이 어느 정도 고통을 잘 이겨내는가에 대한 실험을 했습니다. 실험 내용은 얼음 위에서 맨발로 오래 서있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얼음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 가운데 한 사람만을 응원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결과가 나온 줄 아십니까? 격려와 응원을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두 배나 더 오래 서 있었다고 합니다. 격려는 이렇게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게 합니다. 

월드컵 경기를 보셨지요? 각 나라마다 응원 팀이 자국에서 와서 며칠씩 숙박을 하면서 응원을 합니다. 왜 응원을 합니까? 응원을 받으면 선수들의 마음에 사기가 치솟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꾸 나쁜 점만 들추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좋은 점을 들추도록 노력하십시오. 상대방의 좋은 점을 많이 말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상대방을 살리는 자가 됩니다. 목양교회도 칭찬과 격려가 넘치길 바랍니다. 다같이 상대방게게 이야기합시다. 좋은 점만 이야기합시다! 여러분, 이런 습관을 들이려면 평생을 수고해야 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죄인이기에 우리 생각 속에는 본질적으로 나쁜 점만 보려는 의식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점을 고치고 습관화하려면 평생을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백성들에게 자비와 온정을 베풀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사랑으로 대하고, 자신에게는 엄격하게 대하는 것, 이게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아갑니까?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 엄격하게 대하지 않습니까? 자신에게 엄격하게 대하고 남에게 한없이 관대하십시오. 그러면 세상이 한층 밝아질 것입니다. 

 

다음으로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약자들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허술하게 보이는 자들을 잘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회적으로 약자가 이 세상을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를 잘 아셨습니다. 돈이 넉넉하지 못하기에 이들은 항상 그 날 그 날을 염려하며 살아갑니다. 몸이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지도 못하고, 병원에 가야 하지만, 아예 병을 껴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몸이 더 망가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걸 아시고 고아와 과부들에게 잘 대해주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자신이 생각할 때에 다른 사람보다 좀 여유 있게 산다고 생각이 됩니까? 가진 재산을 조금만 나누어서 가난하게 사는 자들을 도우십시오. 분명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힘들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조금 도와준다면 평생을 기억하면서 살아갈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잠 11: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 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조금 잘사는 사람을 윤택하게 하는 데는 많은 돈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많은 돈이 투자되어도 그 사람이 윤택해졌다는 느낌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힘들게 사는 사람, 매주 살아갈 걱정을 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조금 줄 때에 그 사람은 금방 표시가 납니다. 여러분의 재산을 조금 나누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십시오. 

(눅 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우리 모두 짠돌이가 되지 않도록 합시다. 펑돌이가 되어야 합니다. 펑돌이가 무언 줄 압니까? 펑펑 퍼주는 사람을 말합니다. 나에게 쓰는 것은 짠돌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남에게 베푸는 데는 펑돌이가 되도록 합시다. 

 

하나님은 이처럼 재판을 공정하게 하고, 백성들이 서로 자비를 베풀며, 약자에 대한 배려를 해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그 말을 계속 거절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어떻게 합니까? 포로로 끌려가도록 한 것입니다. 여러분, 평안할 때에 잘해야 합니다. 평안할 때에 말씀을 잘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숨을 돌릴 틈을 주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 삶의 태도를 바꾸려 하지 않음 >

 

이스라엘 백성이 고통을 받는 또 다른 이유는 삶의 태도를 바꾸려 하지 않는데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의 태도는 긍정적인 것이 있는가 하면 부정적인 것이 있습니다. 긍정적인 것은 계속 살려가야 합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것은 개선해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삶이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어떤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어려서부터 칭찬이라고는 별로 듣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늘 그 청년이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고 잔소리를 했습니다. 그렇게 자라다 보니 그 청년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남을 칭찬할 줄 모르며, 상대방이 자신을 칭찬해도 그 칭찬을 받아들일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자신의 삶을 매우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그는 어떤 일을 하면 완벽주의에 가깝게 일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하는 일들이 너무 힘듭니다. 그리고 그 일을 잘 해놓은 후 다른 사람들이 칭찬을 하면 오히려 역반응을 일으킵니다. "저건 나 듣기에 좋은 말로 한 소리야. 겉으론 별로 칭찬할 맘이 없으면서도 그런 거야." 이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하니 성취감이나 만족감이 별로 없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이 일을 잘해 놓아도 칭찬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든 삶이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이 청년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자라온 과정 속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이런 삶은 자신에게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많은 피해를 줍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말씀을 듣는 자들이 삶의 태도를 고치길 요구합니다. 삶의 태도를 고치면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많은 유익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삶의 태도를 고치길 요구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며, 재판을 공정하게 하며, 가난한 자를 배려하며, 칭찬과 격려의 삶을 살라고 요구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어떻게 대응합니까?

 

11,12절을 보십시오. 

이들은 등으로 향하며 듣지 아니하고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등을 돌리고 마음을 굳게 하였다는 것은 삶의 태도를 바꾸려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등을 뒤로 돌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말씀이 틀려서 등 돌립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맞다는 사실은 압니다.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게 정석이라는 것도 압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기 싫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부싸움을 할 때에 등을 돌리는 경우를 살펴보십시오. 부부 싸움을 하면 서로에게 삿대질합니다. 그리고 감정이 격해지면 큰 소리를 냅니다. 더 진전이 되면 등을 돌립니다. 그런데 상대방의 말이 틀린 것입니까? 실제로 제 3자의 입장에서 들어보면 남편의 말도 맞고 아내의 말도 맞습니다. 그런데 서로 등을 돌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네 말이 틀려서 등을 돌립니까? 아닙니다. 맞지만, 수긍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맞지만, 따라갈 수 없다는 것 아닙니까? 

어떤 아내가 남편이 밤늦게 들어오자 다짜고짜 소리를 지릅니다. 그렇게 늦게까지 일하면서 왜 집에 주는 돈은 점점 줄어듭니까? 일을 많이 하면 더 많이 가져와야 하지 않아요? 남편이 늦게 들어오는 것이 가정에 그리 충실하지 못하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면서도 당신이 나가서 일해 보았어? 이렇게 삿대질합니다. 상대의 말이 맞으면서도 늦게 들어오려는 자세를 고치려 하지 않기 때문에 등을 돌리는 것 아닙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마음에 모시면 주님께서 우리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오십니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이 들어오시면 제일 먼저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주님께서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그리고 주님이 사는 방식대로 살아가길 요구합니다. 그래서 평소 용서가 부족한 사람에게 말씀을 들려줍니다. 어떤 말씀을 들려줍니까? 

베드로에게 했던 말씀을 들려줍니다. 

"주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리이까? 일곱 번까지 용서하여야 합니까?" 

여러분 여기서 베드로가 7번을 말한 것은 결코 적은 수가 아닙니다. 우리는 단 한번도 용서하지 못하고 끝장을 내는 사람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어쩌다 외도를 했습니다. 그걸 눈감을 때까지 용서할 수 없다고 언성을 높이다 이혼한 사람도 있습니다. 아내가 잠깐 한눈을 팔았습니다. 그걸 용서할 수 없다고 딴 살림을 차린 사람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에게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것들은 단 한번 걸려도 여지없이 심판의 칼을 들이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삶에 우리 주님이 들어와 간섭을 합니다. 

'일곱 번이 많다고 생각하니.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이것은 동일한 형제가 490번의 죄를 저질렀어도 용서를 하라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려면 우리는 절대라는 말을 빼야 합니다. 이 일만큼은 절대 용서할 수 없어. 이것은 자신의 생각이고, 신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하라. 이렇게 용서가 풍성해지면, 어떻게 될까요? 머리 좋은 사람은 이런 엉뚱한 말을 합니다. 그러면 사회가 개판이 되지요. 왜요? 용서할 줄 알고 죄를 지으니 더 난리가 나지 않습니까? 

여러분 주님이 이런 의도로 말한 것입니까? 용서를 해주면 오히려 더 곤란한 일들이 일어난다고 말합니까?

아닙니다. 사회는 오히려 용서가 부족해서 살기가 어려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베푸는 용서를 통해서 용서의 삶이 얼마나 삶을 윤택하게 하는가를 알려주었습니다.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입니다. 1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의 품삯입니다. 오늘날 노동자 하루의 품삯을 5만원이라고 한다면 한 달란트는 3억이 넘습니다. 그런데 일만 달란트이니까 30조가 넘는 액수입니까? 한마디로 천문학적인 액수이고 사람들이 도무지 갚을 수 없는 돈입니다. 만일 채권자가 용서해 주지 않았다면, 그는 평생동안 빚쟁이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늘에 묻혀 살 것입니다. 그런데 채무자가 용서합니다. "더 이상 갚지 않아도 되오."

이게 바로 용서의 힘입니다. 그늘진 삶에서 희망을 품고 살게 하는 것이 용서가 주는 축복입니다. 그렇게 용서를 받은 자는 모든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용서받은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입니다. 자신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일백 데나리온, 5만*100이니까 500만원 정도 빚진 자를 어떻게 합니까? 물론 500만원 정도 빚을 지면 적은 돈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자신이 30조 넘게 지은 빚을 탕감 받았으니까 충분하게 탕감할 수 있죠....   그런데 갚지 않는다고 감옥에 집어 넣었습니다. 울고 사정을 해도 전혀 듣지 않았습니다. 

용서받은 자는 용서를 베풀 줄 알아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한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우리가 용서를 받았기에 어떤 죄라도 용서하라는 점을 교훈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합니까? 주님의 분부대로 용서의 삶으로 변화합니까? 주님의 말씀은 맞습니다. 그러나 저는 실제로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그리하여 등을 돌리진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삶의 태도를 바꾸라. 삶의 태도를 바꿀 때에 비로소 세상은 아름답게 보인다. 세상은 살맛이 나는 거다. 

그런데 사람들이 삶의 자세를 바꾸려 하지 않기에 결국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택함을 받은 유다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 고통을 당한 현실을 통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자꾸 나에게 주신 말씀을 외면하지 맙시다. 또한 내 자신의 삶 속에서 바꾸어야 할 삶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살핍시다. 바꿀 때에 희망이 보입니다. 바꾸면 삶이 아름다워집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바꾸어 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