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감격을 체험하자 
( 단 6:16-24, 눅 21:17-19 ) 
 
  
우리는 지금 세계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1995년에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한 이후 본격적인 세계화 시대가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직까지 세계화에 대하여 반대와 찬성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계화 시대가 되니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신질서가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얼마전 멕시코의 칸쿤에서 세계화 대회가 열릴 때 이를 반대하던 우리 나라의 농민 대표 가운데 이경해씨가 자결하였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세계가 하나의 공동체가 된 세계화는 구소련과 동구권의 붕괴로 말미암아 가속화되었습니다. 세계화의 가장 중요한 개념은 우리의 것을 버리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것을 세계적으로 만들어 나가야 바른 세계화가 됩니다. 얼마전 우리 교회에서 있었던 “전통음악과 찬양의 만남”은 중요한 시도입니다. 우리 고유의 음식인 김치를 많이 먹고 보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어제 아침 신문에는 우리 나라의 판소리를 유네스코가 ‘인류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세계가 우리 나라를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 것의 소중함을 우리 스스로가 잘 알아야 합니다. 세계화는 성경의 명령입니다. 창세기 12:1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세계적으로 내어보내신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구약의 족장들인 이삭, 야곱, 요셉은 다 같이 세계화된 인물들입니다. 성경에서 포로기는 세계화의 절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잡혀 갑니다. 예례미야 52:28-30에는 세 차례에 걸쳐 포로된 자가 4,600명이라고 합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본토인에 비해 볼 때 아주 극소수이지만 이들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끌어갑니다. 성경에는 포로기에는 본토의 역사가 아니라 포로민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토의 다수가 아니라, 포로지의 소수가 역사의 주류였습니다. 이들은 이방에 가서 공헌하고 일하는 세계화 인물들입니다. 이들이 역사의 주류입니다. 지금도 세계화인물이 역사의 주류가 된다고 봅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에스겔, 다니엘이 전부 포로민들입니다. 포로민 가운데서 중심인물은 역시 다니엘일 것입니다. 그는 10대 소년 때에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는 포로지에서 80여년을 삽니다. 바벨론이 바사에게 멸망하여 다시 바사의 포로가 됩니다. 이런 와중에서도 그는 다섯 번이나 총리와 장관을 지냅니다. 그가 노령에 고레스의 칙령으로 많은 포로민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지만 그는 돌아가기를 거절하고 포로지에 남아 있다가 90세가 되어 세상을 떠납니다. 그는 철저하게 이방에서 생을 살다 마친 세계화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이름 다니엘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란 뜻입니다. 다니엘의 전 생애에 하나님은 그의 심판자이셨습니다. 다니엘은 대부분의 삶을 포로지에서 삽니다. 그러나 그는 철저하게 유대인으로 산 사람입니다. 그를 통해 우리는 신토불이를 봅니다. 첫째, 그는 소년 시절에 바벨론의 궁중에 들어가서 왕이 먹는 음식을 먹게 하였습니다. 그는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거절하고 채식을 하겠다고 우겼습니다. 그러나 채식을 했지만 그의 얼굴빛은 더 좋았습니다. 이것은 다니엘이 자신의 음식을 먹겠다고 한 신토불이입니다. 둘째, 그는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바사 나라의 총리들과 방백들이 다니엘을 고소하기 위하여 모의하였습니다. 왕이 칙령을 내린 다음 30일동안 왕외 다른 것에게 구하면 사자굴에 넣기로 한 것입니다. 왕은 자신이 높임을 받는 것이 좋아서 어인을 찍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죽을 것을 알고도 이방왕이나 다른 신에게 절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신앙적 절개입니다. 자신의 하나님께만 절하고 기도하는 신앙적 신토불이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자 굴에 넣은 다니엘을 사자의 입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잠언 30:30에는 “동물의 왕 사자”라고 합니다. 동물의 왕인 사자도 왕이신 하나님께는 한낮 작은 피조물인 것입니다. 이전에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만든 신상에 절하지 않으므로 불풀무에 들어갔습니다. 이 신상은 높이가 30미터나 됩니다. 이 금상은 크고 위엄이 있었습니다. 이 금상에게 절하지 않으면 불풀무이 들어가는 사실을 이 세 친구는 알고도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불풀무에 들어간 세 친구가 모두 무사했습니다. 그 때 풀무를 들여다 본 사람은 그 속에 “네 사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동정(compassion)이란 말은 ‘함께 고난받는다’는 뜻을 지닌 두 말의 합성어입니다. 하나님은 함께 고난받으시고, 함께 하십니다. 기적이란 “인간의 머리로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입니다. 기적은 하나님의 구원의 방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기적이란 방편을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의 기적으로 나음을 받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십니다. 기적이 구원의 방편인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가장 극적인 구원을 경험한 사람은 다니엘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기적을 베푸십니다. 다니엘을 통하여 사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감격을 체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이 기적은 지금도 반복되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첫째, 다니엘이 사자굴에 던져진 이유 
다니엘이 사자굴에 던져진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경배하지 않았고, 기도하지 않았으면 사자굴에 던져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경배하고 기도하면 핍박을 받고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그런 때가 아니지만 어려운 때에는 하나님을 믿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죽임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디모데후서 3:12에는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합니다. 경건하게 사는 것을 사탄은 싫어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사탄은 미워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사탄은 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은 다니엘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사탄이 막는 일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나의 기도는 하나님을 가장 중요한 분으로 여겨 경외하는 방법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기에 경배하고 기도합니다. 다니엘은 세상에서 어떤 왕보다 하나님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누구보다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이런 그의 자세는 기도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그는 사자굴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는 귀신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귀신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 가운데 가장 으뜸으로 나타나는 것이 신성모독의 귀신입니다. 귀신은 나타나면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고 하나님을 대항합니다. 힌두교에서는 이런 귀신을 ‘아수라’라 부릅니다. 지금도 마귀는 신성을 모독하게 합니다. 신성을 모독하게 하는 귀신이 신성을 높이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도저히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을 높이고 기도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시기하는 사람 때문에 사자굴에 던져졌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잘 되면 사자굴에 던져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시기하여 고통을 줍니다. 성경은 다니엘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사로잡혀 온 유다 자손 중에 그 다니엘이”. 다니엘을 바사의 총리 신분으로 언급하지 않고, 유대인으로 언급합니다. 신분상 약점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 포로민이 바사왕의 권위에 도전하여 법령을 어기고 있는 것으로 몰아갑니다. 

조나단 스위프트는 “가장 좋은 과일을 새가 먼저 쪼아 먹듯, 가장 존경받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중상에 의해 피해를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논리입니다.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이 우월하면 고난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영성회복을 위한 일곱 가지 열쇠’란 책에 보면 우리가 당하는 고난들을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첫째는 선천적인 고난입니다. 둘째는 우연한 고난입니다. 셋째는 자초한 고난입니다. 넷째는 고의적인 고난입니다. 이 고난은 다른 사람들의 불법행위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경건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런 고의적 고난들이 많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복음의 열정이 넘쳐서 전도합니다. 복음 전도로 말미암아 그는 감옥에 갇힙니다. 하나님 때문에 그리고 시기하는 유대인들 때문에 감옥에 갇히지만 그는 천사의 손에 이끌리어 구원을 맛봅니다. 요한도 복음 때문에 갇히고 조그마한 섬에 유배됩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계시를 받고 종래 구원을 받습니다. 요한은 제자들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아서 복음을 전합니다. 바울은 복음만 아니었다면 얼마든지 세상적으로 출세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때문에 잡혀 고생하고, 매를 맛고 파선하여 고생하고, 매복하여 잡아 죽이려 했고, 뱀에 물려 죽을뻔 했지만 구원을 받습니다. 이런 모든 사도들이 하나님 때문에 그리고 시기하는 사람들 때문에 사자굴 같은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이들이 이런 고생을 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것을 다 제쳐두고라도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구원하시기 위해 던지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하실 수 있으니 던지십니다. 하나님은 구원하심을 보고 믿게 하려고 던지십니다. 건지지 못하시면 던지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다니엘을 사자굴에 던지게 한 것입니다. 

둘째, 사자의 입을 봉하신 하나님 
16절에는 다리오왕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 다리오는 바사의 절대 권력을 가진 왕이지만 무력한 인간에 불과했습니다. 왕도 이제 절대자에 대한 신뢰와 경외를 표명합니다. 절대 왕권을 가진 왕이지만 왕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인정합니다. “나는 구원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것이 다리오의 생각입니다.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아는데 까지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구체적인 방법은 사자의 입을 봉하신 것입니다. 사자의 입을 봉하는 것은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처음부터 원인을 아예 제거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입니다.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싸우기 전에 이기게 하신 것입니다. 싸우면 아무래도 상처가 납니다. 싸우면 아군도 피해를 당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싸우지 않고 피해가 나지 않게 하십니다. 시편 7:2에는 “건져낼 자 없으면 저희가 사자 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건져내시기에 찢기고 뜯길 염려가 없습니다. 17절에는 비사의 총리들과 방백들이 다니엘을 던진 사자굴을 인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사자굴을 인봉한 것은 다니엘의 무죄가 입증된다고 하더라도 다시 나오게 하지 못하는 조치입니다. 다니엘을 죽이려는 그들의 의지가 확고함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들이 사자굴을 봉하니까 하나님께서 사자의 입을 봉하십니다. 인간이 봉하면 하나님도 봉하십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보세요. 예수님의 시체를 제자들이 훔쳐간다고 큰 돌문을 굴려놓고, 돌문을 인봉하고, 로마 군인들이 지켰습니다. 이렇게 그들이 무덤을 봉하니 하나님께서 로마병사들의 눈도, 귀도, 다 봉하시고 무덤의 돌문은 하나님이 여셨습니다. 입을 봉하셔서 근본을 해결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셋째, 하나님을 의뢰한 다니엘 
23절에는 다니엘의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는 그가 자기 하나님을 의뢰하었더라”고 합니다. 다니엘이 상하지 않고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을 의뢰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의지했다면 사자와 싸웠을 것입니다. 만일 사자와 싸웠다면 죽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아마 상처는 났을 것입니다. 자신을 의뢰하면 상했을 것이지만 하나님을 의뢰하면 상하지 않고 구원받습니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갔습니다. 그러나 해를 당하지 않았습니다. 죽을 고비를 여러번 당했습니다. 그러나 죽임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또다른 그의 시인 시편 22:4에서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 의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나이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면 하나님이 직접 건지십니다. 그러나 자신을 의뢰하면 하나님은 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건지지 않으면 빠지고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 세상을 의뢰할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이사야 3:1에는 말합니다.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의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을 제하여 버리시되 곧 그 의뢰하는 모든 양식과 그 의뢰하는 모든 물과 용사와 전사와 재판관과 선지자와 복술자와 장로와” 등으로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 세상을 의뢰하면 그 모든 것을 끊으십니다. 아브라함도 의뢰하던 양식도 끊으시고, 하나님만을 의뢰하게 하시려고 애굽까지 쫓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것은 우리에게 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은 하나님을 봐드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봐주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면 우리에게 은혜가 되고 우리에게 복이 됩니다. 캘빈 밀러는 “십자가를 의지하지 말고 십자가에 달리신 분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라고 그의 책에서 말합니다. 십자가는 그 분이 달리셨기에 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의뢰할 것은 그분이 달리셨던 십자가가 아니라 그분입니다. 베드로전서 5:8에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합니다. 지금 기도하는 사람을 사탄은 찾고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를 사탄은 찾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에 나오는 자를 사탄은 찾고 있습니다. 사자는 삼키는 것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막으시면 이것 조차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이기는 사람들이 사는 곳은 어떤 곳인지 아십니까? 구원받은 사람들이 사는 곳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35:9에는 “거기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얻는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라고 합니다. 더 이상 사자가 없습니다. 더 이상 사나운 짐승이 힘을 쓰지 못합니다. 이사야 11:7에는 그 나라를 “사자가 소처럼 품을 먹으며”라고 합니다. 의뢰하는 자에게는 이런 은혜의 나라를 주십니다. 

결론 
한 남자 아이가 아버지와 동물원에 갔습니다. 사자 굴 앞을 지나갈 때, 포효를 지르며 어슬렁거리는 사자에 놀라서 그 남자 아이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얘야 무슨 일이 있니?” 새파랗게 질린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아빠, 저 사자가 보이지 않아요?” “보이지.” 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철장도 함께 보고 있단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사자가 아니라 철장입니다. 우는 사자가 아니라 입이 봉해진 사자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을 괴롭게 하고, 시험에 들게 하는 사탄의 권세를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시편 40:2에는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라고 합니다. 사자의 굴에서 다치지 않는 구원의 감격을 맛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자의 입이 봉해진 하나님의 권능을 날마다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웅덩이와 수렁에서 건지시는 구원의 감격을 맛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우리에게는 사자도, 웅덩이도, 수렁도 없습니다. 다니엘이 누렸던 사자굴에서의 구원의 감격이 우리 구원의 감격이 되어 매일 매일 우리의 삶이 상함이 없고 사탄의 위협이 없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